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42화 (840/1,009)

***

나는 거의 반나절 뒤에나 틀딱 듀오를 만날 수 있었다.

때는 늦어서 아내들은 대부분 잠들었고, ADHD 잼민이를 물가에 내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어머니처럼 프랑과 티르시는 사고뭉치 남편 강북호를 쫓아왔다.

그리하여, 장소는 영업 종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도 불을 켜둔 어느 은밀한 찻집.

“로마니아는 끝장일세. 외국어를 배워두길 망정이지.”

“코르넬리우스. 우리 같이 망명할 준비나 할까?”

“발상이 느리군. 나는 반역을 준비하기 전부터 갈 곳도 정해놨지. 브리타니아의 왕녀님과 연줄을 이어두었으니 남작위 정도는 내주지 않겠나?”

‘저는 청각 장애인이에오’ 하고 주장하는 듯한 바텐더가 묵묵하게 술잔을 닦는 찻집. 우리의 틀딱 듀오께서는 장대한 역돌격 빤스런 계획을 모의 중이었다.

‘머임? 머임?’

이게 로마니아 국내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슈퍼 셀럽, 후작 가문의 가주들이 나눌 대화인가? 엊그제까지 좌충우돌 황제 목따기 대작전을 작당하던 분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

─벌컥벌컥.

머리가 띵해진 나는 일단 술부터 들이켰다.

웬일로 이 영국인 뺨치는 찻잎 덕후들이 찻잔에 술을 채워넣나 했다. 이러니 술 기운이 필요해질 만 하지. 이세계 양주 존맛. 남으면 싸 가야지.

“이쯤 할까. 노인들 농담에 젊은 친구가 정신이 나가버리겠다.”

“농담만은 아닐세. 현실로서 이 나라는 건국을 기념하는 이 날 멸망을 앞뒀으니.”

나이도 있는데 간을 혹사해가며 상남자처럼 호쾌하게 마초-원샷을 선보인 어르신은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바텐더가 쌍욕을 뱉지 않은 건 가게 자체가 어르신의 구멍가게여서일까.

“친위대장은 황제를 데리고 도주했다네. 세간에 흐르는 소문이 어떤지 아나?”

“볼 장 다 보고 숨어 있던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낮말부터 밤말까지 다 듣고 다니는 새랑 쥐들이 후다닥 달려와서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읽어 보게. 설명하기엔 길군.”

종이 뭉치를 받은 나는 프랑한테는 쥬스를 주고 샅샅이 훑어보았다.

“흠. 제 1황자 및 제 3황비의 사망 확인. 해명 없이 도주해버린 황제와 친위대는 오리무중. ‘아틀란티스 동맹’ 건에 대한 해명으로 국내외의 혼란은 가중 중.”

“반역 사태 자체가 자작극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더라. 내가 봤을 때, 올해로 로마니아 황실은 끝장이야. 더는 정통성을 따질 입지조차 아니지.”

남의 나라지만 나라에 망조가 들긴 했군.

오델리아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 프랑이랑 같은 쥬스를 홀짝였다.

“그 전통성이란 것부터가 대대손손 어인박이의 비밀을 숨겨왔다는 점에서 존재의의가 쓰레기 행. 새 황족이 나오거나 원로원이 지도자 층이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어.”

“출세하시겠네요. 바빠지실 것 같은데 보약이나 보내 드릴깝쇼?”

“원로원의 통치는 불가능해. 십중팔구 1년 내로 나라의 형태가 유지되지 못할 테니까. 로마니아는 원형도 남기지 못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겠지.”

내 말은 그냥 씹어버리네. 내가 댁들의 살벌한 개드립을 안 받아줬다고 삐진 거야?

‘아무튼, 이세계 춘추전국시대 서양편인가.’

티르시는 술잔에는 입도 대지 않고 말했다.

“부디 고견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천검제후님.”

“아부는 잘난 사람한테 듣는 게 제일이지. 너도 한 잔 마시면 말해줄게.”

“감사히 받겠습니다.”

틀딱 특) 젊은 사원이 술 안 마시면 심보 꼬임.

티르시가 사회생활을 풀 가동해서 한 잔 빨자, 오델리아는 웃다가도 탄식했다.

“기술이 얼마나 발전하건 국력의 일부는 국토의 크기에서 나와. 이 나라는 땅이 넓지만, 고대 이후에나 생긴 국가고. 로마니아는 아쉽지만 절대 단일민족국가가 못 돼.”

어려운 정치와 민족성 이야기다. 현실의 지구에 대입해서 해석을 해 볼까.

한국에는 소수민족이랄 게 거의 없다. 한반도의 틀 안에서 500년 넘게 유지되고 융화된 나라기에 DNA로는 어쨌든 국민성으로는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이 고구려의 옛 땅을 건사했다면?

