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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10분 후에 일어났다.
“으, 으으……”
“정신이 드십니까?”
“윽……? 어, 우, 울프헤딘 백작님?!”
“저를 아십니까?”
브리타니아 어가 능숙하다. 먹물 좀 먹은 양반인 듯 한데.
“알다마다요! 전 고고학자입니다! 아셰라드 학회장님께 추천장을 받은 델타사라고 합…… 아! 제, 제 동료들은 어디 있습니까?”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나는 딱히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가 조용해졌다.
“……하하. 살아남은 건 저뿐이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믿지 못하시겠지만, 유령선단의 급습으로 제가 탄 배가 침몰했습니다. 저는 배의 파편을 붙잡고 간신히 탈출했는데, 도중에 의식을 잃고……”
꿈에서 본 내용하고 같았다. 아무래도 소용돌이 안에 빠졌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기억은 없는 모양이었다. 비키니 위에 가운을 입은 다나가 손을 내밀었다.
“치료할 테니 가만히 계세요.”
“가, 감사합니다.”
“학자 신분을 드러낼 브로치는요?”
다나가 치료해주며 질문하자 남자는 여기저기를 뒤적댔다.
“……잃어버렸군요. 그, 그렇지만 믿어주십시오! 전 정말 학자입니다!”
“어디 가두기라도 할까 봐요? 염려 마십쇼.”
딱 보니까 그리 쎄지도 않구만. 혹시 깝쳐봤자 지금 댁한테 수건 갖다주러 잠깐 내려간 발퀴리에 하나 못 잡게 생겼는데 뭘.
단지 델타사는 겁이 많은 편인지, 진심으로 당황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후둑!
그의 품에서 카드 같은 게 떨어졌다. 델타사는 깜짝 놀라고, 조금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그 카드를 주머니에 챙기고 다른 증표를 꺼냈다.
“전 학회장님의 아드님과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형님이 실종된 날에도 함께였고…… 여기요! 제가 마법사 길드에도 소속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브로치가 없었지만, 그 대신 다른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슬쩍 얼굴을 비춘 티르시가 내게 말했다.
“진품이네요.”
“알겠습니다. 의심은 안 할 테니 안심하시고요.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이죠?”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따듯한 음료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바닷물에 체온을 뺏긴 그는 그 음료를 마시면서 조금 긴장과 공포가 풀린 듯 했다.
“저희는 황금시대의 아즈테카 원정대를 연구할 목적으로, 얼마 전 로마니아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가 한 말은 대충 이랬다.
고대문명 황금시대의 어느 파라오는 사라진 신 대신 우신을 섬겨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얘긴 지금 현재의 파라오한테도 들었었지.
“그들은 우신들 앞에 거의 전멸했으나, 전투를 염두하긴 했었답니다. 자연스레 고대문명의 높은 기술력을 총동원한 원정대였던 걸로 추측되어……”
“아즈테카에 남겨진 원정대의 유산을 발굴하고 분석할 가치는 충분했겠군요. 학자들이 자원했을 거고요.”
“예. 하지만 학회장님과 그분을 뒤따르는 연구진들은 현재 히타이트의 수도, 카네쉬에 거의 모든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추천장을 받으셨댔죠? 아즈테카 원정대 발굴을 일임받으신 거군요. 동료분들과 같이 아즈테카로 원정행을 나가시던 참에 사고를 맞닥뜨렸고요.”
“그, 그렇습니다. 통찰력이 대단하시군요. 물론 저는 일개 말단 연구원이었습니다만……”
치료가 끝난 듯 일어난 다나가 자리를 비켰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왜 습격당했는지는 모르십니까?”
“면목 없습니다. 스펙터 무리가 지배하는 유령선이니, 몬스터랑 달리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저흴 습격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스펙터?”
내가 고개를 모로 꼬자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유령 몬스터의 상위 분류. 마법을 써. 우두머리 급은 미스릴 클래스.”
“……‘최소’ 미스릴 클래스입니다.”
