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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돌아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의회가 끝에 접어들면서 전력을 어디에 어떻게 분배할지만 남았을 쯤 되서, 나는 키아라 콜리도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셰라드 학회장과 그, 뉘시더라? 아무튼 인생 좆망의 위기에 우리에게 협력한 뭐시기 박사님도 계신다. 이름? 아, 내가 기억하겠냐고.
“다른 분들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놀고 먹는 데 온 힘을 다했지만요.”
깁스를 푼 팔을 흔드는 키아라. 내 시선을 대충 눈치챈 그가 말했다.
“히타이트의 유적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유물을 찾아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일회용이었지만 엘릭서의 효과를 증폭시키니 빠르게 낫더군요.”
“막막한 소식들 가운데 든든해지는 이야기네요.”
히타이트의 수도, 카네쉬에 들린 후에는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다.
그래도 역시 몬스터의 토벌에는 모험가가 제일 아니겠는가. 몬스터 헌터 키아라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건 어디 있죠?”
티르시가 물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겠지. 다행히 근거는 금방 도착했다.
“저겁니다.”
아셰라드가 가리킨 건 딱 봐도 보존 상태가 좋은 유물이었다. 뒤지게 큰 동상이었는데, 피부에 문양이나 장식이 없었다면 진짜 거인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었다.
“저 장치가……?”
“맞아요, 아르마슈나스 씨. 히타이트의 차원이동봉쇄장치 《테라코타》랍니다.”
저게 키아라와 아셰라드가 뼈 빠지게 발굴해낸 유물인가. 내 눈이 이채를 뗬다.
조금 전, 느닷없이 나타난 키아라는 말했다.
─약점은 때때로 역공의 주축이 됩니다.
─지금이 호기라는 생각에 달려들었다간 반격에 당하기 십상이죠.
─그러니, 저희도 그렇게 반격을 가하면 됩니다.
차원이동을 막는 장치, 《테라코타》는 의원의 지적을 반박하기에 충분했다.
─그대들의 신분과 업적, 실력을 믿고 느닷없는 난입은 잊어드리겠소. 어떤 장치요?
─이계의 침략자가 수도에 나타났을 때,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가둬줄 방충망이죠.
《테라코타》의 성능은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우리도 갇혀 보았던 카네쉬의 장치와 똑같걸랑.
“이론상, 이 장치를 사용한다면 별의 자손들이 사용하는 워프 마법을 봉쇄할 수 있습니다. 좁은 범위에 효과를 한정한다면 완전히 가두는 것마저 가능하죠.”
“좌표를 슬쩍 끌어당겨서 격리 차원에 던져넣는 겁니다.”
이 점은 자재신 리베르타스의 권능을 쓰는 헤니르라도 얄짤 없다.
저 유물이 카네쉬 전역(全域)을 통짜 차원벽에 가뒀는데, 그걸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만리장성을 큐브로 만들어서 안에 불도저를 가둬놓는 느낌이지 않을까.
신들의 가호 없이 신의 경지에 손을 뻗던 나라, 히타이트의 유산이다.
성능을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정말로 적을 놓치거나 실패할 가능성은 없소?
적의 게릴라 부대가 능력껏 탈출하지는 않을까. 그런 의문에도 키아라는 답했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기술력이 호각이면 마나 싸움이 됩니다.
─수도를 지키는 데 투자한 아군의 저력이 적의 탈출도 저지하지 못할 정도라면, 저희는 맞서 싸우기보단 항복을 고려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요약하자면 튀는 새끼도 못 잡을 정도면 싸우질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
그리고 트집을 위한 트집은 관두라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거기서 ‘아, 우리는 개좆밥이니까 그 말이 맞읍니다’ 하고 대답할 사람은 없기 마련이었기에, 지금은 전력을 분배할 곳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거기에는 쉴새없이 사륵사륵 쏟아져내리는 모래시계도 한 몫 했겠고.
그렇게 장치가 설치되는 중에 키아라가 말했다.
“남은 문제는…… 저희의 ‘다음 적’이 누구이며, 또 얼마나 강하고, 어디 있는가죠.”
눈짓을 하는 건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난 간략하게 전할 만한 내용만을 전했고, 텔레파시를 들은 키아라는 뺨을 긁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위험천만한 강적들이 즐비해 있다니, 새삼 제 견문이 짧다는 걸 느낍니다. 마스터 클래스의 외적은 키타이의 드래곤들이나 서식처가 알려진 초월종 몬스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요.”
“이 기회에 그 초월종 몬스터들과 돌발 미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거 참, 듣는 모험가의 가슴이 절로 뛰는 소식입니다.”
