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32화 (830/1,009)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렇군. 자네가 그 노르드 폰 울프헤딘인가.〉

몽타주로만 본 첫째 황자가 말했다. 이름이 뭐 클리안이었던가 했는데.

그보다 대놓고 씹어버리기 있냐. 사람 뻘쭘하게. 예의가 안 되먹었구만. 금수저들이 성격이 좋다는 건 다 구라가 맞다. 곳간이 넓으니 인심이 좀 많이 나오는 거라니까.

〈아직까진 어색한 이름이지만,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군요.〉

나는 무기를 들지 않은 손을 내세웠다.

‘해치지 않아요’를 의미하는 최대한의 어필 타임이다 이거에요.

〈반역자를 체포하러 온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들으십쇼. 저도 따지자면 황제랑 적대하는 입장이라서, 황자님들의 심모 깊은 생각은 잘 압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격식 차리지 말지. 예의를 요구할 상황도 아니니.〉

이런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틀딱아.

존나 교회 예배실 같아서 쌉소리하기 좀 그렇긴 한데.

〈황자님이 3줄 요약충이셨다니 놀랍습니다. 뭐, 저도 편하고 좋네요.〉

그러나 꼴마초는 본래 겸양 떠는 말에 사양하지 않는 생물! 나는 수긍하며 말했다.

〈감사인사는 필요없습니다.〉

─지잉!

마나로 창을 뽑아냈다. 사족이지만 내가 마나로 투창용 창을 뽑았다는 건, 그 마나가 곧 오러라는 뜻이다. 집채도 들어올릴 근력이 전완근에서 날뛰었다.

【게르튀르 푸타르크(Geirtýr ᚠᚢᚦᚨᚱᚴ)】·ᚱ(Raidō)

공격기 제 3품새의 투창이 차원을 뛰어넘었다.

황자들을 지키던 투명한 실드는 오딘의 눈으로 간파한지 오래였다. 해체하기에는 분석할 시간이 좀 부족했다. 제 1황자가 생각보다 현명해서였다.

‘대화에 응하지도 않았으니 시간은 못 벌겠군.’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오러의 창은 초조하게 신부복 아래에서 단검을 빼들려고 하던 제 2황자의 어깨에 꽂혔다. 관통하거나 폭발하지 않은 건 내가 힘을 조절해서였다.

─뎅그렁! 성물처럼 생긴 단검이 떨어졌다.

〈혀, 형님?!〉

제 3황자로 보이는 아재가 당황하며 외쳤다. 첫 외침 때는 내 선빵에 경악하며 형을 부축해주려고 내지른 비명이었지만, 이후에는 달랐다.

〈이 단검은!〉

〈독인지 마법인지가 발린 성물입니다. 생긴 건 성스러운데 효과는 좀 뒤숭숭하네요.〉

성물인데 암살용이라니. 독과 암습의 신이나 뭐 그런 것도 있나.

역시 이세계는 미개 그 자체다. 요즘 좀 익숙해져갖고 깜빡할 뻔 했네.

〈크흑…!!〉

예지에서 제 1황자를 제압하고 〈청동옥좌〉를 빼앗았던 배신자는 톱니처럼 뼈와 살을 갈아대는 오러 창 때문인지 거품을 물며 이를 악물었다.

제 1황자 클리안은 그런 동생을 가라앉은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왜냐? 동생아.〉

〈……흐, 흐흐. 멍청한 질문이오, 형님. 지금 이 판에서 황제의 수급을 취할 수만 있다면 정통성이 다 무슨 소용이겠소? 지금만이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을 유일한 기회인데.〉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대답하는 둘째 황자.

내가 알기론 황제 자리를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했다고 들었는데, 상황과 입지가 바뀌자 마음까지 따라 바뀌었던 걸까.

처음부터 저런 야욕을 숨기고 살았던 것일 수도 있다. 클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황위를 원한다면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느냐. 황좌 정도는 네게 줬을 텐데.〉

〈자기도 안 믿을 소리 마시오, 형님. 이 반역을 같이 작당한 형님이랑 동생놈이 살아있으면 그게 어디 황좌에 앉은 거요? 처형대에 묶인 신세지.〉

〈허. 그도 그런가.〉

〈흐, 흐흐. 천하의 권력이 눈앞에 있었거늘……〉

토사구팽을 시도하려던 제 2황자는 내가 내던진 창을 지워버리자 피를 왈칵 쏟으며 기절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한 티르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아마도 그녀는 클리안을 설득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만. 더 다가오지 말게.〉

하지만 이미 실드를 뚫고 공격을 할 수 있는 걸 본 뒤였다. 황자는 체스의 퀸 같은 기물을 옥좌에다가 내려쳤다.

