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12화 (910/1,009)

“우선은 장소가 필요해. 공연 장소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다나는 바로 라리루라가 리허설 중인 콜로세움으로 달려갔다. 이젠 투기장보다는 콘서트 회장으로밖에 안 보인다.

“언니? 선배? 무슨 일이세요?”

섹시한 탱크탑만 입고 연습 중이던 라리루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땀에 젖지 않은 게 조금 아쉽군.

“야호……. 울프헤딘 왔구나…….”

반면에 태초신 할매는 땀 범벅이다.

이것이 젊음인가. 생긴 건 크라운 크라운 탓에 로키가 더 어린데.

“공연을 보러 와 주신 거면 조금 이르답니다♡? 제 공연은 밤에 있거든요!”

“시간이 되면 보러 오긴 할 건데, 다른 일이 더 급해. 일정 관리인은 어딨어?”

“관리인 분요? 어…… 앗, 저기에 계시네요!”

그녀가 가리킨 건 회갈색 입장 통로 안쪽이었다.

라리루라가 알려준대로 찾아가자, 거기선 한창 축제 공연의 일정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나르메르-나일 옷을 입은 사람에게 그랜절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런데 정작 뭔가 따지고 있던 귀족 남자는 날 보자마자 눈이 찢어져라 커지는 게 아닌가?

〈이게 누구십니까! 노르드 님 아니십니까! 아, 이젠 울프헤딘 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겠군요!! 저를 보러 오시진 않았을 테고, 백작 부인의 공연 때문에 오셨습니까?〉

〈……다른 용무도 있긴 합니다. 호칭쯤은 그냥 편하신대로 부르셔도 좋고요.〉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귀족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 새끼 진짜 누구지 시발.

‘반지의 얼굴 인증을 바로 뚫어버리는 걸 보면 나랑 만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나르메르-나일의 귀족 계층 중에 나랑 안면이 있는 사람…… 아스 뭐시기 연합의 귀족인가? 그 영업처 사람들이 이렇게 친근하게 굴진 않을 텐데?

─띨빡아. 알리씨크 영주 아들이잖아.

다나가 심념으로 서포트를 넣어줬다. 그랬지 참.

근데 시발 어쩔 수 없잖아. 그때 레티티아 년을 씹어대던 영주 아들은 절대로 이렇게 밝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화내던 걸 보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헛기침을 하고 악수를 청했다.

〈다시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어떻게,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이제는 어엿한 영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아, 그 할배는 은퇴했나. 그래서 사람이 확 바뀐 거군.

‘그런데 영주가 되선 이런 덴 무슨 일로 왔대?’

잡담을 잠깐 나누고 본론으로.

다행히 서 있는 자리다 보니 신변잡기는 짧았다.

〈언성이 들리던데, 문제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들리셨습니까? 이거 부끄럽군요. 아시는 바 있으실지 모르겠으나, 이번 은애절 기념으로 예술가의 영지인 알리씨크의 연극단에서 출장 공연을 나왔습니다.〉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지금 눈치챈 거지만 미리 알고 있었던 척 하자.

그 연극 때문에 관광객들이 돈을 아껴서 다나가 출판한 책의 판매고가 떡락했다 했었지. 인생이란 이렇게 유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여기 계시는 관리자 분이 이번 연극 『북쪽 바다의 마녀』에 필수불가결한 자재를 구할 수 없게 됐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웃던 게 거짓말처럼 무자비한 표정으로 바뀌는 알리씨크 영주.

이제 좀 이세계 귀족 같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이렇게 호의적이지.

관리인은 귀족이 아닌지, 귀족남 둘─다나까지 더하면 셋─에게 시선을 받자 마취제 없이 인두를 지져진 황소처럼 펄쩍 뛰었다.

〈아입니더! 아, 아니, 아닙니다! 지는 있는대로 노력해 보았심더!〉

〈그런데 왜 스크롤을 구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극에서 가장 중요한 함포전 장면을 생략해야 하느냐며 저희 영지의 극단원들이 아우성입니다.〉

〈그거이 그, 에흠흠……! 프리실라 백작 부인님 명의로 수도에 남아 있던 폭죽 마법 스크롤이 다 팔려버린 뒤여서 말입죠……!〉

프리실라 백작 부인. 낯익은 이름이군.

라리루라 또 너야?