약간 싸움에 미친 또라이 같은 대답이었는데, 뭐 무섭고 쫄리니까 도망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는 나은가. 좋게 좋게 생각하자.
〈후보지의 선정이 끝났소.〉
─팔락.
지금도 각지에서 올라오는 파발과 전서구, 보고 내용을 정리한 서류가 책상에 올라왔다. 마법으로 써내려간지 얼마 안 되서 잉크가 덜 마른 종이를 샅샅이 살폈다.
〈남부의 이칠리아. 서부의 에우피우스와 히에스파니아. 북부의 아퀼티오라.〉
어르신은 6개의 격전지를 차차 읊어내렸다.
격전이 예상되는 지역…… 즉, 위험한 몬스터가 둥지를 튼 토지다.
일반 병사로 토벌하려면 막심한 피해를 일으킬 몬스터들!
예전에 나르메르-나일에서 길다트랑 사이 좋게 썰어넘겼던 거대 전갈 같은 놈들 있잖은가. 그런 녀석들이 튀어나올 거라고 예상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동부의 아우렐리우스 령과, 구(舊) 아르마슈나스 령.〉
구(舊) 아르마슈나스 령.
초대 원로원 의원, 다시 말해 로마니아의 건국 시조급 인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토지. 한때 아르마슈나스 가문이 통치하던 영토였다.
〈그리고 현재는 성새도시 아즈위시아로 불리는 영지. 이상, 여섯 지역이오.〉
그는 뜸을 들이며 말을 멈췄지만 티르시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천검제후께서는……〉
〈물론, 제 영지의 최전선으로 갑니다.〉
〈당연하겠지. 남은 건 총 다섯 곳이 문제겠소.〉
분위기가 조금 침체된 이유는 국력의 약화가 그 정도로 뼈 아프기 때문일 것이었다.
〈귀족들의 협력이 있다 쳐도, 수도의 방비마저 고려하면 배치는……〉
〈외국의 협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오. 이겨도 나라가 기울 터이니……〉
〈속단은 이르오. 몬스터가 국경을 구분하지는 않으니, 물자 지원 정도는──〉
얕은 불로 지지는 것처럼 시간이 드는 회의다. 하지만 급하다고 이걸 생략하고 꼴박했다간 이길 싸움도 지고 말 것이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
〈……키아라 콜리도 연합총장. 이 미증유의 대재앙을 앞두고, 우리가 그대들 모험가 길드의 조력을 바랄 수 있겠소?〉
〈저희의 본부도 서부 에우피우스에 있습니다. 참전 의사를 가진 길드원들도 있겠죠.〉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와도 키아라는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을 뿐이다.
〈구차하게 말로 전해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저 역시 참전합니다.〉
〈후의에 감사드리오.〉
음울한 표정으로 미소지을 뿐인 키아라.
맨입으로 퉁 치지나 말라는 뜻 같았다.
─빙글.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한테 눈길이 왔다. 나는 팔짱을 풀고 앉은 채로 말했다.
〈이는 나라와 인종의 차이를 넘는 문제입니다. 저 역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만은 없겠죠. 이건 브리타니아의 귀족 울프헤딘이 아닌, 저라는 개인의 대답입니다.〉
〈……고맙소. 염치 불구하고 손을 빌리겠소.〉
각 지방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던 의원은 숙인 고개를 들며 질문했다.
〈싸움에 앞서, 원하는 곳은 있소?〉
도움을 받는 저들이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떼를 쓰는 짓을 좀 고아하게 벌이는 게 외교의 자리라지만, 내가 한 발 앞서 선수를 쳤잖은가?
참전은 나 개인의 대답이라고 말이다.
엘리자베트랑 느그 깡패 창쟁이 울씨 내놔라~ 하며 상의한 건 아니란 말씀.
내가 손을 뗀다고 인류 좆망을 꿈꾸는 헤니르가 멈출 리도 없으니, 양보는 받아냈다.
〈최전방으로 가죠. 피한다고 해결되는 전쟁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 양보에 ‘격전지’라는 웃돈을 얹어두면 그만큼 값을 더 받아낼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손에 묻는 잉크를 종이에 문지르며 화색이 된 의원들에게 선언했다.
〈아즈위시아로 갑니다.〉
아르마슈나스의 옛 영지.
티르시가 태어난 땅으로 말이다.
***
“흐음. 결국 당연한 얘기를 하다 왔다는 거네.”
여관으로 돌아온 내 대답에 다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말했다.
프랑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앙증맞은 주먹을 휘둘렀다.
“헤니르는 노르를 숙적으로 보고 있는걸! 예지도 나왔구, 싸우는 건 당연해.”
