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퍽.
머리가 깨부숴진 메르키스가 앞으로 엎어졌다.
【신, 군님……】
두개골에 생긴 큰 균열에서 생각하는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내부 장기는 인간과 별로 다르지 않은 그녀는 죽음까지의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입을 더듬거렸다.
메르키스의 눈에서 안대가 풀렸다.
지워없앨 세상을 보지 않고자 가렸던 눈동자는, 이제야 그녀가 부순 왕궁의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천장보다 위에 있는 이 세상의 하늘도.
머리에서 피를 쏟던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덧없고, 아름답군요. 이, 세상도…】
파스스….
심장에 봉인했던 불꽃의 정령은 주인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과부하로 터질 듯한 심장을 붙잡고서 메이링은 폐의 공기를 꺽꺽거리며 토해냈다. 이 육체는 우신 토나슈일루카틀의 무녀로서 받은 저주이기도 했다.
【끅……! 으큭……!】
우신도 그 숭배자들도 괴멸한 지금에야 저주를 통제할 사람이 없지만, 메이링 자신도 이 저주를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호흡하세요. 심장이 2개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 메이링의 어깨를 어떤 손이 붙잡았다.
마치 거대한 용의 발톱이 어깨에 무게를 실는 듯 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돌아보자, 그곳엔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키아라의 얼굴이 보였다.
【바이츠니아 분이시면 『심법』인가 하는 마나 연공법을 아실 겁니다. 몸 안에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샘솟는 힘과 피를 그곳에 흘려 보내세요.】
스으으, 후으으으…!!
불꽃처럼 뜨거운 빛덩이를 구강에서 불태우면서 메이링은 조언에 따랐다.
아랫배에 묵직하고 사나운 피를 몰아넣자,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지만 통제하기 힘든 용력은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감사합니다. 그, 콜리도 님?】
【키아라라고 불러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싱긋 웃는 소년 얼굴의 모험가는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었다.
같은 드워프 혼혈이라서일지도 모른다. 고향엔 드워프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모험가 길드 연합의 총장이라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힘을 통제하는 법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모험가라는 건 그런 방면의 지식도 얻는 걸까.
호기심을 느끼던 메이링은 왠지 그녀의 원수를 물어죽였던 웅용한 용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바이츠니아는 황금과 용이라고 하면 환장하는 법이었다.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키아라의 출신을 눈치챈 사람은 노르드 일가를 빼면 공투했던 파라오밖에 없었다.
당연히 진실을 알지 못하는 메이링은 뺨을 닦으면서 망상을 잊도록 노력했다.
얼굴에 튄 얼룩은 닦았지만 목덜미가 후덥졌다. 메이링은 키아라라면 뜨거워진 몸을 가라앉히는 방법도 알지 않을까 했지만, 입을 열고 바로 닫았다.
남자에게 ‘몸이 뜨거운데 어떡하면 좋을까요’란 질문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큼, 큼! 키아라 님이 여기에 계신 걸 보면 전직 황자는 제압하셨나 보네요.】
【네. 천검제후께서 끝을 내 주셨죠.】
【다, 다행이네요! 아! 키아라 님도 정말로 멋진 싸움이셨어요!】
허겁지겁 칭찬하는 메이링에게 키아라는 적당히 웃어주었다.
오델리아한테는 저렇게 말했지만, 이 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나면 역시 딸이나 손녀를 보는 기분이 앞서니 곤란할 따름이었다.
‘제 사고관이 인간에 가까워서일지도 모르죠.’
수백 살을 먹고도 인간들과 결혼하곤 하는 장수종족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아, 웃는다. 귀여워.’
호감은 산 것 같다며 메이링은 조금 안심하고, 왜 자신이 안심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애써 잘못 없는 돌멩이만 발로 굴려댔다.
『……제길. 나도 결혼 마렵네.』
마흐잔은 엉덩방아를 찧고는 투덜거렸다. 그런 후에 레벨리오 쪽을 흘겼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10척은 멀리 떨어진 황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피범벅의 에스메랄다 황녀가 비척거리며 다가섰다.
