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77화 (875/1,009)

─철퍽!

시체 2구가 늪지대의 축축한 지면을 뒹굴었다.

“……이게, 무슨?”

혼자만 살아남은 신족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1합도 나누지 못하고 허무하리만치 죽어버렸던 그들은 새로 태어난 신족들 중에서는 가장 빼어난 전투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방만하게도 인간의 몸으로 신의 경지에 올랐다 자찬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상대로도 충분히 이길 공산이 있었다. 다름 아닌 신군 자신의 평가였다.

육체적, 마법적 능력 외에는 특출난 게 없긴 했지만, 셋이서 이 늪지에 500년 이상 숨어 살던 초월종 슬라임을 몇 시간 만에 해치울 정도는 됐다.

진짜 힘을 드러내면 울프헤딘을 상대로도 지지 않는다.

최소한 그들 자신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랬던 녀석들이…… 스치지도 못하고 죽었다?’

도발에 순간적으로 냉정을 잃고, 첫 수에 몸을 붙잡혔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육참골단을 감행했다. 거기까지는 안다.

─툭, 툭.

하지만 정작 그 결사적인 공격으로 그들을 유인했던 노르드는 옷에 튄 피 몇 방울이 전부였다는 것처럼 무사태평할 따름이라니?

‘고작 이 며칠 사이에 더 강해졌다는 말이냐?’

헤니르의 예상이 빗나갔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결론은 우연히도 정답을 찔렀다.

‘신군께서 마지막으로 본 그때보다, 더?’

인간 주제에 저만한 경지에 오르고도, 아직까지 성장할 여지가 남았다고?

“……괴물 같은 놈. 옛 지배자들이라는 족속도 네놈보다는 멀쩡한 괴물일 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도 안도하지 못하고, 나방 날개의 신족 플롬베르크는 전율했다.

‘쓰벌, 뭐였지?’

단지, 그 혐외(嫌畏)의 대상인 노르드도 마냥 속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승리의 감각을 떠올리는 그는 직감적으로 펼친 직전의 권능을 되새겼다.

‘시간이 느려졌어.’

오감의 증폭만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런 효과도 있었지만, 저건 예지의 힘이다.

‘미래를 보는 권능으로 시간을 느리게 할 수도 있나? ……아니, 있겠군.’

잠잠해진 분위기에서 생각을 정리한 그는 눈과 두뇌로 분석을 끝마쳤다.

“싸워볼 만한 적이 없어졌어.”

네페르티티는 들었던 채찍을 다시 내렸다.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다.

생각을 멈춘 노르드는 주먹을 쥐었다.

“그거 죄송하네요. 아무튼 하던 것부터 끝내죠.”

목 없는 시체의 옷이 축축한 늪지에 물드는 걸 일별하며 노르드는 손을 뻗었다. 작업 중 하나를 마무리했을 뿐인데 멈출 이유가 없었다.

내면에서 힘을 쥐어짜내며, 체화한 번개를 뿜어낸다.

〈정화의 벼락불(Fulmen Purgationis)〉.

쿠오오오오─!!

성뢰신의 권능이 마나를 삼키고 그 대가로 번갯불을 쏘아냈다.

물론 그가 노리는 건 하나 남은 신족이 아니다. 창술 한 휘두름에 죽을 적에게 〈정화의 벼락불〉을 쏘다니, 오버 킬에도 정도가 있다.

─퍼엉!!!!

뇌격에 맞아 폭발한 건 세계수의 뿌리였다.

“아니?!”

플롬베르크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말이 세계수의 뿌리지, 저 거목은 거신 이미르의 시체로 만든 복합 차원의 연결고리였다. 명계나 현계를 비롯한 차원들을 지탱하는 힘 말이다.

그런 세계수의 뿌리를 불태우다니?

중력이나 작용 반작용의 법칙 자체를 소각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물론 노르드의 기술 중에서도 세계수의 뿌리를 불태울 만한 것은 〈정화의 벼락불〉 뿐이었지만, 플롬베르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해도 바뀔 건 없었으리라.

연기를 뿜는 손을 쥐며 노르드는 뿌리가 불타는 과정을 눈여겨 보았다.

‘기껏 태웠으니 반응이 있으면 하는데……’

─쨍강!!

아니나 다를까, 뿌리가 소멸하자 예지의 파편이 눈앞을 스치며 부서졌다.

헤니르가 수만 마리의 신족을 탄생시키던 미래. 그 운명이 비틀려서 소멸한 것이다.

후─. 노르드는 손바닥에서 피는 연기를 불었다.

“역시 신족 양산공장은 세계수의 뿌리랑 관계가 있었군.”

모르긴 몰라도 예지에서 본 뿌리들은 문드러져 있지 않았던가.