그 좁쌀 만한─현실적으로 그렇다─ 남한에서도 지방과 지방 사이의 감정이나 문화 차이는 적잖게 있었다. 그런데 혹시 국토가 그것보다 멀게, 넓게 흩어졌다면?

말 타고 다니던 민족과 밭 갈던 민족도 사이가 돈독해질 수는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3~4명만 모여도 편을 가르면서 싸우는 생물.

일본, 중국, 그리고 여의도의 0.5배 크기의 땅뙈기만 갖고 왕을 자처하던 옛날 서양 선제후국들을 생각해 보라. 춘추전국시대가 남일이 아니라니까? 아, 로마니아 일이면 남일이긴 하네.

국토가 넓기에 로마니아에는 소수민족 출신들도 많고 감정의 골도 깊다.

주축이 되는 황실이며 원로원이 무너지면 절대 한 데 융합되지 않는다.

“우리가 제대로 곪은 상처를 터트려놓은 덕에, 로마니아라는 명맥은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다네. ‘우리가 로마니아의 정통후계자’ 라는 주장은 절대 하지 않을 테지.”

“귀족들은 누구나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신의 영지와 이익을 기점으로 나라를 쪼개놓을 거에요. 당연히 외국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죠.”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오델리아가 국경이자 변경의 수호자기는 한데, 모든 국경의 귀족들이 그럴 능력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적당히 옆나라에 뇌물도 바치고 무역하며 살았겠지.

나라가 망하면 가까운 나라한테 정복당할 바엔 얼른 숙이고 들어가기도 할 거고.

“결과적으로 대혼란이 예상되는 판국이지.”

오델리아는 생과즙이 찰랑이는 쥬스를 따랐다. 향이 물씬 피어나는 걸 보면 고급스러운 음료수인 듯 하다. 한 잔 달라고 해 볼걸.

“거기까지라면 우리 예상 범주였으니까 수습도 가능했어. 하지만……”

“이 신성제국에서 신들이 침묵해버렸죠.”

맞다. 결정타는 저것이었다.

누누이 말했듯 황제가 병신이어도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신공으로 끝날 일이었다.

일이 원만하게 종식될 상황에 귀족들이 뭣하러 사분오열을 하겠나. 잃을 게 많은 양반들이니 딱 황제를 묘지로 보내고 턴을 종료하면 그만이었지.

‘그런데 하필 인공신좌가 거의 전멸해버렸어.’

농업, 의료의 99%와 행정 일부를 종교에 맡긴 신성제국 로마니아.

그 나라에서 갑작스레 신들의 존재나 응답이 뚝 끊겨버렸다. 그야말로 전조도 없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는 상상 이상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왜, 옛날엔 일식이나 흉년을 왕의 부덕함이 원인이라고 규탄했댔다잖나.

내가 지구 역사를 잘 모르기에 정말로 이집트의 파라오가 가뭄이 터질 때마다 나일 강에서 폭딸을 쳤는지, 일식이 일어나면 조선 임금을 두고 수근거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세계에서는 가능했다.

정말로 신들이 ‘황제가 꼬와서 니들 안 도와줌 에베벱’ 거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거 아무래도 시기가 좀……”

“그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세. 황제가 비밀을 속 시원하게 해명하지도 않고 도망치듯 사라지고, 평원신이자 건국 황제이신 로물루스 님의 교단은 반역에 휩쓸려서 무너졌지 않나.”

이래서야 천벌을 받을 만 하다. 골치가 아프단 것처럼 말하는 어르신.

놀랍게도 더 격한 리액션은 오델리아한테서부터 나왔다. 그녀는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갖춘 마스터 클래스인데도 신앙심이 깊은 편이었는지, 버티지 못하고 술에 손을 댔다.

“그 덕분에 기어이 신들께서도 우리 로마니아를 내치신 모양이지……. 하. 빌어쳐먹을 황제 자식. 내가 어떻게든 그놈 모가지를 땄어야 했는데.”

“……크흠.”

드물게도 눈치가 보였던 나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 가족이 알고, 숨기는 비밀들은 워낙 많다. 그래서 그중 몇 개인가를 공유하기만 해도 충격의 진실을 들은 사람들은 자지러지며 경악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이 틀딱 듀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로마니아의 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

‘아니 근데 시발, 어쩔 수 없잖냐고.’

훌드폴크, 아틀란티스, 대전쟁의 내막, 오우거와 어인, 히타이트, 임모르탈리스, 〈편찬대대〉, 굴라나뢰크, 별의 자손, 지구와 이세계, ETC…….

새삼 세 보니까 존나 많기도 하다.

이것들만 해도 하루 종일 각을 잡고 나불대는 걸로는 어림도 없는 분량!

하물며 전부 밝힐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데 인공신좌랑, 에퀴녹스랑, 여신 사티스와 니플헤임에 대해서까지 설명한다?

‘염병도 그만한 염병이 없지.’