델타사가 사족을 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라드 학회장님께 말씀을 전하죠. 마침 좀 전까지 대화하던 참이었으니, 금방 나오실 겁니다.”
“예? 여, 여기 계십니까?”
“아뇨. 이걸로.”
나는 아까 전까지 통화했던 통신도구를 꺼냈다.
인공위성이나 중계기 같은 인프라가 갖춰지지는 않은 이세계다. 결국 수천 km 밖에서도 작동하는 무전기라는 뜻인데, 이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치지지직. 치칙… 헤딘… 백작님이십니까?
“네. 접니다. 거두절미하고, 델타사라는 학자를 아십니까?”
하지만 지금 비효율은 따질 게 못 되었다. 대뜸 하는 질문에도 아셰라드는 노이즈를 가라앉힌 뒤 떨떠름하게 말했다.
─네. 제 아들의 친구였습니다. 지금은 아즈테카 족에 파견 나간 줄로 압니다만…… 혹시 그 애와 바다에서 마주치시기라도 하셨는지요?
“마주쳤다면 마주쳤죠. 직접 들으시길.”
내가 통신 유물을 건네자 델타사는 당황하면서 어떻게든 대화를 마쳤다.
─……총장님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말을 잃은 학회장은 키아라와 교대했고, 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네. 울프헤딘 경의 친구 키아라 콜리도입니다.
“친구가 듣고 감동할 법한 인사말이군요.”
─그러시다면 기쁘군요. 유령선이라. 마침 지금 몬스터와 토벌 의뢰 등을 전부 머리에 넣고 있는 친구가 옆에 있으니 질문해 보겠습니다.
유물은 몇 분을 치지직거렸고, 키아라가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이 친구가 모르는 거면 저희 모험가 길드 연합에도 정보가 없다는 건데, 그럼 그 유령선들과 마주친 선박들이 족족 전멸했거나 최근에야 발생한 신종 집단 같습니다.
전멸하면 소식을 전할 생존자도 없기 때문이다. 델타사는 키아라의 가정을 듣고 후다닥 일어났다.
“최, 최근에야 나타났을 리가 없습니다! 그 유령선은── 커흑!”
가슴을 붙잡고 쓰러지는 델타사. 다나의 안색이 굳었다.
“상처랑 저주는 자연 치유가 될 때까지 치료해 놨는데…… 그 잠깐새 증세가 악화했다는 거야?”
“나한테도 보여줘 봐.”
나는 오딘의 눈을 켰다. 아까 본 저주는 다나가 확실히 없앴다. 거의 감기 기운보다 못할 정도로 약체화시켰는데, 그게 그새 강해진 것이었다.
“스펙터의 저주…… 인가 보군요……”
헉헉거리며 델타사는 유언을 읊듯 말했다.
“형님을 눈앞에서 잃고도 뻔뻔하게 살아왔던 게 잘못이었나 봅니다…… 히타이트의 기술을 얻으면 형님과 학회장님이 재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말하지 마십쇼.”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배, 백작님…… 그 유령선단은 히타이트의 군선이었습니다. 저를 바다에 던지고 도망치십시오. 제 저주를 쫓아올 게 분명……”
“아니 쓰벌, 좀 조용히 하라니까요. 집중하는 데 방해된다고.”
귀족이 쏘아붙이자 입을 다무는 델타사.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고 뒤지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게 억울한 표정에서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눈을 부라린 나는 벼락불에 덮힌 손가락을 핀셋 쓰듯 내렸다.
찌지지직…!!
내 손에 잡힌 저주가 뜯겨 나왔다.
해석한 저주의 근원을 【엘든 링】으로 찝어서 파괴한 것이었다.
─뿌직! 저주의 근원을 악력으로 으깼다.
“다나. 저주 풀었으니까 이 양반 마저 치료해 줘.”
“알겠어. 쯧, 쪽팔리네. 한 번에 못 고치고.”
