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20화 (918/1,009)

“새벽 바람이 정말 좆같이 상쾌하군.”

이런 끝내주는 아침, 네페르티티와 떨어진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지는 준비했다. 프로포즈할 장소도 정했고.’

극적이지는 않지만 꽤 적당한 타이밍이다.

뭐가 제일 좋냐면, 지나친 서프라이즈가 아니란 게 좋은 점이다.

티르시도 어쩌면? 하고 살짝 기대하고 있을 터. 원래 깜짝 선물이라는 게 감성이나 상황이 어긋나버리면 처참한 대실패를 겪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 나도 그녀도 ‘알죠? 대충 감 잡으셨죠?’ 하고 눈치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타이밍이라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애초에 티르시가 내 고백을 거절할 리도 없고.’

내 어깨는 승천할 듯이 으쓱댔다. 날씨 이 새끼, 눈치 잘 챙겼어. 소나기라도 내리면 하늘에다 절대천공영역을 갈겨서 구름을 걷어야 할 뻔 했잖어?

─달그락.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새로 따른 냉수를 치얼스했다.

“웰컴 투 뻐킹 해피 데이.”

─꿀꺽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물과, 후덥지지 않을 정도로만 화창한 날씨.

프로포즈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

하루의 끝은 하루의 시작에 달렸다. 티르시 아르마슈나스가 그런 믿음, 아니면 징크스를 가지게 된 건 지난 세월에 기인했다.

아침용 달걀이 쌍란이었다든지, 평소에 막히는 길과 교통의 번잡함이 오늘따라 원활한 것 등등의 사소한 행운은 그날의 운세를 점치는 점괘였다.

푹 자고 일어난 티르시는 내려쬐는 햇빛을 머리카락을 헝크러트린 채로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좋은 날씨.”

커텐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이 화사하다.

시작부터 좋은 날이었다. 그녀는 그만큼 자고도 더 자고 싶어하는 몸을 독려하며 일어났다. 여유 없는 스케쥴을 미루고 앞당겨서 만든 하루다. 잠 따위에 쓸 시간은 없었다.

“……안녕.”

“아, 네페르티티. 안녕하세요?”

여관의 개인실을 열고 나가자 마침 네페르티티 역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양치 중이었던 걸까? 입에 칫솔을 문 그녀였다.

“오늘, 데이트?”

“네, 뭐. 그래서 일찍 일어났어요.”

티르시는 쑥쓰럽게 대답하며 그녀가 문 칫솔을 살폈다.

‘……노르드네 세계에선 칫솔도 조금 달랐었죠.’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연금술 부산물이나 나무, 식물 줄기 등으로 만드는 【중간 가지】의 칫솔보다는 그쪽이 쓰기 편할 거라는 건 확실했다.

‘이것도 기억해둬야겠네요.’

노르드는 익숙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불편 하나하나가 쌓이다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 개발해서 집 안에 배치해 두도록 하자.

물론, 향수병을 일으키는 물건이 주변에 가득한 것과 불편을 겪는 것. 어느 쪽이 더 안 좋은지는 티르시도 확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말이다.

쏴아아아아….

찬물로 몸을 닦고, 머리까지 감는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솔직히 말해서 귀찮다. 다나처럼 짧게 자르고 싶을 때도 있다. 감을 때도 말릴 때도 손이 많이 가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거품을 내고, 물로 닦고, 바람으로 말리고서 빗질까지 마쳤다. 명예귀족 즉위식 때보다 정성을 들였다.

─질끈.

시계에 눈길을 힐끔대던 그녀는 머리를 틀어서 묶었다.

평소 보기 힘든 목덜미를 드러내는, 좀 과감한 치장이다. 그 다음으로 그녀는 노출이 과감한 외출복과 결벽할 만큼 단정한 원피스를 집어들고 가슴께에 번갈아서 가져갔다.

“으음…….”

속옷 차림으로 전신 거울을 노려보던 티르시는 손에 든 옷을 둘 다 내려놓았다.

─텁.

최후의 선택을 받은건 늘씬한 다리와 팔을 드러내는 여름 느낌의 옷이다.

노출도는 낮지만 티르시는 몸매로 승부에 임할 바보는 아니었다. 잘록한 허리와 골반에는 자신이 있는 그녀지만, 이 집안에는 강적이 많아도 너무 많다.

순서는 뒤에서 두 번째. 몸매도 아마 대충 그쯤.

적어도 노르드가 ‘이것만은 티르시한테밖에 못 찾을 매력’이라고 생각할 만한 걸 갈고 닦아야만 승산이 있다. 티르시는 속옷마저 벗어던졌다.