마도신 아르마 슈나스는 생전에도 생후에도 신으로는 숭배받지 않고 대마법사로 불렸기에, 우리의 틀딱 듀오는 궁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별로 말 안 해도 되겠지’하고 생각했던 결과가 이것이었다.

“원래부터 우리 나라에는 신탁이 없었어. 그게 애초부터 일곱 신들께서 실망하고 계셔서였다면? 그리고 건국 기념일에 이 사단을 일으킨 우리들을 기어이 내버리신 거라면?

“허허허. 신들께 버려짐으로써 멸망하는가…… 신성제국다운 멸국이로구나…….”

“정의신 테미스시여…… 부디 국민들의 앞날을 지켜주시옵소서…….”

대주주들한테 조리돌림 풀코스를 당해서 멘탈이 나가버린 무력한 CEO처럼 변해버리고 만 할배와 할매. 국민연금 수령 금액이 줄어든 독거노인들이 이러할까.

─벌컥벌컥!

와삭와삭….

눈치가 보이는지 티르시는 누가 권한 것도 아닌데 독한 술을 목에 들이부었다. 프랑도 철혈의 쿠키 살인마로 진화해서 아몬드 쿠키를 몰살하기만을 위한 기계로 변해버렸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님을 읊조리며 천벌을 실감하는 노인들에게 ‘사실 신성력이라는 게 명계에서 온 거거든요’ 하고 알려준다?

‘이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했다.

“……어르신들.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나는 목에 힘을 빡 주고 내게 허락된 진지함을 모두 끌어모았다.

“까꿍.”

파치지지지직─!

브류나크에게서 신좌가 하나 피어났다. 태양을 방불케 하는 마나의 덩어리였다.

─쨍그랑!

바텐더가 광을 내던 유리잔을 떨어트렸다.

그럴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로마니아 국민의 대다수는 이 태양이나, 그에 준하는 광채를 보고 자랐을 것이었으니까.

이 번개의 마나는 바로 엊그제만 해도 국보라는 성배에 담겨져서 옮겨지던 것!

“인사하시죠. 성뢰신 베스타입니다.”

천통절 말고도, 순례나 헌금 등의 이유로 교단 본부를 찾아봤다면 알 것이다.

이게 진짜 베스타의 권능이며 마나의 응집체고, 이만한 수준의 성뢰는 ‘신’ 자신이 아니고서는 못 보여줄 거라는 사실도 말이다.

─툭!

담배를 떨어트린 어르신과 입에서 술을 주르륵 흘리는 오델리아.

그들은 그렇게 주구장창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 마디를 주워섬겼다.

“……씨발?”

“어허, 고운 말 씁시다. 연치도 많으신 분들이.”

설명 끝, 설득 끝. 참 쉽죠?

이제 어디 머리를 좀 굴려보자.

‘춘추전국시대고 크루세이더 킹덤이고 간에, 내 입장에선 평화로운 게 더 낫다.’

요래조래 각을 재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더라.

영웅은 난세에서만 태어난다지만, 이미 입지를 다져두었던 영웅호걸들의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도 전쟁의 한 측면 아닌가.

양판소에서는 중후반부 쯤에 에이션트 드래곤 1마리 쯤 잡아주고 전쟁 에피소드를 거쳐서 주인공에게 왕이나 뭐 그런 직위를 주곤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이긴 해도 엄연한 현실.

‘운명이 예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전쟁은 나만 손해 보는 짓이지.’

혼돈의 총아, 운명 좆까맨인 인간들이 전쟁으로 활발하게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

‘내 권능의 절반을 봉인당하는 거나 다름없어.’

9초 뒤의 미래밖에 예지할 수 없게 되는 셈.

아니, 미래를 읽어봤자 그 미래가 어긋나버리는 셈인가.

‘이 점만 해도 내게 전쟁은 최우선적으로 막을 이유가 있는 대참사다.’

하물며 뭐요? 캐삭빵 내전?

종전하기 제일 힘든, 지독히 끔찍한 전쟁 양상 아닌가. 게다가 말이 내전이지 외국에서도 수저를 들고 한 입 떠먹으려 올 판이다.

각국 왕님들이랑 맺은 인맥으로 정에 호소한다?

사망자만 얼마나 나올지 모른다. 국익과 시국을 앞에 두고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도의적으로도, 이득충 마인드로도 막아야 해.’

문어 황비 아멜리아가 그런 목표를 꾸렸으리라 생각되는만큼, 여기서 신성 로마니아 제국의 진짜 후예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병신 월드컵이 열러선 안 될 일!

고로, 답은 하나였다.

─휘리릭!

나는 베스타의 마나를 아름다운 여신 모양으로 빚었다. 신좌 자체의 권능을 뽑아 쓸 수는 없어도 겉모습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말했잖아? 난세에는 영웅이 태어나는 법이라고.

“다음 임금님이 누구인지는 제가 정합니다.”

야, 이 야만인 자슥들아. 이것은 왕권신수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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