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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별은 바스라진 기억 속을 표류했다.
어떠한 의도로 벌이는 일은 아니다. 그, 어쩌면 그녀였을지도 모르는 별에게서 자아나 의식 같은 고등한 사고능력은 소멸한지 오래였다.
용암 바다에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침전물처럼, 붉은 별 자신을 닮은 권속들이나 그를 섬기는 저 고향 별의 존재들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전해받을 어떤 감정조차도 이미 남지 않았다.
모든 걸 불사르고 남은 것은, 그가 한때 자신이었다는 증거.
자아라는 이름의, 타고 남은 한 주먹의 재였다.
생각을 할 뇌수조차 불타 없어졌던 그는 불현듯 우주의 어느 곳에서 이름을 불렸다. 찬미를 받은 붉은 별은 옛 지배자의 이치에 따라, 세계수의 한 열매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마주치게 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교수 슬레이어입니다.”
표표한 살기를 녹색 눈동자에 불어넣은 사신은 정중하게 인사하고서 말했다.
“동료랑 재회한 회귀물 주인공 같은 기분이군. 목을 내밀어라. 멱을 따 주마.”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보며 자세를 취하는 작은 생명.
붉은 별은 동격의 초월자들마저 꺼리며, 피해다니는 파멸의 화신이다.
우주의 탄생 이후, 동격의 존재들에게도 이토록 당당한 적의를 받아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작디 작은 생명의 살의를 쐰 붉은 별, 수르트는 확실히 느꼈다.
자아의 잿더미 속 어딘가에서, 호승심과 흥미의 흔적이 문드러지며 피어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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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얼음 유성이 하늘을 날았다.
“싸움도 곧 막바지인데 갑자기 불려왔다고 생각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불꽃이 헤집고 지나간 늪지에 티르시의 마법이 날았다. 노르드에게 불려와서 사정을 들은 그녀는 그의 지시대로 수르트의 겨드랑이를 노렸다.
【──────!!】
공방을 나누던 수르트의 옆구리에 유효타.
마치 행동의 버릇마저 읽혀버린 듯한 악마 같은 타이밍이었지만, 그 사실로부터 어떤 진실을 연상할 지혜가 수르트의 파편에는 없었다.
답례를 하듯 불꽃 대검이 산탄을 흩뿌렸다.
사정거리에 들어간 대상은 라리루라와 다나. 두 사람은 기겁하며 몸을 지켰다.
“제일 편한 패턴이군.”
산탄을 예측하고 끼어든 노르드는 마법을 넓게 펼쳤다.
수르트의 권능, 진홍색 불꽃은 힘 대 힘으로는 막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권능이었다. 가능하다면 무술의 이치를 살려서 흘려넘기는 게 나았다.
그리고 100번을 넘는 싸움에서, 노르드는 그걸 실현할 방법을 한가득 마련했다.
“【엘든링】.”
링 모양으로 응축한 〈정화의 벼락불〉이 산탄 세례를 우아하게 흘러넘겼다.
최소한의 마나 소모로, 최대한의 효율을 보이는 초월적인 마법 솜씨였다.
〈정화의 벼락불〉은 수르트의 본체에는 통하지 않는다. 단지, 권능마저 불태우는 성뢰신의 권능은 비슷한 성질의 권능에 간섭하는 데 적합했다.
“핫 둘둘 핫 둘둘 셋! 핫 둘둘 핫 둘둘 셋!”
첫 웨이브를 흘려넘긴 노르드는 박자를 맞추는 노인처럼 마법을 연발했다.
100번의 거짓 죽음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노르드는 모니터 속의 게임을 파고드는 일부의 게이머들이 수백 번 죽고, 수천 시간을 투자하는 걸 잘 아는 현대 지구인이었다.
죽음이 아쉬움 외에 남길 게 없다면 거기 쏟을 노력이 왜 고통이겠는가?
지난 100번의 도전은 노르드의 초월적 감각과 반사신경으로 갈고 닦여, 철두철미한 솜씨로 적의 모든 공방을 봉쇄했다. 폭염을 뚫고 그가 외쳤다.
“엘든링! 엘든링! 엘든링! 엘든링! 엘든링!”