당장 엘프의 고향, 명계에서 본 알프헤임에서도 에너지를 추출해서 작은 세계수를 기르고 있었다. 경험에서 내린 타당한 추측이다.

“……아니,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플롬베르크는 저절로 허리 뒤의 주머니에 손을 뻗으면서 악을 썼다.

“【윌리투스】는 아직 풀리지 않았을 터! 네가 뿜은 번개는 인공신좌의 권능일 텐데!”

“디스펠 맞았는데 어떻게 썼냐고? 당연히 내가 체화했으니까 그렇지.”

“뭐?”

“신좌에서 뽑아낸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깨우친 마법이라고.”

베로니카의 마법은 권능을 추출하는 걸 도왔을 뿐이다.

권능의 구조, 액기스를 뽑아내서 자신의 마나로 재현하는 것이다. 【윌리투스】 마법이라도 그걸 방해할 건덕지가 있으랴.

“느그들 신이 디스펠 갈기는 꼴을 뻔히 봤는데, 아무렴 기껏 얻은 신 기술에 그 정도의 보험도 안 들어뒀을까.”

오딘의 눈만 있으면 못할 건 없다.

물론 누워서 떡 먹기라고 하기엔 조금 지난하긴 했지만 말이다.

‘누워서 캡사이신 마시기 정도.’

무척 곤란한 일이지만, 친위대장을 해치웠을 때 이미 해냈던 일이다.

다시 한 번 사용하는 데 곤란해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니들이 쓰던 그 망할 마법도 이제 제 겁니다.”

쌔빌까? 그래, 해 버려 브류나크.

노르드는 픽 웃곤 브류나크에게 죽은 신족들의 마나를 흡수하게 시켰다.

─슈와아아아아악!! 적지 않은 마나가 노르드의 손아귀로 빨려들어갔다.

“음~ 상등품 구신의 마나. 쐬주처럼 K-소울에 딱 맞는군.”

─꺼-억. 까-악.

“으, 디러. 그래도 역시 아는 맛이 제일이지?”

브류나크와 깔깔대던 그는 방금 전까지 웃던 게 거짓말처럼 싸늘하게 물었다.

“우리는 대충 볼 장 다 봤는데, 너도 뭐 더 할 거 남았냐?”

“……크. 크흐흐. 크흐흐흐. 할 게 남았냐고?”

어깨를 떨구고 숙인 고개를 떨던 플롬베르크는 안광을 시퍼렇게 빛냈다.

“그래, 좋고 말고!!! 네놈의 그 힘, 신대의 이적(異蹟)에도 통할지 시험해 보──”

─서걱!

고개를 쳐든 플롬베르크가 허리춤에서 다 타서 눌러붙은 장작 같은 것을 꺼내들었을 때였다. 한 줄기의 극광이 번쩍이며 그의 팔이 떨어져나갔다.

“끄아악?!”

“말하는 중에 미안. 그치만 봐 줄 이유가 없는걸.”

골렘의 팔로 대검을 던진 프랑이 말했다. 늪의 냄새가 역한지 코를 찡그리는 그녀.

마나와 오러를 최대한 불어넣은 공격은 전투에 특화한 신족의 팔을 잘랐다.

플롬베르크가 마법사라는 것과, 마나량의 많고 적음이 근력을 결정짓는 골렘 마법의 특성이 낳은 공방의 차이였다.

“크, 크흐흐흐…… 아주 무자비하시군.”

생물로서 이질적인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일까. 플롬베르크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죽여도 죽는 것 같지 않은 괴물들을 하도 많이 봤던 탓일까. 노르드는 그 생동감 넘치는 반응에 친근감마저 느꼈다.

“신이란 이름이 울겠군……. 신군을 뵐 염치가 없겠어…….”

“여기 계신 태초신께선 인간에게 엿 먹는 신도 많았다고 하시던데?”

“그래, 그렇겠지……. 월등한 상위존재라고 필히 자신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보다 강인할 거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니 말이야…….”

착잡한 표정의 로키를 눈치챈 플롬베르크는 그 얼굴에 냉소를 띄웠다.

“지당한 일이지. 신을 초월하는 인간도 있으니, 반대로…… 같은 신들마저 우러러 볼 만큼 강대한 신들도 존재하는 법 아니겠나.”

쏟아지는 피를 보며 플롬베르크는 큭큭거렸다.

이 늪지대의 터주였던 몬스터도, 슬라임 따위에 불과하면서 권능을 발현하고 있었다. 타고 나기를 천애의 강자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 그마저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다.

지성도 거의 갖추지 못한 미물 주제에, 신들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정작 신세계의 신족이라고 떠들던 그는 이 무슨 추태라는 말인가.

