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만큼 놀았으니, 이제 로키를 병원에 입원시키러 가자고.”
“즤에에엔장!! 진짜로 가야 하는 거냐고!!”
울며 부는 로키를 포장해서 치료하려면 우선 저 세계수-처녀막 바깥의 신들을 불러내야 하는 법. 그러므로 우리는 나르메르-나일 행을 결정했다.
“사티스 교단 본부로 가서 여신님부터 만나자.”
“나르메르-나일로 가는 거지?”
프랑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노르. 우리끼리 다녀올 테니 쉬고 있을래?”
“엥? 웨용?”
사막을 여행한다는 게 늘 즐겁지만은 않지만, 안 갈 만한 이유는 아닌데?
“별 건 아니구, 노르도 일이 바쁘지 않나 해서.”
“그 일 때문에 그래. 가서 듀나미스 공방 일도 봐야 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르메르-나일은 가장 큰 거래처다. 유명세에 힘입어서 곧 길드로 승격할 각이라서 현지 순찰도 좀 하고, 거래처의 분위기도 살펴둬야지.
“사람은 원래 간간이 소일거리도 해야 살 맛이 나는 것.”
세계 기술을 선도하는 공방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예 개백수가 되자니 이 세상은 취미로 즐길 만한 것도 드물다고.
군바리들도 핸드폰을 쥐여주니까 부조리가 줄어들었다잖아? 귀족들이 갑질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사람은 무료해지면 인성도 절로 부패하는 것이다.
프랑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 일가족의 사막행이 결정됐다.
〈워프 장치 빌리러 왔는데요.〉
〈앗, 넵! 울프헤딘 백작이시군요! 사용 허가는 나 있습니다!〉
로마니아가 소유한 공식 〈공간이동〉 유물─그 황제련의 역돌격 아이템─을 타고 정규 루트로 저 사막으로. 공식 절차를 밟고 입국도 마쳤다.
너무 유명해져서 그냥 휙 날아가서 밀입국하는 건 불가능한 우리였다.
“시발 이동 빠른 것 봐. 배 타고 한참 걸리던 게 입국절차를 포함해도 2시간 만에 끝나버렸는데?”
다나는 절차를 밟고 나서 싱글벙글 웃었다.
“존나 편하네. 〈공간이동〉의 상용화도 머지않겠어. 연구원 시절에 지랄 맞은 유적 탐사 로테이션으로 발이 부르트던 시절이 다 그리워지겠다.”
“짬 좀 찼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 하긴. 기만충 누나는 얼스터 카페로.”
“별로 원했던 건 아닌데 원트에 프레이야 신좌 뽑았어요. 이거 좋은 건가요?”
“더러운 얼라년 말하는 것 봐.”
미희신님의 유산을,,, 석방해라,,,!
어차피 가성비 좆박은 워프 마법이 모든 이동의 무안단물이 될 수는 없다.
로마니아의 마법사 길드 본부에서는 저만큼 멀쩡하게 보존된 〈공간이동〉 유물을 처음 봤는지 자지러지며 연구 중이라곤 하는데.
“우리 바이콘들의 연구결과를 전해주면 되는 것 아니더냐?”
“관두렴. 무료봉사는 흑우가 되는 지름길이란다.”
“번역 노예답게 말에 실감이 넘치죠? 자기 경험 얘기할 때만 필력이 뻠삥되는 3류 소설가 같죠?”
문신알몸부족 누나는 아가리해.
사막이 더웠는지 티르시는 바로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서 뺨에 댔다.
“그보단 나중에 어디서 운 좋게 얻었다고 하고 〈공간이동〉 유물을 하나 더 만들어서 브리타니아에도 제공하는 게 좋을 거에요. 공주님 많이 토라지신 것 같던데.”
“뎃? 아, 그 아줌마 찡찡대던 게 그래서였군요.”
“썩어도 왕족이시라고 표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선물로는 적당할 거에요. 예산 편성해서 보고해둘게요.”