오델리아는 검을 들었다. 아직 그의 목을 쳐 줄 정도의 온정과 힘은 남았으니까.
〈남길 말은 있나 모르겠네.〉
〈……동생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족은 아니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그런 걸 물어볼 자격이 있어?〉
〈목적을 못 이루게 됐으니, 죽은 뒤의 일에 좀 관심이 생겼을 뿐입니다.〉
내장을 쏟으며 하는 질문에 에스메랄다는 그만 눈을 돌렸다.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날을 손 잡고 보낸 오라비였다.
〈물러나 계세요, 에스메랄다 양.〉
〈……아뇨. 볼게요. 보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델리아는 길게 설득하지 않았다. 배려는 했다. 더 이상은 동정일 따름.
단지, 체념한 것처럼 태연한 레벨리오의 표정은 불쾌했다.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너나 황제나 똑같아.〉
…부릅! 레벨리오가 눈을 찢어져라 떴다.
〈따르는 신이 다를 뿐이지, 인류를 등진 모반자라는 건 피장파장이잖아? 네 인생을 망친 놈들을 찾아서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떠드는 말도 못난 자기변호 뿐이지.〉
검을 맞았을 때보다 훨씬 크게 감정이 요동치는 그에게 오델리아는 경멸하듯 말했다.
〈과격한 신조는 원한에서 태어나지. 너는 결국 별의 자손들이 휘두르기 쉽다고 황제로 뽑을만큼 그릇이 작아빠진 광신도일 뿐이야, 멍청한 놈.〉
〈……하하, 빌어먹을.〉
그는 큭큭거리며 분한 것처럼 이를 악물다가도, 머리를 뒤로 젖히며 축 늘어졌다.
〈그 원한이라는 걸, 아멜리아의 주인한테 갚아주고 싶었던 건데 말이야.〉
─썩둑!
빛이 번뜩이자 황자의 목이 땅을 굴렀다. 오델리아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에스메랄다는 성표를 쥐고 성수를 뿌렸다.
〈……안녕히 가세요, 오라버니.〉
영혼이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걸 느끼며, 손을 모은 그녀는 나지막하게 기도했다.
〈당신이 망치려고 했던 나라의 끝을, 저는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보겠어요.〉
***
─쿵!
나는 가슴에 빵꾸를 뚫어준 헤니르를 내던졌다.
“아아, 이건 「박제」라는 것이다.”
바닥에 꽂자 브류나크가 헤니르의 힘을 빠르게 빨아들였다. 노인의 몸에서 생기가 사라지며 진짜 시체처럼 변해갔다.
로키는 힘들게 걸어와서는 적당히 주저앉았다.
“괜찮냐?”
부축해주자니 헤니르 새끼를 붙잡고 있는 게 더 중요했다.
“됐어. 죽기야 할까.”
로키는 손을 젓고 가슴팍을 열었다. 그 가슴의 상처는 번갯불로 메워져 있었다. 성뢰신 베스타의 신좌였다. 내가 수르트의 불꽃으로 연결했다.
심장 이식 수술이 아니라, 신좌 이식 수술이다.
“임시방편 치고는 괜찮았어. 사람들의 신앙을 가져와 쓰기도 편했고.”
찌직…! 신좌를 떼어내는 로키.
그럴 수밖에 없던 게, 계속 붙여놓고 있기에는 그녀와 베스타의 신좌가 그렇게 상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차원과 열(熱)을 다루는 로키랑 최소한의 공통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신좌를 내게 준 그녀는 대뜸 헤니르를 꼬라보며 말했다.
“죽은 거지?”
“죽었어. 확실하게.”
창세신이자 태초신이었던 신은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죽었다. 끝의 끝까지 자신이 벌였던 짓을 후회하지 않고, 인간을 증오하면서 말이다.
역시 범죄자 새끼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아니, 유언은 남긴 거나 다름 없지. 곱게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단 거니까.”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로키가 말했다. 그렇게 선명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알기 쉬운 표정이라도 짓고 있었나 보다.
