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58화 (957/1,009)

스릉─. 나는 팔찌를 창으로 바꿨다.

‘브류나크. 있냐?’

내면에 대고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브류나크의 의식은 지금 실체화한 현실에 있을 거고, 그 의식은 한층 고도의 차원벽에 가로막혀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구르드는 이 타이밍을 예지하고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 있어서도 나쁜 상황은 아니지.’

이건 반대로 행운이기도 했다.

어쨌든 브류나크가 안에 없어도 이 창은 무기로 충분히 기능한다. 마법과 무술의 사용에는 지장이 없다. 내가 무정하게 직시하자 시구르드가 말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염려 마라. 싸우고자 온 건 아니니.”

“지랄 마라. 니가 싸우기 싫으면 내가 보내줘야 하냐? 니들 손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오늘 느그 친구 레티티아랑 재회할 준비나 하렴.”

저 새끼가 이끄는 〈편찬대대〉에 직간접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몇 명이던가. 그 피해자 중에는 우리 프랑과 네페르티티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네게 해악이 되었나?”

하지만 내 경멸 어린 시선에도 시구르드는 느긋하게 손을 까딱였다.

“뭐, 씹새야?”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의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너와 그녀가 만났을까? 네페르티티의 형제가 죽지 않았다면 그 복수귀가 임모르탈리스가 날뛰던 사르가디스에 찾아왔을까?”

고까운 손짓을 한 망국의 왕자는 품위 넘치도록 역겹게 질문했다.

“그렇지 않다. 순서가 정반대지. 잃었기에 너와 만난 게 아니다. 정해진 운명은 너희를 만나도록 했고, 그 미래의 거름이 되기 위해 그들의 가족은 과거에 묻혀야 했다.”

“아, 그래.”

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래도 뒤지고 싶은 모양이군.”

─쿠와아악!!!!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의 완력이 전신으로부터 살기로 넘실거리는 파괴적인 마나를 폭발시켰다.

있으나 마나한 거리를 초간에 좁힌다. 번갯불을 감은 창이 절기를 펼쳤다. 룬을 형상한 【게르튀르】의 초식이 시구르드의 정수리를 노렸다.

오딘의 눈이 직후에 뇌장을 흩뿌리는 그 새끼의 모습을 예지했다.

“【맹공하는 기수(Atriðr)】.”

하지만 시구르드는 뻔히 보이는 공격을 피하는 것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냈다. 내가 본 몇 초 후의 미래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스스스스스스─!!!

휘두르지도 않은 궁니르가 수천 자루로 늘어나 천지 360도를 완전하게 포위했다. 당황하지 않고 몸에 감은 오러를 분사해서 소멸시켰다.

꽈르르르르르릉─!!!!

공격이 부딪힌 여파로 지반이 융기하며 비틀린 정원을 지옥도로 바꿨다.

공기가 달궈지며 불타오르고, 차원벽 안쪽에서 부딪히고 휘몰아치며 적란운을 만들었다. 으깨진 지반 밑에서 용암이 쇄도했다. 가뿐하게 피하면서 창을 휘둘렀다.

나한테 용암 샤워를 시켜주려던 시구르드는 그 순간 빈틈을 드러냈다.

‘잡았다.’

선공을 가하느라 흐트러진 자세. 심장을 꿰뚫는 브류나크의 창날. 수많은 싸움에서도 느껴본 감각. 손에 잡힐 듯한 승리의 예감.

“날렵하군. 오딘이 아니라 토르의 후계자 같아.”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순간, 내 예지는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고.

“【불타는 눈(Báleygr)】.”

궁니르를 내밀며 공중에 눈동자가 떠오른 순간, 모든 방어 수단을 깡그리 무시하는 열량이 공간을 뛰어넘어서 나를 덮쳤다.

프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에 두른 방어는 통하지 않고, 입을 열 틈조차 없이 내 육신은 뼛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리고, 하나의 ‘만약’이 끝난다.