그야 그렇다. 무대가 바뀌어도 결과는 변함없다.
헤니르는 아내들이랑 알콩달콩 사는 미래를 방해하는 적. 고로 쥬긴다. 크롸롸롸.
“으음. 그치만 이렇게나 요란스러워선 헤니르가 어디 있는지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 점만은 걱정된다는 듯 라리루라는 턱에 손가락을 짚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니, 있어.”
그럴 만한 걱정에도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헤니르 새끼의 목적을 생각해 봐. 상식적으로 미스릴 클래스의 신생 신족 부대를 수만 마리 씩 꾸린다고 인간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내가 말하는 것도 조금 그렇다만…… 가능하지 않겠느냐?”
그 신족의 일원인 베로니카가 대답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식이 너무 무식해. 힘으로 몰아붙일 거라면 이미 바이츠니아나 게르마니아처럼 내가 예지하기 힘든, 나랑 인연이 적은 인간 국가의 수도에 유성우가 내렸을 걸.”
“앗, 그렇네요. 으으, 무서운 얘기에요……”
강해진 만큼 실감이 가는 것일까. 오한이 들자 팔뚝을 쓰다듬는 라리루라였다.
평소처럼 살고 있는데 하늘에 튀어나온 귀쟁이 새끼가 메테오를 풀 오토로 탄창이 바닥날 때까지 쏘고 튄다니? 니미럴 재난영화도 플롯이 그따위면 손익분기점도 못 넘을 걸.
근데 현실은 드라마보다 개연성을 좆 박은 법. 실제로 벌어질 법한 수작이었다.
빤….
뭔가를 떠올린 네페르티티가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노르드. 그런 일이 없도록 별의 자손의 존재를 공표했어?”
“맞아요. 예지가 닿는 범위를 늘려놨던 거죠.”
누가 벌인 일인지 확실하게 확정지을 수 있다면 그 방향성은 확실해진다.
결과적으로 로마니아, 브리타니아, 우리 가족 중 어느 한 곳으로 들이닥치겠지.
그럼 당연히 내 눈에도 ‘나라와 자산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우리의 멱살을 잡고 추궁하는 미래’ 등등이 비췄을 것이다. 예지가 가능해진다는 거다.
“머리가 좋은 놈은 오히려 예상하기도 쉬워. 눈 딱 감고 미친 짓을 하진 못하거든.”
간단명료한 언플로 헤니르가 낼 수 있는 카드를 빼앗을 수 있다는 말씀.
메달 속 아이템을 살피던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문제의 중점은 헤니르 새끼의 대갈통 속 발상이 아니라, 권능 쪽이야.”
“그 새끼의 권능? 영감을 얻는 능력이 왜?”
“누나. 뛰어난 아이디어라는 건 말이야. 예상을 초월하는 발상을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봤지만, 그 모습을 중력과 연관짓지는 못했다.
나는 닌텐도를 하며 자란 세대였지만, 그 터치 패널을 스마트폰이나 키오스크에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실물이 나올 때까지 말이다.
“내가 예지를 통해서 보통은 알지 못할 정보를 알아내는 것처럼, 그놈의 발상과 착안점은 우리의 짐작을 웃돌 거야. 아무튼 오딘도 의견을 구했던 고능아 새끼라며?”
말없이 있던 로키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쌈박한 아이디어 공모전은 헤니르의 특기이며, 나와바리다.
적의 나와바리에서 붙으면 불리한 게 당연하다.
검도 사범도 무기 없이 유도 시합을 하면 먼지 나게 처맞을 거고, 유도 국가 대표도 맨손으로 죽도를 막았다간 팔뚝이 꺾일 거라고.
“부아가 치미지만 진짜 목적은 예상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봐야겠지. ‘우리가 막지 못할 계획’을 떠올리는 권능이야. 머리를 쥐어짜봤자 시간낭비 아니겠어?”
내가 키아라처럼 드래곤으로 변신하지 못한다고 빼액댄다고 용의 전사가 되는 건 아니고, 우신의 무적 권능이 사기라고 투덜대봤자 무적의 근육을 얻게 될 일은 없다.
헤니르의 권능은 전략이란 점에서 나를 웃돈다.
아마도 내 적들은 ‘예지능력 시발 좆같네’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적들의 권능에는 물을 먹을 수밖에.
단지, 나 역시 그놈을 웃도는 능력을 몇 개인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엘리트 드루이드의 진가를 보여줄 때가 왔군.”
우리의 승산은 나의, 울프헤딘의 권능에 있다.
기책의 권능과 예지의 권능의 싸움.
그 접전은 이제 막 전초전에 들어간 것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