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41화 (839/1,009)

***

혹시 화재를 진압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꼬꼬마 친구들이 포켓몬으로 배우는 과학법칙에 따르면 물 타입은 불 타입에 2배 유리하다. 물은 불을 꺼트리는 데 제일 보편적인 수단인 것이다. 기름 화재를 빼면 말이다.

단지 상성빨을 타도 꼬부기가 리자몽을 잡지는 못하듯, 현실은 냉혹하다.

화르르르르륵….

아주 잠깐 내렸던 소나기는 로물루스 교단 본부에서 피어오른 화재를 온전히 진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애매한 물줄기는 화재를 더욱 사납게 했다.

불길이 세졌다기보단, 매연이 심각해졌단 뜻이다.

“켈록, 켈록!”

“프랑. 마스크 줄까?”

“응. 켈록…… 헤헤. 왠지 옛날 생각 난다.”

매연에 기침하던 프랑이 방독면을 쓰면서 헤헤 웃었다. 음. 하수도에서 신전이라. 배경이 RPG겜 초반부/후반부 던전 정도로 갭이 있긴 하네.

헤니르를 놓친 우리는 화재현장에서 빠져나왔다. 반역 현장에 남아 있어서 하등 좋을 게 없으니까. 볼장을 다 본 베로니카의 마법이 발동했다.

─번쩍!

티르시도 챙겨서 〈공간 이동〉으로 빤쓰런.

그리고 나는 바로 발퀴리에를 3마리 꺼냈다.

【가서 어르신한테 상황을 공유해. 저쪽에 혹시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전하고.】

─끄덕. 발퀴리에들은 신전으로 되돌아갔다.

‘오델리아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지.’

저쪽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예상 가는 상대는 친위대장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가서 묻기엔 반역 직후의 혼란이 너무 정신 사납기에 별 수 없다.

‘일부러 신전 앞에 도열하는 것도 피했는데.’

지금은 휴식을 취하면서 사태를 정리할 때였다.

우리는 적당한 은신처에서 숨을 돌렸다. 다나가 엉덩이를 더듬으며 인상을 썼다.

“아, 씁……. 엉덩이 까졌어. 티르시, 포션 남는 것 좀 줄래?”

“여기요. 근데 직접 치료하는 게 낫지 않아요?”

“마나가 후달려서 힘들어. 신좌도 먹통이고.”

포션을 문 다나가 팔뚝을 걷었다. 물러나려 할 때 쓸렸는지 팔이 빨갛게 긁힌 그녀였다. 헤니르 부랄탱탱년. 다음엔 절대 안 놓친다.

“눈나. 엉덩이 대. 발라줄게.”

“너 이 새끼, 마시면 되는걸 왜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냐?”

“리빙 포인트: 약효는 좌약이 직빵임.”

“대장으로 흡수하면 훅 가니까 관두세요.”

포션 병으로 내 목 뒤를 톡 두드리는 티르시.

쳇.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나에게 포션을 건넸다. 이제는 찰과상에도 포션을 쓰고, 거의 부자가 다 돼 버렸군. 티르시는 네페르티티한테도 말했다.

“네페르티티. 당신도요.”

“……괜찮아. 수녀 엄마 덕에 별로 안 다쳤어.”

다나가 내려준 가호 얘기일까? 팔꿈치의 자그만 자상을 숨기는 네페르티티.

그러자 티르시의 눈초리가 홱 올라갔다.

“독이 묻어 있으면 어쩌려고요? 자, 해독 포션만이라도 마시세요.”

“……응.”

얌전히 받는 네페르티티. 티르시한테 약하구만.

예전에 유니콘 흑마법사랑 싸울 때를 떠올리면 시간의 흐름이 감개무량했다. 그때도 나랑 네페르티티한테 티르시가 포션을 줬었는데.

나는 포션을 마시는 다나에게 물었다.

“신좌가 먹통이랬지? 정확히 어떤 상태야?”

“글쎄. 없어지거나 봉인당한 느낌은 아닌데……”

말을 고르며 아담한 가슴을 눌러보는 다나. 꽤 힘들었던 듯 침대에 누워버렸던 라리루라가 졸린 얼굴을 베개에서 옆으로 돌렸다.

“끈이 뚝 끊어진 느낌이에요…. 마취약에 맞은 것처럼 신좌의 존재감은 느껴지는데 권능이나 힘 자체는 못 쓰겠어요…. 으, 속 메슥거려….”

“누워 있어. 남편 손은 약 손~.”

“아으으으.”

벌러덩 누운 후배님의 배를 쓰다듬어주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인신〉의 신좌를 봉인하는 마법인가?”

“마법보다는 권능이겠지.”

굳이 이름을 지목하지 않아도 로키는 자기한테 한 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뭔지 알겠어?”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자기 게 아닌 힘을 차단하는 걸지도 몰라. 원래 헤니르는 무투파도 아니었던데다 신대에는 신좌를 얻은 인간도 없었고.”

