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84화 (882/1,009)

***

‘……진짜로 수르트까지 잡아버렸네.’

여신(이라기보단 자신)의 환상을 펼친 이후부터 계속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정리하며 로키는 뭐라 말 못할 기분에 웃음을 지었다.

신들에게 운명이 점지한 ‘배역’은 피할 수 없는 본질이다.

ᚲᚦᚢᚷᚺᚨ── 그러니까, 수르트는 자신의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태초 이래의 신대를 끝장낼 파멸의 화신이라는 점이 더욱 주요했다.

그렇기에 저 불꽃 거인은 신들마저도 극복하지 못한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르트를 잡아버렸단 말이지.’

죽은 후의 파편이다. 더 이상 운명에 점지받지 못한 망령의 불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르트는 신 중의 신.

초월자 중의 초월자. 저 토르처럼 태초의 요툰, 태초의 신들에 버금가는 강자.

필멸자에게는 죽음의 권화나 다름이 없는 그를,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이겨냈다.

“베로니카. 이거 받아둬. 그 디스펠 마법의 술식이야.”

로키는 빠르게 글을 써내려가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구의 신 인류. 울프헤딘의 예언과 권능. 여러 신들의 안배를 손에 쥐었다지만, 노르드 외의 다른 누가 이만큼 잘 해낼 수 있을까.

예언조차 더는 의미를 이루지 못하는 이 시대.

잊혀지고, 가치를 잃어, 이제는 아는 이도 거의 없던 버려진 희망을 자신의 의지와 분투로 이뤄내고자 하는 인간을 달리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이미 첫 만남 때의 미숙함을 벗어던지고, 어떤 운명도 극복해 보일 듯한 후계자가 여기에 있다.

그가 자신의 의지로, 로키와 그녀의 언니가 못 이룬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준다.

신대의 망령인 로키에게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늙었네. 어린 녀석들의 청출어람에 분함보다 기쁨이 앞서는 걸 보면.’

먼 자손과, 손수 고른 신좌의 계승자가 운명의 영웅 곁에서 행복해지는 미래인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가, 그런 말은 전부 노인의 궤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슬슬 평생 실패만 저질러왔던 천방지축 여신은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을까.

몇 만 년을 존속한 신대의 잔해들에게 하나둘씩 종지부를 찍어가는 노르드를 보며 안심하는 로키. 하지만 그 잘난 후계자님은 그녀가 여운에 잠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할매 뭐해? 일어나. 일하러 가자.”

“일? 무슨 일?”

“아직 몬스터 범람…… 그 뭐냐, 위국전쟁? 은 안 끝났잖아.”

“……설마 그쪽에도 가자고? 지금부터?!”

안 좋은 예감에 로키는 노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삭신이 쑤신다는 시늉을 했지만, 아까까지 불똥을 피해서 요리조리 잘 움직이던 그녀를 본 노르드는 눈 하나 꿈쩍 않았다.

─부르르. 쉴 여지를 주지 않는 시선에 로키는 몸을 떨었다.

“기다려 봐! 아즈위시아에서 한 것처럼 가호를 돌리러 간다는 거야?!”

“아냐. 위기가 벌어질 때마다 버프가 걸린다는 오해를 심어줘도 곤란하니까.”

“그럼 뭔데? 피해복구나 상처 치료 같은 거?”

“어. 여기서만 벌이면 지방의 신통방통한 민간 설화로 끝이잖냐. 한물 간 트로트 가수도 각 잡고 전국순회를 돌면 콘서트 비용 쯤은 으리으리하게 뽑힌다더라.”

─덥썩! 로키의 목덜미를 잡아끄는 노르드.

“디스펠 마법의 카운터 마법은 베로니카가 권능 버프로 만들 거야. 우리가 공연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터져도 도로 불러낼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맡겨주세요☆!”

기운차게 대답하는 라리루라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로키였지만, 구원은 없었다.

“기, 기다려! 뭘 어떡하려고!”

“위치는 알아. 가서 교황들한테 신좌의 마나를 나눠준다. 요정왕의 완드로 지형을 바꾸고 사제들 버프랑 힐에 백업만 해 줘도 신앙을 긁어모으기는 쉽겠지.”

“그럼 난 필요 없잖아! 환상 셔틀이잖아!”

“킹치만 찐퉁 여신이 현장에 없으면 거짓말이 돼 버리는걸?”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녀석이 왜 그런 걸 신경 쓴다는 말인가! 로키는 울며 빼액댔다.

“이거 노인 학대, 아니! 여신 착취야! 나는 아직 니가 내 밥을 바이콘 애들한테 만들게 한 원한을 속에 품고 있거든?! 너도 나처럼 가지랑 피망 들어간 정어리 파이 먹어볼래?!”

“밥이라면 끝나고 한 상 거하게 차려줄게. 나도 배고프거든.”

“그럴 거면 네 아내들도 데려가든가!!”

