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54화 (953/1,009)

─툭.

휴스로이트의 집무실에서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다 됐다.”

종이 다발을 집어 들었다.

잉크가 마른 서류는 다름 아닌 내 논문이었다. 주제는 예르나한테 닌자당했던, 천익상 후보로도 꼽혔던 학위논문의 보강판이다.

아틀란티스와 히타이트, 얼스터.

고대문명 황금시대의 역사를 고찰한 걸작이다. 예르나가 훔쳐간 게 히타이트의 존재를 의혹으로 제기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이건 그 완성본이었다.

‘영지에 돌아왔다가 독촉장이 수북하던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쪽 분야의 논문 집필 및 연구는 나를 빼놓고 할 수 없다.

존중? 배려? 그딴 건 랩실을 서성이는 하이에나 새끼들에게 바라면 안 되는 감정이다. 그보다는 내 위용이 너무 커져서 도둑질을 하기 힘들어서겠지.

─저도 논문 쓰고 싶은데 웨 안 쓰세오?

─님이 먼저 써야 우리도 낼 거 아님. 제발 좀 빨리 써라. 우리 학부생 하나가 이걸로 졸업논문 골랐다가 제출 못 해서 졸업 밀림. 흑흑.

학회에서 날아온 공동연구, 논문 공저 러브콜을 빼고 봐도 이 정도다.

나도 언제까지고 석사로 있고 싶은 건 아니니─다나랑 농담할 때나 재밌지 평생 석사로 살긴 싫다─ 이렇게 집필에 들어간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제출한 논문을 빼면 제대로 논문을 쓰는 건 좀 오랜만이라, ‘찐_찐_진짜 완성본.hwp’ 같은 완성작을 보고 있자니 감개가 무량했다.

‘나 혼자만 써야 해서 유독 빡셌지.’

괜히 힘들다고 몇 명 끼웠다가 ‘저저 씹 무식한 창잽이 새끼 사람 써서 학위 땄네’ 하고 쑥덕대면 좆같을 것이니까.

‘그래도 이걸로 일단락됐군.’

사본도 만들었고 초고(礎稿)도 남아있다. 조만간 제출해야지.

─드르륵, 탁!

서랍을 열고 엄중하게 원고를 보관했다. 서둘러 제출해봤자 투고한다고 바로 석사 금장, 박사 동장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까.

‘이 학계에 진급 프리패스는 없지.’

학계 전반의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하다.

나도 아직 좆만이일 때는 이게 무슨 수구 꼴통 짓이냐는 인상이 컸는데, 귀족까지 올라오고 나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더라.

‘대귀족이 자금이랑 권력으로 학위취득 과정에 손을 댈 수 있다면, 언젠가 권력자들이 개나 소나 신분 빨로 학위를 따갈 게 뻔하니까.’

까막눈 새끼들이 ‘니미똥통대 명예박사’ 이 지랄을 하며 내가 좆뺑이쳐서 딴 박사 하위 이미지에 똥칠을 해대면 당장 나부터가 지건 마려울 거라고.

─고고학 박사? 흐흐, 우리 영주님도 뭐시기 학 박사셨는데?

─공부 왜 함? 귀족으로 태어나면 다 박사인데. 니가 20대 살살 녹여서 딴 박사님 브로치, 영주님 아들은 돌잔치 때 똥기저귀에 달고 있었다. 인정?

─깔깔, 불쌍한 병신 샌님 새끼. 증말 병신 같다.

─영주님이 박사시라구요? 어, 그야 귀족님들은 다들 박사 아녜요?

봐라. 생각만 해도 빡친다.

저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수들에게는 나처럼 저명한 귀족일수록 더 오래 시간을 끌면서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본능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

극한의 이득충 마인드조차 웃도는 ‘나만 좆될 순 없다’ 메타.

이건 시부랄 이미르가 관짝을 박차고 일어나도 못 막는다. 그냥 한 2~3년쯤 기다리면 후속연구 논문도 나오고 할 테니 막기도 귀찮고.

내가 30살이 될 쯤에는 알아서 박사로 진급해 있겠지.

“해-피.”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네. 나는 부랄을 긁으며 집무실을 나왔다.

인간의 육체에 하나의 세계를 욱여넣은 듯한 이 마초-보디는 잠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집무실을 나오자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명령권자 ‘영주님’. 오늘 발행한 신문입니다.”

“응. 니들 말투는 근본적으로 고쳐지지를 않네.”

발퀴리에 시녀들에게 신문을 받아서 식당으로. 고사기에도 적혀 있는 가부장제에 의거해 상석에 앉아서 신문을 넘겼다.

“미네르바가 당선됐군.”

말로 중얼거린 건 그만큼 감회가 깊어서였다.

헤니르가 싸지른 후빨러 자캐들이 일으킨 위국전쟁으로부터 벌써 4달이 지났다. 국가 체계가 와르르르 무너졌으니 오히려 늦은 편이었다.

“그동안 어르신도 고생 오지게 하셨겠네.”

“본 개체에의 질문입니까?”

“아니, 혼잣말인데.”

훨씬 안쪽의 부엌에서 아침밥을 만들던 주방장 발퀴리에가 반응했다. 귀도 좋으셔.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난 아침 새벽이어서 그런가.

“……후아! 아침 공기가 상쾌하네.”

그러고 있으려니 흙이 묻은 프랑이 나타났다.