우르르르르릉─!! 지하 전체가 요동쳤다. 황자님 키보드 샷건 좀 치시네.

〈쯧.〉

9초 후에 벌어지는 미래를 읽은 나는 클리안이 그렇게 굴기 전에 또 투창을 감행했지만, 미래예지에서도 이미 내 공격은 실패한 상태였다.

─쐐액!!

아니나 다를까, 예지에서 보인대로 클리안에게 던진 창은 빗나갔다.

놀랍게도 황자는 공격을 읽고 피한 것이었다.

‘내 공격을 피했어?’

그럴 만한 체술은 없어 보였는데? 나는 그 놀랄 만한 솜씨에 놀랐다. 실력에 비해서 클리안으로부터는 강자다운 기척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저것도 〈청동옥좌〉의 힘인가.’

아직 기동하기 전인데도 소유자의 감지능력이나 신체능력을 증폭시킨 것이었다.

─지잉!!

나는 다음으로는 마법으로 공격해보려 했다가, 끌어올린 마나를 넓게 펼쳤다.

야수회귀의 마나와 오러를 룬 마법으로 굳혀둔 장벽에 공격이 꽂혔다. 나는 눈을 꿈틀했다. 존나 난데없이 나타난 동물이었다. 소환수였다.

〈Buoooooooo!!〉

내 감각에는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등장한 황소 같은 괴물이 실드를 들이받았다. 나는 실드의 감촉에서 이 녀석이 거의 미스릴 클래스 몬스터라는 걸 눈치챘다.

〈로-데오!〉

오러 실드를 앞으로 밀었다. 근육은 강인했지만 기술이나 지능이 부족한 괴물은 믹서기의 칼날에 갈려나가는 것처럼 곤죽이 났다.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벌이로 충분했다.

클리안은 두 손바닥을 땅으로 향했다.

〈이 옥좌는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네. 이전에 사용했을 때 과부하로 부숴졌단 게 첫째 이유요, 둘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발동할 시의 구조 때문일세.〉

설명하던 클리안이 발을 구르자 땅이 쪼개졌다. 힘으로 박살냈나? 틀렸다. 그런 설계였던 것처럼 바닥이 열리면서 무저갱 같은 구멍이 드러났다.

〈흥미가 동하는 말씀이시네요! 여기 남으셔서 끝까지 설명해주시는 건 어떤가요!〉

라리루라가 실을 뿜었다. 권능이 담긴 실타래가 황자를 360도로 구속했다.

공간을 헤집고 등장한 실에 묶였지만 클리안은 눈에서 빛을 터트렸다.

〈청동옥좌는 신들의 권능을 한 데 모으는 유물. 고로, 이 옥좌의 힘은 제국의 기둥을 뽑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야.〉

콰앙─!!!! 대리석 바닥이 폭발하며 7개의 태양 같은 빛덩이가 떠올랐다.

그 빛들은 막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클리안이 가진 기물로 빨려들어갔다. 나는 짧은 예지로 그 꼴을 봤지만 막지 않았다.

막으려다가 실패하는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키이잉!

나는 9초 안에 운명을 바꾼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오딘의 눈을 통해 옥좌의 분석에 집중했다.

‘흡수한 태양은 7개.’

오딘의 눈이 분석한 내용이 뇌에 전해졌다. 저 옥좌는 지금 미완성 상태다.

옥좌를 설계한 사람은 최대 8개의 ‘태양’을 흡수하도록 술식을 고안했다. 하지만 클리안의 기물에 들어간 태양은 7개밖에 되지 않았잖은가.

완성도가 설계자의 예상에 못 미쳤다는 뜻이다.

‘모종의 이유로 하나를 흡수하지 못했어.’

설계대로라면 8개의 태양이 치솟았어야 맞다.

나는 직감과 논리를 총동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눈치챘다.

‘저 태양 같은 마나 덩어리, 상당히 익숙해.’

전부 눈에 익은 건 아니었는데,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낯익었다.

〈……이 로마니아의 인공신. 고대에 등장했던 마스터 클래스들의 권능.〉

나는 유도심문이나 해 볼 생각으로 외쳤다.

〈명계에 얼어붙어 있던 마나 덩어리들을 한 데 모은 겁니까?〉

클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했다.

‘로마니아를 지탱하는 고대인들의 마나!’

