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89화 (887/1,009)

***

타닥, 타닥….

번갯불이 평원을 불살랐다.

수르트의 마나를 제압한 내가 벌인 짓이었다. 꿈 속에서라면 부담 없이 훈련과 시뮬레이션을 벌일 수 있다. 마법사에겐 꿈의 훈련장이다.

“거의 뭐 시간과 정신과 방이네.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는.”

“뺘악! 뺘악!”

새로 얻은 기술을 확인하며 중얼거리자 물러나 있던 브류나크가 소란을 피우며 날아왔다. 그만큼 내 신기술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기억해 둬. 실전에선 네가 보조해 줘야 되니까.”

“뺘악.”

수르트의 권능을 재현하는 건 실패했다.

수십 번 죽으면서 원리는 이해했는데, 안다고 다 할 수 있으면 나는 이세계에 오기 전에 프로게이머라도 됐을 것이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효과가 비슷한 〈정화의 번갯불〉도 있으니 큰 지장은 없지.’

그리고 예상 밖의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오오오오─.

하얀 까마귀, 교수 슬레이어가 내 영혼에 담긴 잡다한 마나를 끌어모았다.

교수 슬레이어가 뱉은 내면세계의 하얀 태양은 예전에 본 것보다 조금 탁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 구신의 마나를 축적한 과정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여기저기서 하도 많이 흡수했으니까.’

내 마나는 말하자면 잡탕 부대찌개였다. 순도가 낮다는 뜻이다.

나쁜 건 아니지만, 이제 양은 충분하니 질에도 신경을 쓸 차례였다. 나는 무질서하게 개발된 도시 구획을 정리하는 것처럼 마나를 응축했다.

“스으으으읍……”

몸에 받아들여서, 수르트의 마나로 녹인다.

불꽃 반응 실험처럼 야광색으로 타오르는 불이 마나의 불순물을 날려버렸다. 벌크업 후에 군살을 커팅하는 기분으로 마나를 정순하게 바꾸는 나.

마나와 마법 간의 용접!

퓨전 한식처럼 성질이 다른 능력끼리 결합하는 기술이었다. 나는 손바닥에 오러권을 발동했다. 내 마나는 오러로 변했다가, 곧 번갯불로 바뀌었다.

“이건 꽤 유용하겠어.”

수르트의 마나를 체득해서 얻은 힘을 짧게 평가한 나는 천리안을 켰다.

브류나크의 도움을 받아서 전세계를 한 눈으로 훑었다. 놀라운 탐지력이었지만, 엘프 신왕국의 옛 유물로도 할 수 있던 일이다. 내가 못해낼 도리는 없다.

‘단서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뭔가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매지컬 인공위성 지도에도 단점은 있지만 지금 이때는 눈 감아줄 만한 단점이다.

나는 전세계의 몇몇 포인트를 둘러보다가, 생각보다 빠르게 그것을 발견했다.

아니, 처음부터 확인해 두려던 곳이었으니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바이콘들의 정원섬.’

과거, 우리가 휴양을 즐겼던 섬에 못 보던 기둥 다섯 개가 우뚝 서 있다.

두근, 두근, 두근….

꼭지점끼리 이으면 오만성이 되는 탑들은 마치 생물처럼 유기질적인 질감으로 맥박쳤다. 살짝만 눈을 돌리자 다섯 마리의 낯선 신족 놈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진녹색의 탑을 살폈다. 동시에 부숴버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재생할 듯 했다.

“실패 끝에 내놓은 급조 작전이라. 얼마나 쓸모 있을지는 봐 봐야 알겠지.”

중얼거리던 나는 팔을 휘둘렀다. 뿜어진 오러가 그곳에 있던 사람 그림자를 직격했다.

기척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몸이 터져나갔다. 나는 물감처럼 튄, 늪지 같은 녹색의 덩어리에게 마저 말을 걸었다.

