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49화 (948/1,009)

…털썩. 프랑은 구속한 스펙터들을 갑판에 살짝 내려놓았다.

─크에에에에!!

“우아아악!!”

이를 드러내는 호러 영화의 유령 같은 사령들. 그 하울링에 트라우마가 도진 델타사가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제대로 제압했으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유령선 놈들이 쫓아올 수도 있으니, 잠시 상황을 제대로 복기해보고 싶군요.”

“보, 복기라고 하셔도…… 저는 선실에 있다가 거의 정황을 모른 채로 난파해 버려서 잘……”

“괜찮습니다. 이걸 쓸 거라서요.”

나는 나우넷의 진흙을 소분한 통을 꺼냈다.

‘……그새 또 약간 줄어들었군.’

로키의 치료 성공률을 높이도록 얼마간 떼 주고 했더니 벌써 꽤 소모돼버렸다.

나는 내용물을 점검하고 아쉬움을 버렸다.

‘이런 건 아껴봤자 똥 된다.’

게임에서 소모템은 안 쓰고 아껴봤자 결국 남은 채로 클리어해서 쓰지도 않고 버려지지 않는가. 좀 너무 많이 가져오기도 했다.

내가 사용하려고 생각한 용도에 쓸 분량은 아직 남았으니 됐다.

“이번 나르메르-나일 행에서 찾은 신대의 신적 존재가 남긴 성유물……? 같은 겁니다. 본인조차 모르는 기억을 되살려볼 수 있죠.”

정확히는 신수의 시체지만 굳이 말할 건 없겠지.

뭐, 왜. 동물 시체는 다 없어서 못 먹고 살잖아. 동물로는 고기도 냠냠 잘 처먹고 가죽으로는 옷도 만들어 쓰면서 뭘 이 정도로.

“시, 신의 성유물이요? 저 같은 놈에게 그런 걸 쓰셔도 됩니까?”

“상관없습니다.”

내가 설득하자 그는 진흙을 꺼낸 통에 족욕하듯 발을 넣었다.

“흠. 이제 내 차례로군.”

지팡이를 든 베로니카가 뿔과 눈동자를 빛냈다. 가운을 입은 그녀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내가 눈길을 빼앗겼을 때, 마법이 발현되었다.

지잉─!

홀로그램처럼 델타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 세상에…… 정말로 유령선단의 모습입니다!”

“놀라긴 이릅니다. 베로니카, 좌표 조절해 줘.”

“알겠다.”

그녀가 좌표를 조절하자 유령선단의 습격부터, 그 이후의 과정까지 볼 수 있었다. 배를 침몰시킨 유령선단은 지휘선을 빼고 산개했다.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생존자를 쫓는 중.”

“배를 가라앉혔으니, 3척이나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위치를 알고 쫓아오겠지. 진짜 귀찮겠는데.”

“으음…… 도망치긴 어렵나요? 그 왜, 이렇게!”

다나의 평가에 라리루라가 권능을 쓰는 시늉을 했다.

나는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좀 지켜보고. 델타사 씨? 그 형님이라는 분이 아셰라드 학회장님의 아드님이 맞습니까?”

“예, 예.”

“그분이 실종된 당시를 회상해 주시겠습니까?”

“아…… 학회장님과 차원이동 연구를 하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네, 바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델타사가 말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별 수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지.’

살짝 신분이 불분명한 델타사의 신분도 증명될 거고, 아셰라드의 아들이 실종된 차원의 좌표도 알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내 눈이라면 차원의 틈과 연결된 좌표를 대충 분석할 수 있다.’

내가 이세계로 떨어졌을 때의 차원이동 좌표도 분석했잖은가.

정확한 좌표는 계산식을 알아내서 연결해야 할 것 같지만, 뭐 아무튼.

안 그래도 나우넷의 진흙은 아셰라드에게 갖다 주려고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없이 때마침 현장에 있던 당사자를 만났으니, 다 끝마쳐버리자.

‘스펙터들의 영혼을 심문하는 건 그 다음에면 돼.’

사실 지금 시점에서 유령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위잉─.

홀로그램 영상이 바뀌었다. 유적발굴에 여념이 없는 학자들이다.

언뜻 평화로운 광경이었는데, 그 평화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쩌적…!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쩌억 벌어지더니, 그 공간에 돌풍이 발생했다. 놀랍지는 않았다. 이 장면을 떠올려 달라고 부탁한 건 내가 아닌가.

─델타사! 물러나!

─형님!!

몸은 말랐지만 듬직해 보이는 남자가 델타사를 밀쳤다.

그의 재치 덕분에 델타사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아셰라드의 아들은 차원의 틈새에서 부는 바람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익!

하지만 그때였다. 바위에 숨은 델타사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3초 정도 사이에 아셰라드의 아들은 어떤 매직 아이템을 사용해서 몸을 지켰다.

차원의 틈에 빨려 들어가도 죽지 않도록, 어떤 마법을 발동한 것이었다.

─델타사! 부탁한다, 이걸 가져가! 이 유물들은 우리 세상의 것이 아냐! 여기서 이계와 연결되는 문이 자주 열렸다면, 이 유물이 저 문의 건너편을 암시하는 단서가 돼 줄……!