“네 잘못이 아냐. 좀 특수한 저주였어. 이 양반 말대로 효과가 약한 대신, 자꾸 재발해서 쫓아갈 때 편하도록 짠 저주였거든.”
치료도 지나치면 몸을 약하게 하기 마련.
얼스터 인의 피가 흐르는 다나는 델타사의 몸이 알아서 치료가 가능하게 뒀지만, 저주가 재발했을 뿐이다.
흑마법과는 또 다른, 원념에 의한 저주다. 눈을 뜬 델타사가 순식간에 나은 몸이 놀라운 듯 입을 뻥긋거렸다.
“어? 모, 몸이 가벼워졌──”
“아 좀, 진짜. 누워 있어요. 바닷물이랑 저주로 폐가 상했으니까.”
“으악!”
밤을 샌 간호사처럼 이마를 밀어서 델타사를 휙 넘어트린 다나가 치료를 재개했다. 전문 치유사가 아니라지만 실수를 저지른 데에 분함과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휙!
나는 암무나 호의 마스트로 한달음에 뛰었다.
‘저주가 재발한 건 다나 잘못이 아니야.’
우리 누나가 방심했을 리는 없다. 나도 오딘의 눈으로 보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넘어갔을 만큼 저주는 약해져 있었다.
즉, 이 현상은 저주의 주체가 가까워졌기 때문!
‘근처 해역 어딘가에 유령선이 있다는 뜻이다.’
마스트에 착지한 나는 프랑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 프랑, 미리 와 있었네?”
“노르가 꿈 얘기를 해줬으니까. 표류한 사람이 살아서 떠다닌다면 그 유령선단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우리 프랑이야.”
젖은 머리카락이 관능적으로 달라붙은 등을 톡 두드렸다.
“그래서, 어때 보여? 바다는 너무 넓으니까 네 기감으로도 찾기 힘들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어둠과 음의 마나를 찾으면 돼. 저쪽을 봐.”
프랑이 망망대해를 가리켰다.
아니, 그냥 바다라기에는 흑점이 하나 있었다.
─키이잉! 천리안을 발동하자, 무슨 유령이 타고 있는 전선(戰船)이 3척이나 접근하고 있었다. 이 배를 발견한 듯 속도가 단숨에 올랐다.
“……엄청 빨라! 보통 배가 아닌가 봐!”
프랑이 조금 놀라서 외쳤다. 땅을 달리는 말과 비교해도 빨랐다.
그냥 말이 아니라, 이세계의 마나를 쓰는 말과 비교해도 그랬다. 나는 천리안을 풀고 대답했다.
“히타이트의 범선이군. 이 암무나 호랑 똑같은.”
“노르, 배를 돌릴 거야?”
“배의 성능이 비등하다면 해전에서 이길 가망은 낮다고 봐야겠지. 배를 부숴 먹긴 싫으니 접전을 시도하려 들기 전에 해치우자.”
우리는 돛대에서 뛰어내렸다. 델타사는 뒤지게 말을 안 듣는 성격인지 다나가 말려도 냉큼 몸을 일으켜서는 배의 난간에 달라붙었다.
“크, 큰일입니다! 백작님! 유령선이, 유령선이!”
“저희도 봤습니다. 접근하고 있군요. 분대인 듯 하지만요.”
함대에서 몇 척만 차출해서 저주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이제 와선 저주를 풀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저 유령들한테 눈깔이 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우리를 놓치겠는가?
내가 대충 대답하자 텔타사는 뭔가 깨달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이쯤에서 우리 실력을 못 알아보고 오두방정을 떨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랬죠! 울프헤딘 백작님이라면 유령선 쯤 별 문제 없이 해치우실 수 있으실지도 모릅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길!”
“……제 얘길 학회장님께 들었습니까?”
“예! 그 강대한 우신들을 토벌한 영웅이시라고! 그, 그리고, 지금은 침몰해서 잃어버렸지만, 저는 바이콘들이 팔던 전기(傳記)를 대리구매했어서……”
“……아, 그러셨군요.”
