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귓속말이야? 온당하지 못하네.”
우리의 속삭임을 들은 마틸다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말을 멈췄다.
심념을 연결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도박장에서 그런 수작질을 좌시할까. 당장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일도 아니니 개쪽당하기 전에 관두자.
“판돈을 거는 걸 잊었는걸.”
─촥! 카드를 받은 마틸다가 말했다. 나는 패를 살피고 표정을 간수했다.
똥패였다. 인생 시발.
“배팅은 매 승부마다 하는 거 아니야?”
프랑이 지갑을 열었다. 돈을 꺼내려는 거겠지만 마틸다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딱 봐도 돈 좀 잃는다고 속을 쓰려할 것 같진 않아서.”
“곤란한데. 겉만 번지르르한 거지라서.”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마틸다는 깔깔거렸다.
“거짓말은 지루하고 재미없어. 멋진 남자한테는 어울리지 않지.”
자연스럽게 남자를 치켜세우며 그녀가 칩을 몇 개 꺼냈다. 색칠도 되지 않은 나무 칩이다. 10개에 1쿠퍼 가격인, 제일 저렴한 판돈이었다.
“1등이 진 사람들 중에서 1명을 골라서 간단한 명령을 하는 건 어떨까? 아, 물론 선을 넘는 짓은 곤란하고…… 이 가게 안에서 실행 가능한 걸로.”
“예를 들면?”
“그렇네…… 나랑 1분 동안 키스해, 같은 거?”
마틸다는 요염한 얼굴이 거짓말인 것처럼 맑게 웃었다. 이건 또 순수한 웃음이라서 놀라웠지만, 난 저절로 눈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싫어? 욕심 많은 남자네. 그럼…… 이 가게가 숙박업도 한다는 거 알아?”
“……숙박업이 뭐 어쨌다구?”
음탕한 미소를 짓는 마틸다에게 눈을 부라리는 프랑. 마틸다는 깔깔댔다.
“어린 아가씨한테는 너무 어려웠나? 나중에 그이한테 물어보렴!”
프랑은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거 오늘 데이트는 일진이 안 좋은가.
카지노에 오지 말 걸 그랬나. 프랑이야 기분이 나빠진다고 나한테 화풀이를 할 성격이 아니지만, 그녀의 기분은 곧 나의 기분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이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 걸 의아하게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눈을 부라리며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가 질투심과 나를 향한 집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게 또 꼴리는 거거든요.
“흐흐흐. 귀엽긴.”
나는 프랑을 끌어안고 뺨에 키스했다. 사랑스런 아내님은 깜짝 놀랐다.
“어, 자, 잠깐만. 노ㄹ……”
“쉿.”
프랑의 입에 검지를 댔다. 프랑은 조금 전까지 기분 나빠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부끄러운 듯이 몸을 꼬물거렸다. 앙증맞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고 싶네.
마틸다의 눈이 꿈틀거렸다.
“……흐응. 나는 이겨서 따내야 하는 판돈을 그 꼬마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시다?”
“해석은 네 자유지. 망상이 자유인 것처럼.”
나는 이 마틸다라는 여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여자로서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냐고? 개소리는 그쯤하고.
그게 아니라, 데이트 중에 이렇게 알기 쉽도록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어주는 동네 금태양 같은 여자라서 고맙다는 얘기다.
인터넷 게시물의 제목이 ‘잼민이 참교육당한 썰’이면 잼민이가 까불거리는 묘사도 참교육 전까지의 즐거운 기다림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네 제안은 받지. 받고, 하나 더.”
그래서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판돈은 이 가게의 칩 대신, 은화로 하지.”
“……당신 제정신이야? 이 게임에 칩이 몇 개씩 오가는 줄 몰라?”
마틸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렇겠지. 가장 저렴한 칩은 1쿠퍼에 10개 짜리인 무색 칩인 듯 했는데, 내 얘기는 이 칩을 그냥 은화로 걸자는 소리였으니까.
막말로 판돈을 1000배로 올리자는 거였다.
“실례지만, 손님? 본점의 지정 칩을 써 주시지 않으면……”
“칩 수수료는 내겠습니다. 계산 잘 해 주십쇼.”
“그러시다면야.”
군소리 컷. 나는 패를 팔랑거렸다.
“동방에는 이런 농담이 있지. 치매 예방에 제일 좋은 운동은 판돈이 센 도박이라고.”
아니, 저희 나라에 그딴 농담 없는데요?
딱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바이츠니아 황녀님을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나는 지갑에서 꺼내든 은화를 1장 테이블에 올렸다.
노르드 환율에서 은화는 약 100만원.
무려 최소 배팅액이 100만 원짜리 판이시다.