“응. 우리도 갈 거야.”

“글쎄, 노르드는 어디든 혼자 보내면 꼭 다쳐서 돌아오시더라고요.”

네페르티티와 티르시까지 따라붙자 항의할 말도 없어졌다.

태초의 신은 강대하나,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

사람의 통곡은 천상의 신들이 보살필지 모르나.

여신의 비명을 보살펴주는 이는, 아무리 그래도 없는 듯 했다.

***

전쟁은 아주 좆 같은 일이다.

당연히 그렇지. 어제의 이웃이 하루만에 카레에 들어가는 돼지고기 민찌처럼 변해버리는데. 이걸 좋다고 하는 놈은 십중팔구 두 부류다.

하나는 상상력이 딸려서 전쟁이 벌어지면 지가 어떻게 될지도 예상 못하는 놈.

둘은 현실을 충분히 알기에, 자신이 총 맞을 일 없다고 확신하는 놈.

그밖에는 열 놈에 1~2명 꼴의 전쟁광이 있겠다. 통계는 야매니까 믿지 말길.

그렇지만 억지로 장점을 쥐어짜내서 전쟁이라는 행위를 좋게 보자면, 피가 흐르는 만큼 전후에는 뼛속까지 특정한 교훈과 이데올로기가 새겨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그대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전쟁에서 지고 ‘아무튼 유대인 탓임. 딴 나라가 나쁨’ 테크트리를 타거나, 오히려 이겨서 ‘식민지 지배는 경제발전을 돕는 것’이라며 잘못된 교훈을 통해 사회의식을 정당화하기도 하니까.

병사들이 흘린 피는 지휘관의 훈장이 된다.

시민이 쏟은 피는 사회의 방향성이 된다.

그리고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오면 시민이다.

이 낙차는 낙수효과가 거꾸로 적용된 현실이다. 피에서 철분을 모아서 훈장을 다는 사람은 있다. 그 피가 적군의 것이라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닐까.

“노르드. 저를 전장으로 보내주세요.”

따라서, 티르시는 내게 제안했던 것이다.

(주)로키 교단을 떡상시키려는 작전 세력에 한 명이 더해진 이유였다.

쩌저저저정─!!!

핏빛 얼음이 평원에서 믹서기처럼 회전했다.

어디서였던가. 양판소를 까는 글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마법사가 마법 한 방에 수백 명을 죽이는데 왜 졸병들이 뭉쳐 다니겠느냐고 말이다

확실히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론이다.

하지만 현실은 좀 더 복잡하고 때론 멍청한 법.

‘어차피 흩어지면 각개격파로 끝나잖아?’

자세한 전략은 훨씬 복잡하지만 TMI가 되니까 생략하고, 이세계의 정석적 전법은 어떤 수단으로 방어를 굳히고 군대로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지구에서도 전투기 몇 대로 보병을 갈아버릴 수 있지만, 거기에 당하면 지휘관이 병신인 거랑 비슷하다. 아니, 공습에 대비를 안 해? 그럼 뒤져야지.

별 꼼수와 그 파훼법, 탐지법이 많지만 능력이 되면 꼼수보단 정석이 최고다.

“카오오오오오오!!! (갸아아아아악!!!)”

그리고 아무리 대비를 잘 한 군대라도, 벙커에 숨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머리 위에 융단 폭격이 쏟아지면 답이 없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아르마슈나스 경, 만세!!!!〉

강한 화력을 순식간에 투사하는 공군은 전장의 신이라고 하던가.

고전하던 도중에 전황을 뒤집어버리는 티르시의 대마법에 병사들은 환호했다.

죽어나가는 피와 살점이 사람의 것이라면 그게 적군이라도 사람의 감성으로 기뻐할 수만은 없을 테지만, 이 전쟁의 주역은 인간과 몬스터 아닌가.

좀비가 내장과 뇌수를 쏟으며 죽어도 슬퍼하는 사람은 없듯, 자신과 전우들에게 피를 쏟게 만든 괴물들의 떼죽음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했다.

〈포위망이 형성될 때까지만 계속할게요.〉

그들의 환호성에 답하듯, 언덕에 자리 잡은 티르시는 재차 광역 마법을 갈겼다.

〈겨, 경!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오죽 하면 지휘관이 당황하며 말릴까.

로마니아에 마스터 클래스는 몇 있어도, 그중에 마법사는 없댄다.

‘마스터 클래스 대마법사’의 능력치 기준을 잡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지휘관으로선 이 미녀 폭격기 씨의 상세 스펙을 모르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미사일 숫자가 정해져 있다면 그걸 아무렇게나 쏠 수는 없잖은가.

단지 그녀의 남편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상관없어요. 여러분께서 얼음을 준비해주셨으니까요.〉

내가 알기로, 우리 마법사님보다 장기전에 강한 마법사는 없거든.

아르마슈나스의 권능, 〈탄빙옥궤〉.

