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56화 (955/1,009)

“……안쪽을 확인해 볼까.”

지구에서 온 비둘기를 새장에 넣고, 나는 힘을 잃은 차원이동장치를 다시 기동시켰다. 시제품에 불과한 장치는 과부하 직전까지 갔지만, 아슬아슬하게 발동했다.

“선배, 어쩌시게요? 설마 들어가시려고요?”

“만지는 정도는 괜찮을걸. ……응, 예지로 봤어. 문제없네.”

9초 뒤의 나는 게이트를 건드렸지만 차원막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예지의 본질은 정확도가 엄청 높은 슈퍼컴퓨터 시뮬레이터나 진배없다.

결과값 하나는 어지간한 천재의 계산보다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긴, 비눗방울도 아니고 손 좀 댄다고 맛이 가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신적 존재들마저 오고 가길 버거워하는 장애물.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력권 탈출 정도 되는 입지일 것이었다.

나는 그 강력한 장애물에 한 번 손을 대 봤다.

─통, 통.

단단하다. 고무 벽 같다.

하지만 부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힘 좀 많이 써서 베거나 하면 찢어질 것이며, 그렇게 찢어버리면 쉽사리 복구되지 않을 것이었다.

‘촉감은 역장(力場) 같군.’

손바닥을 밀어내는 역장을 만져보다가 물러났다.

‘중력과 차원의 공통점은 질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다.’

마나와 물질을 불문하는 시공간의 법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저 역장의 영향이 덜하다.

데이터를 통한 계산과 예지를 쓴 실험으로 안전성을 확신하고 내면을 들여다봤다. 빈둥대고 있던 브류나크가 고개를 쳐들었다.

키잉─! 천리안을 발동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가끔은 외출도 좀 하렴.”

“──삐엑!!”

어디랄 것도 없이 내 뒤에서 날아온 브류나크가 어깨에 앉았다. 뒤에 있던 라리루라한테는 녀석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까만 까마귀 브류나크.

하얀 까마귀 교수 슬레이어.

흑백의 두 까마귀가 내 어깨에 앉았다. 부리를 내 뺨에 비비는 브류나크는 가만히 냅뒀다. 미스릴 부리라서 내가 아니었으면 긁혀서 피가 났겠지만.

‘현실로 불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군.’

우신 토벌전 때? 그땐 다나가 꺼낸 프레이야의 궁전이었지.

피라미드와 〈발퀴리아의 평원(ᚠᚩᛚᚳᚹᚨᛝᚱ)〉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창세의 권능으로 자기 내면세계의 심상을 실체화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수준 낮은 마법은 이 세계수 차원(=이세계)처럼 물리법칙이 뿌리를 굳건하게 내린 차원의 ‘법칙 그 자체’를 주무를 수는 없다.

그건 권능의 경지고, 내가 가진 권능은 오딘의 눈뿐이다.

오늘 이 녀석들을 불러낼 수 있었던 건 또다른 이유다.

아무튼 나는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 게이트 보이지? 갔다 와 보렴.”

“삐엑? 뺘아.”

쐐액─! 내 분신들은 바로 게이트로 날아갔다.

저 옛날 꿈속에 나와서 나한테 반항하던 시절이 거짓말 같군.

‘내 몸이 직접 넘어갈 수는 없지만, 저 녀석들은 괜찮아.’

브류나크와 교수 슬레이어는 게임 아바타 같은 것이다. 내 안에 본체를 두고 현실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화신(Avatar)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들은 골드 클래스 몬스터 정도밖에 안 된다.

대충 타뷸라 새끼를 3분이면 하프 인간 구이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강함이다. 신적 존재의 눈으로 보면 미약한 힘밖에 부여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쨌건 차원막에 손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지.’

권능이나 마나를 조금 뽑아서 다른 차원에 송신한다.

‘심해의 군주’도 몇 번인가 했던 짓이다.

니플헤임에서도 내게 직접 영향을 줬다가 내가 가슴 한복판에 창을 찔러서 불에 덴 듯 물러나곤 했는데, 고작 쟤네들 정도로 차원막에 무리가 갈까.

촤악─!

계산과 예지는 틀리는 법이 없었고, 두 새들은 영국의 푸른 하늘에 불쑥 출현했다. 나는 그들과 시야를 연결했다.

─두두두두두두두!!

헤니르 새끼를 수색했을 때처럼 천리안을 연결해 봤는데, 지구에 도착한 브류나크는 웬 독수리 모양 드론한테 쫓기고 있었다.

