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니르의 심장에 창이 꽂히기 몇십 분 전.
어느 왕성의 지하공동에 있던 레벨리오는 기사 모양의 말을 능숙하게 손에서 굴렸다.
그가 있는 지하공동에는 세계수의 뿌리가 일곱 가닥이나 묶여 있었다. 레벨리오의 신, 헤니르가 결전에 앞서서 끌어다 온 뿌리들이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모아둔 이곳에 지성 없이 부활한 수르트를 유도하거나, 일곱 신좌의 권능을 불살라서 차원 하나를 통째로 절멸시키는 것.
총혜신 헤니르가 인류를 영원히 멸망시키고자 짠 계획이었다.
태아로부터 탯줄을 뜯어내는 것처럼, 【중간 가지】라는 태아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들은 태아의 아사에 휩쓸릴 것이다.
헤니르의 예상으로는, 보름이면 전 인류가 전멸하고도 남을 거란 계산이었다.
〈풍요신 교단에서 마약은 진통제로 쓰인다죠.〉
그는 뿌리에 눈을 못 박고 중얼거렸다.
〈약과 독은 한끗 차이입니다. 지식도 그렇고요. 굳이 몰라도 될 지식들을 알고, 배워서…… 이제 아무 것도 모르던 무렵보다 행복해졌습니까? 에스메랄다.〉
그가 말을 걸었지만, 어둠 속에서 숨 죽여 움직이던 그림자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지잉─.
함께 왔던 로마니아의 마법사들이 투명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수십 명의 돌입 팀이 드러나며 어느 여성이 머리를 들었다.
막내 황자 레벨리의 유일한 동생이자, 한때 제 3황녀라고 불렸던 여인. 에스메랄다였다.
〈……물론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오라버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테니.〉
그녀는 일행의 대표에게 눈으로 허락을 받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여러분들과 저희들, 누가 이기든 다음은 없겠습니다.〉
돌아서는 그의 옆에서 메르키스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무엄한 인간들……!! 감히 이 의식의 장소에 흙발로 들어오다니!!〉
〈토지의 소유권을 따지자면 우리도, 너희들도 이 땅의 주인은 아니지.〉
─푹. 검사답지 않게 땅에 칼끝을 꽂아넣은 오델리아가 말했다.
〈굳이 굳이 따지자면, 뭐 이 국경을 수백 년간 지켜온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소유일 거고. 우리도 차원의 틈새에 히타이트의 수도가 숨어 있다는 건 몰랐지만.〉
그들이 모여든 곳은 히타이트의 왕성 지하.
다나가 이계의 존재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별의 자손 다비드가 죽었던 장소다.
마법사 길드의 창립 멤버이자 대마법사였던 에른스트는 이 땅에 잠들어 있는 세계수의 뿌리가 몇 가닥이나 된다는 걸 알아차렸었다.
인류멸망 계획의 실행에 있어서 가장 유력했던 후보였다.
〈한 번 울프헤딘이 휘젓고 갔던 카네쉬에 다시 관심을 가지진 않으리라고 봤는데…… 어떤 방법으로 저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죠?〉
그들에게 질문하며 레벨리오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신군과의 결전에서 마스터 클래스 급의 전력을 낭비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바이콘 신족의 성지에 특공하는 멤버에 참가해야 옳다.
그런데 정작 레벨리오와 메르키스밖에 없는 이 곳에 로마니아의 정예병력을 투자한다?
‘……알아차렸군요.’
레벨리오는 신군의 마지막 한 수가 들통났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악물었다.
속임수를 간파당했을 때의 싸늘한 감각이 기사 말을 쥔 손끝에 감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거기 계신 아가씨께서, 당신의 마나가 남겨진 훈련용 검을 기증해주셨던 덕분입니다.〉
긴 귀의 순혈 엘프가 나섰다. 복장 양식은 바이츠니아의 것이었다.
〈타타르니아의 엘프십니까?〉
〈알프헤임의 뜻을 잇는 신 엘프 왕국, 타타르니아의 마흐잔입니다. 이번 기회에는 서방 국가 로마니아와의 친교와──〉
스릉─. 마흐잔은 짙은 살기를 흘리며 발검했다.
〈──저희 동포에게 벌레를 심은 개자식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러 왔습니다.〉
배신자 장로 아슈카트와 그 휘하의 굴라나뢰크 소속 엘프들이 죽인 동포가 몇이던가.