“이런? 자칫하면 오늘 집 기둥도 뽑히겠습니다?”
눈치 빠른 키아라가 잽싸게 은화를 1장 올렸다. 돈도 많으면서 엄살은.
“……큿.”
메이링 황녀도 죽상이 되갖고 고민하다 판돈을 꼴았다.
“미, 미친 거 아냐? 너희 작당한 건 아니지?”
“맹세라도 할까? 애초에 우린 외지인이고 여긴 네 홈 그라운드 같던데, 사기를 의심할 거면 우리 쪽에서 의심하는 게 더 지당하지 않나?”
“윽……!”
망설이는 마틸다. 나는 다리를 꼬고 도발했다.
“흐음…… 아니면 혹시, 돈이 모자라신가?”
“뭐?! 너, 너 지금 뭐랬어?!”
“쫄리면 뒤지시던가. 나랑 어울릴 끕이 안 되는 게 잘못은 아니거든.”
나는 자기 여자를 보듬는 마초이즘 중병환자가 된 것처럼 프랑을 끌어안았다.
한손에 여자를 끼고 도박이라. 배드 애스 흉내 같아서 좀 오글거리긴 하네.
“……앗.”
눈을 깜빡거리던 프랑은 내 의도를 깨달은 듯이 느낌표를 띄우고는 역시 은화 1장을 올려두었다. 이로써 돈을 걸지 않은 건 마틸다 뿐이었다.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좋은 날에 신분을 과시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데. 너보다 더 높은 분이 헌병한테 부자님들 체포를 명령한 날이다?”
내가 낄낄대자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에 버금가게 시뻘개졌다.
‘인성질에는 인성질이 답이지.’
애매한 부자일수록 더 나댄다는 건 만고의 진리.
노벨화학상 수상자한테 서울대 신분증을 들이밀면서 자랑하는 듯한 여자다. 이런 수준 낮은 상대에게 빡쳐 한다? 아, 그럴 이유가 하등 읎거든요.
이세계 귀족들의 자존심은 거의 금전적, 신분적 우월감에 기인한다.
이토록 저렴한 상대에겐 짜증을 낼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죽은 줄 알아. 후회하지나 마!”
살살 긁어주자 마틸다는 졸부 같은 가방에서 한 웅큼의 은화를 꺼내서 배팅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흥분했군. 첫 판에는 네가 말했던 명령이 어쩌니 하는 판돈은 없는 걸로 하지. 머리를 조금 식히지 않으면 싸움밖에 더 되겠어?”
감정이 섞이면 말도 안 된다, 인정 못한다 하는 말싸움 끝에 피를 보는 법이다.
내 생각대로 도박장의 생리에 익숙한지 그녀도 그 점은 이해한 듯 멈칫했다.
“……싫다면?”
“파토나는 거지 뭐. 우린 다시 놀러가는 거고.”
나는 프랑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배알 꼴리라고 한 짓 맞다.
물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마틸다가 물러설 리 없다.
“딜러! 뭐해! 빨리 카드 안 깔고!”
“예.”
이 카드 게임의 룰은 포커와 비슷했다. 배팅할 타이밍이나 조합이 다르긴 하지만, 사람 생각이야 다 거기서 거기인 걸지도 몰랐다.
─샥샥.
다른 점이 있다면, 참가자들이 테이블에 깔아둔 카드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
나는 카드를 대충 집었다.
조합이 안 나왔다. 오늘 운이 안 좋은 날 맞네.
“1닢 더.”
똥패인 것에 아쉬워하지 않고, 나는 거침없이 몇 장이나 은화를 쌓았다.
프랑은 혹시 마틸다가 밑장을 빼지는 않는지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 했지만, 놀랍게도 이 갬블에 자신이 있는지 마틸다는 자기 능력만으로 배팅에 달라붙었다.
“히익……! 포, 포기할게요!”
총 예산은 몰라도 포켓 머니로는 제일 후달리는 황녀가 먼저 아웃.
“아, 저도 나가리군요.”
은화를 5장 쌓은 시점에서 키아라가 죽고, 남은 3명이서 배팅을 계속했다.
“다이.”
그리고 나까지 떨어져나가고, 승부는 50실버치 테이블의 1대 1 승부.
최후의 승자는…… 마틸다였다.
“……후, 후후후! 아하하하!! 봤지?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순식간에 5천만원을 딴 마틸다는 신나서 은화를 긁어모았다. 하지만 아까 전까지였다면 씩씩댔을 프랑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숨을 한 번 쉬었을 뿐이다.
“……미안, 졌어.”
“뭘. 잘 했어. 재밌었으면 됐지.”