포모나, 야누스, 로물루스 등. 현대에선 역사를 왜곡당해서 신으로 추앙받는 자들.

천통절의 의식에서도 거쳐갔던 7개 교단의 신.

〈청동옥좌〉는 명계 니플헤임에 안치되어 있던 그들의 마나를 흡수한 것이었다.

‘설계 내용보다 모자라게 흡수한 마나는 아르마 슈나스의 권능이야. 이미 티르시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미처 그것까지는 흡수하지 못한 거다.’

전승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로마니아의 인공신은 마나 덩어리였다. 일종의 자동응답 시스템으로 신도들에게 신성력의 성장을 촉진하고 가호를 내려주는 식으로 만든 인공 신!

전에도 몇 번 말한 적이 있는데, 각국의 신들이 침묵한 현대 이세계에서 로마니아의 종교가 가장 보편적인 종교인 이유는 그것이었다.

브리타니아에만 해도 포모나 교단은 있었잖은가?

그럼 어디 생각해 보자.

그 신들이 한순간에 다 없어진다면?

세상 온갖 곳에 퍼진 종교 교단의 힘이 세력을 잃는다면?

그 여파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스스로 단련해서 쌓은 마나가 사라지진 않아도 종교인들의 쇼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실제로 인공신─마나 덩어리─에게 직접 의존하는 마법도 있을 것이고.

‘의료, 국방, 민심. 사회망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힘을 전부 〈청동옥좌〉에 몰아넣는 거다. 당연히 나라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마비돼.’

인간을 뛰어넘는 권능을 8개나 손에 넣는 것도 부차적인 효과다.

나라의 기둥이 되는 모든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옥좌에 앉은 개인의 힘과 가치가 나라 전체보다 높아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청동옥좌〉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로마니아의 지배자가 된다더니. 이런 뜻이었나.

티르시가 다급하게 외쳤다.

〈황자 전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나의 목적을 알고도 대화를 나눈다……. 굳이 듣지 않더라도 짐작은 가는군. 함께 할 생각이면 환영하지. 막을 생각이라면 상대해줄 이유가 없고. 혹시 날 설득할 문구를 준비해 왔다면 미안하군.〉

클리안은 기물을 머리에 얹었다.

체스의 퀸 같은 기물은 가루가 되서 무너져내린 옥좌를 흡수해서 왕관으로 변했다.

〈이 반란은 그저 나라를 위해서만은 아니라네.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개인적으로도 매듭짓고 싶은 인연도 있으니 말이야.〉

지반이 무너지면서 빛이 새어드는 와중에 그는 티르시에게 말했다.

〈어쩌면 자네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티르시의 머리색에서 그녀의 출신을 짐작했던 것일까? 클리안은 주먹을 쥐었다. 공간 전체가 열쇠에 잠기는 듯한 기척이 났다.

로키는 눈을 굴리다가 외쳤다.

〈야누스의 권능이야! 이 공간을 잠궜어!〉

〈박학다식하군. 바쁘니 이만 실례하지.〉

클리안은 라리루라의 구속을 풀어버리고 공간을 도약했다.

일곱 권능 중에 차원 관련 권능이 있는 것일까. 나는 9초 앞서서 짜둔 마법을 클리안이 사라지는 찰나에 맞췄다. 좌표를 알려줄 룬이었다.

룬을 눈치챈 클리안이 당혹해했지만, 미래를 읽는 나보다 시의적절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곧 황자들과 같이 빛에 감싸이며 사라졌다.

─파앗!

옥좌를 얻은 황자들이 떠나고, 신전의 지하에는 돌가루만이 흩날렸다.

***

파앗─!

자재신 리베르타스의 권능으로 공간을 뛰어넘은 클리안은 신전에 착지했다.

옷에 붙은 룬을 털어냈다. 막대한 마나에 룬은 지워지는 것처럼 소멸했다. 하지만 룬을 달고 이동했기에 노르드는 공간 좌표를 파악했을 것이다.

야누스의 권능으로 봉쇄한 지하를 탈출하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 짧은 찰나에…… 대단하군.’

노르드의 솜씨에 감탄한 클리안은 그 놀라움을 가슴에 묻었다.

눈을 돌리자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분주해진 귀족들과 친위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클리안의 지척에서 성배를 옮겨받고 있는 막내 황자와 황제도 말이다.

막내 황자 레벨리오의 대역에는 관심이 없었다.

클리안은 황제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왔느냐. 늦었구나.〉

황제는 성배에 뻗던 손을 돌리면서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그 차분한 대응에 클리안은 웃었다. 이때를 기다리며 생각한 말을 삼켜야 했기에.

