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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휴식을 마치고 서류 일로 돌아갔다.
“노르드. 헤르마이온 길드의 투자 탄원서에요.”
“또요? 돈 나갈 구석이 많군요.”
“불평은. 들어올 구석도 많으시면서.”
“돈을 쓸 데가 없는 것보단 낫긴 합니다.”
황금 알을 낳는 오리한테는 좋은 사료를 먹여야 하는 법이다. 나는 쇼핑 리스트를 내려놓고 쌓인 서류에 도장을 찍어내려갔다.
“어르신네 만능해결사 집단도 한 건 했다네요.”
“만능해결사? ……아, 오프툼 씨와 그 일행요?”
“넹. 달인 한 명에 유물로 무장한 파티잖아요.”
전쟁에서 활약한 지인이나 직원들의 소식이다. 몇 가지 보너스 허가를 땅땅.
골렘 증산을 준비했다가 좆망했다고? 그건 니들 자업자득이네. 패스.
전쟁 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우리 몫의 일까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애초에 우리는 큰 힘(권력)이 없기에 큰 책임도 없는 입장이고 말이다.
“오늘은 이쯤 하죠. 휴식도 중요하니까요.”
둘이서만 한동안 일을 마치던 티르시는 담백한 태도로 일어섰다. 아까 전까지 내 허벅지 쥬지를 배고 꼼지락대던 아가씨는 오데 갔는지 몰겠다.
“어디 갔다 오시게요?”
“손님이 있어서. 이리로 오실 거에요.”
원로원에서 전쟁 영웅에게 임시로 내준 저택은 으리으리했고, 손님을 맞기도 적당했다. 티르시는 실내복의 가운을 벗다가 멈칫했다.
“……옷, 갈아입을 건데. 쭉 보고 계실 거에요?”
“안 되나요?”
“……볼 것도 없는데.”
없기는 뭐가 없어. 몇 년만 지나도 남편 앞에서 훌렁훌렁 벗게 될지도 모르는데, 스트립쇼를 부끄러워 할 때 실컷 즐겨둬야지 않겠냐고.
메이드 발퀴리에들의 도움을 받아서 적당한 드레스를 입는 티르시.
손님이라는 양반은 금방 왔다.
〈저번에 보고 또 보는군. 몸은 성한 모양이라 다행일세.〉
모자를 벗자 드러나는, 소탈하고 지친 얼굴.
어릴 적의 티르시를 도와줬다는 재상 양반이다.
〈……안부 인사 치고는 당혹스럽네요. 재상님이야말로 몸은 괜찮으신가요?〉
〈‘전직’ 재상이지. 이젠 그냥 뒷방 늙은이야.〉
그는 초췌한 얼굴로 웃었다. 티르시가 그렇게 말 할 만큼 퀭한 낯빛이었다.
〈황제 놈이 내 몫의 죄까지 달고 데롱데롱 매달렸으니, 늙은이가 기력 좀 써서 젊은 놈들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수지 맞는 장사 아니겠는고.〉
듣자 하니 전쟁 때문에 철야라도 한 모양이었다.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노인에겐 상당한 강행군이었겠지. 티르시는 별 말 없이 찻잔에 웬 포션을 가득 따라서는 얼음을 채워넣었다.
노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포션을 찻잔에 따르는 건 또 처음 보는군.〉
〈피로 회복에 좋아요. 처방전이랑 수면제를 몇 잔 드릴 테니, 돌아가면 쉬시죠.〉
〈볼 일은 보고. 울프헤딘 경도 들으시겠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 있죠. 아니면 들어야 하는 얘기인가요?〉
〈나중에 그녀의 입으로 설명받아도 될 걸세.〉
그러시댄다. 나는 티르시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걸으면서 방에서 챙겨온 쇼핑 리스트를 읽다가 눈을 감았다. 오감을 집중시켜서 끌어올리자 마치 레이더 탐사 화면처럼 감각이 곤두섰다.
─화륵.
기감을 외부로 뻗어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뱃속의 열기다.
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게 심상치 않다.
내면에 잠든 불꽃이 실제 육체에까지 영향을 줄 줄이야. 그 업화에 최소 50번은 웰던 스테이크가 됐던 나로서는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쓰러트리길 잘 했어.’