“배려가 모자라네. 유부남의 꿈속에 미녀가 나오면 우리 아내님들이 토라진다고.”

“사뭇 당당하시군요. 저희를 멀리서 염탐하시는 분께서.”

“그 섬은 내 외가 친척들의 별장이라서. 사유지 침범은 바이콘 로컬 룰에선 사형이야.”

물감처럼 터져나갔던 그림자가 되살아났다. 긴 검은 머리의 여성이다.

앞설이 활짝 열린 옷을 입고 4개의 손바닥으로 가슴을 가린 미인이다. 눈은 안대로 감췄지만, 그 자태는 신이나 천사와 같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기 충분한 위압감이 있었다.

여기 있는 게 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보아하니 헤니르 새끼의 단성생식 부산물인가 보군.”

내가 정원섬을 관측하는 걸 눈치채고, 내 꿈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아쉽게도 분신이라 오딘의 눈으로 봐도 본체가 어느 정도의 적인지까지는 모르겠다.

4개의 팔을 가진 장님 신족이 입을 열었다.

“메르키스. 당신을 저지하는 신명을 갖고 태어난, 신군님의 도구입니다.”

“신조의 수를 늘리길 포기하고 수만 마리 몫의 에너지를 모아서 다섯 놈을 만들었나. 인간을 싫어한다는 놈이 인간의 권능은 잘만 써대네.”

“신군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거의 파악하시고, 그 음험한 시선을 차단하고자 절 창조하셨습니다. 제가 이 불쾌한 공간에 온 것도 그 때문이지요.”

집단적 독백 같은 대화다. 말로 설복할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짧은 미래를 관측하고, 미래를 바꾸는 데 모든 능력을 투자한 미래예지. 당신의 행동방식을 보면 그렇게 먼 미래까지는 볼 수 없으시겠죠.”

메르키스라는 장님 여자가 말했다.

“강력함에 걸맞게 결점도 명확합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예지와 미래는 마땅히 바뀌는 것. 그러니 당신이 직면한 ‘가장 가까운 재액’이 유지되는 한, 당신은 다른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위국전쟁에서 벌인 활동을 보고 확신한 것일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우신 토벌전 때도, 수르트 때도 그랬지만 내가 보는 예지는 절대적이지 않다. 나 자신이 운명을 바꾸는 존재이기에 미래의 비전은 단편적이다.

짧게 설명해서, 나는 ‘예지를 막은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내가 권능을 맹신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불꽃의 흡혈귀, 옛 지배자 수르트를 물리친 것 역시 권능의 일환이겠지요. 고로, 저는 당신의 그 거슬리는 눈을 멀게 하고자 합니다.”

메르키스가 팔을 벌렸다.

보석에서 영롱한 빛이 맥박치고, 그 광채를 쬔 내 눈은 노이즈와 함께 미래의 단편을 보았다. 불기둥이 치솟으며 터져나가는 정원섬의 모습을.

어이가 없어진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친놈. 초딩용 특촬물의 악당도 아니고 자폭 스위치를 쳐 만들었네.”

이 메르키스라는 신족은 살아있는 폭탄이었다.

세계수의 뿌리에서 끌어올린 마나를 그대로 온 섬에 터트리는 인간 폭탄 말이다.

“가엾고 딱한 생후 0개월짜리 애새끼들이로다. 똘게이의 수정란답게 제대로 정신이 나가버렸군. 뇌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게 죄는 아니지만, 면죄부도 아니다.”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섬이 폭발하는 예지가 보인다는 건 내가 오지 않아도 진심으로 섬을 터트린다는 얘기다. 지들의 계획을 지들 손으로 다 말아먹는 한이 있어도.’

그냥 허세와 페이크라면 예지가 발동할 리 없다.

내가 저 미친 짓을 멱살을 잡아서 멈출 거라고 믿고, 진짜 자폭할 생각인 것이다.

앞 일을 확신하고 절벽에서 몸을 내던지는 듯한 계획.

