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놀랐잖아!”
막 회귀했을 때의 내 비명에 기겁하며 주저앉은 프랑이 가슴을 붙잡고 외쳤다. 애 떨어질 뻔 했단 것처럼 찌릿 째려보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싸움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는데 실없는 장난에 당했다고 생각한 걸까. 살짝 울먹이는 그녀는 드물게도 내게 화를 다 내고 있었다.
요즘 자주 이러네. 여친 시절이 생각나서 약간 흐뭇하고 그런다.
“……음. 미안.”
그렇지만 왠지 농담을 뱉으려던 입이 잘 열리지 않아서, 나는 말없이 프랑의 뺨을 쓰다듬었다. 음. 이 보들보들한 감촉. 우리 프랑이 맞습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봐?”
“그냥.”
내 죽음을 눈앞에서 봤을 때의 눈동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푸른 눈망울은 반짝거리며 예쁘기만 했다.
그렇다면 됐다.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기엔 당장 내 지금 상황만도 코가 석자였으니까.
“울프헤딘?”
내가 몇 초 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걸 대충 눈치챈 듯 로키가 물었다.
“모여 봐. 할 말이 생겼어.”
“예지야?”
“그래.”
눈치 빠른 태초신에게 할 말이야 정해져 있다. 나는 대답했다.
“지금, 나는 미래에 와 있어.”
나는 이 유사 회귀능력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스킬명은 뭘로 할까? 【현재 회귀】?”
“……【시재회귀(時在回歸)】로 해. 뜻은 같지만 어감은 이쪽이 낫겠어.”
로키는 경악과 환희를 민초처럼 버무린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미치겠네. 아니, 진짜로 미쳐버리겠어! 헤니르, 그 개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수르트의 파편을 재림시킨 거고, 너는 또 무슨 권능을 깨우친 거람?!”
“나는 충분히 도전해 볼 만 하다고 본다.”
위기에서 각성하는 것은 어드밴스드 원숭이들의 종특이다. 이 강북호는 세상이 나를 억까할수록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남자지.
하지만 프랑의 얼굴은 지독하게도 굳어 있었다.
“프랑?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아는 노르라면 그 말 뒤에 ‘나 혼자 갔다 올게’라고 말할 테니까.”
이걸 눈치채네. 속마음을 훤히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구만요.
“혼자서 싸운다는 말이냐? 어째서…… 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굴던 베로니카는 살짝 늦게 내 사고방식을 떠올린 듯 했다.
“주인님. 아니, 나의 그대여.”
“네. 너의 그대입니다. 왜용?”
“설마 우리가 죽는 모습을 보기 싫으니까 혼자 싸우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그딴 소리를 하려 든다면 역지사지라는 말을 머리에 단단히 새겨주겠느니라.”
오만상을 쓰며 말하는 그녀는 ‘혼자 다니다 뒤지기까지 했던 쥬인님이 할 소리에요?’ 라고 따지는 것처럼 눈초리를 쳐들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로서도 할 말은 있다.
“단적으로 말할게. 저 새끼들의 디스펠 마법과 수르드의 개막 패턴이 우리 파티랑 상성이 더럽게 안 좋아. 못해도 처음 3번은 시작하자마자 전멸할 걸.”
수르트의 파편이 재림하면서 터지는 별의 불꽃!
어떻게 해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도 아직 확인 못 해 보지 않았나.
네페르티티의 얼굴에 적잖은 곤혹이 스쳤다.
“……수르트가 그렇게 강해?”
“강해. 생전의 50%만 돼도 이 골짜기는 통째로 용암지대가 될 거야.”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로키가 말했다.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라그나로크를 떠올리기라도 모양.
“그래. 좋으나 싫으나 나도 최소 10번, 20번은 재도전하게 될 거야. 그때마다 너희들이 끔찍하게 죽는 꼴을 보는 건 절대 사양이고.”
기분 문제가 아니다. 내 정신력의 문제다.
‘2~3트 쯤 되서 정줄 놓고 흑화할 게 뻔해.’
상반신이 치즈 퐁듀처럼 녹아내린 네페르티티의 시체라든지, 까맣게 타 죽는 프랑의 최후 같은 걸 리트할 때마다 보게 된다고?
그랬다가는 내 제정신 수치가 마하로 펌블이다. 광기…… 내 오랜 친구여…….
“……아니! 그래도 역시 믿기 어렵다!”
베로니카는 내게 미움을 사는 걸 각오하기라도 한 듯 말했다.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 짧은 설명만 듣고 그대를 원초의 요툰들과 필적했다는 옛 지배자의 반신에게 홀로 보낼 수는 없느니라!”
유무를 묻지 못하게 하는 단호한 태도였다.
