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10화 (908/1,009)

***

〈캐-서-린-!!〉

〈시끄러워, 언니. 오프툼 씨가 듣겠어.〉

고용주 부부와 함께 나타나선 울며불며 달려든 오드리에게 시달리며 캐서린은 귀청 따갑다는 듯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게 누가 데이트 중에 화장실에 달려가래? 나야말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렇다고 배탈이 났다고 말할 건 없잖아아!! 오프툼 씨가 날 뭐라 생각하겠어!!〉

〈털털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털털해서 키스까지 하냐!!〉

〈시끄럽다니까. 자, 이거나 받아.〉

〈훌쩍…… 흑, 뭐야?〉

훌쩍거리던 오드리는 구리 장신구를 받고 눈을 깜빡거렸다.

─휙휙.

캐서린은 귀찮은 일을 끝낸 표정으로 손사레를 쳤다.

〈둘이 같은 장신구를 하면 연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거 아냐. 이제 다음에 키스해도 이상한 취급은 안 받을 거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고?〉

〈우울한 얼굴이 눈에 밟혀서 미소짓게 해 주고 싶었다고 말하든가. 언니 그런 거 꽤 잘 하잖아? 섹시 스파이 어필을 할 찬스라고 보는데.〉

〈그런가……! 좋아, 알았어!〉

눈물을 닦던 오드리는 캐서린을 꽈악 안아줬다.

〈고마워! 첫 데이트를 망칠 뻔 했는데, 다음에 권유할 수 있겠다! 역시 나한테는 캐서린 너밖에 없다니까!〉

〈알면 앞으론 알아서 모셔. 자, 얼른 가 버려.〉

〈그래. 아, 그리고 록시는 나쁘게 보지 말고!! 걔한테 부탁한 건 나니까!!〉

언니를 쫓아내듯 집으로 돌려보내고, 캐서린은 실실거리는 고용주를 쳐다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 같은데요?〉

〈흐음, 그렇구나. 나의 작고 나약한 직원아.〉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이 사람이 저런 말투를 할 때는 99% 장난칠 때인데.

노르드는 신탁을 내리는 신처럼 말했다.

〈본디 ‘두 번째’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암시하느니라. 경험자의 충고다.〉

〈……자꾸 놀리시면 저 사직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취직처는 깜빵인가? 아, 간수는 못 되겠군.〉

진짜 나빴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못 됐대.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업보겠지. 캐서린은 크게 한숨을 쉬고 그들과도 헤어졌다.

터벅, 터벅, 터벅…….

그렇게 골목과 골목을 전전하고, 잠시 정지.

〈냐앙─!〉

길고양이 1마리가 그녀에게 찾아왔다. 캐서린이 부리는 고양이였다.

캐서린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길고양이의 입에 양손을 가져갔다.

〈이리 줘. 어서.〉

〈메우? 냐앙!〉

─데구르르.

꼬리를 흔들던 고양이가 입을 벌리자 장사꾼이 팔던 장신구가 빠져나왔다.

오드리에게 준 것과 같은 장신구였다.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닦고 고양이를 돌려보낸 그녀는 누가 볼세라 장신구를 감췄다.

꼬옥….

캐서린은 마치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을 대하듯, 그 장신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문득 자괴감을 느낀 것처럼, 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앉아선 중얼거렸다.

〈……하아. 도벽은 손목이 잘려도 안 낫는다더니.〉

역시, 이따가 제대로 값을 치르러 가야겠다.

***

흥미진진한 처제의 유혹이 상영을 끝냈다.

“선배! 이 두근두근 오싹오싹한 감상을 어쩌면 좋죠?!”

“연극이라도 볼래?”

“좋네요! 가 봐요♡!”

그러니 유열의 맛을 알아버린 라리루라가 마침 바로 앞에 있던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챌 것이다.

내가 연극을 취미활동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건, 그만큼─현대 지구인의 기준에서는─ 씹노잼이기 때문이라는 걸.

“음……! 나쁘진 않아요, 나쁘진 않은데……!”

귀중한 데이트 시간이 아까웠는지 20분 정도만 보다가 빠져나온 라리루라는 살짝 모자란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렸다.

리얼리티 가득한 실제 썰과 비교하면 이세계의 신파극은 좀 진부한 법.

나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막장 드라마라고 하면 역시 우리 나라긴 한데.”

“우리 나라? 브리타니아요? 얼스터 신화가 어, 꽤 매콤한 맛이라곤 들었는데……”

“아니, 진짜 ‘우리 나라’.”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개를 모로 꼬는 라리루라.