헤니르가 처음 신좌를 쌔벼갔을 때의 기시감이 내게 혀를 차게 했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도── 오딘 신과 ‘심해의 군주’도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관측하지는 못했죠. 이제 당신들에게 남은 선택은 2개가 되었습니다.”

메르키스는 다시 앞섬을 손으로 가렸다.

“섬의 어딘가에 있을 저를 찾아내서 죽이는 것. 혹은 폭사하는 미래를 피하고자 섬의 바깥에서 신군의 과업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고려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군.”

“그러시겠지요.”

나는 시큰둥하게 섬을 가리켰다.

자기더러 뒤지라는 개새끼를 따르는 메르키스가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 감흥도 가족의 안전과 저울질하면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나 추출이 끝나기엔 아직 멀었어. 네가 섬을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을 얻기 전에 족치면 된다. 그러면 너희가 감추려는 진짜 계획도 전모가 보일 테지.”

내가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광기의 블러프로 가린 헤니르의 진짜 목적이랄 것도 말이다.

결론까지의 과정은 이리저리 꼬아놨지만, 결국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전이다.

“곧 보러 가마. 그 터질 듯한 가슴을 까고 남의 꿈에 튀어나온 것에 대한 사과는 내 아내님들에게 직접 하도록.”

“……미친놈.”

“너무 그러지 마. 그 미친놈한테서 도망다니는 느그 신군님이 듣고 쪽팔려하겠다.”

자기 신의 적수를 향해서 어떻게든 예의를 차리려던 인페스티드 애시르는 기어이 욕설을 뱉고서 사라졌다. 나는 낄낄대며 고개를 돌렸다.

섬의 정경은 어둠에 가려졌다. 천리안을 차단한 것이었다.

헤니르를 빼도 신좌가 6개는 모인 섬이다. 저럴 정도의 능력은 있을 만도 했다.

“뺘악!”

브류나크가 울었다. 싸우러 갈 거냐는 물음이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긍정하면서 조금 정정했다.

“아니, 못 마무리한 문제를 정리하러 가는 거지.”

브류나크랑 하루 종일 놀아주겠다는 약속도 곧 지켜줄 수 있을 듯 했다.

입에 담았다간 안 좋은 복선이 될 것 같으니까 말로 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꿈에서 일어난 나는 아내들을 불렀다.

충분히 쉰 후에 싸움을 기다리던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를 섬까지 보내줄 바이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불안한 듯 일행 속 로키를 힐끔거리다가 말했다.

“노르드님. 가능하다면 저희도……”

“같이 가고 싶다는 부탁이면 사양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에게도 맡길 일이 있습니다.”

나는 2개의 편지를 꺼냈다. 급하게 쓴 거라 꽤 악필에, 찍찍 긋고 다시 쓴 부분도 많았지만 나의 신분을 증명할 룬 문자를 새겨놓았다.

─바스락.

엘카라는 이름인가 했던, 베로니카의 다음 예지자가 될 뻔 했던 바이콘에게 편지를 건네며 나는 샐쭉 웃었다.

“로키한테 먹여줄 만한 요리를 생각해 둬.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네!”

건강한 대답에 안색이 좀 창백해진 로키가 힘든 웃음을 지었다. 바이콘들이 주문을 외우며 우리가 서 있는 마법진의 좌표를 정원섬의 하늘로 잡았다.

천리안으로 보고 결계 같은 게 없는 곳을 고른 것이었다.

지팡이 여러 개가 번쩍 빛나며, 대륙 하나보다 먼 곳에 공간을 연결한 직후.

휘이이이이잉─!!

우리는 섬의 상공에서 얼굴을 때리는 맞파람을 맞으며 빛으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권능의 파동이 뿜어졌다.

“곧바로 와요! 아래! 팔레스의 권능으로 태어난 짐승들!”

라리루라의 외침에 베로니카가 주문을 외웠다. 지상에서 바글대는 거대한 날개들은 떼를 지어서 꿈틀대는 게 징그러울 정도였다.