나는 의자를 당겨붙어서 프랑과 꽁냥거렸다.
은화를 보며 웃던 마틸다가 경직됐다. 이 인간, 진짜로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얼굴도 가렸는데 왜 저런데?’
근육 페티시라도 있나. 옷을 두껍게 입고 올 걸 그랬다.
“……흐, 흐응. 탈탈 털리고 나서 위로나 나누긴. 눈물 겨운 연인 납셨어.”
“털려? 누가? 아직 첫 판인데.”
“후후후, 그렇게 나오셔야지! 둘 다 발가벗겨서 노예 각서를 쓰게 해 주겠어.”
“합법 도박장에서 퍽이나 되겠다.”
그런데…… 노예가 된 프랑이라.
목에 사슬을 메고, 허름한 옷을 입고 여기저기 더러워진 프랑……?
‘쓰으읍…… 꼴리는데.’
이 년 천잰가? 나중에 저 컨셉으로 섹스해야지.
그렇게 둘째 판이 돌았다.
“1실버씩 배팅해. 한 번 졌다고 금액을 낮추는 찌질한 짓은 하지 않겠지?”
마틸다는 우리를 조롱하듯 은화를 한 닢 꺼내서 앞에다 던졌다. 신나셨군 아주.
메이링까지 1실버를 올려놓자, 빠르게도 레이즈 시간이 돌아왔다.
─불끈!
프랑은 이번에야말로 이긴다는 마음으로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패가 좋은지 두 다리를 쫑쫑쫑쫑 흔들고 있다.
‘아, 이러는데 어떻게 안 꼴리냐고.’
쥬지드라가 절로 펌핑되는군.
“배팅해. 네 차례잖아?”
마틸다가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벌써인가.
나는 지갑에 손을 쑤셔넣고, 은화를 몇 장 꺼내다가 올려놓았다.
“레이즈. 50실버 걸지.”
“……허?”
마틸다는 번쩍이는 은화를 보더니 웃다가 말고 멍해졌다.
“아까 전 판이 50장이었지? 그럼 이번엔 일단 50장씩 올려두고 시작하자고.”
카지노 측에서 제일 위협적으로 여기고, 반드시 저지하는 전략이 뭔지 아는가?
‘질 때마다 잃은 돈의 2배를 배팅하는 거지.’
100만원으로 졌으면 200만원.
200만원으로 졌으면 400만원.
그렇게 쭉쭉 돈을 쌓다가 800만원 짜리 판에서 딱 1번 이기면 OK다.
‘600만원을 잃지만 800만원을 따게 되니까.’
100번을 져도, 1번이라도 이기면 승리.
수학적으로 보면 당연한 계산이다.
충분한 자금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전법이 있기에, 대부분의 카지노는 판돈에 제한을 걸거나한다나 뭐라나.
‘그렇기 때문에 칩을 쓰는 거지. 판돈이 일정량 이상이면 테이블이 가득 차니까.’
하지만 은화라면 어떨까.
은화로 테이블을 꽉 채운다? 마틸다가 갬블에다 꼴아도 되는 금액으로 그게 될까?
─벌떡! 마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정신이 아니야!! 50실버란 말이야, 50실버!!”
“총 배팅액은 1골드지. 네가 콜 한다면.”
나는 수수료에 벌써부터 흥분한 딜러가 가져다 준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지금 1골드라지 않았어?〉
〈어어? 할리, 할리! 이리 와 봐! 쟤네들 은화를 칩으로 쓰고 있다고!〉
마틸다의 째진 비명에 카지노 사람들의 주목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유희왕 매장에서도 게임을 하면 1~2명 정도는 구경하러 온다던데, 1억짜리 도박이면 안 모일 수가 없지.
마틸다의 손이 떨렸다. 방금 딴 돈이 바로 날아가는 배팅이니까.
나는 테이블의 정황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1초 전까지는 그랬다.
─쾅!
“나도 콜 할게!”
프랑이 배팅했다. 번쩍거리는 로마니아 은화가 딱 50장.
“힉?!”
해맑은 미소를 되찾은 그녀의 말에 마틸다는 뺨 양쪽을 번갈아 맞은 것처럼 작게 비명을 질렀다. 은을 두려워하는 뱀파이어와 같은 비명이었다. 이 년, 역시 언데드 몬스터였나.
나는 개소리를 맛 좋은 술과 함께 삼켰다.
“꼴랑 1골드 50실버 갖고 뭘 그래.”
뭐? 1억 5천? 도박 영화라면 기본 배팅금이지.
‘이래서 미-개한 이세계 귀족들은 안 된다니까.’
타짜도 안 본 놈이 도박을 알겠냐고. 깔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