‘갑자기 또 뭔데?’

시야를 돌려보자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

‘아, 비행기랑 새들이 충돌하지 않게 새를 쫓는 직원인가.’

비둘기가 왜 제 발로 게이트에 날아왔나 했는데, 이래서였구만.

새를 쫓는 장치에도 불구하고 줄창 날아다니는 것이다. 사고를 막으려면 쫓아내야겠지. 두 마리의 까마귀들을 드론이 매섭게 쫓았다.

“뺘.”

브류나크는 얌전히 물러나려다가 귀찮아졌는지 발톱을 휘둘렀다.

─파각!

요즘 네페르티티랑 훈련하게 뒀더니 그새 훔쳐 배우기라도 한 걸까. 예리한 발톱-발차기가 드론을 부쉈다. 지루한 일과 중에 장난감을 찾은 실실대던 직원이 입을 헤 벌렸다.

나는 녀석들이 사고를 치는 모습에 골치가 아파졌다.

‘사고를 치는 것도 치는 거지만, 연비가 뒤지게 나빠.’

소모가 웃어넘기지 못할 수준으로 가파르다.

내 감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 게이지가 시계의 초침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1cm를 나아가는 데에 1m만큼의 연료가 드는 듯한 공고 졸업과제급 가성비다.

“게이트를 통해도 다른 차원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엔 무리가 있군.”

전파교란 때문에 닿지 않는 블루투스를 억지로 연결한 것 같다.

‘당장은 관두자.’

나는 까마귀들을 불러들였다. 팍 하고 터지듯이 화신이 소멸하고 내면세계에 두 까마귀들이 도로 나타났다.

─까악!

브류나크는 그럭저럭 재밌었는지 꿈속의 방으로 총총총 돌아갔다.

새장을 들여다보던 베로니카가 물었다.

“제대로 연결된 게 맞는 모양이구나?”

“그래. 마음만 먹으면 좌표를 미세조정하든, 저 공항의 비행기에 몰래 밀항하든 해서 브류나크가 우리 부모님한테 편지를 보내줘도 되겠어.”

나는 억지로라도 밝게 말했다. 아니, 굳이 억지 부릴 것 없이 이건 확실한 호재였다.

“학회장님네 아드님도 수색해볼 수 있겠고.”

“……아!”

걱정하던 베로니카의 얼굴이 좀 풀렸다. 나는 픽 웃었다.

“우리가 학회장님보다 먼저 지구 어딘가에 있는 아드님을 찾아내 드리자고. 동기가 없어지면 학회장님도 차원이동 연구를 멈추실 거고.”

“행방을 찾는 기술은 아셰라드가 마련할 테니, 그걸 쓰면서 주인님의 천리안이나…… 적잖이 죄송하지만, 어머님 아버님께 부탁드리면 되겠구나.”

“뎃? 고건 또 신박한 발상인데스.”

울 어머니 아버지한테 테에엥 마망파팡 도와조 하자고?

“아니, 한 나라에서 행방불명자 찾기도 힘든데 외국에서 신분도 없는 불법체류자를 찾자고? 어느 나라에 있는지야 마법으로 알아내겠지만……”

“선배가 금괴 몇 덩이를 댁에 보내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오 씨발?”

하긴, 어디쯤 있는지 범위만 줄이면 대충 10억 원만 걸어도 벌떼처럼 목격 증언이 나올 것 같다. 죽은 것만 아니면 현상금 30억 베리도 쌉가능이고.

‘하여튼 똑똑한 마누라들 같으니.’

각오했던 것보다 쉬운 일이 될 듯한 예감에 난 조금 안심했다.

아들부터 찾아준 다음 차원이동장치의 위험성을 알려주면 만사 해결이다.

근본적인 문제─‘심해의 군주’의 존재─는 해결 안 되지만, 어차피 그 문제는 내 세대에 참초제근할 수 없다지 않은가.

자기가 싼 똥은 신들이 스스로 치운댔으니, 난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어나는 일만 헤쳐나가면 될 것이었다.

일단 곧 죽어도 두고 갈 수 없는 차원이동장치는 뜯어내서 석판 인벤토리에 넣었다. 휴스로이트의 저택으로 귀가한 나는 겉옷을 벗어던졌다.

“잠깐 네페르티티 좀 보고 올게.”

“네에~. 오늘은 따로 바쁜 일 없으니까 혹시 제 도움이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래.”

저택 부지에 마련한 결계를 찾아갔다. 정원처럼 꾸며둔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돌담을 두른 샘물 속의 이상한 흙더미는 당연히 나우넷의 진흙이다.

