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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처음 하는 것은 서툴고 어색하다.
그걸 극복시켜주는 게 천재성이겠지만, 아마도 티르시 아르마슈나스는 백 보 양보해서 마법에는 천재여도 연애에는 천재가 아닌 모양이었다.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이번에도 굉장하네요.”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였지만, 그럴 수밖에.
통계와 조사에 근간한 티르시의 데이트 플랜은 탁상공론이었다. 정확하게는, 계산에 있어서 빼면 안 될 변수요소를 전부 망각해버렸던 것이다.
다음 관광지에도 연인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본 티르시는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 그렇지만 다음은……! 다음은 괜찮아요! 이 전망 포인트는 제가 일하면서 수도의 고위층들께 귀띔받은 곳이니까!”
“흐음흐음.”
“이 건물에 있는 작은 음식점은…… 아, 무, 물론 영업을 하고 있다는 전제이긴 한데, 소개로만 손님을 받는 검소한 맛집이라고 해요!”
티르시가 보는 지도를 어깨너머에서 살펴본 노르드가 말했다.
“여기서 1시간 반 거리네요?”
“……헤?”
“갔다 오면 3시쯤 되겠는데요.”
맞았다. 이 복작복작한 관광지까지 오려고 썼던 시간도 문제였지만, 소개받은 관광명소의 장점에 눈이 팔려서 이동 거리를 간과했다.
‘……바보인가요? 머리에 구멍이 난 거에요?’
하루 전까지 완벽하다며 들떠 있던 흰머리 바보 마법사를 떠올리며 티르시는 넋이 나가서 처량한 헛웃음만 지었다.
“고, 〈공간이동〉으로……”
“여기에 가 보신 적은?”
“…………없어요…….”
가 본 적이 없으면 못 간다.
아니, 그녀만한 대마법사라면 가능은 하겠지만 너무 한심한 강행군 아닌가. 천지를 고위마법으로 뒤흔들며 데이트 장소로 워프하는 귀족이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역사 어드매에 남겨지겠지. 그녀 같은 유명인이라면 확실하게.
“……큭큭큭큭.”
그렇게 넋이 나가버린 티르시가 귀엽다는 듯이 노르드는 그녀를 이끌었다.
“가, 가시려구요? 왕복이 3시간이나 걸릴 텐데.”
“점심은 예약해두셨고 하니 갑시다. 조급해하실 건 없으니까요. 혹시 그밖에 예약해놓은 곳이 또 있나요?”
“저, 저녁에 레스토랑을 하나……”
‘……아. 말하면 안 됐었는데.’
나름의 비밀을 이실직고해버린 티르시는 고개를 떨궜지만, 노르드는 끄덕였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되니 식사 예정만 빼고 남은 예정은 캔슬합시다.”
“……네. 알겠어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이잖은가. 퇴짜 먹는 게 당연하다. 티르시는 그렇게 우울해졌는데, 그 순간 노르드의 얼굴이 슥 다가왔다.
“대신, 다음에 또 오죠.”
“……또요?”
“수백 년의 세월이 만든 도시입니다. 하루 만에 다 즐기고 가겠다고 말하면 혼날 거에요.”
그녀가 한심한 데이트 계획을 꼭 쥐고 있자 노르드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았다.
“다음에는 제가 먼저 데이트를 권할게요. 함께 갔던 곳, 아직 못 가본 곳. 저희가 같이 돌아다닐 곳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 그렇다면야.”
전화위복이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오늘의 추태는 다음에든 다다음에든 기필코 만회하고 말리라. 티르시는 점심이 코로 들어가지는도 모를 정도로 생각에 골몰했다가, 피식거리는 노르드를 보고서 정신을 차렸다.
계획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냉정해지자, 조금 전까지의 추태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듯 했다.
“죄, 죄송해요. 데이트인데 노르드한테 집중도 못 하고……”
“흐흐. 오늘따라 사과가 많으시네. 저한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서 그러셨던 건데 뭐라고 할 만큼 못된 남자는 아닙니다.”