하지만 아내들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에, 내 대답은 빨랐다.
“뭐, 어째 그럴 것 같더라. 그럼 시험해 볼래?”
“……시험해? 그대를 말이냐?”
“【시재회귀】의 성능을 말이야.”
나는 그녀와 나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네 머리 속으로만 뭔가 생각해 봐. 그럼 내가 미래를 되풀이해서 맞춰볼게.”
“……알겠느니라.”
얼굴을 굳힌 베로니카는 지팡이를 꼭 쥐고 고민하다가 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느니라. 맞춰보거라.”
“전혀 모르겠네. 틀린 셈 치고 알려주라.”
“……허?”
베로니카는 한순간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화가 치민 듯 눈을 치켜떴다.
“……그대여. 나는 그대의 목숨이 걸린 일로 농담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첫 판에는 당연히 틀리지. 그러니까 너희들이랑 같이 수르트 챌린지를 하기 싫은 거고.”
─톡톡. 나는 내 이마를 두들겼다.
“그치만 ‘다음 번’에는 분명 맞출 수 있을걸?”
“……아!”
눈이 화잔등만하게 커진 베로니카는 이내 내게 답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만약’이 끝난다.
─지지지직.
─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생각했느니라. 맞춰보거라.”
“‘최대한 생뚱맞은 생각을 해야 주인님이 답을 못 맞출 텐데’. 맞지?”
다시 【시재회귀】를 사용해서 처음부터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 뒤, 대답을 뱉었다.
베로니카는 입을 꾹 닫았다. 답은 저번 회차와 똑같았나 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췄느니라. 다만 고작 1번 정도로는 못 미덥구나.”
“동감이야. 몇 번이고 계속 해 보자고.”
돌 다리를 두드리는 실험은 매번 하던 일이다. 먼저 제안해줘서 기쁠 정도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만약’이 끝난다.
“──정답이다. 하지만 고작 1번 맞춘 정도로는 미덥지 않구나.”
“혹시라도 내가 어림짐작으로 때려맞추고 있는 거라면, 전혀 다른 생각을 2개 떠올려서 절대 못 맞추게 하겠다고? 우리 여신님도 참 지독하셔.”
‘만약’의 미래를 반복한다.
나는 베로니카에게 대답을 듣고, ‘미래를 되풀이해서’ 그녀의 문제를 맞춰나갔다.
“다음. 대답해 보거라. 내가 떠올린 ‘전혀 다른 2개의 생각’이란 각각 무엇인지.”
“하나는 수르트를 소환한 매개체는 레바테인의 조각으로 추측된다는 것. 둘은 헤니르는 그 소환 주문을 얻으려고 아멜리아가 죽어갈 때 나타났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
이 문답은 아내들에게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테스트에 가까워.’
나비효과가 얼만큼의 빈도로 발생하는지.
운명의 항상성(恒常性)이 얼만큼 강고한지.
그걸 알아야만, 나도 미래가 【시재회귀】대로 움직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다음. 맞춰보거라.”
그리고, 또 하나의 ‘만약’이 끝난다.
“수르트의 재림 시에 터져나오는 불꽃을 차원의 틈으로 숨어서 피할 수 있을까?”
“──다음. 맞춰보거라.”
“돌입 전에 몬스터들의 혼을 줄여두면 수르트는 약체화하지 않을까?”
“──다음. 맞춰보거라.”
“애초에 꼭 쓰러트릴 필요가 있나? 주인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 작전을 펼치면 그만둬주지 않을까? 해치울 필요는 있다고 보고, 눈물 작전은 통할 것 같으니까 관둬줄래?”
제압할 수 있는 변수는 해치우는 게 맞다.
‘헤니르도 내가 수르트를 정면 돌파할 거라고는 절대 예상 못할 테니까.’
하물며 쓰러트리는 걸로 놈의 능력을 일부라도 흡수하면 천칭은 내 쪽으로 크게 기운다. 상대의 원자폭탄을 막아내고 기술력만 빼가면 최고지.
원자폭탄을 쐈더니 적이 죽지도 않고 워킹-수소폭탄으로 진화한다?
헤니르 그 씹새가 얼마나 얼탱이 없겠어. 이건 못 참지.
“……다음. 맞춰보거라.”
“잘 모르겠는데스.”
알려주길 바라는데스. 다음 회차에서 써먹는데스!
나는 조바심 낼 것 없이 문답에 응했다.
그렇게 질문의 대답이 10번을 넘고, 내 회귀는 11트에 도달했다. 이쯤 되자 귀여운 억지를 부리던 베로니카도 기어이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팔짱을 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무녀가 되길 잘 한 것 같다고? 흐흐흐. 갑자기 생각하는 게 생뚱맞아져서 저번 회차에서는 한참 웃다 왔어. 그래. 예지 능력이 OP는 OP야.”