엘프들이 이 싸움에 참전하고, 유물을 사용하게 만들 이유로는 충분했다.
알프헤임의 유물, 룬 탐지기.
노르드 일가가 명계에서 얻은 세계수의 이파리와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알아냈던 유물의 힘으로, 그들은 황자의 위치를 알아냈던 것이다.
─복수는 언제 해도 달콤한 법이죠.
노르드가 썼던 편지는 2장.
2장의 편지는 각각 타타르니아의 엘프 장로들과 로마니아 원로원에게 갔다.
─맞다, 새로 심은 세계수는 잘 크고 있습니까? 헤니르가 ‘진짜 세계수’의 뿌리를 끌어당기는 법을 아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까 알프헤임에는 진짜 세계수의 뿌리가 있었다죠?
현명한 이들일 수록 노르드의 언변에 넘어가기 쉬웠고 말이다.
그들이 협력체계를 꾸리게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오라버니.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억지를 부려서 이 자리에 따라온 에스메랄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헤니르라는 신대의 악신은 인간을 멸절시키려 한다면서요? 왜 그런 신을 따르죠? 별의 자손은, 아멜리아 어머니는 이제 없잖아요? 오라버니에게 남은 의무는──〉
〈있습니다. 의무라면 얼마든지 있어요.〉
레벨리오는 지하공동을 둘러보았다. 공동이라곤 하나, 한때는 가장 융창했던 고대 왕국의 성이다. 세월의 흐름에 바래져도 그 장식은 아름다웠다.
〈이 카네쉬를 수도로 삼은 히타이트는, 신들이 없어도 자신들만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희망찬 국가였다죠.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바꿨죠. 그 뒤에 별의 자손의 계략이나, 그 별의 자손들을 벌하던 여신 로키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요.〉
〈……로마니아처럼 말입니까?〉
오델리아는 최소한의 예의로서, 한때 황자였던 남자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레벨리오는 차갑기까지 한 표정으로 보드 게임의 말을 매만졌다.
〈똑같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죠.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인간의 선함을 믿고, 희망차게 지옥으로 나아갔습니다.〉
─까드득! 그의 손 힘에 기사 모양 기물에 금이 벌어졌다.
〈그 결과, 라그나로크 후에 찾아올 운명이었던 진정한 황금시대는 오지 못했습니다. 살아남았던 신들도 흑마법사, 몬스터, 이계의 존재가 창궐하는 것을 하늘 위에서 지켜봐야만 했죠.〉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 재앙 중 하나, 우신의 혈통을 받은 키아라는 음울한 미소를 띄었다.
인간의 낭만과 선함을 추구하는 우신의 자손이 거의 짓는 일 없는 싸늘한 미소였다.
〈저도 역사라면 조금 잘 알죠. 라그나로크라는 재앙 이후의 전승은 본 적이 있습니다. 신들께서 보우하시는 세계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 이상향이라던가요?〉
〈찾아오지 못한, 소멸한 미래였죠. 신군께서도 긴 시간 속세의 파멸을 지켜보셨다고 하십니다. 그 파멸을 일으키는 인간들의 무지몽매함과 욕망도.〉
키아라의 비웃음에 레벨리오도 실소로 회답했다.
〈저도 하나 묻지요.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게 여러분의 능력입니까?〉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레벨리오는 기물을 악력으로 으스러트렸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본래대로라면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죠.〉
마흐잔. 키아라. 오델리아. 에스메랄다.
그들 전부가 굴라나뢰크나 별의 자손 등등에게 죽을 뻔 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고향인 타타르니아, 로마니아, 아즈테카도 마찬가지.
진작 파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들 전부가 미래를 추구하다가 예기치 못한 재앙에 짓눌려서 죽을 운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은 지금 살아 있다.
〈그 운명을 피한 게 여러분의 힘입니까? 아뇨. 그것은 오직 한 사람의 지혜와 용력이 이뤄낸 기적입니다. 노르드 폰 울프헤딘의 업적이었죠.〉
파스스….
그는 으스러트린 기물을 일행 앞에 흩뿌렸다.