나는 말 없이 도망치는 베로니카의 귀를 잡았다.
니미 에서릴 블레이드다, 요것아.
“아, 아프니라! 주인님, 아프다니까! 용서해준다 했으면서! 기왕 만든 거 팔아도 된다고 했으면서!”
“됐고, 배나 제대로 지키고 있어. 얼른 가서 몇 놈 잡아 오게.”
어디까지 적어놨는지 읽어보든가 해야지. 당최 볼 수가 없어서 대충 훑어보고 접었더만, 내 전투 기록을 미화와 각색, 일부 검열을 더해서 부풀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령선 탓에 죽을 뻔한 겁쟁이 학자가 바로 맘을 놓고 안심할 정도인가. 돌겠네.’
혀를 내두른 나는 프랑을 불렀다.
“둘이서만 갔다 오자. 지위 높아 보이는 놈들을 사슬로 잡아 줘.”
“응!”
망치를 든 프랑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교황들에게 받은 성유물 망치라면 골렘의 사슬 주변에 신성력을 부여할 수 있다. 강화 효과는 꽤 미미하겠지만 실체를 잡는 정도라면 문제 없었다.
“근두운!”
야수회귀의 마나에 연기를 조합했다.
오딘의 눈이 완전히 내 권능으로 승화된 지금, 술식 결합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우리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에잇!”
프랑의 뒤에 나타난 골렘 팔이 모자를 쓴 유령, 스펙터를 노렸다.
─느으으으으!!
놀랍게도 스펙터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슬을 피해냈다.
“……원념으로 강화됐나? 생전에 강했다기보단 통솔자 역할을 한 놈이 그만큼 강력한 모양인데.”
예지몽에서 본 스펙터가 떠올랐다.
“스스로 원념에 잡아먹혔으니 흑마법사는 아닐 테고, 강력한 마법사가 여한과 집착에 찌들어서는 망령이 된 건가……? 이크.”
중얼거리던 나는 밑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구름 채로 회피했다.
“노르! 이렇게 멀면 못 잡아!”
“그래? 너무 먼가.”
거리가 멀면 날아오는 게 보인다. 피할 시간도 있다. 나이프 투척이라면 몰라도 생포하려는 사슬 정도는 프랑보다 못한 적들도 피하는 것이다.
“고도를 낮춰 줄까? 아니다, 이렇게 할게.”
나는 손바닥을 합장하고 룬 만다라를 띄웠다.
“【ᛁ(Isaz)】.”
브류나크의 힘으로 룬을 발동했다.
룬의 적성과 깨달음의 벽을 초월해서 다루게 해 주는 룬 지팡이의 힘! 나는 후퇴, 정지, 얼음 등의 뜻을 가지는 룬의 참된 뜻을 발휘했다.
끼이이익─!
스펙터와 유령들이 잠시 멈췄다.
‘원념과 마나로 움직이는 생물이라면 멈출 수도 있지.’
“얍!”
프랑이 사슬을 날렸다. 스펙터 몇 마리가 즉시 제압당해서 근두운으로 끌려왔다. 귀여운 기합과 상반된 절제된 포획이었다.
“이만 자라. 이제 더는 야근할 생각 말고.”
나는 죽어서도 구천을 떠도는 그들에게 휴식을 선물했다.
고오오오─!! 손에 벼락불이 모여들었다.
베스타의 권능, 〈정화의 벼락불〉이다.
대낮의 하늘을 더욱 밝게 불태우는 벼락이 유령선들을 관통했다.
유령선들은 급속도로 퍼지는 벼락불에 순식간에 재와 파편으로 변했다. 바다에 가라앉는 것보다도 먼저 함선의 방어 마법과 함께 불타버린 것이다.
꾸르르르르….
원념에 사로잡힌 영혼들은 잠들자, 더 이상 침몰해가는 배에 죽음을 거부하고 움직이는 자는 누구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성호를 긋고 암무나 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