【시재회귀】가 발동 가능한 특수 상황에서 그 불꽃 거인을 잡은 건 묘수였다.
레바테인의 파편은 매개체일 뿐이다. 유성처럼 떨어진 수르트의 시체를 해치우지 않았다면 언제 또 헤니르가 써먹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첫 번째 예지에서 본 늪지가 어딘진 알아냈다.’
신족 트리오의 영혼을 셀루스티아 남작 때처럼 브류나크와의 콤보로 탈탈 털었다.
위치는 알아냈지만, 아마 지금 가 봤자 의미는 없을 듯 했다.
‘실패한 걸 깨닫고 진작에 튀었을 테니까.’
로키의 말로는 그 새끼도 천리안 비슷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 능력으로 히타이트의 수도 카네쉬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로키를 찾아냈다던가. 내 존재를 깨닫고 차원벽의 심도를 낮추자마자 바로 시선을 느꼈댄다.
‘하지만 헤니르한테는 남은 수단이 얼마 없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한계에, 예지당하면 끝장이라는 페널티.
체스에서 체크를 당한 상태에서 나를 수르트의 앞에 던져놓은 발상은 제법이었지만, 권능에 의한 아이디어는 마찬가지로 권능에 의한 예지/회귀로 카운터 당했다.
대굴빡을 쓴 접전도 로마니아 코인을 풀 매수한 내 앞에 꺾였다.
지금까지의 승패 스코어는 3전 2승 1무.
인공신좌를 따인 걸 패배라고 쳐도 내가 1승을 더 리드하고 있다.
거기다가 추리와 상상력, 그리고 신족 트리오의 자백으로 거처의 후보군도 좁힌 참이다.
‘세계수의 뿌리가 있는 곳.’
헤니르, 그 씨팔럼은 그중 어딘가에 있다.
오히려 그 신족들이 헤니르의 행방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놈도 반쯤 나를 유인해내려는 생각이겠지. 덕분에 내 추측도 확신을 얻었다.
‘천리안의 힘이 필요해.’
세상의 모든 뿌리들을 다 둘러볼 만큼, 존나게 센 천리안이 말이다.
‘기껏 얻은 수르트의 파편도 소화해야 하고.’
─벌컥!
어느 방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어젖혔다. 여성의 방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휘리리리리릭! 휘리리리리리리릭!!
문을 열었을 뿐인데 농밀하게 퍼져나오는 마나.
방의 한복판에 앉은 로키가 국내에서 흘러오는 신앙── 마나를 실타래로 엮어내고 있었다. 쉴새없이 손을 놀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좆간에게 실크 생성장치로 쓰이는 누에 그 자체!
나는 혐성 그 자체와도 같은 비열함으로 그녀가 쌓은 마나 실타래를 양동이에 담았다.
“할당량은 채웠군. 계속 수고해라.”
“히이이이! 살려쥬세여! 팔이 아파여! 쓸데없이 반짝거려서 눈도 따가워여!”
“크흐흐흐. 곧 있으면 편해질 거다. 안심하도록.”
“히이이이, 히이이이이이이. 이 하얀 실크 같은 머리카락…… 오딘 언니야……?”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로키를 두고 방문을 냉큼 닫았다. 오딘이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가 보지.
“흐음. 저러다 께꼬닥해도 곤란한데……”
나는 면접을 앞두고 모기에게 부랄을 물린 취준생처럼 곤란해졌다.
로키 할매가 저러고 있는 건 ‘킹갓엠페러 로키 여신님’이라는 언플의 약빨이 상상 이상으로 통한 탓이었다.
승전 뽕, 신앙 뽕이라는 게 이렇게 쎌 줄 몰랐지.
‘다나랑 라리루라가 흘러들어온 마나량을 미처 소화 못 하고 있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더니. 내가 신성 뽕쟁이 제국 로마니아를 얕봤다.
그야말로 내가 그녀들의 아가방에 애기설계도를 빵빵하게 채워줬을 때처럼, 볼록 부푼 마나통에서 역류한 싱싱한 신앙이 로키한테 쏟아지고 있다나 뭐라나.
리즈 시절의 로키라면 그 신앙을 혼자 꿀꺽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현재 그녀는 밑 빠진 독.