“그래…… 다 끝났네. 정말로 길었어.”
로키는 아예 드러누워서는 보일랑말랑하게 미소지었다.
…두근!
브류나크가 신좌와 마나 계승을 마친 듯 맥박을 쳤다.
내가 직접 흡수하지는 못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지. 내 분신인 브류나크가 강해지는 건 내가 강해지는 거랑 다를 게 없기도 하고.
특히 마법을 쓸 때는 브류나크가 보조 A.I.로서 도와주니까 말이다.
“인공신좌는 제대로 챙겼어?”
─웅웅!!
“그래, 수고했어. 7대신 교단에 돌려주자. 내가 갖고 있어봤자 쓸모 없고.”
물론 뽕은 뽑아낼 만큼 뽑아낸 다음이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혈수마공으로 헤니르의 시체를 불태웠다.
화르르르르….
오딘으로 위장한 ‘심해의 군주’가 썼었다는 노인 같은 몸은 재가 되었다.
오딘이 기록에 할배로 남겨진 건 그녀가 신분을 감출 때 그렇게 변신한 것도 있었겠지만, 신대의 말미에서는 ‘심해의 군주’가 이 육신으로 돌아다닌 탓일 것이었다.
신대보다 이전, 별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계속되던 역사의 한 페이지.
그 종지부를 내가 찍게 되다니. 아무리 나라도 과연 신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응?”
감상에 잠겼던 나는 잿더미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승려가 남기는 것 같은 사리였다.
헤니르 새끼, 비건이었나? 분석해 보자 권능의 파편 같은 것이었다. 인공신좌를 회수하려면 브류나크로 흡수해야 해서 영혼은 회수 못했는데, 별 게 다 남았군.
“깔쌈하게 슛~!”
아무튼 역시 마지막은 인성질이지.
싸이코 새끼의 뼛가루를 걷어차서 날려버리고, 사리를 챙긴 나는 로키를 돌아봤다. 다행히 내가 티배깅을 해도 별로 개의치 않는지, 누워만 있는 그녀였다.
“로키. 슬슬 일어나. 혹시 싸움이 안 끝난 데가 있으면 도와주러 가게.”
팔찌로 만든 브류나크를 손목에 차며 말했지만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라왔다.
“로키? 야!! 일어나 봐, 로키!! 로키!!”
대답은 여전히 없다. 안색이 파래진 나는 얼른 그녀를 일으켜 안고 뺨을 두들겼다.
“로키!!!!!!”
“흐이아으이아익?!”
─벌떡! 눈을 뜬 로키는 팔다리를 휘저었다.
“뭐, 뭐, 뭔데?! 무슨 일인데?! 왜?!”
허둥지둥 거리던 그녀는 자기가 열어놔서 거의 훤히 드러난 유방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브라자도 안 차고 다니는 망할 할매는 앞섬을 여미며 나를 쳐다봤다.
“……이런 빈약하고 쬐끄만 몸에 관심이 있니? 내 원래 모습이라면 뿅 가도 별 수 없지만, 크라운 크라운이 생전에 몇 살이었는지는 알아?”
“이 장모장모년이 뭐라는 것이지? 매콤한 불꽃 효도 펀치를 처맞고 싶음을 암시?”
아잇씨팔,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애미애비 없이 독립시행으로 태어난 년답게 내 복장을 뒤집어 놓는군.
왜 얘기하다 말고 퍼질러 자고 지랄이야. 존나 빡침을 주체 못한 나는 로키의 뺨을 붙잡고 이마 한가운데에 손가락 딱밤을 거듭했다.
“악! 익! 엑! 헥! 아파! 아프다고! 미안하다니까!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는 건 거짓말이라니까! 나이 처먹고 몸을 험하게 굴리면 등만 눕혀도 졸음이 솔솔 온단 말야!”
“그니까 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쳐 자냐고. 뒤질 거면 침대에서 평화롭게 뒤져. 지금 콱 죽어버리면 내가 험허게 굴려서 죽었다고 덤터기 쓸 거 아냐.”