아셰라드의 아들이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돌풍 소리에 묻혀버렸다.

입을 벌리고 있던 현실의 델타사가 말했다.

“……저때 형님이 저런 말을 했었단 말입니까? 저 유물이 다른 차원에, 이계에 연결되는 단서가 돼 줄 거라는 말을?!”

“조용히. 아직 덜 끝났습니다.”

─……젠장!

들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이빨을 악물고 자기가 발굴하고 있던 유물을 바위 뒤까지 내던졌다. 탱그랑…! 유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욱─!!

힘이 다한 그는 차원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윽! 형님, 형님!

순식간에 일어난 돌풍이 걷히자 델타사는 급히 바위 뒤에서 나왔지만, 그때 차원의 틈은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닫혀버린 뒤였다.

─이럴 수가…… 형님…….

망연자실한 그와 다른 연구원들이 나타날 무렵, 그는 바위 뒤로 날아온 유물을 깨달은 것처럼 등 뒤를 홱 돌아보았다.

─……조금 전의 유물은 역풍을 뚫고 날아왔어. 형님이 던진 거야!

그는 황급하게 바위 뒤편을 더듬고 아셰라드의 아들이 던진 유물을 주워들었다. 그 물건은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카드였다.

치지지직…! 기억은 그 장면에서 멈췄다.

“……허어.”

적지 않게 놀라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델타사에게 손짓했다.

“델타사 씨. 아까 신분증을 보여주실 때 똑같은 카드를 본 것 같습니다만, 저 유물을 개인적으로 구매하신 겁니까? 지금 갖고 계신 것 맞죠?”

막 깨어났던 그가 품을 뒤적대다가 떨어트리고, 브로치랑 달리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한 듯 굴었던 카드가 있지 않았나.

“그, 그건……”

그런데 내가 그렇게 묻자 델타사는 비밀이 들킨 것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다나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정당하게 취득한 게 아니네. 횡령한 거야.”

“회, 횡령?”

프랑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델타사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팔뚝을 주무르던 티르시가 고개를 저었다.

“유물이니까요. 판매가가 정해진 다음에는 돈을 지불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죠. 작은 판떼기 같은 물건이었고, 몰래 빼돌리긴 간단했겠네요.”

“……그렇습니다. 예. 제가 빼돌렸습니다.”

─쿵! 델타사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쩐지 기억을 보자는 얘기에 우물쭈물하더니, 유물을 빼돌린 사실이 들킬까 무서워했던 거였나.

“하지만……! 형님의 말은 미처 듣지 못했어도, 이 물건이 형님이 제게 남긴 물건이라는 건 분명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전……!”

“그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돌아가서 직접 자수하든 하십쇼.”

그걸 우리한테 말해서 어쩌자고, 새끼야.

이 새끼가 구라를 까거나 억지를 부렸다면 죽기 전까지 줘패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줬을 테지만, 자기가 잘못했다고 느끼고 있는데 패버리면 그냥 깡패잖은가.

굳이 손 쓰기도 싫었고, 뭣보다 내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었다.

“그 카드, 저한테도 보여주시겠습니까?”

나는 참회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텔타사는 주저한 듯 했지만, 이미 우리 가족의 위용을 잔뜩 봤기에 거부하지 않고 유물을 내 손에 올렸다.

그 카드를 태양에 비춰보며 나는 질문했다.

“이게 어떤 유물인지는 알아보셨습니까?”

“……아뇨. 매직 아이템일 거라고 생각하고, 제 마법사 길드의 친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분석해 봤는데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반짝. 낡은 판떼기는 태양빛을 희미하게 반사하고자 노력했다.

“연금술 등으로 무기물을 가공한 화합물입니다. 특수한 소재로, 동일 성분이 발견된 기록이 전혀 없었죠. 전 고대문명의 가공소재라고 여겼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마나도, 용도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셰라드 학회장님의 아드님께선 이게 이계의 물건이라고 했죠?”

“그렇게 말했지. 그리 빗나간 추측은 아닐 터다. 자연적이고 우발적인 사고라면, 저 유적지에 같은 현상이 이전에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지.”

연구를 도우면서 지식이 쌓인 베로니카는 내게 말했다.

“질량이 작은 물건이나 작은 동물 정도라면 이 세상에 넘어왔다고 가정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굉장히 잘 가공된 물건이에요. 상당한 문명을 갖춘 이계가 아니면 이런 가공기술은──”

티르시는 가만히 그 카드를 보다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부릅떴다.

횡령범에게 정신이 팔렸던 다나도 뒤늦게 그런 티르시의 반응에 카드 자체가 관심을 가졌다가, 그 입을 멍하니 벌렸다.

“야, 노르. 너 그거……”

“응. 누나 생각이 맞을 듯.”

청색, 황색, 흰색으로 구성된 카드에는 서명까지 돼 있었고, 맨 위에 적힌 ‘BARCLAYCARD’라는 회사명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카드를── 플라스틱 신용카드를 손에 쥐었다.

“그 아저씨가 어디로 빨려갔는지 알 것 같네.”

내 지식이 맞으면, 이건 영국 최초의 신용카드 회사였으니까.

‘어쩐지 차원 좌표가 비슷하더라.’

낯선 세상에서 고생 많겠어, 그 말라깽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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