명치에 구멍 난 여신님께선 뷰룻뷰룻 들어오는 파릇파릇한 젊은 것들의 숭배와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디 아이돌처럼 구웨에엑 하고 계신다.
‘그래도 기껏 받은 도네를 낭비할 수는 없지.’
그래서 따로 뽑아놓도록 시켰더니 저러고 있다.
고로, 그녀의 주마등 리콜에는 내 잘못도 대략 3% 쯤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나라도 양심이 찔릴 수밖에 없기에 대처에 나설 생각이다.
“즉, 남은 마나는 내가 먹는다.”
흡수한 다음에 아내님들한테 나눠줘도 되고.
애초에 수르트의 파편이 열기를 얻는 스피드가 심상치 않다니까. 혹시 내면세계에 들어가면 마이 고유결계인 평원이 퐈이야 하고 있진 않으려나.
말하자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태양인이 돼 버린 것이었다.
슈퍼 태양인이나 극태양인이라고 부르면 될까. 수르트 이 새끼는 생전에 낙엽만 스쳐도 풀발하는 정력 덩어리였음에 틀림없다. 이건 라스푸틴도 인정하는 부분.
불꽃 거인은 정력에 좋다지만 비아그라도 잔뜩 씹어먹으면 심장이 지가 쥬지인 줄 알고 발기하려 드는 것처럼, 이대로는 나도 좀 위험할 것이었다.
이 모든 문제는 놀랍게도 단 하나의 해결법으로 귀결된다.
‘양기는 음기로 다스려야 하는 법!’
다나와 라리루라의 심념을 Fuck해서 직결한다.
노루표 무협지에서 말하는 음양합일이다.
“이 앞, 교미의 시간이다.”
아, 섹스! 훌륭한 명상수단이지!
“이히히. 크히히히. 크헤헤헤헤.”
나는 룰루랄라 그녀들에게로 찾아갔다.
***
로마니아 수도에 자리한 어느 저택의 일실(一室).
신화 속의 여신처럼 빛의 날개가 자라난 여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내면에 집중하는 그녀의 곁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엄숙한 분위기를 이뤘다.
퇴폐적인 느낌이 풍기는 미모도 겹쳐서 지상의 넋을 기리는 여신처럼도 보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실제론 넋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의 신앙을 흡수하며 자신의 내면을 넓히는 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푸하아!”
다나는 그렇게 모여드는 신앙심을 흡수해보고자 노력했지만, 과연 역부족이었다.
가혹한 운동에서 해방된 것처럼 그녀의 집중과 자세가 무너졌다. 침대에 엎어져서 쌕쌕대는 다나. 그 거친 숨소리에 라리루라도 집중이 깨졌다.
“쀼흐엑.”
웃기는 소리를 낸 라리루라도 콧잔등에 딱밤을 맞은 것처럼 뒤로 쓰러졌다.
거칠게 숨을 고르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옆으로 쓰러져서는 쓸데없이 야한 자세로 헥헥대고 있는 9살 연상의 언니에게 넌지시 물었다.
“다나 언니~…? 몇 분 버텼어요~…?”
“그런 거 하나하나 안 세고 있는데…… 그래도 더럽게 빡세네, 이거.”
기운없는 질문에 걸맞는 기운없는 대답이었다.
다나와 라리루라는 이래봬도 가족 중에선 명상 전반에 가장 익숙했다.
드루이드 가계(家系)에서 명상을 배우고, 또 저 이름 없는 여신에게 받은 선물을 소화하면서 빛의 마나를 다루는 데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다나.
신체조율이라는 고달픈 집중력 상승 트레이닝과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어려운 서커스 공연 훈련에 더불어, 개량한 바이츠니아의 호흡법을 몸에 익힌 라리루라.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데 뛰어난 천재들이다.
구신의 신좌를 이만큼 다뤄내는 건 그녀들에게 그만한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들로 하여금 이만큼의 실패를 거듭하게 만드는 상대가, 신들의 권능도 아닌 로마니아 백만 시민의 가벼운 감사와 신앙이라니?