로키가 말하길, 그때 당시에는 인간에게 신좌를 준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아무도 ‘인간들만의 시대’를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신좌란 개념이 제대로 정립된 건 신대 말미야. 만언신의 권능처럼 신좌로 분류되지 않는 권능도 꽤 돼.”

“당시의 없던 개념이라. 헤니르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까지는 모른단 건가.”

그럴 만도 했다. 〈인신〉을 카운터치는 기술이 신좌라는 개념도 모호하던 무렵에 존재했겠는가. 아무리 멀리 잡아도 고대 이후에 개발한 거겠지.

‘로키라도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를 수밖에.’

그래도 모든 권능에 대해 발동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권능을 죄다 봉인하는 씹사기 기술이라면 나도 헤니르를 상대로는 미래를 못 봤어야 맞다. 그 병신도 날 피해다니지 않았을 거고 말이다.

프랑이 신음하는 라리루라의 신발을 벗겨줬다. 내가 눈으로 묻자 로키는 말했다.

“헤니르의 권능은 【영혼의 황홀경(óðr)】으로 불렸어. 우리가 엘프와 인간을 만들 때도 그릇이 될 혼은 오딘 언니가, 소통할 언어와 감정은 내가, 배우고 꿈꾸는 지성은 헤니르가 담당했지.”

“그 얘기는 요정왕한테 들었어.”

브류나크의 변화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였다.

브류나크는 내 분신이었기에 태생적으로 ‘혼’과 ‘지성’이 있었고, 요정왕의 권능으로 인간인 나랑 말을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잠시나마 얻었었다.

반면 발퀴리에는 ‘혼’과 룬을 보유하긴 했지만, 오딘 혼자서는 로키와 헤니르의 권능을 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과는 거리가 먼 인공 혼백이 됐다.

발퀴리에가 따지자면 골렘에 더 가까운 이유가 그것이었고 말이다.

“오딘 언니도 지혜의 신으로 불렸지만, 권능만 따지면 헤니르가 그 역할에 더 어울렸지. 지식을 배우고 사유하며 소원을 갖는 이성(理性)……”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 하던 로키는 다시 평소 얼굴로 돌아왔다.

“【영혼의 황홀경】은 인간들이 갖춘 습득력과 지성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이야. 마법사가 번뜩 떠올리는 영감, 전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헤니르가 불어넣은 힘이었어.”

그렇게 말한 로키는 뒤늦게 한 마디를 더했다.

“아, 노르드 너는 예외고.”

“나야 출신이 다르니까. 그런 것보다, 지금 모든 깨달음의 근원이랬어?”

깨달음을 얻는 권능이라니?

저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소리였다. 나도 미스릴, 마스터 클래스로 오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하물며 늙어죽지도 않는 신적 존재가?

“붓만 들어도 걸작을 몇 장이나 그릴 수 있고, 자연을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발상을 얻기도 했어.”

그래서 비로소 총혜신인 것일까.

마법사인 베로니카는 권능의 강력함을 십분 이해한 듯 탐탁찮게 질문했다.

“무엇이든지 배우고, 깨우치는 권능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로키님.”

“말로 들으면 굉장해 보이지? 근데 그렇지만도 않았어. 헤니르는 신 치고는 약했거든. 발상력이나 번뜩임은 누구나가 인정했지만……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능이 없었지.”

로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정했다.

‘능력이 생각만큼 못 따라줬다는 뜻인가.’

헤엄치는 요령을 깨우쳐도 팔과 다리가 없으면 소용없다. 발상과 아이디어가 번뜩여도 그걸 실행시킬 현실적인 방안까지 떠오르는 건 아니잖은가.

질풍노도로 2차 성징 중인 중삐리가 야한 상상을 하다가 개꼴리는 발상을 떠올려도, 종이에 옮겨그리면 졸라맨 테트리스가 될 뿐인 것처럼 말이다.

“근데 이젠 옛날 옛적의 그 호구가 아니잖아?”

다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헤니르는 로마니아의 인공신좌들을 가져갔어. 어디에 쓸지는 몰라도 얌전히 보관해두진 않을 거 아냐. 권능끼리 조합하면 무시 못할 텐데?”

“하지만 도망쳤지. 노르드를 피해서.”

─척. 로키는 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영혼의 황홀경】을 총동원해도 너를 이길 방법은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오오.”

네페르티티가 존나 탈력감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참 듣는 사람도 힘 빠지게 만드는 감탄이었다.

프랑한테 이마를 쓰다듬받던 라리루라는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뻗댔다.

주위에서 감탄과 칭찬의 시선이 쏟아지자 약간 우쭐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억지로라도 겸연쩍은 기분을 외면하며 말했다.

“신좌를 가져가서 훨씬 더 강해질 우려도 있긴 하지.”

“로키 말로는 【해신】의 몸을 목에 끼웠다며. 신좌로 보강한다면 더 그렇고.”

“그래도 힘들 거에요. 그만한 강적이 된다는 건 노르드의 위협이 된다는 뜻이니까. 그에게 승산이 생기자마자 노르드의 예지에 걸리겠죠.”

