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46화 (844/1,009)

노르드는 종교에 대해 악감정이랄 건 없었다.

모태-무교이긴 해도 성직자의 개인적인 타락을 곧 종교계의 부패로 일반화시킬 만큼 무식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논리에서는 의료계와 고고학계도 자유롭지 않고.

하지만 노르드의 고향 별에서는 종교에 관련한 갑론을박이 1만 년 가깝게 이어졌던 만큼, 교양의 일종으로 어느 정도 주워들은 지식은 있었다.

‘끝났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네페르티티의 관점은 결정적인 치명타라는 걸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증명하는 건 종교계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난제지.’

물론 이세계와 지구는 상황이 다르긴 했다.

단, 베스타 교단이 신의 부재를 증명할 방법도 자폭밖에 남지 않았다.

이 격차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도 뒤집지 못할 것이었다.

〈증거……!!!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잠깐 사이에 식은땀에 젖은 알키데스는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외쳤다.

에스메랄다는 경멸스럽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교황 예하. 제가 알기로 증거니 뭐니 떠드는 종자는 태반이 사기꾼이에요.〉

〈……황녀는 가만히 계시오. 이건 우리 교단과 백작 사이의 문제요.〉

〈제가 신분을 내세울 처지는 아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무례하시네요.〉

에스메랄다는 혀를 찼을 무렵 노르드는 왜인지 팔찌를 만지고 있었다.

무슨 매직 아이템일까? 그의 신분을 보면 무척 오래된 고대 유물이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았다. 노르드는 그러고 있다가 픽 웃었다.

〈확인하시지요.〉

〈……예?〉

〈증거를 가져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국은 좀 좋지 않지만, 마침 증인으로서 서 주시기 충분한 신분의 귀인께서 여기 계시는군요.〉

노르드가 눈짓하자 에스메랄다는 안색을 폈다.

〈아, 물론이죠! 증언해 드리고 말고요!〉

〈이, 이……!!〉

〈교황 예하. 예기치 못한 만남이라 오래 있을 순 없습니다. 저도 용무가 있어서.〉

노르드는 턱을 까딱했다. 알키데스는 손가락을 떨었다.

당초에는 성뢰 성배를 도난당한 오점을 그에게 뒤집어 씌울 생각이었다. 교단의 치부가 협박으로 기능했던 건 오직 그 점 덕분이다.

하지만 발상이 어설펐다. 모든 교단이 한꺼번에 신을 잃는다는 초유의 사태에서 알키데스의 독단 어린 협박은 역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베스타 신도도 아닌 노르드가 베스타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아까 전까지는 알키데스와 교단의 무기였던 그 추측이, 이제 와서 그의 목을 졸랐다.

‘확인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어느 쪽이 더 이득일까. 고민은 순식간이었다.

‘……확인한다. 어쩌면 거짓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어!’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울프헤딘과는 적대해버린 뒤다.

재볼 것도 없이 노르드에게서 베스타의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알키데스였지만, 정확한 수준까지는 몰랐다. 기만책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초조해진 알키데스는 부질없는 희망에 매달렸다.

진실을 알아야 거짓말하기로 마음 먹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눈을 딱 감고 축복의 주문을 외웠다.

〈거룩하신 화톳불의 어머니시여, 그대의 종을 굽어살피소서……〉

그의 마나로 주문을 외우자 축복이 노르드에게 쏟아졌다.

그러고 나서, 알키데스는 느꼈다.

〈아, 이, 이런……!〉

티 한 점 없이 맑은 성뢰의 마나와, 결코 그에 지지 않는 정순한 마나.

어둠과 음의 마나? 당연하게도 그런 건 추호도 없었다.

알키데스는 기도하던 손을 떨어트렸다.

‘미스릴 클래스? 이게 고작 미스릴 클래스라고?’

망할 놈들. 개 같은 정보상 자식들. 이게 미스릴 클래스라면 나는 황제겠다. 알키데스는 노르드의 정보를 판 상인들에게 분노하며 공포에 떨었다.

견습 사제 시절 이단 심판에 동행했을 때, 성기사들의 불꽃을 처음 보고 느낀 놀람과 공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개미가 돼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저 방대한 마나 가운데 베스타의 권능이 있다.

드넓은 천공을 우러러보고, 그 하늘에 몰아치는 태풍과 천둥을 눈치챘을 때와 같은 경외감이었다. 게다가 천둥을 뿜는 태풍은 알키데스가 선택하기 나름으로는 그를 향할지도 몰랐다.