“…………큭!”

여실한 죽음의 감각을 느끼며 나는 물러났다.

무심코 고열이 헤집고 지나간 부위를 만졌지만 내 몸에는 부상 하나 없었다. 다리를 내려다보자 첫발은 디디지도 않은 채였다.

‘……【시재회귀】가 발동했나.’

발을 내디디고, 돌격하려는 순간 예지로 미래의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고작 3초 뒤에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미래. 너무 가깝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감지했기에, 수르트 때처럼 치지직 거리는 노이즈도 일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참한 패배다.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한 죽음은 나와 시구르드 사이의 여실한 격차를 의미했다.

하지만 내가 동요하지 않았던 건, 그게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가 창을 낮추고 바라보자, 시구르드는 갑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리곤 힐끔, 내가 쥔 브류나크의 예리한 날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기쁘군. 바라던 것 이상의 강함이다, 울프헤딘.”

마치 이 창에 목이 달아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흐.”

나는 입가를 비틀며 두 눈을 다 갖춘 예언자를 비웃었다.

“그 표정, 두 번 연속으로 뒈짖한 표정이군.”

100번 넘게 죽음을 반복해 봤기에 알 수 있었다.

헤니르를 쓰러트리고 돌아와서, 【시재회귀】의 매커니즘을 고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건 강적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다주는 능력이니까.

애매하게 강한 적보다, 오히려 죽음이 불가피할 만큼 강자와 싸우는 편이 나는 이기기 쉽다. 내게 닥친 죽음의 형태를 모조리 관측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같은 예언자끼리는 어떨까?

모든 예언자는 카산드라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신의 파멸을 보게 된다. 이 눈이 제일 보기 쉬운 운명의 흐름은 바로 자신이 파멸하는 미래니까.

“예언자는 자신의 죽음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지.”

나는 모든 세포가 소멸하는 감각을 뿌리치면서 이죽댔다.

“내가 너를 죽일 가능성이 있으면, 반대로 니가 나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예언자는 ‘자기 죽음’이 최우선으로 보이기 마련이야.”

당장 코앞에 닥친 죽음 이상의 파멸은 없으니까.

‘조금 전’의 ‘미래’에서, 시구르드는 내 공격이며 생각을 전부 간파한 것처럼 나를 압도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100%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값을 나의 참패나 부족함으로 보는 것은 확증편향의 오류다.

시구르드가 내 공격을 전부 예지한 것은, 보는 시점을 달리하면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너, 지금 내 창에 찔려서 뒈졌지?”

저놈도 【시재회귀】에 필적하는 농도로 미래를 보고 온 것이었다.

개소리를 지껄일 결과, 내게 살해당하는 미래를!

“그래. 네 생각대로, 그 창에 2번 정도 죽었다.”

시구르드는 생각보다 진솔하게 긍정했다.

지금, 예지를 통해서 내게 죽는 미래를 봤다고 말이다.

“공간을 넘어서 몸에 직접 별의 열을 불어넣는 마법인데, 설마 처음 보는 상대가 즉시 간파하고 발동 전에 내 목을 칠 거라고 누가 예상하겠나. 그 미래가 벌어질 가능성이 0%가 아니란 게 놀랍군.”

저 새끼가 구라를 까는 게 아니라면, 아마 원래 미래의 나는 지금 달려들어서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시구르드의 모가지를 커팅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시구르드는 방어에 집중하면서 마법을 맞출 준비를 했고, 내가 본 미래에서는 내 패배가 결정되고 만 것이다.

“같은 상대에게 2번 넘게 죽은 건 처음이다. 썩 놀라운 전적이야.”

“아, 그러셔? 세 번 연속으로 죽어보지 그러냐.”

“그것도 나쁘지 않군.”

─츠즛! 시구르드가 선공을 날렸다.

“계속하지. 네가 납득할 때까지.”