“아핫♡ 티르시 언니, 꼭 선배의 비서 같아요!”
“고마워요. ……칭찬 맞죠?”
“네? 그야 칭찬인데요?”
“그, 그렇죠. 죄송해요.”
찔리는 게 있으신가 보군. 서방님 책상 밑으로 출퇴근하는 명예 귀족 영애께서는 말을 아꼈다. 그 속내가 서방님 자지 자유펠라권이라는 귀한 TO를 독점하려는 못된 심보인 건 뻔할 뻔 자였고.
그렇게 떠들고 있자, 우리 소식을 들은 사티스 교단에서 신도 몇 명이 찾아왔다.
《오전 3시 30분까지 교단에 방문 바랍니다.》
《넹.》
사람들이 없어야 사티스도 내려오던가 할 테니. 다시 말하자면 그때까진 할 일이 없다는 얘기다. 나는 손바닥을 비볐다.
“어차피 서두를 일도 없고, 느긋하게 놀다 가기 위해서라도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몇 군데 금방 둘러보고 올게.”
“노르드, 성실해.”
“감사합니다. 네페르티티도 같이 가실래요?”
“갈래.”
“그러면 〈공간이동〉 담당이 필요할 터. 내가 따라가 주마.”
“망할. 나도 데려가! 10년이나 잠들게 생겼는데 집이나 지키고 있게 생겼어?!”
멤버가 정해졌구만. 나, 베로니카, 네페르티티, 로키로 현장 업무다.
나는 다나에게 말했다.
“〈공간이동〉 연발해서 변신으로 신분 감추고 공방에서 나온 감찰원들인 척 점검만 하고 올게. 오늘 밤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놀고 있어.”
“그래라.”
“조심해서 다녀와, 노르!”
“응. 다녀오께!”
─파앗! 베로니카가 펼친 마법이 우리를 감쌌다.
마치 1명 1명 다른 사람인 것처럼 신분을 돌려가면서 휙휙 마쳐버리자.
문제에 엮이지만 않으면 불심검문으로 신분증을 제시할 일도 없을 거고.
***
끼익, 쿵─.
노르드가 둘을 데리고 모습을 감춘 뒤, 다나는 여관의 테이블을 끌어왔다.
“회의 시작하자. 이번 주제는 저 남편놈의 전담 마크에 대해서야.”
─척척. 자연스럽게 앉는 노르드의 아내들.
“가장 먼저 주제부터 확실히 하구 가자.”
프랑이 말하자 티르시는 필기할 종이를 꺼냈다. 먼저 입을 연 건 다나였다.
“이건 우리 전원이 공유하는 생각이겠지만, 난 후덥지근한 불쾌지수 만땅의 사막 나라에 그다지 좋은 인상이 없어.”
세미나에 나갈 때보다 정색하고 설명하는 다나.
나라 자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막에서 한 여행도 그럭저럭 즐거웠고, 다나에게 기억 속의 추억을 앨범으로 정리하라고 하면 몇 장 정도는 섞여들 것이다.
하지만.
“선배가 정말로 저세상에 가버렸던 곳이니까요.”
그 모든 좋은 인상을 인생 최악의 사건 하나가 다 덮어버렸지 않은가.
라리루라가 눈쌀을 귀엽게 찡그리며 하는 말에 그녀들은 절실히 공감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둬둘 순 없어요. 노르드가 먼저 어디 나가기 싫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에요. 최소한의 외출을 빼면.”
수준 낮은 그림 실력으로 종이에 노르드를 그려놓은 티르시가 말했다.
프랑은 최고로 진지하게 심사숙고를 반복하다가 결정했다.
“역시 답은 ‘그것’ 뿐이네.”
“4대 1에서 6대 1가 됐다지만 정면승부는 조금 불리하다고 봐요.”