“……후우. 11개 문제, 전부 다 정답이다.”
베로니카는 체념했다. 실험도 이제 충분했다.
역시 이 권능은 아주 쓸만하다.
‘어지간히 색다른 접근을 하지 않는 한, 미래는 크게 변동하지 않아.’
한 번 확정된 질문과 대답은 내가 중간에 베로니카의 치마를 까뒤집거나, 네페르티티의 가슴팍에 코박죽을 감행하거나 해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오딘과 로키가 말하던 운명의 강제력이라는 걸 조금 실감한 기분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난수는 있겠지만, 오차범위다.
“그래서, 어때? 믿을 맘이 들었어?”
“……믿지 않을 수가 없군. 이걸로 총 몇 번째 회귀더냐?”
“11번. 아니, 처음 걸 포함하면 12번인가.”
“12번…… 왠지 말이 빠르다 싶었어.”
멍하니 중얼거린 건 네페르티티였다.
하긴, 6트째 쯤 되서부터 전반부의 설명이 점점 빨라지긴 했지. 스피드 런을 하는 기분이었는데 좀 성의가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믿어준 것 같네.”
팔짱을 푼 나는 미소를 띄고 파티를 돌아봤다.
신분도 출신도 다른 온갖 종족의 여인들은 나를 경외로운 대자연의 신비라도 보는 것처럼 보면서 굳어 있었다.
개구리 해부를 처음 해 보는 의대생 같군 그래.
잠시 낄낄대던 나는 웃던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좋아. 이제부터 진짜 첫 보스전 꼴박을 시작할 건데,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하자.”
“……지, 질문? 무, 무슨 질문 말이냐?”
“수르트 공략에 실패할 때마다 이 문답을 계속 반복하는 건 조금 시간 낭비거든. 어떻게 말하면 너희가 ‘중간 과정’에서 내 솔플을 인정해 줄까?”
수르트의 공격 패턴을 몸으로 때워가며 알아낼 중간 과정.
그 무한 리트 중에는 아내들에게 굳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10분 안팎의 꼴박 후에 회귀하면 리셋될 미래이니 말이다.
“어, 아, 음…… 그런 거라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때?”
아직도 얼떨떨한 듯한 프랑은 고민하다가 눈을 빛냈다.
“맹세의 룬으로, 절대로 죽는 일은 없을 거라구 약속해 줄래?”
“……그, 그래.”
내 미래예지는 알고 있을 테니, 그렇게만 하면 믿어주긴 하겠네.
일회용 설득에 쓰기에는 쫌 무거운 맹세였지만.
***
──문득, 동포들이 죽었다.
플롬베르크가 그 찰나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란 말을 듣는다면 그 외에 달리 적절한 묘사는 없을 것이었다.
빛이 번쩍이고, 자세를 취하고, 죽는다.
공간 마법의 빛을 감지하고, 뛰어난 반사신경을 뽐내며 즉각 움직였던 둘이 그렇게 죽고, 머리가 하얘진 그의 팔을 뇌광이 스쳐지나갔다.
“도입부 잡몹 컷.”
“……빌어먹을!!!!”
후퇴하며 거리를 벌리는 플롬베르크. 노르드는 세계수의 뿌리를 겨누다가 멈췄다.
“아, 생각해 보니까 저 뿌리는 굳이 안 태워도 되겠네.”
수르트가 나오면 세계수의 뿌리라고 멀쩡할 리 없다. 운명이 어찌 되건 소환만 강요하면 되겠지. 못해도 조금의 마나조차 아까운 초반 도전 중에는 말이다.
“죽어라, 울프헤딘!!”
전이를 가다듬은 플롬베르크가 폭풍을 뿜었다.
바람의 칼날이 섞인 폭풍은 노르드를 뒤덮고서 그의 목숨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예리한 공기의 단층은 삽시간에 노르드의 몸을 뒤덮었으나, 그 다음 찰나.
─촤아아악!!!
폭풍은 심지에서부터 십자 모양으로 베어졌다. 산산조각 난 바람의 건너편에서 노르드는 태연한 얼굴로 걸어나왔다.
“흠. 그, 뭐더라? 아, 그래.”
창을 휘둘러서 폭풍을 압축한 대마법을 파훼한 그는 생각해둔 대사를 버럭 외쳤다.
“네 이놈, 헤니르의 자손이여!! 네놈은 결코 수르트를 소환하지 못할 것이다!! 허리춤에 숨긴 레바테인의 조각을 꺼냈다간 과인이 경을 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