손을 뻗어서 붙잡고, 그 즉시 투창한 궁니르가 세상에서 소멸했다. 어떠한 감각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창이 내 머리를 정수리에서부터 꿰뚫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막대한 위력은 찬물에 끓는 쇳물을 던진 것처럼 내 몸과 함께 가둬진 공간의 공기 분자를 태우며, 우리가 있던 공간을 태양의 표면처럼 융해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만약’이 끝난다.

“……쯧!”

현실처럼 생생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즉시 돌진했다.

무기가 부딪혔다. 창과 창의 격돌이라기보다는 미사일 실험 현장을 닮은 폭발음! 나는 팔에 불어넣은 마나와 근력으로 힘을 겨루며 뇌까렸다.

“니가 본 미래를 100% 성사시키는 창이구만? 오딘한테 조언 같은 게 아니라 그 창을 받았어야 했는데.”

“알아채는 게 빠르군. 몇 번 죽었지?”

“그 창에는 한 번.”

─콰르르르륵!! 불똥이 튀겼다. 힘겨루기에서는 내 승리였지만, 특기가 마법과 체술로 갈리는데 그 정도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ᚱ(Raidō)】!”

쯔우웅─!

나는 회피를 중시하며 룬의 힘으로 공간의 틈에 진입했지만, 시구르드가 허공을 그으면서 마법을 펼치자 짐승에게 물린 듯 팔이 턱 붙잡혔다.

공간 자체가 멈추면서 내 팔이 붙들린 것이다.

“운명을 고정하는 핀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본 승리는 반드시 이뤄진다. 네가 상대가 아니라면야 죽음을 예지 당한 상대는 첫 수에 끝나지.”

“사실 나도 첫 수에 끝났어, 씨발롬아.”

“관점의 차이가 있군. 내가 본 미래에서는 이미 4번 이상을 연달아서 피했다. 감탄의 표현을 새로 배워야 할 지경이야.”

“좆 까셔, 필요 없다. 【ᛒ(Berkanan)】.”

룬 마법으로 팔을 변형시켜서 공간에서 잽싸게 빠져나왔다. 그 잠깐 사이에 찢겨나가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내 창이 휘영청 빛나면서 오러를 머금은 절기를 펼치며 시구르드를 노렸다. 아니, 노리려고 했다.

“그건 8번째 죽음에서 봤다. 【대지의 주인Foldardróttinn】.”

땅이 자의식을 가진 것처럼 수많은 뱀으로 변하면서 나를 묶으려 들었다. 창을 휘두르며 전부 다 베었지만, 그 0.1초는 될까 싶은 찰나에 궁니르가 번뜩였다.

─콰앙!!!!

귓가에 울리는 천둥소리는 환청이다. 들으려고 한 순간에는 이미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갔으니까. 귀도 없어졌는데 내 귀에 들릴 리가 없다.

“……퉷.”

머리통 윗 부분이 날아가서 입안에 뇌수가 고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불쾌한 감각에 침을 뱉고서 이를 드러냈다.

“오딘이 다루던 무렵보다 유용하겠군. 신이었던 오딘과 달리, 너는 니가 이긴 미래가 보일 때까지 운명을 비틀고, 다시 관측해서 던지면 되니까.”

“편리한 무기지. 궁니르가 침묵할 때는 이기건 지건 그 싸움의 행방이 내게 아무 영향이 없다는 걸 시사하는 셈이다.”

부유하던 궁니르를 붙잡은 시구르드가 말했다.

“즉, 궁니르가 얌전해질 때야말로 네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순간이라는 뜻이겠지.”

웅웅웅…!! 창이 맹견처럼 떨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하군. 쥐고 있기 힘들 정도야.”

“쥐고 있기 힘든 김에 맘 편하게 놓고 뒤져주면 고맙겠는데?”

“만족할 때까지 반복해 봐라. 나도 너도 자신이 이기는 미래를 찾을 수는 없다. 상대를 죽일 힘을 갖춘 예언자들의 싸움이란 그런 법이지.”