“더워! 뜨거워! 혹시 오늘 세상이 멸망하는 거 아니죠?! 종말의 한 장면 같은데요!”
현세에 강림한 불지옥 같은 불꽃. 악몽보다 더 두려운 신적 존재의 권능이 덮쳐오는 전쟁터에서 라리루라는 서둘러 차원벽을 펼쳤다.
─치링!! 투명한 격벽이 그녀의 가족을 지켰다.
혹시 모를 잔열마저 사전에 차단한 자신을 칭찬하듯 라리루라는 활짝 웃었다.
“저 지금 완전 멋지지 않았어요?! 다들 호감도에 가산점 부탁드려요♡!”
“그래, 성장했네! 시발, 나는 비명이 절로 목에 턱턱 걸리는데!”
“저는 비슷한 싸움을 하도 봐서 적응했어요!”
아니, 그래도 듣고 보면 그렇다. 우신을 토벌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지옥도에서 비명을 지르는 등 평범한 감수성이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다나의 대답에 라리루라는 자신의 놀라운 성장─아마도─에 애매하게 울상을 지었다.
“야, 망할 남편놈아!! 이거 진짜로 발퀴리에들은 부르면 안 돼?!”
“안 돼! 변수만 늘어나!”
다나가 외치자 노르드가 즉답했다. 그는 예지를 최대한 발휘하며 말했다.
“누나 역할은 버프 유지랑 섭딜이야! 믿는다!”
믿는다는 말에 그만 얼굴이 풀릴 뻔 한 다나는 서둘러서 긴장감을 긁어모았다.
이런 싸움에서 남편이 혼자 싸우려 들지 않기를 그렇게 바랐던 그녀들이다. 지옥 같은 광경이기는 했으나, 그래서 더 노르드에게 신뢰받는다는 실감 역시 솟는 것이었다.
“후, 후흐흐! 어쩔 수 없네! 죽지 않게 조심해!”
“참 쉬운 여자네요, 다나.”
“그게 매력 아니겠느냐?”
폭격처럼 대마법을 쏴대며 중얼거리는 티르시와 베로니카.
전투에 앞서 노르드가 늪지에 있던 신족들을 다 해치웠기에, 그녀들의 전력은 문제 없이 기능했다. 베로니카의 권능이 이때 가장 적절한 마법을 수십 가지나 형성했다.
이 작열지대에서 티르시의 권능은 도저히 지속 불가능했지만, 상관없다.
“얍!!!!”
다나의 가호를 받은 프랑은 골렘의 팔로 엄청난 질량의 금속 단검을 투척했다.
─콱콱콱!!!
예리한 칼날이 헤비하게 박혔다.
【──────!!!!】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새끼야!!”
거세게 날뛰는 수르트의 반격은 노르드가 전담 마크했다. 그가 모든 공격을 흘려버리는 동안, 1분 1초라도 빠르게 파티원들은 공격을 퍼부었다.
집중하는 그를 대신해서 전황을 살피던 로키가 소리쳤다.
“얘들아! 마법보단 물리적으로 패는 게 더 효과적인 모양이야!”
“프랑과 네페르티티의 서포트군요! 알았어요!”
“두 사람의 신체능력은 다나의 가호로 최대치를 찍었다! 우린 보조에 충실하자꾸나!”
전술은 보다 세련되게 바뀌고, 한층 빨라진다.
매섭게 공격하는 전사와 도적을 후방에서 온갖 수단으로 보조한다. 라리루라는 그녀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옮기거나 차원을 비틀었다.
“……불타는 채찍. 살짝 세련됐네.”
우신 가죽 채찍이 남은 열로 타오르는 걸 힘껏 뿌리치는 네페르티티.
가족들의 모든 도움이 자신과 프랑이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기대 받아버렸네.”
“그럼 응해줘야지!”
시선을 섞은 달인들은 좌우 양익을 도맡고 지칠 줄을 모르며 거인의 팔을 공격했다.
‘……슬슬 2페이즈군.’
패턴 하나의 빈틈 동안 순식간에 상황을 견적내면서, 노르드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수르트의 양팔에 누적된 데미지는 크다.
아니나 다를까, 불꽃 거인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잊었던 자아의 늪에서 생전의 힘과 기술을 더욱 퍼올렸다.