─샥. 검소하지만 솜씨 좋은 고기 요리를 써는 노르드. 달인의 검술처럼 깔끔한 해체였다.
“전 재밌었어요. 티르시의 색다른 일면도 봤고. 남 보여주려는 데이트도 아닌데 저희만 즐거우면 됐죠. 이런 좌충우돌도 피 튀기는 싸움에 비하면 평화롭잖아요.”
“……그러려나요?”
“그렇고 말고요. 데이트는 얼마든지 또 합시다. 이젠 여유로워 보이셔서 보기 좋네요. 빨간 뺨에 깜찍하게 소스도 좀 묻히셨고.”
가슴이 덜컹해서 얼른 냅킨으로 닦았지만 묻어 나오는 게 없었다. 어디지 하는 마음에 꼴사납지 않을 정도로만 얼굴을 문지르고 있자, 보이는 건 사랑하는 그의 은근한 미소였다.
파들파들….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가리고 부들거렸다.
“……거, 거짓말이었군요. 저를 속였어요.”
“긴장 좀 푸시라고 농담 좀 했습니다. 묻히셔도 귀엽게 봐 드릴게요.”
“긴장이 아니라 오금이 풀릴 것만 같거든요?”
그리고 귀여운 꼬마보다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여성으로 봐 줬으면 한다.
“좋은데요? 다리가 풀리면 제가 안고 다닐게요. 아니면 업어드려요?”
“절대 풀릴 일 없게 나사못을 꽉 조여두겠어요.”
“티르시의 오금은 나사로 고정돼 있었군요. 어, 그럼 혹시 머리도…… 으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저더러 머리가 나사 빠진 거 아니냐고 할 생각이었죠! 그렇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생각해 봐도 빠진 게 맞다. 아예 뽑혀벼렀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하지만 뽑아간 사람이 할 소리인가요?’
분재의 가지를 치듯, 식재료의 잔뿌리를 뽑듯 그녀의 머리로부터 차분함이라든지 나사라든지 하는 걸 뽁뽁 뽑아가서 가지고 놀고 있는 주제에 어쩜 저렇게 짖궂담.
몸도 마음도 가져갔으면 하다 못해서 주인의식 정도는 가지면 어디 덧나나?
‘……굳이 따지면 제가 솔선수범해서 갖다 바친 거긴 한데, 그래도 일단 받은 건 받은 거잖아요!’
자기만 보는 바보로 만들어놓고 어쩌다 이렇게 바보가 됐냐고 놀리다니?
─퍽, 퍽. 테이블 밑에서 신발을 벗은 티르시는 기분 나쁘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그의 발을 찼다. 앙증맞은 분노 표시에 노르드는 낄낄댔다.
“……이젠 몰라요. 전 밥이나 먹을 거에요.”
한동안 그러던 티르시는 고기에만 시선을 주고 식사에 몰두했다.
검소한 가게는 테이블도 좁아서 그래도 되었다.
꼬옥…♡
탁자 밑으로 그와 발을 엉키며 장난칠 수 있었으니까. 귀족다운 품위라곤 눈 씻고도 못 찾아볼 짓이었지만, 티르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보라면 예의쯤은 깜빡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나자 이후의 데이트는 즐거웠다.
“티르시. 이세계 닥터 피쉬래요. 발 담가볼래요?”
“……싫어요. 각질을 먹는 물고기라면서요. 혹시 몰려들기라도 하면 꼭 제가 더러운 것 같잖아요.”
“오오. 앉아만 있으면 10분 만에 목조 조각상을 깎아준다는데요? 엘프 틀딱 명인의 캐리커쳐 조각쑈인 것인가?”
“좋네요. 앉아 계세요. 저한테 줄 선물이겠죠?”
“제 조각상이라면 베로니카도 팔고 있는디요.”
