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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당대…… 아니, ‘전대’ 국왕은 올해로 68세였다고 한다.
악룡이 둥지에서 잠자고, 요정왕이 북방 설원에 왕국을 세우는 세상. 때로는 사람이 노화와 맞서 싸워서 이기기도 한다지만, 그건 일부의 달인들한테나 해당하는 얘기다.
평화로운 시대의 왕에게 요구되는 건 세월조차 극복할 강인한 육체와 무술이 아니라 사람을 다스리는 덕과 정견이다.
그래도 그는 일반인으로서는 장수한 편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국무를 보고 자러 들어가며 정정했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로 건강하다가, 정말 잠들 듯이 떠났다는 모양이었으니.
원래부터 병환은 있었기에 급사 자체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고위 성직자 교황의 입증이니 믿을 만했다.
하관식 역시 로마니아에서 직접 찾아온 교황이 진행했다.
“──하고 제가 물었을 때, 국왕 전하께서는 ‘이 왕관의 무게는 왕 된 자에게 겸허히 목을 숙이고 국민을 굽어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풍요신 교단의 교황은 차분하게 왕의 장례식을 주례했다.
로키가 치료받으러 갔다는 소식에 꺼이꺼이 울며 ‘어째서 저를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라며 대성통곡하던 사람치고는 상당히 경건한 미사였다.
사악, 사악─.
기사단 대표와 문관 대표의 지시로 목관에 흙이 끼얹어졌다.
왕족들이 잠들었다기에는 엄중할 뿐이지 소박할 정도로 평범한 묘지. 그 터에 브리타니아의 왕은 긴 여행을 떠났다.
“왕위쟁탈전은 일어나지 않겠죠? 다행입니다.”
“다 폐하…… 이크, 전하의 은덕이지요.”
장례식은 길게 이어졌으나, 귀족들이란 인간의 감수성을 토끼 간처럼 떼어놓고 사는 생물인지라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대관식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의 눈치를 보며 왕의 호칭마저 고쳐야 하는 약소국이어도, 엄연히 한 나라의 국왕이다.
죽은 왕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면, 산 왕은 존경을 사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오늘 막 즉위한 젊은 여왕이라도 말이다.
…스스스.
나는 기척을 죽이고 궁전의 담벼락 옆을 달렸다.
소식을 들은 날 밤에 아내님들과 수도에 방문,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머물고 있는데 엘리자베트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넓네.’
궁전의 마법 보안을 권능으로 전부 빠져나가며 여왕 엘리자베트가 머무는 궁궐에 남모르게 발을 디뎠다. 병사들과 사역마들을 피하기는 쉬웠다.
브리타니아의 궁전은 조선의 궁궐과 유사했다.
성들의 크기만 컸다면 대제국 느낌이 났겠지만 유감스럽게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특히 지금 엘리자베트가 앉아서 근무하는 궁궐은 더 그랬고.
─자박. 잔디를 밟는 소리를 내자 엘리자베트가 정원에 얼굴을 향했다. 그녀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못 알아채서 미안한데, 거기 있는 거 맞지? 대답이 없으면 암살자로 여기고 정령들한테 일단 몇 대 때려보라고 할 건데.”
“몰래 오라고 해놓고 그게 무슨 망발이십니까?”
투명 마법을 풀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엘리자베트는 꺄륵거렸다.
“투명 마법까지 쓰고 올 줄은 몰랐지. 정령들이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쫄아 있길래, 니가 아니면 내가 즉위하자마자 궁전에서 사람 죽어나가겠네~ 했거든?”
“겁먹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주십쇼.”
그리고 경비가 더 눈에 띄게 와 주길 바랐으면 시큐리티를 낮추든가.
나는 오딘의 눈에 비치는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이젠 별 게 다 보이네. 지구에 돌아갈 일이 있으면 무당이나 해 볼까.
창틀을 밟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령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치웠다. 하긴, 침입한 흔적이 나왔다간 호위기사들 눈에 핏발 좀 서겠네.
아내님들은 오지 않았다. 굳이 우르르 올 일도 아니고.
“너무 자주 보는군. 다음 결혼식에는 아무래도 참가 못하겠어.”
벽에 기대고 서 있던 길다트가 눈인사를 했다. 닌 왜 폼을 쳐 잡고 있니.
“예이. 편지랑 선물만 보내주셔도 감지덕지입죠. 암튼 부르셨대서 왔슴다. 이 방에서는 큰 소리로 말해도 됩니까? 아님 목소리 낮출깝쇼? 폐하.”
“편하게 말해. 집무실은 방음이 좋거든. 침실은 나쁘고.”
“아니 뭔? 보통 반대 아닙니까?”
“침실에 침입한 암살자가 왕족을 해치는데 날이 밝도록 소란을 눈치 못 채면 큰일이잖아? 우리는 그 덕분에 사생활이 없어서 죽을 맛이고.”