‘……속옷 정도는 살짝 야해도 괜찮겠지. 응응. 그렇고 말고.’

옷은 이걸로 다 입었다.

화장은 할까? 아니, 관두자.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싫고 젊어 보이는 화장법은 모른다. 피부에는 좀 자신이 있으니까 이쪽으로 밀어붙이자. 만질 때의 촉감이라든지.

‘……만져질 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울 속 하얀 뿌리 홍당무 같은 여자를 외면한 티르시는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로.

“노르드.”

“넹.”

즐겁게 웃는 그의 표정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긴장은 풀리지 않았지만, 노력해서 기운을 냈다. 티르시는 마치 일상적인 과정을 실행하는 것처럼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가, 가요.”

태연하게 안겨서 당황시켜주고 싶었는데, 말을 더듬어버렸다. 죽고 싶다.

“크흡…….”

“……웃지 마세요.”

“안 웃었습니다.”

“거짓말도 하지 마세요.”

“저만큼 진실만을 가까이하는 남자는 없는데요.”

“또 또 거짓말.”

티르시는 팔짱을 낀 그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오늘은 얌전히 따라만 오세요. 로마니아 인의 풀코스를 만끽하게 해 드릴 테니까요! 그야 귀족용이라기보다는 서민용에 가깝지만, 그런 사소한 건 어쨌든!”

“서민용이길 망정이네요. 옷을 새로 입고 올 뻔 했어요. 티르시처럼 근사하게 잘 차려입질 못해서.”

“……칭찬이 참 술술 나오셔.”

퉁명스럽게 말해보긴 했지만, 그녀가 생각해도 목소리는 삐엑거리며 들떠 있었다.

“으…… 노르드 옷도 멋있어요.”

“고맙습니다. 티르시가 안 부끄럽게 단정하게만 입어봤어요.”

“당신이 부끄러웠던 적은…… 한 번도…… 음, 죄송해요. 전혀 없진 않네요.”

“스스로도 짚이는 순간이 많아서 딱히 상처받진 않았읍니다.”

샐쭉 웃는 그를 데리고 티르시는 가방에서 작은 지도를 펼쳤다. 팜플렛처럼 접어서 힐끔거리면서 간 곳은 유명한 걸로도 유명한 서민의 맛집이다.

“이 가게는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영업한 전통 있는 맛집이에요! 안타깝게도 점주 분은 노환으로 낙명하셨지만, 아드님이 솜씨를 이어받아서 연중무휴로…… 무휴로……?”

말이 끝으로 갈 수록 기어들어갔지만, 그럴 만 했다.

─Close.

바깥에 내놓은 의자는 전부 안에 들어가 있고, 문은 꽉 닫혀서 자물쇠가 걸렸다.

빛이 꺼진 점내에는 의자가 테이블 위에 올라간 게, 누가 봐도 휴일의 가게였다.

“어? 어? 여, 연중무휴……? 자, 잠시만요?”

티르시는 더는 이럴 수 없을만치 당황하며 작은 수첩을 꺼냈다.

새 수첩인데 얼마나 꺼내봤었는지 손떼가 잔뜩 묻었다. 얼마나 이 날을 기대하며 준비했는지 한 눈에 보이는 수첩에 노르드는 다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작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축제 마지막 날 하루는 쉽니다〉?”

“네?!”

엉덩이를 차인 것처럼 놀란 티르시는 노르드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입간판을 살피고, 노르드가 읽은 그대로의 안내문을 보고 입만 벙긋댔다.

“왜, 왜 하필 오늘……?”

“축제 마지막 날이니까요. 쉬거나 놀고 싶었던 거겠죠.”

“……으으으으…!!”

그의 위로하는 말이 마치 ‘자주 있는 실수에요’ 라며 티르시의 허술한 계획을 수습해주려는 것만 같아서─분명 그럴 것이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온몸을 떨었다.

‘다, 당황하지 말아요! 일단 머리를 식혀야……!’

조심하지 않았따간 들켜버린다. 그녀가 데이트 일정을 짜 본 게 처음이라는 게!

연애경험이 전혀 없던 건 그렇다 쳐도, 친구랑 놀러다녀본 적도 손에 꼽는는 것까지 들켜버리면 동정 어린 짠한 시선이 날아들고도 남는다!

‘침착, 침착하죠……! 노르드한테 내가 허당이란 이미지는 없을 거에요……!’

티 안 나게 얼굴을 식히며─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며─ 티르시는 진정했다.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남성을 리드할 줄 아는 여인처럼 굴기도 했었으니, 아직 자신의 평가가 그때로부터 큰 변화가 없으리라고 믿는 그녀였다.