“……어디에서요?! 인당 몇 개까지?!”
“레후?”
무계획이라는 계획은 즐겁다. 눈길이 가는대로 돌아다녀도 분주한 축제 마지막 날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운 일 투성이였다.
“……티르시가 그렇제 제 씹덕 피규어를 껴안고 계시니 저도 티르시 피규어가 갖고 싶어지는데요.”
“흥이네요. 이 정도는 받아야 공평하죠. 원하는 대로 갖고 놀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미 저 자신이 당신의 완구에요. 그런데 뭐하러 저를 닮은 인형씩이나 만들 필요가…… 지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큽, 푸흡……!”
“잊어달라고 했잖아요?! 잊게 해 드릴까요?!”
길길이 날뛰면서도 가공의 등장인물 나우디즈의 피규어를 챙겨넣는 티르시에게 노르드는 짐짓 근엄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어허, 티파니야. 얌전히 있지 못하겠느냐. 듣는 처키 슬프다.”
“누가 티파니에요!”
“애나벨에 버금가는 유명한 인형의 이름입니다. 그보다 예끼! 티르시 요녀석! 인형이 주인님한테 바락바락 대들게 돼 있나!”
“……아, 그렇네요? 대들어서 죄송해요.”
“……뎃?”
“……? ……?! 노, 노, 농담이에요, 농담!”
“흐으음……. 진실 혹은 거짓으로 스펀지에 실험 요청하겟읍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절대 하지 마세요! 그것보다, 다나랑 라리루라가 공연을 한다고 들었는데 한 번 구경하러 가지 않으시겠어요?!”
티르시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가 보기는 했지만 ‘다른 부인이랑 갔다왔는디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던 노르드는 그녀를 따랐다.
다행히 두 번, 세 번을 보더라도 지루하진 않은 공연이었지만, 로키가 빠진 몫까지 종횡무진하던 핑크 머리 서커스 걸이 ‘와 저 선배는 올 때마다 여자가 바뀌네’ 하는 표정을 지은 건 인상적이었다.
“후우으으……”
몇 번 현대 지구의 문물을 맛본 티르시에게도 저 공연은 자극적이었는지, 공연 후의 벤치에 앉아서 달콤한 숨을 토해내는 그녀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어느덧 저물어버린 해를 대신해 떠오른 달을 힐끔거렸다.
“밤이네요, 벌써.”
“여름은 밤이 늦는다고 하지만요. 그만큼 저도 시계를 볼 겨를도 없었네요.”
마실 걸 사 온 노르드에게서 종이컵을 받으며─단가 문제로 종이컵이 보편적이다─ 티르시는 좀 삐진 표정을 지었다.
“데이트 중에 시계만 힐끔대도 실례 아녜요?”
“지도만 보는 건 실례가 아닌가 봅니다.”
“진짜 죄송해요. 다시는 안 까불게요.”
“흐흐. 장난입니다, 장난.”
노르드가 벤치에 앉자 멀리 베스타 본교단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아, 오늘 무슨 기사들의 대회가 있댔죠.”
무슨 일인가 하던 티르시는 오늘 일정을 떠올리고서 눈치챘다.
“노르드는 참가하고 싶지 않았나요?”
“저는 기사가 아니라 영주 대리인데다, 기마술 겨루기 등이 우선인 대회이고, 궁극적으로는 제가 참전하면 압승해서 미안해질 테니 관뒀슴다.”
“그렇긴 해요. 저도 연금술이라면 어쨌든 마법 대회에 참가하는 건 조금 치사한 느낌이 드네요.”
“맞습니다. 권투대회에서 일반인을 패고 챔피언 소리를 듣는 기분일 거에요. 아버지가 ‘북호야 또 사람을 때렸느냐’ 하며 회초리를 드실 겁니다.”
“……후후후. 저는 몸을 던지며 ‘아버님, 그이를 용서해 주세요!’ 하면 되나요?”