〈……부, 부인께서?〉

사람 하나 잡을 듯 하던 영주는 얼굴을 황급히 폈다.

그럴 만 했다. 관리인의 태만이 크기는 했지만, 이 새끼 입장에서는 내 얼굴에 침을 뱉은 셈이지 않은가. 나도 이 사실을 몰랐다는 건 눈치 못 챌 거고.

생각없이 한 말이 ‘느그 여편네가 공연 물품을 다 사가서 좆 같은데 어떻게 할래?’ 라는 뜻이 돼 버렸는데 누구라고 안 당황할까.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미처 모르고……〉

〈흠…….〉

나는 섣불리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해 봤다.

라리루라가 따로 독과점이나 사재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양 자체가 적던 물품을 사들였을 뿐 아닌가. 책 잡힐 일은 없다.

‘게다가 라리루라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로키랑 공연해 볼 기회니까.’

최고의 무대로 만들려고 기대하고 있을 귀여운 아내님을 책망한다?

하늘이 용서 안 해도 내가 용서한다. 우리 후배님을 괴롭히려고 트집 잡는 분충들은 ‘헤니르’ 해 주겠어욧!

─톡톡.

다나가 내 등을 두드렸다. 내가 힐끔 돌아보자 그녀가 심념으로 말했다.

─야, 잠깐 교대 좀.

─뭐하게?

─상담. 부인이 먼저 나서는 건 예의가 아니래. 니가 말 좀 꺼내 봐.

아, 애미없는 귀족 예법 때문이구나.

신분만 동일하면 남녀는 평등한데, 귀족의 데릴사위나 부인은 취급이 한 티어 낮다. 지구에서도 직급 낮은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면 매너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상담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중간 다리를 놔 주자 다나는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네. 연극 장소와 극단원들을 빌리고 싶어요.〉

〈빌린다고 하시면, 정확하게 어떤……?〉

〈얼스터 신화를 기반으로 한 동화를 연극으로 선보일 생각입니다.〉

다나의 제안에 내 눈깔이 동그래졌다. 알리씨크 영주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대로는 어느 한쪽의 공연의 질이 큰 폭으로 떨어질 터.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분명 발행한지 얼마 안 됐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유능한 메이드들이 꽤 많은 편이라서요.〉

메이드라니? 나는 다나의 생각을 눈치채고 내심 손뼉을 쳤다.

‘발퀴리에들한테 공연을 시킬 생각이구나.’

셀루스티아 남작으로 변신했던 전적도 있다. 저 신화풍 동화의 등장인물들로 변신하는 건 간단할 것이고, 합을 맞추는 것도 가능할 듯 했다.

‘발퀴리에는 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지.’

록리를 노력의 둔재로 만든 그림자 분신술 수련법처럼 습득력을 삽시간에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의외로 손재주가 없는 녀석들이라 메이드 예법 같은 걸 배우는 데에도 한 세월이 걸렸지만, 얼스터의 신화 내용은 싸움과 대화가 전부니까.

〈실제로 봐야 알겠지만…… 썩 괜찮게 들리는 제안입니다. 혹시 저희 영지의 극단원들과도 잠시 합을 맞춰 보시겠습니까?〉

다나의 동화를 읽은 알리씨크 영주가 제안했다.

〈내용 자체는 간단하니만큼, 연출에 투자하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터입니다. 저희 극단원들의 실력을 믿어보시죠.〉

〈그게 사실이신가요? 정말 기쁜 제안이에요! 부디 부탁드려요!〉

다나가 이런 말투를 쓰는 날도 있군.

존댓말을 못 할 만큼 무식한 눈나는 아니지만, 역시 듣는 사람 입장에선 위화감 한 번 씹오진다. 자기도 저게 싫어서 지체 높은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단지…… 말을 꺼내고 나서 말씀드리긴 조금 어렵습니다만, 장인정신이 있는 단원들이다 보니 설득이 고역이긴 할 겁니다.〉

〈어디 계시죠? 제가 설득하러 가 보겠어요.〉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술을 지원하는 건 알리씨크 귀족의 소명이니.〉

자기가 저지른 무례를 만회할 생각도 있는 걸까. 제안을 승낙한 영주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만, 혹시 서명만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뭘 주섬주섬 꺼내길래 무슨 계약서나 극단원을 설득할 도구를 꺼내는가 했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게 된 건 1권의 책이었다.

