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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숭고한 무녀 취임신식(就任神式)을 마치고 깨끗하게 씻긴 베로니카를 업었다.
“여수 밤~ 바다. 이 조명에 담긴~.”
노래를 흥얼대며 절세의 미녀를 업고 돌아가는 길.
귀갓길이라기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저택 부지에서 저택으로, 뒤지도록 큰 마당에서 집으로 돌아갈 뿐. 가는 길에 마법으로 지켜지는 벽담 밖으로 오션 뷰가 보이는 게 인상적이다.
“해안가 근처의 수녀원이라. 판타지 같군.”
해안 도시의 풍경은 급진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보수적인 영지민들을 억지로 밀어서 재개발 따윌 시전한다?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서.
아틀란티스에만 돈을 투자한다는 뒷소리가 나와봤자 어차피 이 도시 양반들 세금은 아예 사용내역까지 까버릴 생각이라 의미 없다.
‘개발 순위에서 밀린 걸 불만으로 여기면 그때 가서 입을 털지 뭐.’
고향의 모습이 멋대로 바뀌는 게 싫다는 이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해주도록 하자.
책임 회피와 갈라치기가 원큐에 끝나는 기적의 딜교다.
‘언제까지 영주 대리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쿠으으….”
꽤나 피곤한 것인지 쌕쌕거리며 잠든 베로니카. 나는 피식 웃고 그녀를 고쳐 업었다. 절대로 손에 잡히는 엉덩이의 감촉을 즐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후.”
그렇게 실없고 갈 데 없는 성욕을 주체 못 하고 있자 생각의 나래가 펼쳐졌다.
‘황제와 친위대장마저 해치우면 별의 자손과 그 따까리들은 거의 정리 끝이다.’
완전히 해결했다곤 말하기 힘들지만 급한 불은 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타다 남은 잔불이 타오르거나 새 불똥이 어디서 툭 튀어나오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도 내가 곧바로 쳐들어가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아틀란티스로 돌아왔던 것 역시 그 이유에 기인한다.
예지 속 친위대장은 후방을 교란한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후방이 어디인지는 모르는데, 전쟁에서 후방 교란 작전은 때때로 유효하다는 듯 하다. 전문가들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전쟁에서 지휘관이 노릴 만 한 후방은 적군의 요충지나 취약점.’
그리고 이 소탕전은 나와 그들의 전쟁이다.
이쯤 되면 의심을 하지 말란 게 궤변 아니겠나. 그들이 노릴 만한 후방은 자명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키잉!
짜리몽탕한 예지의 단편이 뇌리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베로니카의 뿔이 내 마나의 색으로 빛났다. 잠들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풍류를 모르는 놈들이로다. 여운에 잠겨서 부끄러움을 잊으려던 차였거늘.”
“일어났구나. 보였어?”
내 무녀가 된 것으로 미래를 보는 권능을 조금 나눠받은 것일까?
베로니카는 등에서 내려오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래 말이더냐? 그렇지는 않다. 막연하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 뿐이지.”
“왠지 미안한데. 주력 캐릭터 하나만 전폭적으로 밀어주는데 약빨이 후달려서.”
“후후. 글쎄? 보이는 미래는 사람마다 다른 법 아니겠느냐.”
비척거리며 일어난 베로니카는 나랑 몸을 섞는 중에 생긴 위화감이나 피로를 깊게 숨을 내뱉으며 떨쳐냈다. 그녀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왔다.
“후우…… 그래, 언제인지는 모른다 쳐도 어디인지는 보였느냐? 어디지? 주인님.”
인공 미스릴 메달을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9초 후의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베로니카에게 마나를 불어넣어주며 그녀의 체력 회복을 도왔다.
그러면서 말했다.
“5초 뒤, 이 집 마당.”
─웅웅!! 브류나크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아하. 그거 정말 운치 없는 놈들이로군.”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지. 초조한 놈들이 매너 따윌 따지겠어?”
“적당하군. 우리도 이 꼭두새벽에 매너도 없이 소란을 피워야 할 테니.”
우리는 더 떠들 것도 없이 한 데 뭉쳐서 달렸다.
내가 앞, 베로니카가 뒤. 나는 냅다 브류나크에 벼락을 불러일으켰다. 술식에 맞춰서 피어난 번갯불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마당 한곳에 내려꽂혔다.