하지만 3초도 안 되서 ‘우리 나라’라는 게 현대 지구의 한국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우리 후배님의 얼굴은 햇빛을 쬔 해바라기처럼 확 펴졌다.

“그거다♡!! 네, 바로 그거에요♡!!”

“오늘 보러 갈래? 내 꿈에 들어와서 브류나크랑 놀아주면 더 좋고.”

“네, 물 흐르는 듯한 밤일 권유 감사합니다! 좀 뻔하긴 한데 순간 혹했어요♡! 그래도 내일은 공연 연습으로 바쁠 테니까 선배한테 잡아먹힐 수만은 없답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어째선지 라리루라는 우쭐거릴 뿐이었다.

“선배네 세상에서 본 영상 중에 딱 어울리는 게 있었거든요! 제가 백작 부인이라서 서커스 공연을 못 한다면, 반대로 백작 부인이기에 가능한 일도 있지 않겠어요♡?”

“뭐길래 그래? 나도 좀 알자.”

“네에~ 비밀이에요~♡! 선배도 뭔가 깨닫거나 하면 비밀로 하시니까 쌤쌤이죠?”

할 말도 없다. 얼씨구 싶어서 얼굴을 찡그리고 만 나였지만, 곧바로 피부를 밀착하는 라리루라의 육탄공격에 얼굴에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핫♡ 기대되네요!”

“쓰으으읍…… 그래. 나도 기대되네.”

엄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남은 하루를 실실대며 끌려다녔다.

꼴마초는 자기 여자한테는 약한 법이었다.

***

다음날.

잠에서 일어난 나는 당장 다나를 찾아갔다.

“누나. 아직 바빠? 뭐야, 뒤져 있네.”

“……뒤지긴 누가 뒤져, 씹새야.”

눈가를 비비며 잠깐 졸던 다나가 대답했다. 꽤 졸려 보였다.

평소의 개털머리가 한층 더 복실복실하다.

“뭘 했길래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것이지? 남편이 옆에 없어서 밤잠을 설친다더니만 기어이 만성질환으로 승급했나?”

“턱까지 내려오면 그게 야만부족 전투분장이지 다크써클이냐 씨발아.”

“아무튼 졸려하고 있기는 하잖아. 자기객관화는 정신병 치료의 기본이다?”

“과연. 니가 왜 또라이 기질을 못 버리는지 이해했다. 이 다나 여신님한테 참회할 멘트나 생각해 두렴. 조만한 다나 교단도 브랜드 런칭할 예정임.”

“벌써부터 미래계획 조졌죠? 정년퇴직 하고 요식업에 발 담갔다가 고대로 좆망하는 전형적인 사업 실패 테크죠? 하늘 같은 남편의 재테크에 응애 나 퇴물 박사 용돈 줘 하는 미래가 보이죠?”

“관공서에 달라붙어서 영지민들 고혈 빨아먹는 골목식당처럼 니 저택에만 지부를 세울 테니 망할 일 없을걸? 주 수입원은 남편 착취니까 길거리에 나앉을 때까지 백년해로하려고.”

“돈 세탁용 자회사잖아 미친년아.”

“자회사? 뭐지?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음을 암시?”

“꼴릿하게 무친년…… 그래서 왜 비몽사몽임?”

곧 죽어도 한 마디를 안 지는 엘리트한 토크를 마치며 묻는 나.

신좌를 계승하고, 여러 영약 빨로 마나를 늘린 끝에 며칠 밤을 새도 문제가 없는 체력을 얻었던 다나 아닌가. 왜 이렇게 졸려하는 것이지?

다나는 졸려서 뇌가 잘 안 돌아가는지 손가락을 휘적거리다가 말했다.

“그 뭐냐, 인쇄를 내가 직접 했거든.”

“누나가 했다고? 아, 창세의 권능으로?”

“응…… 대박 졸려…… 죽는다……”

뭔데 귀엽지. 역시 다나는 아이큐를 조금 낮춘 편이 솔직해져서 자박꼼 마렵다.

창세의 권능은 힘 자체는 약해도 만능이다.

단, 붓과 물감으로 누군가는 모나리자를 그려도 나는 졸라맨밖에 못 그리는 것처럼 활용도는 개인차가 심하다. 단순한 복제라도 그림을 못 그리는 다나는 힘들었겠지.

“일정이 빡세서 어쩔 수 없었어. 베로니카처럼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비틀….