신적 존재와도 맞서며 이겨왔던 그녀들이지만, 이만한 고역은 처음이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살짝 싹트려고 했던 자만이나 헛바람 같은 게 말 그대로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게 수르트랑 싸울 때보다 10배는 빡세……”
“그야 저땐 선배가 베테랑 수르트 사냥꾼 같은 거였으니까요……”
“……그럼 아멜리아랑 싸울 때보다 100배 빡센 걸로.”
“……네, 뭐. 그건 맞는 말이네요~.”
녹초가 돼서 얘기하던 라리루라가 말했다.
“……선배가 말하던, ‘초인도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란 말이 좀 실감이 가네요.”
“그러게나. 신이란 건 정말로 제정신으로 할 게 못 돼.”
신좌의 계승자라지만 그녀들도 사람이다.
신이라면 다를까 싶다가도, 옆방에서 마나 뽑는 생체유물이 돼 버린 태초신님을 생각하면 역시나 그렇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데굴데굴.
라리루라는 침대를 굴러서 다나에게 밀착했다.
“신님들이 인류의 창조주라면 일종의 어머니나 아버지인 거잖아요? 자식이 100만 명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과로사할 자신이 있다구요?”
“야, 100만 명은 심했다. 100명만 낳아도 분만대에서 늙어 죽겠네.”
“저는 10명까지는 가능한데요♡”
“그런 정신 나간 걸로 경쟁하지 말아줄래. 응?”
대화하던 그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기척을 느껴서였다.
“남편, 강림.”
노크 후에 허락을 받고 방에 들어온 노르드는 그 직후, 눈에 띈 광경에 경악했다.
“뭐지? 왜 둘이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지? 처용가를 암시하는 것인가?”
“마나량 증가 훈련 중이었어요♡!”
다나를 끌어안으면서 해맑게 외치는 라리루라. 그다지 후덥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다나도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노르드가 심각하게 말했다.
“과연. 나더러 난입 페널티를 받으라는 뜻이군.”
“뭔데? 좋은 단련법이라도 생각났어?”
“섹함뜨? 정액은 답을 알고 있다.”
“아니, 쌉또라이 새끼야 좀.”
다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라리루라는 번쩍 손을 들었다.
“네! 저요! 전 할래요! 펠라 시켜주세요!”
“라리루라? 방금 전까지 의기투합했으면서 바로 배신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휴식과 기분전환은 성장의 거름이에요!”
“남편 놈이 깔아뭉개면 절대 휴식 정도로는 안 끝나니까 그렇지…….”
군소리가 들리지 않은 듯 달려온 라리루라에게 노르드는 말했다.
“변신 목걸이 있지?”
“네! 차면 되죠? 어떤 분장으로 할까요?”
목걸이를 꺼내드는 신속함이 거의 산책을 가는 강아지 수준이다. 노르드는 웃으며 목걸이를 걸고 양손으로 붙잡았다. 마나가 흐르며 라리루라의 몸 일부를 바꿨다.
“으응~?”
머리에 뿔이 솟고, 허리춤에는 날개가 자라더니 꼬리뼈에 매끈한 꼬리가 생겼다.
서큐버스 코스프레 같은 모양에 라리루라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러다가도 머리에 전구가 켜진 듯 키득댔다.
“아핫♡ 알았다! 선배, 어제 오늘 일이 고되셔셔 자지가 흐물흐물해지셨군요~?”
“뭐 임마?”
“라리루라는 다 이해한답니다~? 마나도 무진장 쓰셨구, 갑자기 귀여운 후배랑 꽁냥대고 싶어지셨는데 정작 아래춤이 흐물흐물 물렁물렁이라 야한 옷차림의 도움이 필요하셨던 거죠♡?”
살랑거리는 꼬리로 노르드의 배를 간지럽히면서 라리루라는 입가를 가렸다.
“좋다구요~♡? 선배의 페티시에 잘 어울려 드리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럽고 셋째 가라면 펑펑 울 정도인 라리루라가, 오늘도 서방님의 야한 취향을 충족시켜주는 현모양처가── 후엑♡”
언제 나쁜 손장난이 들어올지 내심 기대하면서 부추기던 라리루라가 의도하지 못한 신음을 내며 다리가 풀렸다.
노르드가 머리에 자라난 뿔을 붙잡고, 마나를 쭉 빨아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