그 벼락이 꽂히는 바로 그때였다. 웅덩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밤바다인지 그림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공간 이동〉의 웜홀이 지면에 열렸다.
─콰릉!!!!
내 벼락은 해수면보다는 구덩이에 꽂힌 것처럼 웜홀을 관통했다.
촤좌좌좍─!!!
하지만 상대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방패로 번개를 막고 검으로 찢어발긴 여인이 웜홀 속에서 뛰쳐나오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노르드 폰 울프헤딘?! 어떻게 여기에!!〉
〈후방을 교란한다며? 여기나 아틀란티스로 올 것 같더라고.〉
〈……뭐라?!〉
대답은 혼란을 일으키고, 혼란이 빈틈을 만들어냈다.
내가 차르투스라는 친위대원을 족쳤던 시점에는 아직 계획도 없던 후방 교란작전!
어찌 된 노릇인지 적이 그 작전을 다 알고 대기하고 있던 것 아닌가. 놀랄 만도 했다. 나 같으면 스파이라도 심었나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웠겠지.
나는 그 찰나를 찌르기로 꿰뚫었다.
─푸욱!!!
〈……크윽!!〉
방패로 쳐냈지만 미끄러진 창날이 어깨를 깊게 스쳤다.
〈손맛이 끝내주는군. 피부가 거의 갑옷인데.〉
어깨에 깊은 상처. 인간이었으면 전투력이 급감할 상처였는데, 그마저도 브류나크처럼 날카로운 무기가 아니었으면 오히려 날이 접혔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나랑 같은 타이밍에 마법을 외우던 베로니카가 움직였다.
화르르르르륵! 화아아악─!!!
나보다 긴 주문을 외우던 베로니카는 웜홀에서 시시각각 튀어나오려는 다른 친위대원에게 화끈한 불맛을 선사했다. 마당을 초토화시키는 혜성이다.
〈정원이 엉망이로군! 프랑에게 혼나겠어!〉
〈그때는 나도 같이 혼나줄게!〉
─차캉!! 방패를 건틀릿으로 억제한 나는 친위대장과 무기를 부딪혔다.
잔꾀를 부릴 여지 없이, 힘만을 겨루는 자세였다.
〈건방진 이방인 놈. 별의 바다의 축복을 받은 내게 힘으로 도전하겠다는 거냐?〉
빨리도 냉정해진 친위대장은 힘을 끌어올렸다.
놀라운 완력이 사지를 짓눌렀다. 이제까지 힘을 겨룬 상대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 것 같았다. 탑 레벨에 우신이 껴 있다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마스터 클래스의 형태는 여럿이지만, 육체적인 능력과 권능/무술은 양립이 힘들다.
지금은 아예 드러누워서 회복하기 바쁜 키아라 콜리도의 권능은 육탄전에만 특화돼 있고, 반대로 내 권능은 직접 전투와 관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원래부터 마스터 클래스였다는 친위대장이 별의 자손의 힘을 받아들였다면?
신체능력의 향상은 전사들의 영원한 지상과제다.
육체와 기술 모두 극한까지 갈고 닦은 초월자. 황제라는 짐짝을 들고도 오델리아로부터 도주했던 실력은 결단코 나약하지 않다.
그녀가 꾸민 얕은 지혜가 내 권능 앞에 무의미해졌다고 해서 얕볼 순 없다.
전략을 짜는 예측 승부가 내 권능의 독무대이듯 전투에서는 적이 유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놀람은 친위대장의 몫이었다.
꾸구그그그극……!!!
힘 승부에서 나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지면에 발이 깊게 파묻혀졌지만, 그마저도 내가 체중에 비해 까마득하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팔의 완력으로 힘을 상쇄시키고 있기에 그 정도였다.
〈버틴다고?! 무슨 수로……!!〉
〈그치만 전사 주제에 승부를 피하려는 상병신 년한테 밀리면 쪽팔리잖아.〉
내 비아냥에 친위대장의 얼굴이 굳었다.
눈치를 보면 내 권능에 대해서는 대충 들어둔 듯 하다. 그럼 더 당황스럽겠지.
예언은 따지자면 마법사의 궁극적인 도달점!
두뇌 싸움에서 밀렸다면 하다 못해 몸 싸움에선 나보다 뛰어날 법도 하잖나.
능력의 방향성 차이를 감안하면 가뿐하게 짓뭉개지는 게 맞는 상대.