“아하. 그래서 이중신분으로 가출을……”
“히히. 이젠 그것도 못하게 됐네.”
그렇게 웃다가 말고 엘리자베트는 정색했다. 거 엉덩이에 뿔 나겠어.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고 내 탁자에 올라온 일들 중에는 아바마마가 개인적으로 후원하던 명인들의 인명록도 있어. 아직 미처 인수, 인계받지 못했던 내용이었고.”
“아랫사람을 어찌 부리느냐로 윗사람의 품격이 정해집니다, 폐하.”
“그러하더냐? 역시 백작은 현명하군. 그렇다면 내 반드시 백작과의 약속을 지키지. 중범죄를 저지르던 영주들을 폐(廢)하고 영지를 하사하마, 엣헴.”
“네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농담하듯 대답하자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쉬었다.
“엥? 갑자기 또 왜 그러십니까?”
“나는 피에 굶주린 여왕은 아니지만, 피바람은 불가피해. 영주는 자기 땅에서 작은 왕과도 같아. 그리고 권력은 온갖 추악한 욕망을 감춰주지.”
그녀의 손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붙잡는 듯한 시늉을 했다.
오딘의 눈으로 보자 종이 모양 정령이었다. 극비 기밀문서인가?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으니 편리할 듯 했다.
“질 나쁜 귀족들이 사냥대회를 여는 산골짜기의 기묘한 동굴. 사용되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어째선지 사람이 드나드는 유폐탑. 불법입국자가 매달 수십 명씩 잡히는데 재판에는 넘겨지지 않는 항구……”
소리도 안 나는 종이를 넘기던 그녀가 탄식했다.
“자기들만의 작은 사회에서 영주의 권력으로 이 나라의 법을 능멸하는 놈들이야. 내가 즉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걸 수 있는 동안 숙청해야 마땅해.”
이쯤 되면 숙청도 아니고 그냥 정의 집행이다. 나는 모리배처럼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파리의 마음가짐이다.
“크흐흐. 어디, 제가 손 좀 빌려드릴깝쇼?”
“손에 피를 묻혀달라 부탁하는 건 친구 사이에 예의가 아니잖니?”
“뎃? 착하기도 하셔라.”
귀족의 화법은 존나 신기하다. 인사치레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니. 내가 픽 웃자 길다트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봉건 왕가는 지주들의 통솔자다. 앞가림 하나 남의 도움 없이 해내지 못한다면 장래가 어둡겠지. 널 불러내서 전해주려 한 건 그다음 주제다.”
“다음?”
“필설로 쓰기에도 불쾌한 잔악한 취미와 욕구. 그걸 충족시키려면 권력자에게 빌붙는 게 최고지. 취미를 공유하는 영주라면 밀약을 맺기도 쉽고.”
“……그 뭐냐, 감옥에 노예를 가둬서 학대하거나 하는 거?”
“더 심각하다.”
“음, 굳이 듣거나 말하진 않을련다. 대충 상상 가.”
분명 서방국가에는 노예 제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받았던 대학원생 대우만 해도 그랬듯이 이 노예란 최저임금도 못 받는 빨간줄 그인 불법체류 외노자 정도의 포지션이지, 존나 지지고 볶아도 합법인 불가촉천민은 아니었다.
베로니카가 읽는 야설 속 성노예는 현실에서는 불법이다. 저희 창작물하구 현실은 구분하도록 해요.
‘애당초 대부분의 노예가 형벌의 일환인데 그런 대우를 하겠냐고.’
하지만 법이 다 그렇듯이 안 지켜질 때도 많다.
쌍둥이 괴도 자매를 회유할 때도 말했던가? 좀 인간성이 소멸해버린 듯한 취향의 변태 새끼들은 어디에든 있나 보다.
“근데 듣고 있자니 넘모 끔찍한 얘기에오. 저는 그런 놈들이 거시기 덜렁대던 영지 받기 싫음.”
“지금 말한 녀석은 후작 가문 출신이니까 그놈 본가에 책임을 물어서 좋은 영지로 뜯어낼 거야. 문제는 그 자식의 ‘손님’ 중에 고고학자들도 있다는 거지.”
뭐 이 씹팔?
나는 얼탱이가 나가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어어, 그게, 고놈들은 일부 이단임미다. 여왕님 고고학계 탄압하지 마. 고고학자는 다 착해.”
“누가 탄압한대? 그런 얘기 말고, 너 줄 영지를 고르다 보니까 알게 된 건데, 고고학자는 엘리트 계층인 데다 특정 지역에 장기간 머물러도 의심을 사지 않잖아?”
“……아무래도 그렇죠?”
당장 카네쉬에서 죽치고 있는 고고학자들이 몇 명이던가.
노다지를 찾으면 앞마당에 알 박고 커맨드센터 세우는 직업이잖은가.