바구니에 호미랑 내가 선물한 물뿌리개를 담고 있는 걸 보니까 이른 아침부터 마당을 손보다 온 모양이었다.

“어? 노르, 일찍 일어…… 또 밤새웠구나. 자꾸 그럴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안 것이지.”

아, 나 머리가 안 뻗쳤구나. 안 잤다는 증거였다.

실수했구만. 오기 전에 대갈통에 물 좀 끼얹고 오는 거였는데.

“이제 밤샘 안 해도 돼. 다 끝났거든.”

“2달이 넘도록 그 소리잖아. 나 진짜 화낸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내미는 프랑. 논문을 쓰는 동안 내가 금연에 들어간 골초처럼 말로만 ‘아, 한다고~ 알겠다고~’ 거려서 뿔이 난 듯 했다.

“흐흐. 진짜 미안. 근데 집필이 끝나서 이젠 안 잘 이유도 없어.”

“……정말? 그럼 다행이구.”

마법으로 흙을 그러모은 프랑이 내가 보던 신문에 게슴츠레하게 눈을 부라렸다. 시력이 나빠서가 아니고, 어렵사리 로마니아 어를 읽어보는 것이었다.

“〈미네르바 후보 당…… 당선? 압도적 승리의 비결……〉 앗, 미네르바 씨가 티르시 씨 고향의 영주님이 된 거야?”

“그래. 티르시가 지지 선언을 해주고 왔거든.”

정확하게는 시민들 앞에서 몇 마디 연설하려다 큰 실언을 하고 왔다.

─제가 이곳의 통리관(統理官)이 되길 바라셨던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하지만, 지금은 서방님과의 시간을 소중히 하고 싶습…… 아.

꽃다운 결혼적령기 영애님, 통한의 실언.

근데 이게 또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신혼? 티르시 아가씨께서?

─그러믄…… 하지 말자……

티르시로서는 눈앞이 아찔했겠지만, 그 실언을 들은 시민들은 ‘그러면 이 투표권이라는 걸 미네르바 님한테 던져야겠구먼’ 하고 이해해주었다.

─우리 아가씨 24살이에요. 오케이? 25살이면 남편 있어야죠.

이세계인들 기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녀의 사랑을 배려하주는 마음은 저 삭막한 영지의 시민들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낙엽만 굴러가도 즐거울 신혼인데 이 똥땅에 와서 기약도 없이 일하라고? 우리 동네 노땅님들 염치 어디? 틀니 닦다 흘렸으면 주워오게 하수도에 던져줘?

─미네르바 님은 경력에 스크래치가 있다고? 븅신아! 우리 집 담벼락엔 몬스터가 긁고 간 자국도 있어! 저 분이 아니면 이 촌구석에는 황제 같은 놈들이나 오겠지!

그렇게 돼서 당선한 모양이다.

티르시의 실언은 숨김없는 본심이었기에 ‘그래도 아르마슈나스 후작님이 통치하실 때가 좋았지……’ 하며 약간 틀내 나는 마인드를 가진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계산적인 티르시라도 여기까지 계산하진 못했던 듯, 며칠 정도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쪽팔렸나.

“……밥을 갖다 주면 드시고 내놓긴 하더라구.”

“티르시 본인이랑 낙선한 귀족 놈들을 빼면 다 해피엔딩이네.”

“그…… 신문에 티르시 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청년들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적혀 있지 않아?”

“음. 우리 프랑이 아직 로마니아 어 공부가 좀 부족하구나.”

나는 신문을 찢어서 불태웠다. 씹어먹으려다가 참은 것이었다.

“……좋은 아침. 그리고 배고픈 아침.”

“확실히 허기가 지는군. 오늘 아침은 무엇이냐?”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동안, 나는 다 읽은 신문 대신에 하루가 멀다 하고 미어터지는 우체통에서 선별한 편지들을 대충 읽어봤다.

뭣하러 식탁에서 보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00~10년대만 해도 식탁에서 신문 읽고 뉴스 보는 가장은 흔했고, 이세계에서도 그랬으니까.

학계의 러브 콜. 이따 답장에 논문을 첨부해서 회신하면 그만.

티르시랑 자식을 보면 우리 손주랑 결혼시키면 어떠냐는 어르신의 제안. 중간에 와이번 라이더가 드래곤한테 잡아먹혀서 전달 못 받은 걸로 하자.

놀이공원 개발이 순조롭고, 일자리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짭나수나문의 감사장…… 은 씨발 왜 이 저택으로 온 거야? 아내님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다 읽고, 필요 없는 건 오러로 파쇄했다. 그러자 편지는 1통만 남았다.

이것만은 우체통이 아니다. 유물로 우리 집에다 보낸 거지. 초능력으로 보낸 택배라니. 잘 가다가 1년 휴재하고 연중할 것 같아서 싫은 방식이군.

이 편지를 보낸 아줌마가 일을 관두겠다고 하면 백경대 식사집합 시키듯 발퀴리에 부대를 데리고 추노하러 갈 용의는 있다.

‘아셰라드한테서 온 거군.’

볼 것도 없이 바로 편지를 개봉했다.

─시체섬에서 차원연결 실험을 개시할 예정.

우물우물… 나는 발퀴리에들의 수제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물었다.

그래, 2~3달 기다렸으면 입질이 올 때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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