그런데 그런 내가 자신의 힘에 비등하게 맞서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겠지.
〈졸렬한 짓을 들켜서 쪽팔려졌나? 그럴 염치가 남아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군.〉
나는 숨이 닿을 정도의 지척에서 이죽거렸다.
다시 말하자. 후방을 교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친절한 이웃 거미맨을 꾀내려면 발암 히로인을 빌딩에 매달아놓으면 되고, 콧수염 배관공을 불러내고 싶을 땐 복숭아 버섯 공주를 납치하면 좋다.
〈게릴라 전으로 내 지인들이나 재산을 조지면 내가 행동하기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했나? 발상은 괜찮았다. 하지만 대가리도 실력도 후달렸지.〉
─쿠당!! 쾅!!! 부딪혔던 무기를 떨쳐냈다.
막다 못해 받아치기까지 한 건 정말로 예상 밖이었겠지. 썩어도 준치라고 내 반격은 막았지만 그 방패 너머의 안색은 적잖이 혼란스러운 듯 했다.
〈하나. 네 빡대갈통이 떠올릴 생각을 내가 대비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 안일함. 둘. 그렇게 꾸민 저능한 작전마저 제대로 실천 못한 나약함.〉
─채채채채채챙!!!
심리전에서 우위를 잡은 만큼 내 창술은 공격을 그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병신이면 왜 나한테 처맞고 있는지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아니면 우리 저능한 문어박힘이 년한테는 아직 설명이 더 필요한가?〉
나는 예전부터 편집증적으로 거주지의 치안이며 보안을 관리했다.
굳이 도시를 개발하지 않는 것도 개발 과정에서 외부인의 유입을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완비해둔 방충망에 친위대라는 벌레 무리가 걸려들었을 뿐.
〈어쨌거나 잘 와 줬다. 너희들 때문에 결계를 더 강화하려 했었는데, 오늘 싸그리 족쳐두면 그만큼 비용은 덜 깨지겠어!〉
구신의 마나를 끌어올려서 브류나크에 불어넣고 휘둘렀다.
무예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초월자들의 싸움은 역으로 흔한 전사들과 비슷했다.
뻔히 드러나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기에 승패를 좌우하는 건 기술과 판단력. 그리고 현실적이게도 무기의 차이다. 장인이라면 몰라도 도구를 가리지 않는 전사는 뒤지기 딱 좋다.
─깡!!!
내가 친위대장을 압도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9초 앞까지 미래를 보고, 손에 든 무기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온갖 마나와 신적 존재의 손을 거쳐가며 강화된 내 분신.
별의 세례를 받고 혼돈의 마나에 담금질된 육체라도 어렵잖게 베어냈다.
〈빌어먹을……! 네놈의 그 창, 신물이구나!〉
계속 늘어만 가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더 강하게 반격하는 친위대장.
패기는 훌륭하지만 속내는 얄팍하다. 깨달음과 강함이란 인간성의 성숙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고, 친위대장은 불리함의 원인을 실력이 아닌 무기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사람이라면 저런 치졸함도 으레 가질 법 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한 것이다.
인간을 관둬가면서 힘을 추구해도 본질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지껄이는 꼴을 보니 알 만 하군. 아멜리아가 내 얘기는 제대로 안 해 주든?〉
또 한 번의 이니시에이팅. 일의 추이를 모르는 친위대장에게 아멜리아의 이름은 혼란을 자극하는 캡사이신 급 스파이스다.
아니나 다를까 검끝에 동요가 드러났다.
〈……우리의 주인을 어떻게 했나!!〉
〈몰라 새꺄. 내가 죽인 게 아닌데 어케 암?〉
날 그리 두려워했다는 문어 새끼다. 내 정보를 전부 전했다간 부하들이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전해받은 정보로도 내 실력을 낮게 봤던 걸까. 어쨌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주인이 안 보이면 버려진 애완견답게 충절을 지키든가 들로 돌아갔어야지.〉
─팟!
마음이 동요해서 생긴 1초 미만의 빈틈.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바로 절기를 펼쳤다.
콰르르륵! 휘리리리리릭─!!
셀루스티아의 지팡이의 힘을 탈취한 브류나크와 오딘의 눈이 강력한 시너지 작용을 일으켰다. 내 육신은 창을 휘두르는 자세마다 분열했다.
공격기 제 8품새는 허허실실의 페인트.
