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분이나 기다렸지만 도적 새끼들은 일어나질 않았다.
“인법 기상나팔의 술!!”
찌이이이잉─!!!
마나로 육체를 강제로 각성시켜도 효과 없음.
그밖의 수단을 몇 번인가 동원했지만 깨어나는 느낌은 없었다.
“심장을 멈춰서 영혼을 불러내도 이 꼴인가.”
나는 뽑아낸 영혼을 앞뒤로 흔들었다. 식물인간 뺨치게 흔들리는 영혼.
골든 타임(기열 민간인들은 반생반사나 혼수상태라고도 부른다)에 들어간 도적조차 영혼이 잠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래선 심문이고 뭐고 못 한다.
육체의 인사불성을 초월한 기절이로군.
“씨부랄. 제 발로 일어나지도 않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옮기지.”
“휴으으…… 저, 저한테 맡겨주세요오……”
꺼낸 도적의 영혼을 집어넣고 있자 라리루라가 죽상이 돼서는 꼭두각시를 타고 찾아왔다. 그녀가 인형을 꺼냈다.
휴르르륵─!
인형이 입을 벌리자 소굴에 즐비하던 식물인간 도적들이 한순간에 빨려들어갔다. 나는 대경실색을 하면서 펄쩍 뛰었다.
“씨발 머야! 왜 벌써 잡아먹고 그래!”
“으…… 안에 가둔 거거든요……? 마차를 넓힌 권능이랑 똑같아요…….”
앗, 그럭구나. 이거라면 나중에 심문하기도 편리하고 경비대에 가져다 버리기도 쉽겠네. 진수성찬 기회를 잃어버릴 사막 동물들만 아쉽게 됐다.
“사차원 주머니에다 생물도 보관할 수 있었군. 설정충이 아니라 몰랐네.”
지도를 봤다. 다음 목적지는 아비주-소르그다.
‘여기 들렀다가 사티스 여신을 만나고 귀가하자.’
수상쩍은 진흙에 대한 얘기는 현지 귀족들한테 전해주면 되겠지. 뭔지도 모르는데 아득바득 찾아다니자니 빤쓰런 스피드로 보아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닐 듯 했고.
‘그래야 아내들이랑 7P를 하지!’
뒤탈이 없으면 여섯 명이 전부 헤으응 기절해도 상관없다.
모든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날, 나는 우리 아내님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의욕이 나왔다.
‘로키랑 10년쯤 헤어지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말이지.’
그래도 신들을 믿을 수밖에.
수술 자체에 악의가 없다면 성공할 것이다.
그래도 짬을 때리려고 치료시키는 거라니 왠지 믿음이 갔다. 나도 꽤나 이 몹쓸 세상의 각박함에 물들어버린 듯한 기분이 드는 하루였다.
***
아비주-소르그는 융성한 도시였다.
“근처에 피라미드도 있는 걸 보면 대도시인가 봐.”
프랑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발밑이 안 보일 것 같은데 괜찮을라나 몰라.
“아비주-소르그. 나르메르-나일의 옛 도읍.”
“네? 수도였다구요?”
“천도(遷都). 드문 일 아냐.”
“천도, 천도…… 아. 수도 이전.”
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역사가 길면 그 중간중간에 통치자가 ‘야. 우리는 이사 안 가냐?’ 라며 수도를 옮기거나 하는 일도 있다.
몇 세대 뒤에 원상복귀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처럼 제대로 정착하는 데 성공할 때도 있었다. 아비주-소르그는 이사에 성공한 후의 예전 수도다.
“수도는 또 왜 옮긴 거야?”
다나가 찌뿌둥하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오늘의 밤 시중 담당이었기에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딱 도시에 도착해버려서 아쉬운 눈치다. 나는 수통에서 입을 뗐다.
“이런 푼수떼기 누나야. 고고학자가 일반인한테 역사를 물으면 어떡해.”
“역사가 얼마나 복잡한데 새끼야. 전공이 아닌 분야까지 아는 척 나대는 게 할 짓이냐? 세계사에 직접 영향을 끼친 사건이 아니면 모르지.”
“고건 쌉팩트로군. 그치만 나는 아는데요? 깔깔!”
“그건 니가.”
“시발 뭐. 시발 내가 뭐! 누나가 내가 대학에서 타 학과 교수들 때문에 번역 노가다 뛰면서 부전공 역사도 달달 외우게 된 거에뭐보태준거라도있냐왜갑자기옛날PTSD를유발시키고지랄인데!!”
“아 씌펄 진정해 미친놈아. 발작 스위치 가성비 존나 좋네.”
누나가 갑자기 부랄을 때리니까 그렇지. 부부가 티격대며 노는 건 좋지만 선을 넘는 건 위법이다. 부부관계가 파탄난다고.
“수도를 이전한 건 우발적 사건이 많아서랜다.”