그녀는 새치름하고 우아하게 턴하며 돌아섰다.

“……으흠. 뭐, 자주 있는 일이죠. 이럴 경우도 대비해서 부차적인 계획을 짜 놨으니, 이제부터는 그걸 따르도록 해요.”

거짓말이다.

계획? 없다. 이제부터 생각해내야 한다.

“큽…! 그, 그러면 아침은 가볍게만 채우죠.”

노르드는 웃음이 터질 듯한 얼굴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어깨를 붙잡았다.

서로에게 천만다행이도, 남편이 뒤로 다가오자 티르시는 계획표를 감추기 급급해서 그의 표정까지 살필 겨를은 없었다.

“보니까 꽤 식사량이 많은 가게 같은데, 브런치 수준으로 늦은 아침을 먹기에는 살짝 과했을지도 몰라요. 잘 된 셈 치고 적당히 카페에서 간단하게 먹을까요?”

“네? ……앗, 네, 네! 역시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듣고 보니 그렇다. 티르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성비와 맛을 겸비한 가게인 건 좋은데, 10시에 늦은 아침으로 먹기에는 점심 식사 때 부담이 될 만한 가게이긴 했다.

‘새, 생각도 못했어……’

책상물림 데이트 플랜의 맹점이다.

실전은 무자비하구나. 티르시는 주섬대며 지도를 다시 꺼냈다.

“알겠어요. 하지만 카페는 안 돼요. 괜찮은 가게까지 들릴 여유가 없어서.”

“넹?”

노르드는 생각없이 되물었다가 입을 닫아버렸다.

지도에 빼곡하게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모조리 티르시의 글씨체로.

“가까운 가게에서 가볍게 먹을 만한 곳은…… 아, 샌드위치가 있네요! 여기로 가죠! 여기서 옆옆 블록인데다 이동 코스랑도 겹치니까 시간 낭비도 없어요!”

“네이.”

이거 중증이군. 노르드는 픽 웃었지만 티르시는 가장 완벽한 계획을 생각하며 지도에 얼굴 가져다대듯 하기도 바빠보였다.

‘아주 열심이네.’

노르드도 곧 그런 그녀의 모습을 즐기면서 따땃미지근한 시선을 보냈다.

“아, 티르시. 가로등 조심하세요.”

“네에.”

“마지막 날이라 도로가 더럽네요. 이리로.”

“네? 네.”

─휙, 휙.

지도와 거리를 살피는 데 정신이 팔려서 여유가 없는 여성에 비해, 느긋하게 그녀를 따라가며 가끔씩 어깨를 당기며 보살펴주는 남성.

신들에게도 비견될 초월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모습은 이 축제 중에 널리디 널린 커플만 같았다.

〈후훗. 좋을 때네.〉

〈젊군요, 젊어.〉

누가 봐도 풋풋한 숫처녀의 첫 연애라는 게 다 들여다보이는 행동거지에 행인들이 속닥거리면서 귀엽다는 듯 웃었지만, 티르시는 대마법사의 권능이 무색하게 눈치채지도 못했다.

‘메, 메모 때문에 주변 건물 이름이 안 보여요! 지금 어디쯤인 건가요?!’

멋진 자승자박이다. 교과서에 예시로 적어놔도 될 실수다. 살아있는 반면교사다.

스스로도 그걸 느낀 티르시는 초인적인 두뇌를 한계까지 채찍질해서 간신히 길을 찾아냈다. 공간지각력의 기적. 대마법사다운 위업이었다.

“휴우우우…….”

─우물우물.

간신히 마음을 놓고 앉아서 샌드위치를 조금씩 맛보는 티르시를 노르드는 히죽대며 바라보았다. 이 얼치기 영애님의 고군분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로맨스 코미디 같아서 볼 맛이 났다.

“아침은 이거면 되겠네요. 다음은 어디로 가죠? 기대되네요.”

“다, 다음이요? 잠시만요. 기다려 보세요!”

화들짝 놀란 티르시는 그녀가 허둥지둥 거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남편의 짖궂음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지도를 펼치고 거기에 숨어서 노트를 열었다.

“라벤나폴리스의 필수 관광지, 축복의 자갈밭에 들렀다가 불행을 쫓는 분수에 기념주화를 던지러 간다고 돼 있…… 갈 거에요!”

“재밌겠네요. 생각해보니 정작 축제에만 신경을 썼지, 수도 자체의 볼거리에는 그다지 신경을 못 쓴 기억도 나고요.”

“정말인가요? 다행…… 으흠, 당연하네요! 오늘 하루는 제게 맡겨만 두세요!”

말 몇 마디에 신나서 얼굴이 확 펴진다.