예언자에 손에 들리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해도 좋을 창세신의 창.

시구르드는 그런 무기를 길을 가다가 대충 주운 나뭇가지를 대하듯 다뤘다. 창을 바닥에 꽂은 그 새끼가 농담하듯 표정 변화도 없이 지껄였다.

“놀랍게도, 나 또한 벌써 10번은 더 죽었다.”

“알아, 씹새야.”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창을 휘두르다 죽었다.

죽음까지 이어지는 미래에 달려들고, 죽는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권능을 발휘할 체력이 남아 있는 동안은 서로 이길 수 없다. 이 싸움에서 1%라도 질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내가 죽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줌 미만의 승산을 100% 성사시킬 능력을 갖출 때까지, 나와 너는 죽는 미래를 반복한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브류나크를 궁니르로 전부 튕겨내면서 시구르드는 시시한 것처럼 말했다.

“어느 한쪽의 승리는 다른 쪽의 죽음을 뜻하지. 내가 이긴다면 너는 그 미래를 보고 대응할 테고, 그렇게 네가 이기는 미래가 갖춰지면 그때는 나도 그 미래를 관측한다.”

4번, 9번, 16번, 20번.

자기가 죽는 미래를 본 시구르드는 내 예지에서 계속 나를 압살했다.

반대로 시구르드의 예지에선 내가 저 씨발럼을 손가락 하나로 쳐죽이고 있겠지. 그렇게 뒤져버린 시구르드는 ‘이렇게 하면 이기겠다’ 싶은 방식으로 나를 해치우는 것이다.

‘체력이 바닥날 때를 기다리는 건 무리가 있다.’

그때쯤 되면 저 씹새는 후퇴를 고려할 테니까.

애초에 죽음을 예지하는 건 소모가 적다. 서로 수만 번을 죽어도 끝나지 않을 우려가 더 컸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예언자의 패러독스였다.

승리가 패배를 의미하고, 패배가 승리를 뜻하는 무간지옥! 나는 연달아 서른두 번의 죽음을 겪고 간신히 손속을 멈췄다.

“……도합 96번.”

─툭툭.

시체 같은 낯빛으로 시구르드가 어깨를 털었다.

“지독하게도 죽이는군. 원한이 깊은 모양이지.”

“병신이 많이도 뒤졌네. 나는 32번이다.”

“놀랍군. 네게 통할 마법만 천 개는 될 텐데.”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대꾸라서 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좀 차분하게 대화할 의지가 생겼나.”

궁니르의 진동이 잦아드는 걸 보고, 시구르드는 골백번의 죽음이 잠시 지나간 산들바람이었던 듯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따분하게 지껄였다.

“아셰라드 신시아는 죽는다. 이틀 후에.”

“……………….”

─찌르르르. 궁니르가 잠시 진동하다가 멈췄다.

“네가 걸어갈 운명의 길에서 죽어나갈 목숨 중 하나지. 원체 고지식하던 그녀는 아들을 되찾으려 한 첫 실험이 수포가 되자 술에 취해서 잠든다.”

“그래서 뭐, 새끼야.”

“네가 여왕 엘리자베트에게 들었을 머저리들은 당시의…… 지금의 바쁜 학회에서 학회장이 죽게 되면 도망칠 시간이 생기리라고 봤다. 정답이었지.”

일그러진 달빛이 랜턴처럼 깜빡거렸다. 팔짱을 끼고 얘기를 듣는 내 눈썹은 역팔자로 찌푸려졌다.

“학회장의 죽음을 고고학계 전체가 책임을 진 셈 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학회에선 사람을 차출하기에 앞서, 빈 학회장 자리가 눈에 밟히지.”

히타이트와 학회장 자리, 엘리자베트의 압박에 정신이 없을 학회는 그 역겨운 놈들을 즉시 잡을 수 없고, 몇 년간 행방을 놓칠지도 몰랐다.