“후윽, 후, 후으, 후으……!!”

네페르티티는 그 샘물 앞에서 심장이 터지도록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하고 계셨어요?”

“……응. 내일도 할 거야.”

짤막한 대답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진흙을 보관했을 때, 내가 생각한 용도는 다름 아닌 훈련이었다.

지금까지 싸워온 강적들을 기억 속에서 100% 되살려낸다면?

그건 분명 엄청난 전투훈련이 될 것이다. 하다 죽을 정도로 위험한 훈련도 어차피 기억 속이므로 진짜 죽을 일도 없다.

셰이드의 꿈에 비해서 재현률도 뛰어나고, 몸과 마나량의 성장도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다. 스토리 라인과 상관없는 게임의 보스 레이드 컨텐츠다.

“후으, 흐…… 내 기억만으론, 완성도가 부족해.”

내 기억 속의 강적을 불러달라는 소리였다.

네페르티티는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퀭한 눈을 비볐다. 드문드문 떨리는 손발은 마치 현실 자체 같은 죽음에 육체가 절로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아냐고? 나도 수르트 잡을 때 그랬걸랑. 하하하.

사실 그다지 웃기진 않지만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네페르티티를 말릴 만한 방법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고,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 십분 이해하기에 나는 주댕이를 나불대지 않고 꼴마초답게 행동으로 대답해줬다.

“브류나크.”

“──삐엑! 뺘아아아!”

신바람이 난 브류나크가 튀어나와서 네페르티티에게 안겨붙었다. 땀에 젖은 가슴에 파고드는 게 이런 상황인데도 좀 야릇해서 나는 눈을 피했다.

브류나크를 쓰다듬으면서도 네페르티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나 훈련하다 잠들었어?”

“현실 맞습니다. 제가 바쁠 때도 원하시면 훈련하실 수 있게 현실에 불러내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꿈속에서 엄청나게 다치는 네페르티티를 도저히 보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킹치만 트라우마 생길 것 같단 말예요.’

울 아내님들이 나더러 다치지 좀 말라고 그렇게 경기를 일으키는 기분을 알겠더라니까? 나도 네페르티티가 실제로 저러고 다니면 그녀들처럼 몸을 바쳐서 막을 것이었다.

‘존나 꽂츄를 흔들면서 역바니 댄스라도 출 것.’

내가 쪽팔린 게 대수인가? 냅두자니 이 인간이 어디 가서 칼빵 맞고 죽을까 무서운데. 이게 전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역지사지 당하고 멘탈 나가서 급하게 만든 거 아님.’

브류나크는 괜찮냐고? 쟤 본질의 절반이 사람을 죽이는 무기인데 뭘.

피 튀기고 암흑-마나가 넘쳐흐르는 싸움터에서 까악삐약삐엑 거리는 애라고.

“훈련하고 계세요. 브류나크, 너도 좀 지나치다 싶으면 막고.”

나는 내 분신에게 강력하게 지시하고 입에 손을 대며 속닥거렸다.

“여기서만 하는 말인데, 제가 100번 넘게 픽픽 죽으면서 수르트 잡을 때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은 있었걸랑요? 네페르티티도 그렇게 하세요. 아니면 진흙 다 뺏을 겁니다?”

“……응. 고마워.”

“이젠 감사 인사도 잘 하시네요. 오구오구.”

“턱밑 쓰다듬지 마. 나 아기 아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솔직하게 턱을 쳐들고 가만히 있는걸?

“명령권자 ‘영주님’. 왕성에서 관리 분이 찾아와 계십니다.”

네페르티티가 훈련하도록 두고 결계를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발퀴리에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절로 눈을 찌푸려지는 소식이었다.

“왕성에서 사람이? 보통 일은 아니겠는데.”

내가 이 나라에서 엄청나게 대우받고 존중받는 처지라지만 사람을 매번 보내지는 않는다. 보내도 집사나 시종이지, 왕성에 근무하는 신하는 아니다.

나는 발퀴리에의 도움을 받아서 귀족 옷을 입고 발걸음을 옮겼다.

“왕성에서 나오셨다고요?”

“예. 엘리자베트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긴 대화는 각설하고, 아마 백작인 나만큼 지체 높을 듯한 귀족 공무원은 장례식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가라앉은 표정으로 용건을 전했다.

“국왕 폐하께서 승하(昇遐)하셨습니다.”

정정하자.

나랏님의 장례식은 이제부터 참석하러 가야 할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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