흐물거리던 대검이 나뭇가지처럼 굳어졌다.
공기마저 태우는 불꽃이 몸에 열기를 결속했다. 거대한 육체가 마치 그 크기만큼의 진공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난폭하게 공기를 빨아들인다.
“억까 패턴이 온다! 다들 내 뒤로 모여!”
마법사들의 전방에 착지한 노르드가 지시했다. 프랑과 네페르티티도 달려왔다.
수르트의 주 무기였던 레바테인은 없다.
노르드로 비유하자면 브류나크를 잃고, 오러의 창을 꺼내든 상태에 불과하다.
휘오오오오오─!!
하지만, 달인은 붓을 가리지 않고 불은 장작을 선별하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뒤로 당기는 수르트. 노르드의 거짓 죽음 중 30%를 차지하는 일검이 날아든다. 형체 없는 양팔에서 근육이 융기하는 듯 했다.
“1, 2, 3──”
한계까지 쥐어짠 예지가 몇 초 후 찾아올 불꽃 세례를 관측했다.
최대 9초 후의 미래까지 관측하는 단기 예지다. 잘려나간 필름처럼 단편적인 미래예지로 계속되는 예비 동작의 환상이 데자뷰처럼 노르드의 뉴런을 스친다.
수르트가 임계점에 도달한 불꽃을 내려쳤다.
이대로 지면을 두들기면 수천 개의 지뢰가 터진 것처럼 일대가 터져나가고, 협곡은 고름을 터트린 화상 흉터처럼 용암과 잿더미로 가득 찬다.
“──수르트하살법 받아치기.”
그리고 노르드는 그 흉맹한 내려찍기를 밑에서 받아쳤다.
폭발음. 작열. 섬광과 함께 날아가는 몸의 파편.
단단히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기행이 낳은 결과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
수르트의 양팔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감정도 자아도 없는 거인마저 몇 초간 충격과, 혼란으로 행동을 멈출 만한 기적.
“딜 타임이다!! 다들 조져버려!!”
몇 초도 안 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듯한 일갈! 미리 얘기를 들었음에도 순간 놀라서 경직되고 말았던 그녀들은 다급히 반격했다.
콰콰콰콰콰광─!!!!
노르드가 방어를 전담했던 5초 남짓한 시간. 그 동안 그녀들이 모았던 최대의 공격들이 팔을 잃은 수르트의 육체를 처참하게 두들겼다.
“이이제이는 선학의 지혜다, 불대갈 새끼야.”
최고의 순간에 카운터를 성공시킨 노르드는 씩 웃었다.
〈정화의 벼락불〉을 이용해서 공격을 흘려내는 법을 처음 깨우쳤을 때. 기이할 만큼 격렬해졌던 수르트의 공격에 위화감을 느낀 그는 그 카운터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탐구해서 깨닫고, 수십 번의 실험으로 한 가지 이론과 가설을 완성시켰다.
“너는 남한테 뒤진 게 아니라, 니 불과 권능에 타 죽은 거야.”
이 괴물로 하여금 그렇게 될 때까지 불을 뿜게 만들 이유가 있었다면?
라그나로크 때의 수르트가 자기 힘에 타 죽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올바르게 모든 걸 불사르는 불꽃이라면, 너도 예외는 아니어야 사리에 맞지.”
그래서 노르드는 생각하고, 실행했다.
수르트의 가장 큰 공격을 받아치고 반사하기로.
신대의 창술 【게르튀르】의 초식엔 적의 공격 에너지가 0가 되도록 상쇄하는 절기가 있다. 2번의 죽음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분석했던 권능의 형질을 연구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수르트의 권능을 반사하는 힘.
〈정화의 벼락불〉로 형성한 전자기장을 창술로 펼치는 기술!
【게르튀르 푸타르크】의 원리를 적용한 절기는 수르트가 가장 강렬한 불꽃을 뿜을 때를 노려서, 그 모든 열량을 당사자에게 반사시켰던 것이다.
“언제 쓰나 기다렸다, 씹놈아! 꼭 내가 기다리는 패턴은 빨리빨리 안 나와요, 씨빨!”
촤자자자자자자자자작─!!!!
급속접근한 노르드가 거인의 몸을 난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