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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78화 (876/1,009)

“……헤니르, 이 망할 자식이 진짜!!”

기도문이 찬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깨닫자, 로키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싹. 등골에 차가운 송곳이 꽂힌 듯한 오한.

죽어가는 몸으로 별의 자손과 혼자 대치했을 때 이상의 전율이 그녀를 엄습했다.

손과 발로부터 혈액의 흐름이 멈추는 것만 같은 감각은 태초의 여신에게 잊은지 오래였던 감정을 여실히 불러일으켰다.

그 감정은, 틀림없는 공포였다.

“노르드!!!!!!”

“말 안 해도 알아!”

굳이 지시받을 것도 없이, 그는 답을 깨우쳤다. 노르드는 창을 던지듯 떨어진 팔을 겨냥했다. 저 주술은 시전자를 죽인다고 해제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같은 주문을 또 외우던 플롬베르크가 포효했다.

【──ᛁᚨ!! ᛁᚨ!! ᚲᚦᚢᚷᚺᚨ!! 케품르니르!! 막아라!!】

푸확─!! 늪지에서 해일처럼 물보라가 일었다.

노르드는 무시했다. 【게르튀르】의 공격기 제 3품새. 투창 자세로 던진 벼락불은 초월종 몬스터의 몸을 관통하고 잘려나간 신족의 팔에 꽂혔다.

그 손은 뇌격에 증발하고, 장작 파편만 남아서 늪지를 증발시키며 타올랐다.

쿠오오오오오──!!!!

하지만 장작은 소멸하지 않았다.

“……무슨 씨팔?!”

신의 권능을 구현화한 벼락불에도 불구하고, 그 파편은 열에 버텼다. 마치 어떤 작열도 저 장작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견딘 것이었다.

─꿀렁.

죽은 영혼과 혈육이 늪으로 모여든다.

늪지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조난자와 몬스터를 포식해왔던 슬라임의 힘. 벼락불에 소멸한 늪지의 터주, 슬라임 케품르니르의 권능이었다.

플롬베르크에게 조종당하는 슬라임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역할을 완수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닥……!!!!

다 꺼진 장작불에 억지로 불을 붙이려는 것처럼 붉게 타오르는 나뭇가지의 파편.

어디선가 본 듯한 색감에 노르드는 떠올렸다.

바이콘들의 성지, 정원섬을 위도에 안 어울리는 열대기후로 만들었던 용암지대.

그 열기의 근원지는 신대에 부러져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식지 않았던, 어느 가지의 파편이었던 것을.

신들의 종말이 도래한 날 그 가지를 휘둘렀다던 존재의 이름을.

【ᛈᚺ:ᛝᛚᚢᛁ: ᛗᚷᛚᚹ:ᚾᚨᚠᚺ: ᚲᚦᚢᚷᚺᚨ: ᚠᛟᛗᚨᛚᚺᚨᚢᛏ ᚾ:ᚷᚺᚨ-ᚷᚺᚨᚨ: ᚾᚨᚠ:ᛚᚦᚨᚷᚾ: ᛁᚨ!! ᛁᚨ!! ᚲᚦᚢᚷᚺᚨ!!】

─콰드드득!!

3번째 주문을 외운 플롬베르크의 몸통을 골렘의 대검과 채찍이 베고, 부쉈다.

신족의 몸통이 토막나서 나뒹굴고, 그가 불러낸 바람이 사그라진다.

하지만 그 적막이 폭풍전야의 적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온데간데 없고, 달조차도 없는 별하늘이 가득하다.

그리고, 섶나무 나무들의 가지 끝에 매달린 듯 외롭게 빛나는 으뜸별이 하나.

“……저 위치에, 별자리는 없었을 터인데.”

베로니카는 본 적 없는 항성의 모습에 당혹했을 때였다.

붉은 눈동자처럼 보이던 항성은 인간이 생각한 원근감이라는 개념을, 그 얄팍한 지성을 우롱하는 것처럼 삽시간에 부풀어올랐다.

지면이 한여름철의 아스팔트처럼 달궈지고, 확 열린 모공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빠져나온 수분기가 빠르게도 증발하면서 새하얀 소금기를 남겼다. 사막보다 높은 열이 오븐 속에 갇힌 반죽이 된 것만 같다.

“같은, 신들 사이에서도. 힘의 격차는, 있는 법.”

몸통 일부와 목만 남은 플롬베르크가 죽어가듯 속삭였다.

“외신들에게 필적했다는 옛 지배자의 재림이다. 비록 죽어 없어진 영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지만, 내 목숨 정도는 싼…… 값……?”

그렇게 뇌까리던 그는 점차 말을 잃었다.

포말하우트 항성이 그를 보고 있었다.

…후두둑.

