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07화 (905/1,009)

***

오프툼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너무 일찍 왔나.’

기다리는 약속 상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가 약속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와서다.

기다림이 지루하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다.

원래 싸움과 복수, 그리고 그걸 위한 조사 외엔 남은 삶을 소비하는 방법도 잊어버렸던 그다. 어디 있어도 똑같이 기다릴 뿐인 시간이라면 조금 일찍 나온다고 대수겠는가.

‘이런 때까지 소문 수집이라. 철두철미하군.’

그는 자신이 오늘 외출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당신에게 위로부터의 일을 맡기겠습니다.

약 냄새가 나는 검은 로브로 몸을 감추고, 새를 비롯한 동물을 동반한 여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고용주 양반의 ‘정보상’은 대뜸 그런 부탁을 해 왔다.

─설명은 필요없겠죠. 파일을 두고 가겠습니다.

─불온한 흐름이라도 포착됐나?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의 정보 수집입니다.

오프툼은 정보상의 의뢰를 승낙했다.

‘저만큼 철저한 조사원이다. 유의미한 일이겠지.’

사실 무의미한 일이어도 상관 없었다. 급한 일도 없었으니까.

‘정보를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정보상 캐서린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언니 오드리의 생떼라는 걸 모르는 채로 오프툼은 자기 시계를 챙겨넣었다.

오프툼도 캐서린의 얼굴은 알지만, 본업에 한해서는 언니에 비해 훨씬 치밀한 여동생은 자신의 이중신분을 완벽히 감췄던 것이다.

〈오프툼 씨! 기다리셨죠!〉

조금 간드러진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옷과 악세서리를 깔끔하게 꾸민 오드리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급하게 뛰실 것 없소. 나도 금방 왔으니.〉

〈아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오늘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공방 일 때문에 왔는데, 이 알콩달콩한 분위기에서 여자 혼자 돌아다닐 용기가 없었거든요!〉

그럴 수밖에. 연인들의 축제에 혼자 돌아다니는 묘령의 여성이라니. 안타까운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연인인가.’

오프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족의 죽음을 언제까지고 끌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새 가정을 꾸리는 꼴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처지였다. 사티스의 사냥개란 그런 것이었으니.

‘언제고 사티스님의 곁으로 가게 될 몸. 천수를 누리며 과업을 수행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런 내가 사랑이라. 지나친 사치겠지.’

답이 나올 리 없는 고민은 그만두도록 하자.

오프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맞게 말했다.

〈나야말로 권유에 응해주셔서 고맙소. 즐거운 하루가 되면 좋겠군.〉

〈네! 물론이에요!〉

오프툼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웃다가도, 내심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나저나…… 니르바나 양은 왜 나한테 신분을 숨기는 건지.’

그래야 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거라기에는 위장이 너무 허술한데.’

그녀가 뒷세계의 직장 동료인 ‘니르바나’라는 건 진작 눈치챈 오프툼이었다.

〈……저 바보 언니.〉

정보상의 직감으로 그 사실을 눈치챈 캐서린은 그들의 오해와 착각으로 얼룩진 데이트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미행하며 탄식하고 말았다.

***

“선배! 데이트 코스를 짜 봤어요! 어떤가요~? 이 천재적인 스케쥴표♡!”

“스케쥴을 5분 단위로 짠 게 아다 느낌이 나서 좋네요. 4/5점 드립니다.”

“과연! 그럼 불태워버릴게요☆! 불꽃의 열기가 제 눈물을 감춰줄 거에요!”

“아니, 그렇다고 울지는 말고.”

라리루라는 내 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날 잡아끌듯이 축제 현장으로 대쉬했다.

“여기에요, 여기! 라벤나폴리스에서 다과가 맛있기로 제일 유명한 찻집!”

관광진흥지를 품에 안고 손가락질을 하는 우리 후배님은 오늘도 절호조다. 워낙 기운이 넘쳐나서 끌려가는 나까지 다 즐거워진다.

간단한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질문 타임.

“프리실라. 오늘 일정은 뭐야?”

우리 사이의 약속. 단 둘이서 데이트 중일 때는 본명으로.

마침 신분도 감춰야 하니 적당했다. 라리루라야 맨날 선배라고 부르니 상관없고.