‘원본은 창만 여럿으로 분열하는 기술이었지.’
공격을 퍼붓는 난격기와 합치면 거의 폭풍우에 버금간다.
적어도 공격의 반은 맞출 수 있는 기술. 하지만 뭉게뭉게 근두운을 부리는 이세계 손오공, Z-용사인 나에게는 좀 더 다른 활용법이 있다.
푸확─!
환술을 부리듯이 늘어난 몸에, 한순간 동안만 실체를 부여한다.
【게르튀르 푸타르크(Geirtýr ᚠᚢᚦᚨᚱᚴ)】·ᛚ(Laguz)
그 순간, 증식한 나는 360도를 둘러싸며 힘차게 창을 내려쳤다.
─콰과과곽!!!
【게르튀르】의 초식 중에서도 매우 높은 마나 소모를 동반하는 기술은 값어치를 했다. 분신술은 간파한 친위대장이었지만 인간형에서 손발은 하나 뿐이지 않은가.
나와 분신들이 휘두른 창이 급소에 꽂혔다.
【……Cccrrrrrraaaaaa!!!!!】
아주 잠시 본성을 깨운 친위대장은 그 터프하기 짝이 없는 생명력으로 공격을 견뎠다. 파란 피에 젖은 여기사가 방패를 내던졌다.
나는 주인의 손을 벗어난 방패를 반으로 쪼개버리며 물러났다.
〈이젠 상관없다!! 아멜리아 님의 행방은 묻지 않겠다!!〉
드득, 드드득…!!
생포나 심문 각을 볼 적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됐는지 그녀는 팔을 변형시켰다.
〈네 여자를 묶어놓고 그 앞에서 잘근잘근 죽여주마!! 죽이고 남은 시체는 버무려서 남은 계집들 앞으로 보내주겠어!!〉
〈이 날씨에 날고기는 잘못 배송하면 상한다?〉
말하는 것 보게. 아무래도 힘을 꺼내니 광증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하긴, 마스터 클래스라도 적성 문제에서 벗어날 순 없다. 별의 자손이나 나처럼 혼돈의 마나에도 견딜 만한 존재가 흔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역시 저리 다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나.’
지금 물러난 이유는 불리해서가 아니다.
웜홀에서 더 많은 친위대원이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잠깐 사이에 발퀴리에들을 꺼내서 전위를 맡긴 베로니카였지만, 솔직히 영 못 미덥다.
‘친위대는 전원이 아멜리아에게 징그러운 촉수 덩어리로 변신하는 축복을 받았다.’
일개 친위대원도 만만치 않다. 차르투스를 때려잡은 내 경험으로 보건대 10명만 나와도 베로니카에게는 버거울 수가 있었다.
‘어?’
그래서였을까.
코앞의 미래를 보며 위치를 바꾸려던 나는, 이 기습 아닌 기습에 맞서고서 처음으로 예상을 벗어나는 사태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물러난 사이에 변모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친위대장을 예지로 봤기 때문에?
전혀 틀렸다. 내가 놀람을 금치 못한 이유는 그 순간 벌어졌다.
【모조술식: 레바테인(Eptirleiða Hævateinn).】
펼쳐진 룬 만다라는 99개.
예르나가 〈인신〉에게도 이길 수 있다고 여긴 분신체를 갈아버렸던 내가 펼친 것과 비교해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불꽃이 완전무결하게 완성됐다.
아니, 비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이 마법은 처음 내가 폭주했을 때의 그것이니까.
불꽃은 물과 기름을 끼얹은 용광로처럼 날뛰며 진짜 모습을 드러낸 친위대원들을 휘발시켰다. 그 화력이 지나치게 강력하고 제어가 완벽했기에 재 한 줌 남을 도리가 없었다.
정원을 거의 손상시키지도 않은 불길이 꺼졌을 무렵, 끝에 약간 풀려난 열기가 만든 기류에 바닷바람이 으스스하리만치 차갑게 내려앉았다.
〈미래를 보는 감각은 신기하군. 내가 몇백 년 가까이 연찬해야 도달할 경지의 지혜가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듯 해.〉
신체의 일부를 나의 색으로 물들인 베로니카는 웃었다.
입꼬리만 끌어올리는 차가운 표정을 웃는다고 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아름다운 미소였다.
〈헌데…… 누구를 어떻게 죽이겠다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기류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