“저요, 저요! 2인 1조로 멤버를 바꿔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구상한 작전을 재검토하며, 그녀들은 싸움을 앞둔 참모처럼 의견을 나누고 모든 서류를 불태워서 파기했다.
그리고 30분 뒤.
〈……옷을 만들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리고 재봉도구와 장소를 빌리겠어요.〉
시내의 재봉 길드에서는 모습을 가면과 로브로 감춘 여인들의 방문에 노심초사하는 처지가 됐다.
침을 삼킨 중년 여직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 하는 자들이지? 수상한 의뢰는 거절해야만 하겠지만……’
무섭다. 로브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은 임전무퇴의 달인을 방불케 했다.
딱히 위협할 생각은 없는 듯 했는데, 그럼에도 여직원은 위압감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체를 감춘 강자들이 익명으로 의상 제작을 요구한다니? 범죄의 냄새밖에 나질 않잖은가.
제발 건전한 임무에 착수한 모험가나 용병이길 기도하며 여직원은 말했다.
〈……원하시는 의상의 도면 등은 있으십니까?〉
증거를 확보하면 경비대에 신고를 넣을 수 있을 것이었으니까.
〈치수도 있으니 인원수만큼 만들어 주세요.〉
슬랜더한 여인이 키 작은 여인에게 도면을 받고 넘겨줬다. 긴장한 여직원은 그걸 받아들고 표정이 바뀌지 않게 살폈다. 그리고 눈치챘다.
〈……메이드복?〉
아니지. 이걸 메이드복이라고 하면 시녀들에게 실례다.
이건 메이드 컨셉의 밤일 의상이었다.
‘……아. 어디 변태 귀족이 보낸 사람이겠구나.’
돈도 많지. 호위를 몇 명이나 고용한 거람.
여직원의 몸에서는 모든 긴장이 싹 사라졌다.
〈으흠. 그러나 3~4시간 만에 완성하긴 곤란합니다. 저희도 예약된 의뢰가 있다 보니, 6벌씩 몇 종류나 만들려면 최소 일주일은──〉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가요?〉
촤륵─. 귀족적인 몸짓의 여인이 가죽 주머니를 올렸다.
몇 개인의 은화가 쏟아졌다.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속세의 많은 문제는 더 많은 돈으로 해결된다.
어느 나라에서도 통하는 진리였다.
***
나르메르-나일 마할 남부. 대도시 마할.
남부의 영지 연맹, 아스트레완 연맹의 실질적인 수장 격의 인물 중 한 사람. 마할의 영주는 눈을 찌푸리며 갑작스러운 방문객에게 되물었다.
《또 뚱딴지같은 소리로군.》
《너무 그리 비아냥대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대답하는 인물은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중성적인 여인이었다.
마할의 영주는 얼굴의 절반에 화상 흉터에 눈을 빼앗기지 않고자 노력하며, 이 당돌한 방문객에게 눈짓 한 번 주지 않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언약도 없이 찾아와서 협력을 요구하곤 좋은 대답을 들을 거라 기대했나? 그렇게 믿는다면 네 감도 상당히 죽지 않았나 염려되는데, 만디사.》
《감이 아니라 계시라니까.》
화상으로 표정을 잃은 듯한 여인의 대답. 매우 건장한 체격의 영주는 그런 그녀에게 적잖은 불길함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세크메트 여신의 계시.
그게 달인의 직감이라는 표현보다 온건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경고는 주지했소. 우리 경비대와 연맹원에게 전달하지.》
마할의 영주는 마지막까지 남겨둔 서류만 앞에 두고 도장을 내려놓았다.
사무적인 존칭은 축객령의 일환이었다.
《남서부에서 빈발하는 실종 사건. 우리도 이미 조사 중이니 정보를 얻는대로 세크메트 길드와도 공유하겠소. 그 밖에도 달리 용건이 있으신가?》
세크메트 모험가 길드장은 침묵하며 신뢰 없는 동맹을 바라보았다.