나는 다시 수통을 들이켰다가 PTSD적인 금단의 지식을 끌어냈다.
“특히 무슨…… 뭐라더라? 죽은 자가 되살아난 사건이 잦았대.”
“강령술? 흑마법사야?”
“신대 무렵 얘기니까 무관하지 않을까 싶네.”
치안이 씹창난 건 비교적 현대의 일이니까.
우리는 일단 연락을 받은 영주부터 만났다.
그로부터 들린 소식은 찝찝한 것이었다.
《실종사건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통치자로서 다분히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혹여라도 울프헤딘 백작님께도 해악을 끼칠 수가 있으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노총각 냄새가 나는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무스탕이랜다. 로마니아 혼혈인 영주다.
홀애비 냄새를 향수로 가린 듯한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현대 지구라면 몰라도 이세계 기준으로 보면 쌉 노총각이었다.
일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듯한 경직된 분위기. 학자 느낌이 나기도 한다. 다나의 불행한 IF 같군.
나는 달달한 사막의 음료를 마음에 들어 하며─홍차보단 낫다─ 웃었다.
《악인들을 교화하고자 노력해도 덕치만으로는 곤란할 때가 있죠.》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저희도 오는 길에 도적단의 소굴을 찾아내서 생포해 왔습니다. 아, 오해는 마시길. 소식을 들은 김에 지나가면서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무시할 순 없잖습니까? 시민들의 피해도 있으니.》
외국 귀빈이 도적들한테 습격당했다면 그 무슨 추태인가. 얼굴이 푸르죽죽해지는 그를 위로하며 나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기절…… 말씀입니까?》
《혼수상태입니다. 가족 중에 성직자가 있는데, 저희가 알아보니 영혼 채로 잠들어 있더군요. 응? 혹시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요?》
굳은 표정. 보아하니 그런 느낌. 영주가 말했다.
《말만으로는 설명 드리기 어렵군요. 현재 영지 지하감옥에 가둬둔 흑마법사가 있는데, 백작님도 의문이 남으셨다면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흑마법사라. 알겠습니다. 안내해 주시렵니까?》
뭐하러 처형하지 않았단 말인가? 삐끗하면 탈출하거나 대형사고를 치고도 남을 족속들인데? 나는 위화감을 느끼며 그놈과 만나고, 더 의아해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영주님!! 저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철창에 매달리며 읍소하는 청년.
범생이 같은 얼굴인데 흑마법사라니. 적화해서 빨갱이 사상에 물든 2차대전 시기의 불꽃타락 공산주의자라도 되나.
《저는 흑마법은 고사하고 마법도 모릅니다! 글 몇 줄 읽을 줄 아는 게 전부고, 여자친구와 만난 뒤에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여기 갇혀 있었단 말입니다!》
《아흐레째 저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정말로 무고할 가능성은요?》
영주 무스탕은 고개를 저었다.
《시내의 지하에서 시체와 피 웅덩이에서 자던 작자입니다. 썩은내가 심하다는 보고를 받고 무장 경비대가 현장을 급습해서 체포했죠. 증거도 다수 확보했고요.》
《예. 사실 저도 물어나 본 겁니다.》
남자에게서는 어둠과 음의 마나가 느껴졌다. 난 그놈이 철창 밖에 내민 팔을 낚아챘다. 야수회귀 코팅으로 덮지 않아도 거인보다 강력한 힘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키타이 촌놈이 사람 잡는다!》
《뭐, 뭐? 이, 이 무례한 놈이!》
《진정하십쇼. 제가 대충 입고 와서 그렇슴다.》
킹치만 귀족 의상은 이 더위에선 귀찮은걸. 내 피부는 소중하단 말야.
─찌익!
나는 그 새끼의 팔뚝에 감긴 붕대를 찢었다. 그 속살은 괴사한 상태다.
《항생제 치료는 받았지만, 벌레가 좀먹은 흔적이군. 팔에 말미암은 저주를 주로 쓰는 계파인가? 이런 흑마법의 대표였던 임모르탈리스 예비 멤버가 내 손에 뒤졌는데.》
명계에 떨어지기 전에 지하에 숨어있던 놈들을 한꺼번에 해치웠었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누명입니다!》
《말로는 무슨 소린들 못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감각은 저 변명을 진실로 인식했다.
당황한 눈치가 조금도 없다. 이게 연기라면 난 인간불신에 걸려서 아내님들의 가슴으로부터 10초 이상 떨어지면 살지 못하는 새끼 켕카가 돼 버릴 것이었다.
《네 여자는 네가 여기 갇힌 걸 알고 있나?》
《저, 저도 그게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제발 에이미에게 제 소식이라도 전해주십시오! 그 순한 녀석은 제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기다려? 너 같은 흑마법사를? 그녀도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
《뭐, 뭐라고요?!》
흑마법사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음. 빨갱이 인맥은 전부 빨갱이 이론은 이세계에서도 통하네. 하지만 도발해봐도 연기 같지는 않은데.