〈그런 여러분들이 보드 게임의 말과 뭐가 다릅니까?〉
〈……………….〉
〈인간은 신과 영웅을 소원합니다. 자기 앞날의 힘든 일들을 대신 해결해줄 대표를 바라죠. 정치. 전쟁. 기아. 역병. 그런 재앙을 감당하고서 해소해줄 초인에게 매달립니다.
추합니다. 역겹기 그지없죠. 이렇게 말하는 저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신군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다음 세대의 황제가 됐을 테니.〉
〈그렇게 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시겠다는 겁니까?〉
오델리아의 비아냥에 레벨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알아듣질 못하셨군요. 아닙니다. 인류는 결국 일부의 초인에게 운명을 조종당하는 멍청한 족속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겁니다.
혼돈의 총아? 하하. 어떤 혼돈이 하나된 의지에 지배당합니까? 운명을 일그러트리는 우리 인간의 힘은 역사 상 한 번도 올바르게 쓰였던 적이 없습니다.〉
고대의 황금시대가 그랬고, 현대의 로마니아가 그랬다.
의지의 힘? 혼돈의 총아?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란 이토록 어리석건만.
뛰어난 초인과 괴물이 인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건 누누이 증명되어 왔다.
별의 자손이 황제를 통해서 세계를 어지럽혔고, 노르드 울프헤딘은 그것을 자신의 재주로 고쳤다. 유상무상의 일반인들은 이렇듯 초인에게 지배받을 운명이다.
〈……분명히 그럴지도 몰라요. 세상은, 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선도하곤 하니까.〉
에스메랄다는 부정하지 못한 채로 항변했다. 이 낯선 면면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교집합은 오직 한 사람의 영웅이었다. 반론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뛰어난 사람들이 세상을 더 올바르게 이끌어주면 되잖아요.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어요. 지금보다 나아진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하면……〉
〈그따위 망상에 젖어 있으니까──!!!!!〉
순식간에 뿜어진 노기(怒氣)가 종소리처럼 왕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숨을 멎는 그녀에게 레벨리오는 격노한 감정을 다스리며 뇌까렸다.
〈그따위 망상에 젖어 있으니까, 신들조차 이미 썩어버린 가지에 아직까지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역병에 걸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죽는 무능한 부모처럼.
저희 인류는 단 한 순간도 실패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된 실패로 세상을 망쳤죠. 저 울프헤딘처럼 유례없는 영웅이 등장한 지금도요. 그렇죠? 실패자 여러분들.〉
〈레벨리오 님. 부디 노기를 가라앉혀 주세요.〉
적들을 둘러본 레벨리오는 메르키스의 목소리에 조금 감정을 추스렸다.
〈썩은 열매를 고쳐놓을 방법이 있나요? 좋죠. 함께 찾아봅시다. 세상을 바르게 다잡읍시다. 자, 그러면 그 다음은? 울프헤딘이 죽은 뒤는? 또다른 초인을 기다릴까요?〉
〈그, 그건……〉
〈다시 등장한 초인이 사악한 악인이라면요? 저 울프헤딘이 악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역대 황제 같은 필부들도 세상을 이렇게 박살냈는데, 그처럼 뛰어난 초인이 악행을 행하면?〉
세계의 운명을 그런 불확실성에 걸 것인가?
레벨리오가 보기엔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 문제, 당신의 신이라고 해서 달라집니까?〉
눈썹을 팔자 모양으로 만든 오델리아의 질문은, 그녀가 세계의 진실을 거의 모르는 처지였는데도 불구하고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우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레벨리오는 말했다.
〈다르죠. 운명은 중력과 같습니다. 합리적이고 당연한 진리만을 따르니.〉
운명의 흐름에 악의 같은 건 없다.
집에 연쇄 살인마를 숨겨준 사람이 살해당한 걸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가? 헛소리다. 그건 필연 같은 게 아니라 당연한 결과였다.
키아라는 고함 소리에 저릿해진 피부를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운명이 피하지 못할 파멸이라면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이는 중력이 변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겠지만, 그렇다면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면 될 일이죠. 그거야말로 신도 인간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운명은 결국 그런 것이다.
운명을 모르는 채로도 파멸은 예방할 수 있다. 살인마를 집에 들이지 않으면 되니까.
물론 라그나로크가 그랬듯, 간혹 가다 살인마가 먼저 집에 들어오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행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인류는 찾아올 일도 없던 살인마를 불러모으기 바빴다.