“저희 아버지의 귀신같은 회초리 솜씨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티르시를 피해서 저만 때리실 게 분명하거든요.”
티르시는 일부러 웃음을 짓고 음료를 마셨다.
표정을 숨기려 할 때 보이는 귀족들의 버릇이다.
문득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돌아보려는 그에게, 티르시는 말을 돌리듯 말했다.
“이만 식사하러 갈까요? 예약에 늦겠어요.”
***
식사 예절이라는 건 존나 시발 귀찮은 것이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한 번 익혀두면 어디서든 ‘끼요요욧! 브리타니아식 테이블 매너!’ 하고 붕쯔붕쯔 거리며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옷까지 갈아입고 입장하는 뒤지게 고급스러운 음식점에서도 ‘아닛-!! 노란 원숭이가 포크와 나이프를 구분할 줄 알다닛-!!’ 같은 칭찬 어린 시선을 받을 수가 있다.
“더는 노르드한테 가르칠 게 없네요. 하산해도 좋아요.”
“티르시한테 배운 건 별로 없는데요.”
“후후. 그게 아쉽다니까요. 배움이 늦으셨다면, 그걸 빌미로 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다음에 뭐라도 가르쳐 주세요.”
괜찮은 식사를 마친 우리는 귀족적으로 냅킨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고급화되기에는 아직 졸부 생활이 살짝 짧았지만, 그래도 음식을 처먹으면서 ‘뎃? 맛있는 데스! 이렇게 우마우마한 콘페이토는 처음인데스!’ 거리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다.
펑, 퍼펑─!
사면을 유리 벽으로 만들어놓은 식당에서는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피날레가 울려퍼졌다.
‘불꽃놀이라니. 미국의 7월 4일 같군.’
아마 지금쯤은 교황들이 축언을 마치고 로키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축제 마지막 날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됐다.
“……오늘 하루도 곧 끝이네요.”
티르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불꽃에 눈길을 빼앗겼다.
‘지금인가?’
그래, 지금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잊지 않고 주머니에 챙겨둔 반지함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허벅지에다가 올려뒀다. 당연히 안에 든 것은 프로포즈를 위한 결혼반지였다.
‘원래는 돌아가는 길에 준비해 둔 곳으로 가려 했지만……’
내가 준비한 장소는 아니지만, 티르시가 이대로 취해서 돌아가거나 하면 상황이 애매해지지 않나.
로맨틱한 레스토랑. 꼴에 신성제국이었다고, 저 7대신 교황의 축사보다 식사를 우선한 손님은 몇 없어서 거의 전세를 낸 거나 다름없는 무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여기밖에 없다.
협력자 O와 C1, C2에겐 나중에 사과하자. 나는 화장실을 빌미로 직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이 과정에서 초고위마법 〈뒷돈 of 뇌물〉의 시전이 있었다─ 자리로 돌아왔다.
〈아데트 56년산 포도주입니다. 안주는 가볍게 준비해 봤습니다.〉
〈……술? 저희는 주문한 적 없어요.〉
〈저희 가게의 서비스입니다, 아름다운 손님.〉
은화 3장짜리 서비스지.
그렇게 테이블이 정리되고, 술을 한 잔씩 놓고 오붓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였다.
“티르시.”
턱을 괴고 창밖의 불꽃놀이를 멍하니 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가 든 반지함도.
그녀의 눈동자가 이렇게 커질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커졌다.
“미안해요. 원래는 좀 더 준비해둔 게 많았지만,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해는 해 줄 것이다. 완벽하게 하려다 망치는 건 덜 완벽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오늘 하루로 뼈져리게 느꼈을 티르시니까.
“……노르드.”
“제가 물어본 적이 있었죠? 당신의 과거는 이미 끝났었냐고. 티르시는 다 끝났다고 말해줬고, 그건 분명 사실이었지만…… 사실 마침표까지는 찍히지 않았었죠.”