“아스 신 로키. 당신이라면 알 것이오. 신들조차 신이라 섬기던 존재들을! 신군의 의매였던 오딘과 같은 주신들이 그러했고, 뇌신 토르가 그러했듯!! 옛 지배자들 중에서도 특히 초월자였던 이들을!!”

웃음을 분노로 바꾸며 플롬베르크는 고함쳤다.

“힘이오!! 오직 강함만이 모든 계급과 위계마저 초월하는 신성의 증명일진저!!!!”

휘오오오오……!! 바람을 휘감은 그는 주문없이 마법을 장전하며 달려들었다.

“옛 지배자들마저 신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 우둔한 아버지, 이미르가 낳은 원초의 요툰들!! 그 괴물을 태초신들은 ‘외신(Outer God)’이라고 불렀다지!!”

“역사 얘기는 좋아하지만, TMI는 사양인데.”

일행을 밀쳐내는 바람을 도리어 때려부수면서, 노르드는 창을 휘둘렀다.

“얼른 뒤져주면 고맙겠어. 궁금한 건 네 영혼을 불러서 물어볼 테니까!”

─슈칵!!

다른 둘처럼 숨을 고르고 부딪힌 게 아닌 터라 노르드가 받아치듯 가한 공격은 플롬베르크의 팔 뼈를 깊게 베어내는 데 그쳤다.

“신군의 자손인 내가 이깟 상처 정도로 죽을 것 같으냐!!”

“……쯧, 까비.”

─텅!!

아까처럼 권능을 일깨워보려 한 그였지만, 즉시 집중을 방해하려는 듯 날카로운 바람이 아내들을 노렸다. 베로니카와 로키를 지킨 그가 혀를 찼다.

‘공격이 좀 가벼운데.’

마나와 생명력을 깎아서 미친 듯이 종횡무진을 해대는 적.

하지만 정작 그 공격에는 살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저 미치광이가 불살을 꿈꾸게 됐다는 것도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결국 이 공격 자체가 속임수라는 뜻 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 얘기는 나보다 헤니르한테 듣지 그래! 애 키우는 게 내 특기이긴 하지만!”

“하하하하!!! 그렇지!! 강대하지 못한 당신은 태초신의 수치요!! 그러나 그밖의 태초신들은 강함도 위엄도 무척이나 외경할 만 하지!!”

환상을 뿌리며 소리치는 로키에게 플롬베르크는 광소로 대답했다.

“허나 이미르를 죽이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이 들었소?! 그 옛날의 요툰 전쟁── ‘외신 전쟁’에서 오딘과 라, 우라누스 등과 동격의 태초신들을 몇 명이나 잃었소?!”

촤르르르르─!!

날개의 인분과 피가 바람에 섞여서 형형색색의 질풍을 피워냈다.

공방일체의 바람에 올라탄 플롬베르크는 짧은 〈공간 이동〉으로 늪지를 누볐다.

“따라서, 태초신 로키여!! 나는 두려운 것이오!! 두려워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오!!”

아내들에게 공격을 맡긴 노르드는 적의 동작을 살피며 그 넋두리를 들었다.

“외신을 물리친 태초신들마저도 파멸시켰던, 옛 지배자들의 제왕이!! 그 제왕들 중에서 오직 하나,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심해의 군주’의 힘이!!

그러니 신군께서는 기필코 만신의 위에 군림하셔야만 하는 것이오!! 혼돈의 총아들을 몰아내고 이 세상을 지켜낼 절대자로서!!”

포효를 노이즈처럼 흘러넘기며 전황을 살핀다.

적의 노림수를 파악한 노르드는 1초도 안 되는 고민 후, 벼락을 불러일으켰다.

─쿠오오오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뇌정. 다름 아닌 〈정화의 번갯불〉이었다.

‘동료들의 시체로부터 우릴 밀쳐내고 있어.’

노르드는 적들의 목적이 죽은 몬스터의 영혼을 회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부족한 동력과 제물을 뒤진 신족들로 대신하려 하는 거다.’

오버 킬이 분명한 공격이지만,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그 목적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굳이 마나량을 아끼며 방치할 문제는 아니라는 걸.

‘마나 소모는 뒷전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렇게 노르드가 성뢰신의 벼락불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ᛈᚺ:ᛝᛚᚢᛁ: ᛗᚷᛚᚹ:ᚾᚨᚠᚺ: ᚲᚦᚢᚷᚺᚨ: ᚠᛟᛗᚨᛚᚺᚨᚢᛏ ᚾ:ᚷᚺᚨ-ᚷᚺᚨᚨ: ᚾᚨᚠ:ᛚᚦᚨᚷᚾ: ᛁᚨ!! ᛁᚨ!! ᚲᚦᚢᚷᚺᚨ!!!】

사방에 피를 뿌려둔 플롬베르크가, 큰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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