〈알고 계셨나 보오? 아버지.〉

〈말했잖느냐. 늦었다고. 내가 성배를 육안으로 보기 전에 왔어야지. 가짜란 걸 눈치채고 의식을 취소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문제될 게 없지. 또 변명을 나불대며 도망친 황제를 축출하러 갈 뿐.〉

클리안의 손에 불꽃이 피어났다.

〈아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황제를 지키고자 달려오던 근위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전락했다.

그가 흡수한 권능과 마나는 다 합쳐서 7개였다. 지금 그의 왕관에는 마스터 클래스의 방대한 마나량의 7배에 달하는 마나가 모여 있었다.

로마니아 신의 권능 중에 싸움에 특화된 능력은 별로 없었지만, 이 마나로 클리안이 마법을 사용하기만 해도 비할 데 없는 힘이었다.

‘단순히 7배의 마나라기보단, 양만 많은 셈이긴 하지.’

정말로 마스터 클래스들의 7배나 되는 출력을 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될 게 무엇인가? 클리안은 방해꾼이 들어오지 않도록 무쇠도 녹여버릴 불꽃으로 벽을 두르고 황제와 독대했다.

화르르르르─.

타들어가는 온도에 황제의 얼굴에서는 빠르게도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클리안은 그 열기에서도 혼자만 자유로운 것처럼 발을 내디뎠다.

〈물어볼 게 있소, 아버지. 대숙청에 대해서요.〉

〈들을 생각 없다, 덜떨어진 녀석아!!〉

─휙!! 황제는 숨겨들고 있던 기물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클리안투스! 네가 준비한 옥좌에는 이 아비가 앉으마!!〉

황제가 꺼낸 왕의 기물은 〈청동옥좌〉의 소유 권한을 부여하는 부속 유물이었다. 그리고 설계에 따라서 존재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소유권이기도 했다.

황제가 그대로 옥좌의 힘을 응축한 왕관을 탈취하고자 주문을 외웠을 때였다.

─훅!

별안간 바람이 불었다고 황제는 생각했다. 감긴 눈이 어째선지 뜨여지질 않았기에 그는 그대로 손 끝에 쥔 기물의 촉감을 굳게 쥐었다.

〈악? 윽?〉

그런데 어째서인지 손에 아무 감촉도 느껴지질 않았다. 더듬거리면서 눈꺼풀끼리 달라붙은 것만 같은 눈을 뜬 황제는 자신의 손목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불길이 휩쓸자마자 상처가 치료돼 있었다. 아무 아픔도 느끼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오만하구려, 아버지. 내가 이 정도의 준비도 안 하고 왔으리라 생각했소?〉

소유권의 외부 간섭을 막은 클리안은 넘어지는 황제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소유 권한을 유지하는 부분은 성뢰로 불태웠다. 옥좌의 밸런스에 영향이 가겠지만, 어차피 계속 쓸 힘도 아니잖은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이게 다요? 아니면 다음에는 친위대장의 힘을 믿어보겠소?〉

클리안은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제, 제길…….〉

황제는 품위도 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가는 듯 하다가, 클리안이 등을 밟자 신음을 흘리면서 멈췄다. 포기를 모르고 버둥거리는 친아버지에게 클리안은 다시 질문했다.

〈물어볼 게 있소, 아버지. 대숙청에 대해서요. 내 아내를 죽인 대숙청 말이오.〉

〈끄윽, 끄으으…….〉

〈아내는, 메르세데스는 왜 죽어야 했소? 그때 당신이 지껄인 명분 말고, 나나 동생들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진짜 이유 말이오.〉

클리안은 그 이유가 이번에 드러난 과거의 역사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황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파헤치던 귀족들과 얽혀서 죽은 것이라고. 황제를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온 것은 뒤쪽이었다.

〈그녀의 경우는, 나에 대해서 알아차려서였죠. 기회를 잡아서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걸 다비드가 간편하다며 선호했기 때문이에요.〉

〈누구냐!!〉

불꽃의 장막을 뚫고 들어올 거라곤 생각 못했던 탓일까. 놀라며 뒤돌아선 클리안은 거기서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보고 또다시 놀라야 했다.

〈……제 3황비?〉

무기력해 보이는 황비는 불꽃 속에서 자그맣게 웃었다.

〈이제 다신 어머니라고 불러주지 않을 건가요? 클리안투스.〉

흔들리는 불꽃 속에서 황비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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