황제와 별의 자손들에 얽힌 비극은 끝나지 않은 채였으니까.
복수가 아닌 의문.
그녀는 자신이 초대 원로원 가문 아르마슈나스 후작의 영애가 아니라, 마법사 길드의 8성급 마법사로서 살아야 했던 이유를 찾아다녔다.
분노나 증오보다는 뿌리를 찾는 과정이다.
논문이든 각본이든 문단을 넘어가려면, 새 글을 적어 내려가려면 반드시 그 줄에 마무리의 방점을 찍어야만 하니까.
퍼엉─!
새 나라로 거듭나는 로마니아가 불꽃의 방점을 찍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릎을 꿇은 나는 앉아있는 그녀에게 반지함을 열어보였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것도 당연해요. 과거는 끝나는 게 아니니까. 쌓이고 쌓여서, 저와 같은 사람이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주는 걸…… 아니면 당신과 같은 사람이 더 훌륭한 기반을 쌓아주는 걸 기다려주는 거죠.”
나는 잊혀진 과거를 발굴하는 고고학자.
신대의 진실. 고대의 진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갈구하던 과거의 진실.
언젠가 알려지는 게 당연한 흙더미 속 진실들을 찾아내서 그 ‘언젠가’를 ‘오늘’로 만들어내는 직업. 그게 역사를 탐구하는 고고학자의 본분이 아닌가.
“과거는 끝나지 않고, 미래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나 같은 고고학자는 티르시처럼 뛰어난 누군가의 손에 배턴을 건네듯 과거를 맡긴다. 그 스텝을 계속하는 것으로 사람은 발전해왔으리라.
“만약에 당신이 제 미래에 함께 있고, 저 또한 당신의 미래에 함께한다면── 그건 정말로 멋진 나날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반지를 내밀었다.
“그러니, 티르시.”
울음을 참느라 하얘진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제게 허락된 남은 시간들을 전부, 당신과 함께 보내도 되겠습니까?”
두렵지는 않았다. 확인 절차에 불과하니까.
거절당할 리가 없다. 그녀 스스로도 무심코 자백했듯, 몸도 마음도 내게 줘 버렸다고 자인한 티르시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고백에 담긴 마음은 단 하나였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진심 말이다.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노르드.”
─툭.
하지만, 어째서일까. 티르시는 반지를 끼우려는 내 손을 덮었다.
“정말로…… 당신에게 반한 날부터 쭉. 쭉 듣고 싶었던 그 어떤 말보다 멋졌어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저도 모르게 받아들여 버리고 말 만큼요.”
“……티르시?”
“하지만…… 하지만.”
내가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바라보자, 티르시는 자기 심장을 스스로 뽑아내서 절구에 갈아버리는 사람이 이럴까 싶은 얼굴로 반지를 밀어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티르시는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 만큼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타닷!
그녀는 구두 굽에서 소리를 낼 만큼 가쁘게 뒤 돌고, 그대로 레스토랑을 떠나갔다. 2명뿐인 손님들을 위해서 운율 좋게 흐르던 음악 반주가 구슬프도록 우아했다.
〈……손님.〉
내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굳어있자, 직원은 도저히 말을 못 걸겠다는 것처럼 질끈 감은 눈을 내게서 돌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수도에서도 제일 귀한 포도주입니다. 저, 으음…… 히, 힘내십시오.〉
반지를 건네다가 굳은 손에 직원은 병을 끼우고 도망치듯 떠났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석상이, 아니. 피규어가 돼 있었을까.
“……후, 후후후. 으히히히!! 으히히히히히힣!!!!”
─꿀꺽꿀꺽꿀꺽!!!!
나는 간만에 병나발을 불고서, 술 냄새가 그득그득한 고함을 내질렀다.
“술!!!! 안 마시곤 못 배기겠어!!!!”
프로포즈 전적, 4승 1패.
니미 씨발, 그래. 4연승 했으면 1번쯤 질 때도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