〈예하? 축복이라는 건 이걸로 끝입니까?〉

〈예, 옙!!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까까지와 다르지도 않은 질문이었지만 알키데스는 얼어붙었다.

알키데스는 알고 있었다. 베스타는 신이 아니라 황금시대의 인간이라는 것을.

성뢰신 베스타는 과거의 로마니아 인이다. 그가 기도하고 의식을 주관하며 느끼는 숭고한 마나는 옛 성현이 후손을 위해서 남긴 유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왜 그 성현의 유산이 노르드의 손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의문은 들었지만, 해결할 수는 없는 의문이었다.

노르드가 다른 교단의 신좌까지 전부 보유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유가 무엇이고 어떤 사정이 있건 결론은 그대로였다.

교단은 신뢰를 잃을 행위를 거듭했으며, 신앙을 간증할 방법은 그들이 가진 베스타의 마나─빛과 번개의 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베스타의 신좌만큼 성스러운 벼락을 보이지는 못한다.

신앙을 모으는 승부가 됐을 때, 교단은 절대로 노르드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예하? 결과를 들려주셔야지요.〉

노르드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바뀌어야 할 쪽이 누구인가는 그걸로 정해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울프헤딘 백작님께서는, 성뢰신께 다대한 축복을 받으신 듯 합니다.〉

입장 차이를 비로소 실감한 굴복 선언이었다.

***

우리의 새로운 흑우는 공손하게 떠나갔다.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백작님.〉

〈예.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님’ 자가 붙은 걸 보면 처지는 이해한 듯 했다.

감시는 붙일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저들에게 가능한 일도 없을 테니.

‘이 강북호 폰 울프헤딘에게 야부리로 막고라를 걸어? 어림도 없지.’

나를 성뢰를 훔친 도둑으로 몰거나, 내가 가진 베스타의 마나를 빌미로 ‘이 사실을 들켜서 일을 크게 만들기 싫으면 협력해라’~ 같은 식으로 나를 부려먹는다.

대충 그런 꿍꿍이를 품고 왔겠지만, 우리가 베스타의 마나를 당당하게 내보일 거라는 생각은 못한 건가. 상황이 급했다지만 어설픈 선동이로군.

‘교단의 힘을 앞세웠다면 가능은 했겠지.’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를 실감해 본 사람들은 다 공감하겠지만, 어지간한 억지는 돈과 인맥으로 커버가 가능하다.

교황의 지위를 과신했던 것일까.

주도권을 못 잡고 끌려가면 더 악랄한 함정들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첫 문턱에서 턱 걸려버렸으니 실패일 뿐이다. 이를 어쩌나. 데프픗.

‘어쨌든 나한테는 개이득이지.’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베스타 교단이 제 발로 을의 입장으로 굴러들어온 셈.

협력하고 담합하는 만큼 물러나 줘야 할 상대가 기습공격을 가하려다가 고꾸라졌다.

족쇄도 채워놨다. 편하게 써먹기만 하면 되겠군.

흑마법사 체크도 벗어난 모양이고.

“수고했어. 아주 귀신같더라?”

─웅웅. 나는 잘게 떨리는 브류나크를 칭찬했다.

오프툼이 말했고 유니콘 흑마법사가 보여줬듯, 다른 물체에 어둠과 음의 마나를 담아서 쓰면 그 악영향─부작용─을 받지 않는다.

에퀴녹스의 따까리들이 흑마법사를 판별하는 기술을 빠져나간 원리다.

‘특히 나는 브류나크가 어둠과 음의 마나를 다 통제하니까.’

이중삼중의 보안이니 들킬래야 들킬 수가 없다.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한데, 이렇게 실제로 몸소 체험한 건 좋은 성과였다.

그렇게 써먹기 좋은 흑우를 얻은 나는 황녀와도 얘기를 나눴다.

〈실종된 황자님을 찾아달라는 겁니까?〉

〈예.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물어보는 황녀였지만, 솔직히 곤란하단 말이지.

‘너의 오라비는 죽었다. 유감을 표하도록 하지.’

딱 그렇게 말하고 쫓아내는 게 가장 낫다. 헤니르가 어쩌고 〈청동 옥좌〉가 어쩌고 말해주는 건 영 좋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말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행방에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분들께 언질을 드려 보면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그러실 것 없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일부러라도 삭막하게 대답한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쪽은 혼자만 보내기 못 미덥기에 신분을 감춘 발퀴리에를 호위로 붙였다.

마나를 풀 충전시킨 발퀴리에를 붙여준 다나가 말했다.