내 미래예지를 100% 이해한 티르시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언젠가 싸우게 될 운명인 이상, 헤니르 새끼가 강력해지는 미래를 내 눈이 놓쳐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헤니르의 싹수가 노래지려는 순간, 나는 그놈이 어디서 뭘 하는지 볼 수 있겠지.

“그렇다고 강해지길 포기하면 아예 이길 방도가 없을 테고. 외통수로구나.”

지팡이를 메달에 넣으며 조금 안심해 하는 듯한 베로니카였다.

아예 수십 년을 존버 또 존버해서 절대 승패를 뒤집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해온다면 몰라, 우리가 그러는 동안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다.

“와, 그렇게 보니까 미래예지 존나 무섭네. 나도 오딘의 후계자나 할 걸.”

다나는 피식거리며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따듯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대신 누나한테는 하늘 나라 발퀴리에 랩실이랑 에인헤리 기숙사가 있잖아. 존나 대학원생을 강제징용하는 권능이요? 크, 시발. 이게 코즈믹 호러지.”

“고맙다 씨발남편아. 너도 뒤지면 그날부로 내 에인헤리임.”

“와 증말요? 4대 보험 되요?”

“조식 중식 석식에 기숙사도 지원해 줄게.”

“뭐야 시발 저녁밥이 왜 나와요. 집에 보내줘요.”

“꼬우면 장수하시던가. 뒤지기만 해. 평생 델꼬 상전으로 모셔드릴게.”

“조건 후한 것 봐. 헤드헌팅 씹고수.”

아무튼 사후강평은 이쯤 하자.

중요한 건 당분간 헤니르가 쥐 죽은 듯 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쓰벌. 이래서 찐따들이 힘을 숨기는구나.’

내가 너무 쎄지니까 적들이 요리조리 튈 생각만 하고, 정면에서 싸우질 않는다니!

적을 피해다니던 때랑은 입장이 바뀌고 말았다.

예전에는 우리가 몰래몰래 뒤에서 ‘오딘님 정의로운 암살자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하며 적의 등에 칼을 꽂고 다녔다면, 이제는 나를 겁내는 적들이 코인에 물린 존버충이 돼 버린 것이었다.

아! 하늘은 왜 나를 낳고 저런 좆밥들을 낳았단 말인가!

이게…… 강자의 애환……!!

“강북호──!! 너무 강하다아아앗──!!”

“지랄 말고. 이 새끼 뇌절하게 두면 20페이지는 떠든다.”

다나가 내 귀를 잡아당기자 로키는 픽 웃었다.

“애초부터 그런 성격, 그런 능력이니까 권능도 그런 쪽으로 발현한 거겠지.”

“음…… 어쨌든 저희도 당분간은 뭔가 행동하기 애매하다는 거네요~?”

라리루라가 누운 채로 손가락에 입을 댔다. 생각하던 프랑이 끄덕거렸다.

“단서도 없는걸. 노르의 예지를 믿고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

“권능에만 의존하는 것도 못할 짓이니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가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워프 포탈로 이리저리 튀어댕기는 씹놈을 어떤 방법으로 잡는다는 말인가.

우리가 노력해서 찾아내도, 낌새를 느끼자마자 튀어버릴 우려가 컸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가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초조해질 것도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아내들을 달래듯 말하며, 내심으론 전의를 가다듬었다.

헤니르를 놓쳐서 끝맛이 석연치 않은 건 나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로마니아는 어떻게 될까요?”

문득 그렇게 말한 건 티르시였다.

“황제, 제 1황자,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막내 황자가 죽고 인공신좌도 사라졌어요. 아마도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겠죠.”

“……그럴 테죠.”

로마니아의 신들이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각 교단의 지도층이나 교황급의 인사는 깨닫고 있을까?

단지, 혹시 알고 있어도 신좌가 없어진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

“신도들이 쌓은 마나가 소멸하지는 않을 터다. 인공신좌는 가호나 권능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끄는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베로니카는 객관적으로 사실만을 늘어놓았다.

그 점은 당연하다. 강력한 마나 덩어리와 신에 준하는 권능의 표상이라도 자기 신도들 전부에게 마나를 나눠주면 10년도 못 가서 소멸할 것이었다.

막말로 내가 마스터 클래스가 됐어도 옥쇄로 내 영지민 전원과 발퀴리에를 전부 보살피라고 하면 죽어나갈 게 뻔한데.

결국 게임의 스킬 포인트 시스템처럼 신도들을 보조하고, 가끔 커다란 의식 때에나 직접 관여한 정도였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절대 무시 못할 입지라는 것도 사실.

“로마니아의 행정은 붕괴할 거에요. 남은 일은 황제가 살아있는지에 달렸죠.”

“……코르넬리우스 어르신의 연락을 기다리죠.”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팔찌를 매만졌다.

─두근. 손끝에서 전해지는 파동.

나는 브류나크 안에 잠든 채로 맥동하는 신좌를 느낄 수 있었다.

“……음.”

쓰벌, 이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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