《제길! 제길! 에이미한테 손 하나 댔다간 봐!》
칭얼대는 그와 거리를 뒀다. 영주가 말했다.
《연인에 대해서도 조사가 끝났습니다.》
《결과는요?》
《문란한 생활을 보내고 있더군요. 아는 남자만 일곱 정도. 여자도 있고요.》
와우. 팜므파탈이셨네. 저놈만 불쌍하게 됐구만.
내가 휘파람을 불자 그는 쓰게 웃었다가 정색을 빨았다.
《의혹이 몇 개 있습니다. 연맹 간의 협력 조사 결과, 그 에이미라는 타 영지의 여인이 1달 이상 실종됐었다는 것. 그리고 원래 문란한 여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과연?》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시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건 이들의 능력에 대놓고 ‘님들이 병신이었음 어쩌려고용?’ 하고 묻는 거니까. 귀족이 아니어도 저지르면 안 되는 무례다.
그래서 지하감옥은 잠깐 조용해졌다.
《영주님. 지하감옥에 가둬둔 도적단이 깨어난 모양입니다.》
간수와 대화하던 호위의 보고였다. 눈치 좋군.
《그게 사실이냐? 백작님. 가보시렵니까?》
《예. 물론 그래야죠.》
영주는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는 듯 말했기에 나 역시 그들을 따라갔다.
간수의 보고는 딱 그때까지만 좋은 소식이었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윽, 시발. 냄새…… 댁들은 누구슈?》
《저도 모릅니다. 그보다 굉장히 험상궂으시네. 도적이십니까?》
《이 씨발, 나는 공사 인부요! 와꾸 좆 같은 건 댁도 나 못지 않고!》
《하하. 저만큼 댄디-하드보일드한 남자가 나르메르-나일에 몇 명이나 있다고…… 이 씨발?! 내 얼굴에 누가 이딴 흉터를 만들어놨어?!》
아비규환의 개판.
사진을 찍어서 수묵화 필터를 걸면 그렇게 미술관에 걸어놔도 될 듯한 혼란의 한중간이었다. 와. 보고만 있어도 정신 사납네.
《조용!! 영주님의 행차시다!!》
─탕탕!!
그 꼴을 보다 못한 간수장이 사스마타로 철창을 두들겼다. 사스마타란 비인도적인 나르메르-나일의 형벌 도구를 말한다.
《여, 영주님?》
《히익!》
바로 넙죽 엎드리는 평민들. 으음. 이게 귀족이 보는 시야인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20년 정도 보내면 그야 귀족들의 평균 인성이 도플라밍고가 될 만 하겠어. 노예도 있으니 대충 천룡인 비슷한 거겠지.
영주 무스탕은 정색을 빨며 말했다.
《너희들 중에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있노라면 그자는 독실로 옮기고, 죄를 따져서 무고할 경우엔 석방해주마.》
귀족의 으름장에 도적들은 감히 지좆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매혹적인 조건이긴 했는지 눈을 굴렸다.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대던 중, 대장인지 나이가 가장 많은 듯한 놈이 손을 들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저 테베란, 24년 인생을 살면서 감옥에 투옥당할 만한 죄를 저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만……》
《……너희들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영주는 감옥의 게시판 같은 곳에 걸린 몽타쥬를 보는 듯 했다.
그 게시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할의 테베란. 54세. 도적. 24살 때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여 현재까지 체포당한 경력 없음. 발견 시 즉시 체포/사살할 것.
54살 먹은 프로 도적이라. 그쯤 되면 업계 원로 쯤 되겠는데.
그런데 자기를 24살의 무고한 시민이라 말한단 말이지.
《저, 저희들의 관계 말입니까?》
《전부 초면입니다. 저 남부 잡놈들은 본 적도 없습니다.》
《잡놈? 이 새끼가……!》
─탕탕!!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간수장이 또 사스마타로 철창을 두들겼다. 사스마타란 비인도적인 나르메르-나일의 형벌 도구를 말한다.
영주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질문은 이게 마지막이다. 올해가 몇 년이지?》
《예, 예?》
《저, 저요! 제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벙찌는 일부를 빼고, 오히려 머리 후달리는 놈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가 아는 올해의 년도를 철창에 달라붙으며 말해댔다.
각자 최소 2년에서, 최대 30년까지 차이가 나는 연년을.
어느 한 놈도 올해가 몇 년인지 말하진 못했다.
《미친놈들. 무슨 10년 후의 연도를……》
《누가 할 소릴. 댁은 뭐 30년 전 얘기를 하고 있어?》
영주가 눈두덩이를 주물렀고, 나는 감탄했다.
‘집단적 기억상실이라.’
그 진흙 덩어리는 뇌를 마시는 새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