─신대의 계보, 바이콘의 계도자.

인생 시발 진짜.

〈……서명만 적으면 되겠습니까?〉

〈예, 예!! 호, 혹시 ‘천공신류 오의 애써릴 오버 드라이브’라고도 적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필살 화룡멸겁 청강파섬뢰’라고 바이츠니아 어로……〉

〈……그거 설마 소설 내의 대사입니까?〉

〈예? 어…? 노르드 님의 기술 아니었습니까?!〉

좋아. 베로니카는 내일 데이트 일정 전부 취소다.

아주 하루 종일 침대에서 울게 해 주겠어. 나는 썩은 얼굴로 리퀘스트에 맞춘 글을 적었고, 존나 기뻐하는 씹새의 설득으로 다나의 제안은 가뿐히 통과됐다.

〈저도!! 저희들도 백작님의 친필 서명을 받고 싶습니닷!!!〉

〈정말 끝내줬습니닷!! 대사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렸습니닷!!!!〉

〈신들의 힘이! 그 권능이! 그들이 안배해 놓은 피할 수 없는 세계의 법칙이! 한낱 인간이 바꿀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너는! 과연 그런가?! 남량(南良)! 아니, 오딘의 의지를 잇는 후계자 나우디즈 헤븐즈사인이여!〉

〈플레인스 오브 데스파이어… 이곳은, 절망의 평원이다!〉

그 씹덕 단원들을 위해서 20권이나 더 싸인을 해줘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중2병이 맞다. 조만간 위생 안대 같은 걸 차고 나타나겠지.

“씨발, 씨발!!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지!!”

“존나 나쁜 마누라년이 내가 하고 싶은 말까지 뺏어가고 지랄이네. 또 뭔데?”

“뭐기는 시발아!! 베로니카가 낸 책은 이 바쁜 공연 당일에까지 안 갖고 있는 극단원이 없는데, 우리 책은 어떻게 단 1명도 갖고 있질 않냐고!”

“우리? ‘너희’라고 해 주시겠어요? 저는 초대형 출판사 바이콘-헤르마이온 미디어의 대주주라서.”

“선 긋지 마 씨팔럼아!!!!”

“제 가정 내 역할이 씨 팔이가 맞긴 합니다만, 굳이 언급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해결법을 찾으러 왔다가 빡칠 일만 늘어나고 만 다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존나 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간 베로니카한텐 못 이겨.”

“아직도 이길 생각이셨다니 놀랍읍니다. 적당히 체념할 줄 아셔야 하지 않을까오?”

“……………………………….”

다나의 얼굴이 마네킹처럼 변해서 나는 가만히 그녀를 외면했다.

“그래, 맞아……. 네가 있었지……?”

끼기긱….

눈이 사백안을 넘어서 좁쌀만해진 다나가 나를 90도 기울인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으아악! 미치광이 고고학자다!

“노르? 오늘 하루 동안 너는 누구 거랬지?”

“노예를 제외한 로마니아 공화국의 자유시민은 모두 그들 자신의 소유입니닷!!!”

“울프헤딘 가문에서 가주는 아내의 소유물이야.”

“그 반대도 성립되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닷!!!!”

“아가리 쌉쳐.”

관리인을 겁박해서 콜로세움의 한 방을 얻어낸 우리 누님께서는 나를 침대에 자빠트렸다. 어째서 갑자기 포상 타임인 레후?

“얼른 자지 꺼내 씨발아.”

“뎃?”

“연출은 너네 세상 영화가 제일 낫잖아. 셰이드 할 거니까 자지 좀 세워 봐.”

아, 그런 거구나. 이 누나가 갑자기 스트레스성 성추행에 미쳐버린 줄 알았네.

“저, 그런데 말이죠? 저희들 섬세한 수컷의 해면체는 뇌랑은 별개의 메커니즘으로 돌아가서요. 자, 발기 시작! 악! 한다고 빨딱 서는 게 아닌데요.”

다나는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더니 말했다.

“나 자는 동안 니 좆대로 따먹어도 되니까, 얼른.”

“엥 진짜루?”

─벌떡!

쥬지가 다나 손에 반쯤 벗겨진 빤스에서 대가릴 내밀었다.

여전히 나를 꼴리게 할 줄 아는 누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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