“Ccccccccc……!!”

사람보다 커다란 피막에 긴 팔다리를 가진 반인반조 같은 것들이 하늘로 몰려왔다.

부유하는 두루마리를 두른 신족에게서 쏟아지는 짐승들은 어미가 죽고 그 등에 붙어있던 새끼 거미들이 쏟아지는 꼴을 수만 배로 부풀린 듯 했다.

─퍼드드드득!!!

하나의 살덩이처럼 기둥을 이루며 날아드는 새 인간들!

“마법사를 상대로 숫자만 내세울 줄이야. 첫 수 치고는 한심하구나.”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베로니카의 불꽃 마법이 거기에 적중하려 했을 때였다.

“하아아아아압──!!!!!”

─쿠르르르릉!!

지축을 흔드는 듯한 포효를 내지르며 뛰어오른 거한이 주먹으로 불꽃을 상쇄했다.

티르시의 바람이 착지를 도왔다. 거칠게 바닥에 착지한 덩치는 식물이 몸에서 자라난 신족이었다. 잎사귀가 머리카락처럼 자라난 놈에게서 알코올로 숙성된 과육 냄새가 풍겨왔다.

고혹적인 모습의 미남은 내가 씹게이 같은 생김새에 인상을 쓰건 말건 킥킥댔다.

“떼를 지어서 오리라고 생각했다만, 생각보다는 정정당당한 놈들이었군.”

“방심 마라. 신군께서 소음에 눈을 찌푸리시는 일 없이 끝내지.”

두루마리를 몸에 휘감고 둥둥 띄워놓은 신족이 말했다.

소리 없이 무더운 섬의 나무와 그늘에서 또다른 신족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헤니르의 정예병이라고 해야 할까. 신화에 자주 있는 ‘태초신과 그 1세대 자손들’ 같은 놈들이다. 저 새끼들이 이긴다면 창세신화에 이름을 남겨도 잘 어울릴 듯 싶었다.

“……베로니카랑 비슷한 권능?”

“정답이긴 하겠지만, 나로 비유하지 말거라. 꽤 기분이 나쁘구나.”

네페르티티가 중얼거리자 베로니카는 인상을 팍 썼다.

저 놈들은 나와 베로니카의 관계처럼, 헤니르의 여섯 권능을 내려받은 것이었다.

내가 원큐에 해치웠던 신족 트리오는 깨달음의 권능으로 무예만 습득한 상태였을까. 인스턴트 컵 라면 같은 공산품이지만 권능의 집합체라면 꽤나 강적이긴 하겠지.

몸에 식물을 길러낸 신족이 손에서 꽃을 기르며 말했다.

“자, 남자 하나에 매달리는 천박한 인간의 여신들이여. 오늘 이곳에 흐를 네놈들의 피를 잉크로 시대의 한 페이지를 채워넣을 그림을 그려주──”

고까운 도발을 던지던 식물 새끼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몸을 던졌다.

다나가 내던진 빌딩 만한 검이 그 새끼의 머리 위에 메다 꽂힌 것이었다.

“끄으으으윽!!”

다른 신족들처럼 빠르게 반응했지만 빛의 검은 겨냥한 상대를 놓칠 만큼 느려터지지 않았다. 다나의 목에서 성물 목걸이가 빛났다.

“나는 속 시원하게 알려줄 것도 아니면서 말만 많은 놈들이 제일 빡쳐. 대학원에선 그런 녀석들 치고 뭘 제대로 아는 놈이 없었거든.”

아니꼽다는 것처럼 말한 다나는 검에 담긴 빛의 마나를 폭발시켰다.

빛의 마나는 치유력 대신 열량을 품고, 공기와 뜨거운 흙을 폭산시켰다.

콰앙─!!!!

개전(開戰)을 알리는 짧고 강렬한 폭발은 찰나.

우리는 섬의 자연환경을 산산조각내며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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