《노르드 울프헤딘 백작이 입국했다던데.》
《그래서?》
《그 남자와 골렘 무역 계약을 맺고 있다며?》
《그게 어쨌단 거요?》
《다리를 놔 줬으면 하는데.》
침묵이 몇 초간 감돌았다.
─쿵!
마할의 영주는 내려놓은 도장을 집어들고, 서류 위에 찍었다.
《단호하게 거절하겠소. 돌아가시오.》
《알겠어. 포기하지.》
만디사는 선뜻 일어나서는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사라지는 그녀를 본 영주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지만, 저 모험가가 아니어도 그에게는 영지의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파라오의 외유가 잦다. 반드시 필요한 외교에만 얼굴을 비추고 계시겠지만, 마치 국내에 남은 흑마법사들의 문제가 모두 정리된 듯한 거동이다.’
저 파라오가 생각없는 행동을 한다? 영주는 그 가능성을 전면부정했다.
‘임모르탈리스와 그 휘하 흑마법사들의 전멸로 흑마법사의 세력도는 격변을 겪고 있다. 그놈들이 은인자중하며 세를 불리게 두는 건 좋지 않아.’
다시 말하자면 파라오는 그들을 꾀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맞겠지.
얼마나 엄중하게 수색해도 저 사막을 전부 파헤치는 건 국정에 있어서 논외일 수밖에 없다. 흑마법사는 뿌리 뽑지 못하는 잡초, 몬스터와 같았다.
‘그건 문제가 안 된다. 우리끼리 해결할 범주야.’
하물며 공방의 계약 진척도를 점검하겠다는 속 뻔한 명목으로 입국한 외국의 영웅에게 손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정 울프헤딘의 협력이 필요하면 파라오가 타진할 것이고.
‘단지, 실종 사건이 평균보다 높다는 건……’
으레 있을 법한 흑마법사의 범죄행각인가?
그도 아니면── 저 죽음과 모래의 냄새가 충만한 황금향의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악마라도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인가?
아직까지도 신대의 흔적이 잠들어 있는 나르메르-나일의 대사막.
태양신 라의 축복, 야트라우 강의 자비가 닿지 않는 작열의 대지를 떠올리며 몸서리친 마할의 영주는 그 불쾌함을 냉수로 달래고 눈을 찌푸렸다.
‘조바심이 곤란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보다 내가 신경 쓸 일은──’
─팔락. 도장을 찍은 서류를 든 그는 의심쩍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샤를로비스에 나타났다는 익명의 거액 투자자.”
사업 투자로 로마니아를 방문한 연맹원이 우연한 기회에 드워프 직원의 말실수에서 알게 되었다는 수상쩍은 소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투자자의 신원이 유출되지도, 그 신분이 어떤지를 따질 일도 없을 것이었다. 훔친 돈을 쓰는 것도 아니라면 더 그렇고 말이다.
단지 연맹의 수뇌부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레완 연맹이라고 자칭한 갑부 아낙수나문과, 그 아들 이모텝…….》
그의 자본과 권력을 동원해도 도무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물색 머리카락, 갈색 피부의 여귀족이라. 그런 인물은 남부에는 없다.’
8~10살의 아들을 가진 부유한 귀족으로 범위를 좁히면 나라 전체를 뒤져도 나올까 말까다. 고로 이 정체 모를 인물은 십중팔구 가짜다.
도대체 어떤 치밀한 사기꾼일 것인가.
또 무슨 생각으로 연맹원을 사칭한 것인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정말로 돈만 많은 졸부라면 차라리 정말 가입해 줬으면 할 정도군.’
신분을 감추고 싶은 거라면 돈을 좀 받는 대신 연맹에 받아줄 수도 있는데. 그는 아낙수나문이란 인물을 계속 조사해도 되겠냐는 허가증에 도장을 찍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숨을 쉬건 말건, 오늘도 사막의 태양은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