─번쩍! 문화상품권이 걸린 퀴즈에 나온 초등학생처럼 거수하는 핑크 후배님.

“네에, 선배♡! 점심까진 볼만한 이벤트도 별로 없고, 선배랑 꽁냥대면서 즐겨볼까 합니다! 이런 세련된 미인과 함께 보내는 하루라니, 평생의 추억으로 남기셔도 된다구요~?”

“또또 까불지.”

얼굴을 가리면 뭐해. 말투가 전혀 바뀌질 않는데.

반지의 힘이 로마니아에서도 은근히 알려진 귀염상을 감춰주고는 있지만, 폭신폭신한 팬케이크─를 닮은 빵─에 몰두하는 라리루라는 거침없는 정상영업 중.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상큼한 아우라는 숨길 수 없는 걸까.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적지 않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장 일정이 없으면 옷가게부터 좀 들리자.”

“네? 옷가게는 왜요?”

포크를 물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라리루라.

“저만을 위한 패션쇼를 선보여 주시려는 거라면 마음은 갸륵하지만요~? 그렇게 멋진 구경거리를 보여주시면 제가 정신이 팔려서 하루가 순식간에 끝나버려요?”

“당연히 네 옷이지. 그리고 가구도.”

나는 달다구리한 빵을 씹었다. 커피가 땡기는군.

“우리 저택에 있는 네 방, 텅텅 비었잖아. 옷도 그렇고 가구도 그렇고.”

처음에는 비어 있는 걸 봐도 ‘얘가 아직 물건을 채울 시간이 안 나나?’ 했다.

하도 이리저리 끌고 다녔으니까 당연하잖은가? 원흉인 내가 ‘왜 옷을 안 삼? 사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소리를 하면 아무리 라리루라라도 하이킥을 날릴 거라고.

그런데 정작 여유가 꽤 나기 시작한 뒤에도, 저 간촐한 방은 한사코 미니멀리즘.

조금 정돈하면 입주하기 전의 방이라고 말해도 믿을 듯 했다.

‘생각해보면 사르가디스에 살 때도 간소했지.’

어릴 적에 쓰던 랜턴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우리 후배님 아닌가.

결혼식 비용도 본인의 혼수비용에서 충당해버릴 만큼 저축도 잘 하고 견실한 그녀지만, 정작 돈이 많아진 지금도 소비가 거기에 못 따라가다니?

“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지, 라리루라는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게요? 제가 전에는 서커스 단원이었잖아요?”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도거든요? 아무튼 그때는 유랑 생활이어서 개인물품은 가벼울수록 좋았단 말이죠? 짐마차가 있긴 했지만 여관에 갈 때마다 풀었다가 정리하는 것도 일이고요.”

“그 버릇이 아직까지도 남았다?”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선배가 말하기 전까진 불편한 것도 눈치 못 챘었고?”

라리루라는 포크에 묻은 빵 조각을 날름댔다.

말끝이 의문문으로 끝나는 게 좀 부끄러운 듯한 눈치였다.

“……앗?! 혹시 제가 옷이나 머리모양 같은 데 변화를 주는 걸 게을리한 탓에 ‘지루하고 따분한 계집이로군’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맨날 박사 가운하고 전통 드레스만 입는 너드 여신 콤비를 저격하진 말아줄래.”

살짝 불쌍해져서 나도 모르게 지적하고 말았다.

데이트 중에 다른 여자 얘기를 꺼내는 건 NG라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요! 그치만 옷은 창세의 권능으로 만들어도 되는데요?”

의외로 진짜 걱정했는지─저맘때 여자애라면 옷 못 입는다는 소리가 쓰라리게 들릴 법은 했다─, 라리루라는 마음을 놓은 듯 마음을 쓸어내렸다.

꽤 큰 가슴이라서 쓸어내리기도 힘들어 보이네.

“번 돈을 지역사회에다 유통시키지 않으면 졸부 소리 듣는다? 그리고 옷은 디자인이나 마감이 더 중요하잖냐. 그냥 전문가한테 맡겨버려.”

나는 수도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녹차를 홀짝거리고서 말했다.