이렇게니 당신에게 끔뻑 죽어서 못 산다고 온몸으로 표를 내면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럽건만, 노르드가 낯간지러워해도 티르시는 샌드위치를 즐기며 미소지었다.

그런 주제에 식사하는 모습은 또 기품 있는 게 언밸런스하다.

“갈까요?”

간단한 식사를 해치운 그녀는 우아하게 손등을 내밀었고, 노르드는 익살맞을 만큼 과장되게 손에 키스했다.

축복의 자갈밭이란 전세계 각지에 있던 번영신 포르투나의 파괴된 신상을 모아둔 종교시설이다. 운명의 흐름을 교리로 삼는 그들 종교는 돌조각을 깔아서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에요.”

“으레 있는 관광 코스네요. 가 본 적은 없지만 덕분에 재밌겠어요.”

노르드가 그렇게 말하자 신의 옥음을 받은 여신도가 이러랴 할 만큼 기뻐한 티르시였지만, 그랬던 그녀의 얼굴은 정확히 15분 뒤에 다시 멍해졌다.

─우글우글!

─바글바글!

겉보기에는 동굴 터널처럼 생긴 산책 코스.

그곳에는 인종부터 차림새까지 각양각색인 시민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충 봐도 자갈밭길보다 대기열이 2배는 길다.

커플 하나가 빠지는 데만 최소 5분은 걸리는 듯 했으니, 이제부터 줄을 서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뭐, 유명 관광지라면 이렇게 되겠죠.”

등을 두드려주는 그의 손길에 비참함이 2배.

티르시는 고개를 푹 떨궜다.

“……다른 데로 가실래요?”

기운이 없어진 티르시가 질문했다. 그녀도 처음 오는 곳이었기에 기대가 많기는 했지만, 이 좋은 날에 그를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뇨, 가 봐요. 티르시만 싫지 않다면요.”

그래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티르시는 주저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하릴없이 긴 줄을 기다렸다.

“수도에는 와 본 적 있으시댔죠?”

“네, 네. 솔직히 예전하고 꽤 바뀌긴 했지만요.”

“구획이 이렇다 보니 크게 바뀌진 않았겠지만, 기분이 싱숭생숭하셨겠네요. 저도 어릴 적에 살던 곳이 10년 쯤 뒤에 다시 가 보니까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 있어서──”

“그랬나요? 하긴, 10년 쯤 지나면 사르가디스도 상당히──”

하지만 그런 지루한 기다림도 몇 마디의 대화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디로 가서 뭘 할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구경하며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분!〉

어느덧 웃으며 이야기하게 됐던 티르시는 벌써 줄이 끝나버렸다는 걸 눈치채고 적잖이 실망하는 자신을 눈치챘다. 그런 뒤에 자신을 질책했다.

‘후으. 벌써부터 이래선 데이트가 다 끝날 때는 눈물이라도 찔끔 나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참으며 로마니아 주화를 꺼냈다. 기부금이자 입장료였다.

〈하아, 드디어 다음 차례네.〉

헌금함이라는 이름의 입장료 통에 비용을 내고 있자, 뒤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는 데 진 뺐다니까. 마지막 날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래도 카에디, 꼭 들리고 싶었다며?〉

〈당연하지. 연인들의 축제에 연인들의 명소를 거르면 평생 후회한댔단 말야.〉

커플로 보이는 외국인 둘이 애정교류 같은 투닥거림을 나누는 듯 했다. 남성이 헛웃음을 지으며 밀실 같은 자갈밭의 입구를 살폈다.

〈길의 끝까지 손을 잡고 걸어가면 그 연인들은 백년해로한다…… 컨셉 잘 짰네.〉

〈멍청아, 천벌 받을라. 잡기 싫다곤 하지 마?〉

〈퍽이나 싫겠다. 손 줘. 깍지 끼고 건너게.〉

탱그랑─.

티르시가 넣은 동화가 헌금함에 찬 동화와 부딪혔다.

넣었다기보단 떨어트린 거였지만.

“……………….”

티르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동굴 같은 입구의 커텐을 걷고 들어갔다. 노르드도 따라들어가 보자, 내부는 촛불이 줄줄이 늘어선 외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동굴 속 자갈밭에 서서 티르시는 치마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흰 손가락이 꼼지락댔다.

─톡.

노르드는 그녀의 손에 손을 가져다댔다.

주저는 없었다. 티르시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오. 저희 백년해로 하겠네요.”

“……하든 말든 맘대로 하라 그래요.”

“넵. 그럼 제 맘대로 할게요.”

자갈밭에 난 짧은 길을 걷는 데에는 10분이나 걸렸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둘 뿐인 적막은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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