“이 부패 영주와 후원 관계로 엮인 학자 집단. 하지만 우리가 소탕에 들어갔을 때는 하필 놈들이 영지에 있지 않았어. 존재 자체도 장부나 증거를 정리하다가 알게 된 거고.”
“신원 불명이라는 거군요.”
“철두철미하게 행위 중에도 얼굴엔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데, 그나마 피해자들의 목격 증언은 있어. 노예로 부려지던 6성급 여성 마법사는 ‘초대 손님’들의 얼굴을 간파하기까지 했고.”
“그 사람한테 얼굴을 찾아내게 하면요?”
“앞을 못 봐. 얼굴을 눈치챘다는 걸 들켰대.”
왜 앞을 못 보게 됐는지는 물어보고 싶지 않네.
일부러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도 말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고문기구 밭에서 구르는 건 저승보다 끔찍할 것이었으니까.
“덕분에 몽타주도 못 그려. 완성한 인상착의를 확인 못 하니까. 눈을 치료하고 나면 그놈들끼리 얼굴을 들킨 놈들의 입을 막아버린 뒤겠지.”
“꼬리를 자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굴겠군요. 고고학회에 연락하시죠. 학회도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그 새끼들을 발본색원할 겁니다.”
나는 해답을 제시하고 눈치챘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씁, 그렇군요. 학자들이 거진 히타이트 이슈에 엮여 있었죠. 아마 그놈들도 거기 매달려 있겠고, 학회가 인원을 추려서 수색하려면 시간이 걸리죠.”
“너도 멀쩡한 영지 두고 지금 말한 유폐탑이나 받아가라 그러면 뿔날 거잖아? 돈 되고 편한 일을 멈추고 색마들 잡으러 가라 그러면 학자들이 뭐라 그러려나?”
지랄할 게 뻔하지. 공휴일에 당직 걸린 돈미새 의사들보다 5배는 염병하며 교수-폭탄 돌리기를 실시할 게 자명했다.
교수들 인성이 그럼 그렇지 뭐.
“사건 하나 크게 터트리면 신분을 감추고 망명 갈 틈을 벌 수 있다고 보겠군요. 학회에 전달하면 눈치채고 도망칠 테고.”
“……사실은 이미 전달해버렸어. 담당한 기사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더라고.”
“않이 즈기요.”
뭐라고 탓하기는 또 그런 게, 확실히 전달하고 나면 찾기는 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당자들이 학계 상황을 알았을 리도 없고 말이다.
얼굴을 몰라도 신체 특징은 안댔고, 아마 금방 찾겠지.
─비만 체형에다 배꼽에 칼빵 흉터가 있고 짝부랄인 학자 아세용?
─어, 전에 유적 탐사하다 같이 씻을 때 보기론 ○○ 소장님이 그랬는디요. 오른쪽 부랄은 자다가 지나가던 몬스터한테 앙 하고 물어뜯겼슴.
이런 식으로 금방 찾지 않을까. 나는 납득하고 질문했다.
“그래서, 이 얘기를 제게 말씀해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조심하라는 얘기야. 바보들 머릿속은 예측이란 걸 불허하니까. 어떤 멍청한 짓을 할지 모르는데 나중에 가서 ‘알았는데 말 안 했어. 미안해’ 같은 소릴 할 수는 없잖아?”
“아하. 영지 얘기를 해 주시는 김에 경고도 좀 해주신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한테 덤비진 않겠지만, 혹시 알아? 그 히타이트라는 데에서 사고라도 칠지.”
그렇긴 하다. 혼돈의 총아라는 인간은 운명마저 비틀지만, 그 강렬한 의지가 꼭 올바르고 현명한 놈한테만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멍청한 빡통들이 눌러도 폭탄은 터진다.
나비효과라는 건 무시할 게 못 된다.
“우리 왕가에서도 되도록 수색할게. 영지는 그 후에 하사할 거고.”
“일부러 감사함다. 수색하시는 동안 저도 저희 가족들 안전에는 각별히 신경 쓰고 있겠슴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저런 병신들이라면 프랑 혼자 상처 하나 없이 다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걸랑.
대화를 마친 나는 인사를 남기고 정원을 거꾸로 되돌아갔다. 모습을 감추고 풀밭을 걸었다. 순찰을 도는 기사들을 지나보내야 돌아가기 편할 것이다.
‘……흐음.’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하잘 없는 상념과 감흥 따위가 가라앉는 불순물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솔직히, 조금 싱숭생숭하게 느껴지긴 했다.
‘앞으로도 평범하게 살다 보면 저런 새끼들이랑 엮이는 일이 도로 늘어나려나.’
하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오히려 이상했다고 하는 게 맞을까.