“……농담이 너무하지 않니? 장난 좀 쳤기로서니 그러기야? 나 같은 광대는 10분 간격으로 농담을 하지 않으면 혓바닥에 가시가 돋는 걸 어떡해?”
“에이, 뭘 그렇게 서운해 해. 당연히 진심이지.”
“그, 그렇구나. 진심이구나…… 어라? 나…… 왜 눈물이……?”
그렇게 우리가 하찮은 콩트를 찍고 있을 때였다.
빠지직… 빠직!
헤니르가 싸지른 똥, 다시 말하자면 차원에 간 금이 쩌적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건 수습이 된 것 같은데 한 줄기만 길쭉한 게 남아 있었다.
“머여 시발? 설마 저건 못 고치나?”
“어? 살아남은 애들이 그렇게 폐급인가?”
로키도 당황한 것처럼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음. 그러고 보니 나 아직도 얘를 안고 있었네. 적당히 옆으로 밀쳐버리자 균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더러 능력을 탓하는지 모르겠군, 오딘의 광대여.
“뎃? 이 목소리, 혹시……”
내가 고개를 꼬자 여성의 무뚝뚝한 음성이 바로 긍정했다.
─기억하고 있는가 보구나, 이방의 전사여. 다시 만나서 기쁘구나.
“아뇨 그, 성함이 순간 생각이 안 나서…… 아, 맞다. 사티스 님?”
─……맞다. 나르메르-나일의 수렵신 사티스다.
“근데 말투가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 가오 잡다 말고 떠나실 때 진짜 말투 커밍 아웃 하셨으면서. 그래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또 폼 잡고 계시길래 다른 분인가 했슴다.”
─……망할. 그걸 굳이 지적해야겠어?
털털한 말투로 돌아간 그녀는 삐진 듯 말했다.
─그것보다 혹시 내 동상 같은 건 없어? 지상에 신앙이 좀 남아 있어서 그나마 강림할 수 있는 게 나 정도인데, 강림에 쓸 빙의체가 있었음 하는데.
“동상요? 따로 받은 게 없는데요. 기념품을 살 걸 그랬나.”
품질이 쓸데없이 높은 게, 무슨 성인용 피규어 같아서 일부러라도 안 샀는데.
별 수 있나. 허접한 흙 계열 마법으로 적당하게 인형을 만들었다. 사티스는 진짜 싫은 듯 했지만 필요한 일인지 그 작은 흙인형에 들어갔다.
꼼지락대는 인형을 본 로키가 빵 터졌다.
“으히히히히힉! 더럽게 못생겼네, 진짜!”
“그 입 안 닥쳐? 젠장. 한 대 갈겨주고 싶은데 때리면 죽어버릴까 봐 하지도 못 하겠네. 혹시 나 대신 좀 때려주지 않을래?”
“앞으로 심심할 때마다 불러서 딱밤 날릴게요. 그러니까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는지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키가 저 말이 농담인지, 아니면 그냥 욕 보기 적에 빨리 죽는 게 더 곱게 가는 건지 고민하는 듯 했을 때였다. 사티스가 위엄 쩌는 포스를 뿜으며 말했다.
“천상에 못 박힌 신들의 총의를 대변(代辯)하여, 나 사티스가 고하노라.”
“그런 거 말고요. 간단하게.”
“……우리들이 알기로, 이제 【중간 가지】에서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녀석은 로키 정도밖에 안 남았어. 헤니르, 그 개자식도 드디어 골로 갔고.”
의외로 말귀가 통하는 여신님은 헤니르에게 몇 마디 악담을 뱉었다.
그러게. 너무 곱게 보냈나. 뭉게뭉게 총살타에다 힘을 너무 실었던 내 잘못이다.
“그러니까, 제안이 하나 있어.”
얼굴이 삐뚤빼뚤한 흙인형은 진지하게 말했다.
“로키, 저 멍청이의 상처를 고쳐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