푸르르던 섶나무들이 고사(枯死)하며 이파리를 떨어트렸다.

“화, 화, 화화, 화염의…… 화염의 거, 거인……!”

별빛의 시선을 받은 플롬베르크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자신이 불러낸 존재인데도 플롬베르크의 정신이 공포심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나무들처럼 말라죽어가는 그는 눈 깜짝할 새 늙어갔다.

【■■■■■■■■■■──!!!!!!!】

눈썹부터 머리카락까지 모든 털이 빠졌다. 겁에 질린 얼굴은 도끼에 패인 듯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자기 눈을 뭉개버리고 싶은 것처럼 펄떡거렸으나, 팔은 모두 잘려나간 뒤였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네페르티티는 말라붙은 신족의 목덜미를 붙잡아들고 물었다.

“뭘 불러낸 거야? 대답해!!”

“오, 오오, 오오오오!!! 오신다!! 모든 불꽃 정령들의 왕께서! 재액의 검은 자께서 강림하신다!!”

제대로 되먹지 않은 대답에 네페르티티는 눈을 찌푸렸다.

미쳐버린 광인의 전형적인 모습. 흑마법사들과 오랜 기간 싸웠던 그녀에게도 익숙한 증세였지만 이래서는 대답을 들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결과에 변함은 없다.

혹시라도 불러낸 것이 ‘생전’의 그 존재였다면, 플롬베르크는 주문을 다 외웠던 시점에서 공포로 자해하며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랐으니까.

어떻게 고결한 정신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고결한 정신력이 작열에 타죽지 않을 힘을 선사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

추락하는 별을 본 로키는 망연하게 속삭였다.

“……수르트.”

별이 떨어진다. 지옥보다 무정한 불꽃을 품고서.

죽어가는 나방의 소원에 응한 별똥별.

하지만 별에 소원을 빌고자 하는 자는, 우선 그 열기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

수르트.

게르마니아 신화, 그러니까 내가 아는 북유럽의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존재.

불꽃 거인들의 수장이며 스스로도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인이라는 그 수르트는, 라그나로크가 오는 날 세상을 불태워서 파괴시킨다는 존재였다.

레바테인이라는 이름의 불타는 가지를 휘두르는 불꽃 거인.

신들의 파멸이 형상화된 파멸의 화신이다.

그리고 이세계의 진짜 역사에서 서리 거인이나 요툰이라는 것들은 빡대갈 잠만보 거신이 숨풍숨풍 낳아제낀 괴물들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수르트도 ‘심해의 군주’처럼 옛 지배자 중 하나라는 것일까.

저번에 들었던 태초의 요툰이 ‘외신’이라는 존나 위험한 존재라면, ‘심해의 군주’와 수르트는 이들 태초의 요툰에게도 버금가는 1티어 괴물들이다.

인간이 신들의 경지에 도달하고, 간혹 인간보다 못난 신도 있는 세상이다.

옛 지배자이면서 외신에 필적하는, 신을 초월한 신이 있을 법도 하겠지.

비유하자면 옛 지배자들 버전 토르다.

외신이나 태초신─주신─들보다 늦게, 부족하게 태어났는데도 힘은 1티어 신들 못지않게 강한 개 깡패 새끼들인 것이다.

그 왜, 꽤 있잖은가. 4성인데 5성보다 쎈 놈들. 딱 그거다.

‘그런데 왜 시발, 그 탈 4성 별똥별 새끼가 내 대가리 위에 떨어지냐고!!!’

아무리 나라도 추락하는 별의 위압감을 느끼고 태평할 수는 없었다.

저게 죽고 남은 수르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나는 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버프가 빠져나간 다른 일행은 절대로 못 버틸 텐데.

항성은 삽시간에 커지고, 열파(熱波)가 몰려든다.

나는 저 애미 터진 별이 멈춰줄 생각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이를 악물었다.

떠오르는 의문은 많지만, 지금은 전부 뒷전이다.

수르트의 불꽃은 장난이 아니었다. 저 멀리에서 몰려드는 열기만으로 눈알의 수분이 증발할 것만 같은데, 정면으로 맞았다간 우리 일가족은 그대로 증발할 것이었다.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

방금 전, 시간이 느려진 듯한 현상에서 깨우친 권능의 신지평을 열어야 했다.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팔──!!!!”

나는 뇌세포를 혹사하며 집중력을 쥐어짰다.

흐물…. 온 세상의 색감이 문드러지며 느려졌다. 그렇게 느려진 세계에서도 내 의식만은 평상 시와 같은 속도로 사고하며 움직였다.

‘……된다!’

나는 덮쳐드는 불꽃이 조금씩 느려져가는 것을 목도하며 대갈통을 과열시켰다.