안 그래도 삶의 목표이자 취미였던 서커스마저 못 하게 됐는데, 쇼핑에라도 취미를 붙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귀족 부인답게 다과회에 다니게 되는 날도 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니, 이 녀석 성격 상 그런 날은 절대 안 오려나.

“!”

그러자 라리루라는 비밀이라도 눈치챈 듯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웠다.

“……아핫♡? 으흥~? 후응~♡?”

동글동글해진 눈이 게스츰레하게 바뀌며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먼 발치에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선명한 표정 변화였다. 서커스단 에이스 걸 시절 몸에 밴 건지 표정 하나는 다채롭고 화려하다.

그야 이 점이 귀여운 거지만,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프리뭐시기. 어쩐 연유로 이어폰이 뽑힌 야동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지?”

내가 눈을 찌푸리자 라리루라는 입을 가리면서 허리를 이리저리 살랑거렸다.

“아뇨, 그게요~? 저, 눈치채버렸거든요~.”

“착각인 게 뻔 하지만 굳이 들어주지. 서방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도록.”

“선~ 배? 제 방이 텅 비어있어서 걱정되셨군요? 저래서는 어느 날 제가 갑자기 짐만 싸서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가?

절대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한 추리를 펼치면서 라리루라는 검지로 내 가슴을 찔러댔다. 쿡쿡쿡쿡.

“어때요? 맞죠? 맞죠♡? 속마음을 훤히 들켜서 부끄러우시죠?”

“……아닌데? 아닌데? 절대 아닌데? 착각인데?”

“아~ 핫~♡! 부끄러워 하시긴! 자, 꼬옥 안아보세요! 아무 데도 안 가니까!”

─탁탁!

무릎을 치던 라리루라는 팔을 벌렸다. 잔망스런 미소가 방실방실 얼굴에 가득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찬스에요! 지금이라면 선배만의 독과점 소장품 프리실라에게 포옥♡ 안겨서 빨개진 얼굴을 감추실 수 있다구요?”

빨개졌을 리가 있나. 신체조율을 최대한 짜내서 혈류를 억제하고 있는데.

“떠나? 프리실라 네가? 농담도.”

나는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으며 역습을 가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쪽팔린 대사였지만, 이 자신감 가득한 이세계 아이돌보다는 나을 것이다.

턱을 괸 나는 드라마 남자주인공처럼 낯뜨거운 대사를 장전하고, 발사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나 없이 살 수 있을까봐?”

“와아, 재수없어♡!”

시1발.

카운터 블로우에 어금니가 날아간 기분이었다. 쪽팔림을 감수하고 갈긴 과감한 공격이 빗나가서 괜히 1대 더 처맞기만 했다.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달인의 이름이 우는군.

“그야 선배가 매력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저도 인정하지만요~? 그렇게 제 목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고 착각하셔도 곤란한데요?”

라리루라는 두손으로 잡은 찻잔을 홀짝거리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해도 몰라요? 10년 쯤 뒤에 선배를 닮은 딸이랑 저를 닮은 아들을 둘둘씩 낳으면 선배가 집에 없으셔도 1시간 반쯤은 견딜 자신이 있답니다?”

“니가 분리불안증을 앓고 있는 줄은 몰랐네.”

집에 두면 짖어서 미용실에다 묶어놓고 기르는 시츄 같은 년.

“애정결핍이라기보단 선배결핍이네요. 모자란 것 하나 없는 저는 어딜 가도 사랑받으니까, 제 구성성분 중에 만성결핍인 건 선배의 사랑 뿐이에요?”

팔뚝에 안겨붙으면서 내 어깨에 턱을 얹는 후배님.

자기가 어떻게 굴면 예쁨받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무브먼트다. 괘씸하긴.

─깨작깨작. 나는 죄없는 빵을 조지며 물었다.

“밥 먹을 다 먹으면 옷이랑 가구를 보러 가기로 하고, 그 다음엔?”

“클라라 씨의 대회를 구경하러 가요☆!”

까불대던 라리루라는 활기차게 말했다.

“링링이의 개수 때마다 신세도 많이 졌고, 응원 정도는 해 드려야죠♡!”

듣고 보니까 그것도 그렇네.

드워프 공방들 상대로 무쌍을 벌이는 인간찬가 대장장이 이벤트라. 볼 맛 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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