“1년 후, 너는 그 머저리들을 찾아내서 죽인다. 아셰라드 신시아에게 성묘를 간 다음 날이었다.”

“그게 내가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의, ‘정상적인 미래’다 이거냐?”

오딘의 신좌로 본 미래.

운명을 비틀 수 있기에 멀리 보지 못하는 나랑 다르게, 운명의 흐름에 종속되어 있기에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던 그 짝눈 태초신의 권능이다.

“그래. 답을 알고 보면 뻔한 얘기다. 헤니르에게 맞설 때처럼 너는 미래를 보지 못해도 이 미래를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다. 이번엔 그 사실을 알게 된 타이밍이 늦었을 뿐.”

신의 권능을 인간의 혼돈으로 휘둘렀을 씹새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두들겼다.

“네가 왜 이 미래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

“알고 있는가 보군. 그렇다. 아셰라드 신시아의 죽음은 네게 전혀 악영향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 여자가 차원을 연결할 위협이 알아서 사라진다면 너에게는 굳이 예지할 것도 없는, 기쁜 오산이며 행운이지.”

그게 내가 아셰라드가 납치당하는 미래를 보지 못한 이유였다.

내 가족이 죽는 미래랑 다르게, 그건 내 미래에 하등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아셰라드의 죽음은 내 파멸이 아니니까.

틀린 곳 하나 없는 지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픽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기필코 저지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래, 할 얘기는 그게 다고?”

기가 찰 만큼 같잖은 지적이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목숨을 다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인가? 내 안에서 아셰라드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아내님들만큼 그녀를 소중히 여길 이유가 없기는 하잖은가.

“학회장님의 죽음을 내 죽음처럼 큰일로 느끼지 못하겠다는 건 사실이군. 하지만 그건 학회장님도 마찬가지일걸? 까짓거 오늘 중으로 구해내면 좆도 문제없겠네.”

내게 아가페를 실천하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은 없지만, 나는 그런 서민적인 마음가짐 가운데서도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자 살아왔다.

저딴 위선적인 비난에 양심을 자극받을 이유가 없다.

“그딴 개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몇 달을 학수고대하다 오늘 이렇게 튀어나왔냐? 까놓고 말해서 좀 많이 한심한데. 병신 같기도 하고. 너는──”

거침없이 비아냥대던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내게 죽는 동안에도, 나를 죽이는 동안에도 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듯 굴기만 했던 시구르드. 그 미친 고대인 새끼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좋다, 그렇게 나와야지.”

눈을 의심하리만치 즐겁게 웃던 시구르드가 뚝 웃음을 그쳤다.

“아무렴, 운명은 가역적이다. 예언자로서 자신이 보지 못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는 무척이나 중요해. 마기도라에게는 그게 없었다. 오딘에게는 있었겠지만.”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에도 감정이 희박하던 드는, 조금 전까지와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열기에 찬 눈동자를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

“내게 물었지? 왜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너답지 않은 질문이군. 그 대답은 이미 한참 전에 말해주지 않았나.”

한참 전. 그렇게 말할 만한 순간에 짐작이 갔다. 순간적인 기억이 내 뇌리를 스쳤다.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녀의 고향이 불타던 날. 그 재앙의 주역이었던 시구르드는 불타는 언덕에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서 담담하게 말했었다.

─축하한다, 울프헤딘. 너는 우리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내가 저들에게 승리했노라고 말이다.

“미래를 바꿔라. 운명을 지배해라.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을, 이제부터는 네가 너만의 방식으로 해 나가야 할 차례다.”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였지만,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무슨 궤변을 늘어놓을지 알 것 같았다.

나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동기’를 주고자, 저 미친놈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머지않아 도래할 세계를 보라.】

손가락의 틈새에서 시구르드의 눈이 빛났다.

【미래편찬.】

그 찰나, 세상은 빛에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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