마법사들이 깔아준 얼음으로 대마법을 펼쳐내는 티르시는 태연한 안색이었다. 본인의 마나는 거의 쓰지 않고, 남겨진 얼음을 재활용해서 다시 얼음 마법을 쏴댄다.

그야말로 얼음을 매개로 한 유사 무한동력이다.

‘초대 원로원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군.’

생전의 마도신 아르마 슈나스 씨가 이 짓거리를 하는 꼴을 봤다면, 그야 대대로 전쟁병기를 만들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수밖에.

신들이 떠난 고대 초기의 혼란기에 이런 위용을 봤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었다.

슥─.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몬스터들을 둘러보는 나.

─촤좌좌좌좌좌좌좌좌좌작!!!

평원에 달려들던 늑대들이 얼음 칼날에 베여 큰 부상을 입고 발이 멈췄다.

그러자 발이 초원의 얼음에 들러붙고, 혹설처럼 몰아치는 눈보라에 체온과 신진대사가 떨어진다. 그렇게 마법이 쓸고 지나가면 남는 건 거의 반쯤 동사한 몬스터 뿐.

마법으로 적을 전멸시키는 게 아니고, 움직임과 저항 능력을 봉쇄한 것이었다.

‘무차별적인 듯 보이지만, 굉장히 계산적이네.’

티르시답다면 티르시다운 전법이었다.

폭격이란 강력하지만, 의외로 투사한 만큼 적을 확실히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마나가 아깝지 않게 효율적인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 개새끼들! 더는 요리조리 못 도망다닌다!〉

〈방심 말고 진형을 유지하며 창으로 찔러버려! 저 놈들 더는 못 움직이니까!〉

그렇게 전투능력이 소실하거나 격감한 몬스터는 병사들의 먹잇감이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팔다리가 뜯긴 채 행군하는 군대한테 진다? 로마니아 군은 그렇게까지 한심한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하물며 몬스터들은 힘만 강한 당나라 군대.

그 힘을 넘는 초월자에게 뒤지게 얻어맞으면 더 볼 장도 없다.

〈이얏-! 이얏-! 이얏-!〉

한편, 다른 쪽에서는 보스 몹으로 보이는 놈을 용사 파티 같은 놈들이 잡고 있다.

로마니아에서도 유명한 모험가 파티다. 고용된 국군 소속은 아니고 이 지방의 주민인 듯 했는데, 그들의 뒤에서 로물루스교의 교황이 버프 중이다.

〈두려워 말고 나아가시오! 천상의 가호가 저와 그대들을 보살필지니!〉

천상(=로키)의 환영은 한 차례 뿌렸고, 마나를 충분히 공급받은 그들은 수월하게 강대한 몬스터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이걸로 네 곳 째.’

이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위국전쟁에서도 특히 격렬한 분쟁지역을 절반 가량 돌았다.

나머지는 큰 문제 없다. 키아라랑 오델리아가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폭격을 마무리 지은 티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난 듯 하군요.〉

그리고서 로키의 환영으로 몸을 감춘 나랑 아이 컨택트.

교황들에게 협력을 받아서 로키 신앙을 가능한 되살리는 것도 목적 중 하나지만, 그녀가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세계수의 뿌리는 태우셨나요?

─악용할 여지가 있으니까 2개 정도만 태웠죠. 다른 신족은 눈에 띄지 않더군요.

애초에 수르트가 뿌리를 불태웠을 때부터 기존 예지는 붕괴했었고 말이다.

근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고작 뿌리가 한 가닥 찢어진 정도로 계획이 무너질까?

내가 보기에 이건 헤니르가 이번 계획은 텄다고 보고 일찌감치 접은 것이었다.

‘그 씹새의 뒷공작은 실패다.’

수르트를 불러내서 나를 죽이려는 계획도 실패.

죽이기는 커녕, 되려 나를 강화시키는 데 그쳤다.

전쟁은 끝난 것이다. 우리들의 승리로.

‘이겨도 져도 비극인 건 똑같지만……’

그래도 상처 뿐인 승리였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피해만 보면 그 말은 사실에 가깝지만, 이로써 로마니아의 체제와 의지는 굳건해졌다. 황제라는 곪은 상처를 도려내고 고열에 시달렸어도 굳세게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러니 무엇 하나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 싸웠던 누구나가.

‘우리로서도 얻은 게 많았고.’

교단의 성물들과 권능의 강화.

아내님들의 레벨 업.

‘무엇보다…… 수르트의 파편.’

나의 내면에서 작은 묘목이 꿈틀거렸다. 화로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훅훅 달아오르면서 내 마나가 용광로에 뒤섞여서 불순물이 걸러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즈위시아에 있던 신족들의 언동 등, 몇 가지 단서도 얻었다. 헤니르, 그 새끼가 뭘 노리고 있는지도 대충 상상이 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확신했다.

미쳐버린 짝퉁 키다리 아저씨와의 결전이 머지 않았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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