태초신이라든지 옛 지배자 같은 주제는 달동네 철물점에서 돌팔이에게 성질내던 아딱브딱 지구인이랑 어울리는 테마가 아니잖은가.
‘오히려 이런 일이 1~2년 전까지만 해도 나랑 더 밀접하고, 더 자주 겪을 법한 일이었지.’
신들의 탄생과 파멸, 세계의 운명 등에 맞서고 나서 겪으니 훨씬 추접스럽고 더러운, 그래서 더 실감 넘치게 피부에 와닿는 인간 세상의 추악함.
그런 것들에 오랜만에 맞닿자 새삼스레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인류 사회의 일부였다.
세계 제일의 갑부라고 똥 밟을 일이 없을까. 내 강함이 인간 중에서는 견줄 자가 없더라도, 이런 역겹고 한심한 일과 완전히 무관할 순 없었다.
‘축제 때 아내들과 평범한 행복을 즐긴 것처럼, 이 세상에서 계속 살다 보면 이런 평범한 불행도 겪겠지.’
그러다 점차 적응하며, 고향이라는 말을 들어도 지구보다 이 추악하다가도 선하고 아름다운 땅을 먼저 떠올리게 될지도 몰랐다.
‘키아라랑 오델리아도 평범하게 자기 일을 하며 살고 있고, 7대신들도 생전에는 그랬다니까.’
마스터 클래스라고 해도 인간은 인간.
신들조차 한 데 모여 우당탕탕 대소동을 벌이며 살았다는데, 인간에 불과한 내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천지가 개벽할 듯한 참변만 겪고 해결할까.
그런 파란만장하기만 한 인생은 남들이 권해도 내 쪽에서 사양이다.
예전과는 비교도 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였다.
울프헤딘이어도 노르드였고, 노르드이면서 또한 강북호다.
신에게 버금가는 강함을 가진 인간도 언젠가는 죽는다.
신은 영원하지 않고, 인간은 특히 더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법칙을 뒤흔들고 별의 보호막을 찢으며 다른 차원의 악신을 해치웠다고 해도, 사람이라면 결국 사람의 세상에 살 수밖에 없다.
로키가 기어이 천상에 돌아갔듯이, 인간은 땅에 발을 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전대 국왕이 가꾸었을 정원의 한편에서 창을 든 새하얀 남자와 마주쳤을 때, 나는 의외로 놀라지도 살의를 불태우지도 않았다.
“……………….”
우리는 거울을 처음 보는 들짐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침묵을 지켰다.
정원에 뜬 달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월광을 내리쬈다.
치지직, 치지직…! 메달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배! 선배! 제 말 들리세요?!”
메달이 전해주는 음성은 전파가 나쁜 무전기를 방불케 하며 뚝뚝 끊어졌다. 단편적인 단어가 내 주머니 속에서 윙윙댔다.
“방금 델타사 씨가 찾아오셨…… 학회장님…… 학자들한테 납치당하…… 선배를 데리러 가려 해도 갈 수가 없…… 지금 어디에 계시는……!”
…치지지직, 치지지지지직!
─뚝!!
라리루라의 목소리는 거기서 완전히 끊겨버렸다.
나는 성벽을 힐긋 쳐다봤다. 브리타니아 왕궁의 정원은 기이하게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었다.
차원이 비틀린 것이다. 다나가 때려부수기 전의 카네쉬처럼.
라리루라의 권능으로도 이 안에 들어올 순 없는 것일까.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벗어날 수 없었기에 로키도 가슴에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이 차원의 틈새에 가까이 와서 연다면 몰라도, 지금 왕성 밖의 어딘가에서 위치도 모른 채로 휙 워프해서 들어오기엔 이 ‘마법’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았다.
‘역시 마법은 나보다 낫군.’
그러니까 내가 눈을 반개한 건, 이만한 마법의 발동을 나 역시 발동 직전까지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깐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고, 오딘의 눈을 켠 것도 아니긴 했다.
그래도 마스터 클래스의 감각이 마법이 발동한 후에나 간신히 눈치챌 정도로, 저 남자의 마법은 치밀하고 빨랐다.
“유부녀 납치범이랑 달밤의 세레나데라.”
나는 그자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네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얌전한가 싶어서 걱정깨나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좀스러운 하루가 되겠어.”
“설마 첫 만남부터 그런 궁색한 수작을 부릴까. 아셰라드 신시아의 실종과 사망은 너의 운명이자 행운이다. 네가 겪을 필연의 한 페이지에 불과해.”
누구보다 신에 가까운 권능으로 인간의 시대를 일그러트리던 〈편찬대대〉의 수장은 따분한 옛날 영화를 다시 돌아보는 연출가처럼 창을 놓았다.
“지금, 나와 너의 만남이 그러하듯이.”
시구르드의 왼편에서 궁니르가 표표히 유영했다.
신들의 운명과 결별하고, 속세를 살아가게 되리라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