그 찰나,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건 어떤 과학적 지식이다.

별빛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별들이 수천 년이나 전에 방출한 것이며,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들은 몇천 광년의 거리를 넘어서 도달한 것이라고.

나도 일단 이과이기는 했지만, 이런 수준 높고 배울 일 적은 분야에는 어두웠다.

상식적으로, 하늘의 별빛들이 수천 년간 우주를 건너서 지구로 날아든 과거의 산물이라는 얘기를 어떤 감성으로 이해해야 하냐 이거에요.

키이잉─!!

하지만, 예지의 권능을 깨우친 덕분이었을까.

어느샌가 나는 그 복잡기괴한 논증을 감각으로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 듯 했다.

입대 전 알바를 찾아다니던 무렵, 공단의 어떤 중계기 안테나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를 잡고 서서 실려오는 기자재를 옮기는 일이었다.

사람이라기보단 기계가 돼서, 순차적으로 오는 안테나 파츠를 옮기는 일.

시간의 흐름도 그랬다.

시간은 절대로 멈출 수 없는 컨베이어 벨트다.

하지만 그 규칙을 어그러트리는 존재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우리 같은 예언자다.

아무도 보지 못 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뒤쪽까지 눈길을 뻗는 존재들!

나는 언제, 어떤 ‘미래’가 실려오는지 미리 알아차리는 게 가능한 예언자였다. 신들도 손대지 못 하는 시간의 컨베이어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이었다.

‘권능을 발동해서, 미래를 본다!’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몇 번이고 계속!

─키잉!!!!

내 왼눈이 마나의 색으로 불타올랐다.

내 눈이 받아들이는 미래의 정보를 쌓고, 다시 쌓아서 100배 이상 증폭시켰다.

당연히 그렇게 했다간 뇌의 처리속도보다 많은 작업량── ‘시간’이 밀린다.

밀린 일을 처리하려면 야근을 해야 하는 가엾은 대학원생들처럼, 내 의식이 처리하는 미래의 정보량이 쌓이고 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다. 밀린 일을 처리하려면 일단 작업물이 더 늘어나는 것부터 막아야겠지.

즉, 컨베이어 벨트─시간─ 자체가 멈추게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 아라키 히로히코 선생은 말했다.

‘충분히 발달한 초고속 이동은 시간정지와 구별할 수 없다.’

단지 내 경우는 가속시키는 게 몸이 아니라 의식일 뿐.

나는 시간의 흐름보다 빠르게 속삭였다.

“【미래 퇴적】.”

─우뚝!!

세계의 시간과 함께, 수르트의 불꽃이 정지했다.

공간을 태우며 전달되는 불꽃도, 팽창하며 폭발까지 일으키는 공기층도, 포기한 것처럼 베로니카만이라도 감싸듯 몸을 던지는 로키도 멈췄다.

심적권청(心滴券聽)이라고 하던가.

달인들이 극한의 전투 속에서 찰나를 영원처럼 느끼게 된다는 순간.

나는 극도로 드높아진 집중력으로 체감 시간이 몇천 배로 늘어난다는 우발적인 현상을 권능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심적권청보다 더 강력하게!

굳이 문제를 꼽자면, 시간이 멈추면 당연히 내 몸도 멈춘다는 것.

‘시간정지물은 다 거짓말이야.’

네 이놈 SOD. 순진한 한국인들을 속였겠다. 너 이거 혐한이야.

하지만 나로서도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펼친 기술은 9초 한정의 단기 미래예지를 최대한 거듭하는 것으로,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량─체감 시간─만을 증폭시키는 변칙 사용법이니까.

‘의식은 멀쩡하지만 마나도 움직이질 않는군.’

존나 시발 콘솔 게임 중에 ESC를 눌러서 일시 정지를 시킨 것 같은 느낌이다.

권능의 일종이므로 체력도 깎이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이 시간 감속을 적당히 조절해서 가속의 룬을 더하면 사슴 뿔이랑 메기 수염을 참수했을 때처럼 엄청난 속도와 정밀성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수르트의 불꽃을 피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내들이 폭발 범위에 있는데 나만 도망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생각하곤 달라서 좀 좆 같지만, 뭐 상관없어.’

필요했던 건 머릴 굴릴 시간이었으니까.

왼눈이 형광색의 안광을 뿜는 걸 감지하면서 내 의식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이상해.’

의문은 끝이 없었고, 위화감은 너무나 강렬해서 굳이 언급할 것도 없을 정도다.

A4양면용지 10장으로도 부족할 의문점들!

가능한 짧게 요약하자면, 대충 이랬다.

‘개시빨 애미 뒤진 병신 권능.’

수르트의 재림 같은 미친 미래를, 왜 예지 못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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