“안 알려줘? 레벨리오 황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서 좋을 것도 없잖아.”

“하긴. 그건 그래.”

황녀에게 저렇게 말해준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진짜 행방은 나라도 찾기 힘들겠지만, 귀족들이 알아낸 사실쯤은 전해줄 수 있겠지.’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일개 황녀에게는 가혹한 진실 아닌가. 알아봤자 손가락만 빨며 가슴이 미어지거나, 스스로 뭐라도 해 보려다가 애꿎은 목숨만 잃을 게 뻔했다.

에스메랄다 자신이 진실을 밝혀낼 날이 올지도 모르잖은가.

하다 못해 그렇게 됐을 때, 미치광이 오라비가 동생을 죽이러 찾아오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내 손으로 황자놈의 새끼를 해치웠다가 원망을 사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게 마초이즘의 기출변형, 배드-애쓰인 것.”

“……생각없는 선의는 종종 괴롭힘이 돼.”

경험이 있는지 네페르티티는 예쁜 눈썹을 찡그러트렸다. 그녀만한 미인이다. 수작이든 호의에서든 뭐라도 해 주려고 다가왔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까.

다나도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기 마음이 편하자고 가혹한 진실을 알려주고 양심적인 척 구는 것도 못할 짓이지. 모르는 편이 약일 때도 있는 거지.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눈나네 가족처럼?”

“너랑 오딘의 관계처럼.”

그렇다. 미래를 보는 눈을 가져도 알지 못하는 건 있다. 오우거 1마리랑 영혼의 맞다이를 벌이던 내가 이세계의 진실을 전부 들었어도 부담스럽기만 했을 것 아닌가.

다나네 가족처럼 오해를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 책임 정도는 기쁘게 지도록 하자.

“아 참. 아까는 고마웠어요, 네페르티티.”

네페르티티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나, 도움 됐어?”

“네. 그 자리에서 분위기를 뒤집었잖아요?”

프레임이란 건 한 번 씌워지면 뒤지게 귀찮다.

몰카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마침 핸드폰 갤러리에 야짤이 가득하다? 그때 가서 변명해봤자 보신을 위한 변명으로 들릴 따름이다.

─신들이 로마니아에게 실망하고 떠나기 전에, 한 용사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렸다.

─신들이 로마니아를 버린 지금, 웬 옐로 몽키 새끼가 성물을 훔쳐서 힘을 얻었다.

보라. 양쪽 다 강력한 헤드라인 아닌가?

교단에게 막고라를 걸고 ‘응~ 까발리면 너희만 뒤져~’ 해서 망정이지, 언론전이 되면 통제 못할 망조가 든 로마니아의 여론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며느리도 모를 일!

“……신앙하고 혼란, 공포. 사람들은 그런 것에 휩싸이면 이성을 잃어.”

“네. 끽 하면 저만 마녀 사냥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어요.”

브리타니아와 내가 맡은 영지면 몰라도 여기선 베스타 교단이 훨씬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 존나 수상쩍은 Z-용사는 고구마 용사물 한 편 찍을 뻔 했다 이거에요.

“응. 나도 브류나크도 잘 했어.”

네페르티티는 재차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고서 날 빤히 쳐다봤다.

“잘 했으니까, 상 받고 싶어.”

“……상? 무슨 상이요?”

“……한가할 때 같이 노는 거?”

다 같이 놀다는 뜻은 절대 아니겠고. 나랑 브류나크를 더해서 셋이 놀자는 건가.

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좋고 말고요. 그래도 곧바로는 어렵습니다.”

“왜?”

“황제가 더 멀리 도망치기 전에 찾아놔야 해요.”

베스타를 통한 황권신수설 퍼포먼스와 정통성, 또 그밖의 변수를 감안하면 찾아서 족쳐두는 것이 맞았다. 살려둘 이유도 없고.

네페르티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괜찮아. 티르시의 복수.”

“본인은 그럴 마음 없는 듯 하지만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야.”

“……그런 건가요?”

“응. 그런 거.”

네페르티티의 표정을 읽기 힘든 건 오랜만이다. 나쁜 변화인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어차피 우리도 움직일 생각이기는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키잉!

여관 방이 모르는 장소로 덧씌워졌다. 산뜻하던 방이 암회색으로 바뀌었다.

‘호랑이도 말하면 온다더니.’

나는 구석에서 분노로 씩씩대는 노년의 황제를 보고 픽 웃었다.

익숙한 권능의 발현.

오딘의 눈의 미래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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