신들이 창조한 세상은 인간들의 손에 넝마가 된 것이다.
〈신대 이후의 인류사란, 인간들이 운명을 거스르는 힘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과정이었습니다.〉
보라. 신들의 시대는 수십만 년이나 유지됐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 10%도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나 파멸로 뛰어들고 있지 않은가.
레벨리오는 그렇게 믿었기에, 헤니르의 아들이 되었다.
그를 낳아준 부모가 황제와 별의 자손이었기에, 그는 아버지와 같은 신을 만났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신이 통치하면 멀쩡한 미래를 흉측한 형태로 바꿔버리는 일은 없겠죠. 인류는 이미 수천 년의 실패로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더 이상은 마지막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합의점은 찾지 못할 것 같군요.〉
땅에서 검을 뽑아낸 오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황자님. 당신의 말이 다 옳다고 쳐도, 저는 2개의 모순을 지적하겠습니다.〉
〈……들어봅시다.〉
〈하나는 설령 신이라고 해도, 인간이 실패만을 반복한 바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수천만 명의 목숨을 몰살하는 걸 옳다고 해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둘은, 그렇게 떠드는 당신 역시 인간이란 겁니다. 헤니르라는 작자가 황자님을 살려줄까요? 아니면 혹시 토사구팽을 각오하셨는지요?〉
마땅한 지적에 레벨리오의 격정에 압도당하는가 했던 일행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을 확 차렸다. 과연 오델리아는 적의 살의에도 주눅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논리로도 학살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파괴에요. 그리고 당연히, 저는 제 삶과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 파멸하게 둘 생각이 없습니다.〉
오델리아는 경직된 분위기마저 갈라버리려는 듯 우아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미 말 싸움은 무의미했다.
레벨리오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싸움이 끝난 뒤에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명심하면 되는 문제였다.
〈……흠. 천검제후님. 그건 살짝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명. 적에게 압도되지 않았던 하프 드워프가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무슨 뜻이야? 총장. 여기서 갑자기 내 등에다 칼을 꽂겠다고 하면 곤란해.〉
기껏 한 말을 동료에게 부정당하자 오델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단지, 키아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만 움츠렸다.
〈울프헤딘 경한테 혼나고 싶지는 않으니 그럴 수는 없죠. 제가 부정한 부분은 저들의 광기 어린 학살이 잘못됐다는 말에 대한 게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해줄래? 그게 아니면 뭐를……〉
중얼거리는 중간에 오델리아는 답을 눈치챘다.
〈……설마?〉
〈예. 그 설마인 모양입니다.〉
드워프와 우신의 혼혈. 직업도 출생도 몬스터와 밀접한 모험가 길드 연합의 총장은 뱀 같은 세로 동공으로 눈동자를 바꿨다.
〈신으로 추대받은 인간이라. 낭만은 있지만, 제 취향은 아니군요.〉
그의 육신을 흐르는 피와 그 몸에 쌓은 역전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황자도, 운명을 일그러트리는 인간도 아니라고.
〈저번에 어느 백작님께 쓴 소리를 들어서요.〉
메르키스에게 모자를 받은 레벨리오는 긴 챙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신봉하는 분에게만 책임과 바람을 떠맡기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쉬잉!
레벨리오는 용의 뼈로 만든 장검을 쥐었다.
〈……여기는 모험가 길드와 아우렐리우스 기사단. 타타르니아 엘프들 덕에 레벨리오 황자와 안대를 낀 신족을 찾아냈다.〉
오델리아는 노르드가 준 메달에 대고 간단하게 연락을 남겼다.
〈따라서, 현 시간부로 전투에 들어간다.〉
긴 말로 떠들고 있을 틈은 없을 듯 했으니까.
장검을 쥔 레벨리오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만 비켜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신군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실 듯 하니.〉
〈아니오. 그런 염려는 마시길. 당신도, 당신의 신의 꿈도, 오늘 여기서 끝날 테니.〉
살기를 흘리는 레벨리오에게, 카네쉬에서 얻은 유물을 쥔 키아라는 미소로 화답했다.
〈저는 초과근무를 싫어하거든요.〉
믿음에는 보답한다. 모험가의 철칙이다.
그 신조를 어긴 적이 없기에, 키아라 콜리도는 모험가 길드의 수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