휘청거리던 다나가 힘들게 일어나서 옷을 대충 걸쳤다.

“됐으니까 따라 와, 남편놈아. 데이트나 가게.”

“바로 간다고? 좀 자지 그래?”

“됐어. 가서 판매고도 봐야 하고.”

“……판매고?”

판매고? 판매고라니? 예감이 좋지 않은데.

내가 쉬야 마려운 개처럼 떨자 다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판매고. 마침 오늘 하루는 나만의 서방님 아니냐? 웬일로 너를 온종일 부려먹을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좆됐다. 이건 완전히 밭에 제 발로 들어와갖고 괭이까지 혼자 장착한 흑우를 보는 눈이 아닌가? 나는 공포에 떨면서도 침착하게 항변했다.

“치졸한 마나님 같으니. 이럴 때만 서방님이지? 데이트는 어쩌고?”

“내가 시끌벅적한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잊은 건 아니지? 나 갑자기 슬퍼진다? 이 망할 남편이 나한테 관심이 없나? 어? 슬프네?”

“결혼식까지 간소하게 올렸는데 그걸 잊겠냐고. 당연히 알지. 알기는 한데!”

“알면서 뭘. 내가 너랑 데이트를 못 해본 것도 아닌데. 그리고 막말로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내가 데이트 가자고 권하면 니가 튕길 수나 있고?”

“아니 씹, 이 씹…… 시팔 씹……! 아, 애미 씹!”

맞기는 한데……!! 100% 합리적인 추론이기는 한데!!

“존나 이건 부당계약이잖아!! 허니트랩이잖아!! 부부 간의 사기는 고소 사유얏!!”

“이미 늦었으니 아가리 하시죠, 물주님?”

하아암─. 하품을 하던 다나는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뎃?”

나는 입을 털려고 굴리던 대가리가 딱 정지했다.

다나가 먼저 내 손을 다 잡다니, 무슨 일이지?

‘손가락을 끼우는 모양이 아주 깨가 떨어지는데.’

알겠다. 가짜가 틀림없군. 우리 누나는 먼저 알콩달콩 스킨쉽을 할 바에는 차라리 쥬지를 빨고 말 여자라고.

미인계를 쓸 때도 입만 살았지, 풋풋한 터치는 쪽팔려서 절대 안 한다는 말이지.

“네 이년 가짜야! 우리 마누라를 어디 숨겼지!”

“?”

미친 놈이 미친 짓을 하네~ 하는 태도로 새가 날갯짓하는 걸 보는 듯 하던 다나는 깍지낀 손을 발견하고 그대로 5초 쯤 멍을 때렸다.

“……이 씨발, 왜 남의 손을 멋대로 잡고 그래?!”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빨개진 얼굴로 훌쩍 물러났다. ─우수수! 오죽 세게 부딪힌 모양인지 책장에서 책들이 몇 권 쏟아졌다.

놀랍게도 진짜 다나가 맞는갑다.

“시발, 님이 먼저 잡았는데요. 내면화된 애정이 졸린 뇌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극한상황에서는 저절로 본심이 나온다든가 하는 그거임.”

“으휴, 개또라이 쉑. 누가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믿겠냐. 그렇게 누나 손이 잡고 싶었으면 잡게 해 달라고 말을 할 것이지. 귀여우니 봐준다.”

“제 말을 듣질 않는군요.”

“됐고. 마침 유명작가 다나 베르베이아 박사의 데뷔작이 1권 떨어졌네.”

다나는 샐쭉하게 나한테 완성한 동화책을 주고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넣었다.

“씻고 올 테니까 읽어 봐. 솔직히 개씹명작이다, 인정?”

“표지도 못 봤는데 인정부터 요구하네. 칭찬에 대한 지나친 갈망…… 자존심의 결여…… 자라난 환경의 문제로 사료됩니다. 입원이 필요하겠어요.”

“딸을 제대로 못 키워서 미안하군.”

“악!!! 장모님!!! 좋은 아침임미닷!!!!”

다시 다나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 나는 장모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서 다나가 씻고 나오길 기다렸다. 이런 시발, 목욕 안 한 다나의 농후한 향을 테이스팅할 생각이었는데.

“뭘 우리 엄마한테 효도하고 있냐? 빨리들 와!”

기대되는 것처럼 다나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랑 장모님은 피식 웃고 그런 다나를 뒤쫓았다. 저 상태를 보면 진짜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아마 책을 사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다나를 따라서 출판 길드의 서점에 찾아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냥 따라가지 말 걸 그랬다 싶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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