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59화 (958/1,009)

***

공간의 흔들림을 느끼고 그녀는 눈을 떴다.

〈……습격?〉

오랫동안 편하게 쉰 적이 없는 몸은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의식을 바로 일깨웠다. 고민은 잠시였다. 단출하게 들고 나갈 무기에 케이프까지 두르고서 창틀에 발을 걸쳤다.

장비는 벗고 잠든 적이 없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가 아니라, 잠에 들 때 새로 갈아입을 뿐.

─스스스!

그녀는 탁한 눈동자를 가라앉히며 밤이 끝나지 않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

혹자가 말하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록 중에서는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는 그 사람의 어휘력의 한계라는 말도 있다. 사람은 머리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언어로 만드는 생물이기에, 단어로서 정의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겠느냐는 논지다.

혹시 그게 사실이면, 로키한테 만언신의 권능을 내려받은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생각해본 상상력을 전부 공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윽!”

그렇기에, 지금 내 시야에 펼쳐진 것은 역사상 그 어떤 생물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빛보다 빠르게, 인간의 뇌와 시신경으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빛! 내 뇌는 마치 컴퓨터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전원을 강제 종료하듯 그 빛을 인식하기를 거부했다.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면 말은 쉽지만, 그 어떤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언어로 남기고자 했겠는가. 프랙탈 우주처럼 빛이 기하학적으로 일그러지면서 시공간이 늘어났다.

쿠키 파편처럼 범람하는 대륙이 멀어져간다.

자의식이 우주 바깥까지 걷어차여서 날아간다.

나 혼자 공전하는 행성에서 쫓겨난 것 같았다. 까마득하게 멀어진 우주에서 보이는 것은 장대한 나무였다. 뿌리와 가지에 열매가 매달린 빛의 나무.

나무의 주변을 별들이 회전했다.

빠르게 돌리는 영상처럼 순식간에 별빛들이 몇 바퀴나 나무의 주변을 돌고, 열매 중 가장 생명력 넘치는 열매가 대자연을 담은 수정구처럼 봄부터 겨울까지 순환했다.

순환하고, 순환하며── 죽은 것처럼 멈췄다.

쭈우욱…!

문득 그 빛의 나무가 머리가 잘려나간 사람처럼 보였을 때, 급류에 휩쓸려가는 통나무처럼 사멸한 열매가 나를 잡아당겼다.

입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신음은 흘리지 않았다. 파리채에 맞는 파리가 된 기분으로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대륙을 목격하고 급하게 숨을 참았다.

쿠웅…!

충격은 예상보다 적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듯한 아픔밖에 없다.

감각도 그랬다. 마치 잠결에 굴러떨어져서 개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방금 전에 본 우주의 모습이 흐릿한 기억으로 잊혀지는 듯 하다.

오딘의 눈이 녹화를 끝낸 카세트 테이프처럼 뚝 끊겼다. 그렇게 눈앞에서 확산하는 빛이 완전하게 가라앉았을 때, 나는 녹색 모래사장 위에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시발.”

손에 잡자 마치 녹조류가 모래 알갱이처럼 뭉친 느낌이었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잠깐 휴식시켰다. 생각하길 멈췄다는 뜻이다.

‘……나더러 미래를 보라고?’

내가 감지할 수도 없이 퍼져나갔던 빛!

그 빛은 오딘의 눈으로도 읽지 못했다. 아니지, 빛 자체가 내가 가진 권능의 힘이 폭주했기 보인 것이다. 혐짤을 보고 나서야 욕이 나오는 것처럼 눈으로 봤을 때는 이미 늦었던 듯 싶다.

‘이것 자체가 공격은 아닌 듯 한데…….’

시간의 흐름이 현실과 다르다는 실감이 있다. 【시재회귀】 때처럼 의식이 깨어난다면 시구르드 씹새가 눈뽕을 쳐갈긴 직후로 돌아갈 것이었다.

─통통. 고장난 기계를 두드리듯 눈을 두들겼다.

‘권능이 발동하질 않아.’

내 감각으로는 먹통이 됐다기보단 처리 능력이 한계를 맞이했다는 인상이었다. 이래서는 미래를 예지하는 건 어렵겠다.

어쩌면 굳이 예지를 발동하지 않아도, 난 이미 미래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딴 장난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지. 바로 빠져나간다.’

모래사장, 아니. 이끼밭이라고 해야 할 장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각을 살려봤다. 브류나크의 의식은 내면에는 없었다.

‘시발, 이러면 돌아갈 방법이 감이 안 잡히는데.’

눈깔이 내 통제를 따른다면 권능을 꺼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 힘이니만큼 그나마 회복에 어느 정도 걸릴지 감이 잡히긴 했지만.

“……나으려면 일주일은 걸리겠군.”

계속 처리능력에 과부하가 걸린 듯한 느낌이라, 진정시키고 이 이미지를 파훼하려면 대충 그쯤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됐다.

일주일.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긴 시간이다.

메달을 뒤져보자 식량이 나왔다.

“쓸데없이 리얼하고 지랄이네.”

셰이드의 꿈, 나우넷의 진흙, 【시재회귀】로도 익숙한 감각이다. 나는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요리용으로 넣어둔 당근부터 씹었다.

하늘은 파랬다. 낮이라는 뜻이 아니다. 밤인데도 요염한 물감에 오염된 것처럼 푸르딩딩했고, 달은 질투 많은 여신의 눈동자처럼 어딘가 불온하게만 느껴졌다.

‘……미래. 미래라.’

바다처럼 변한 하늘에는 생명력이 넘쳤지만, 그 반대급부로 힘을 빼앗긴 듯 대지에는 아무 힘조차 느낄 수 없었다.

땅에 손을 짚자, 이 이끼 같은 게 그나마 남은 생명이었다.

“……하. 니애미 소일렌트 그린.”

더 끔찍한 건, 이 이끼들이 한때는 더 ‘고도한’ 생명이었다는 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면 이 이끼밭 전체에서 인간다운 영혼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나라 하나만큼의 인구가 죽지도 못한 채, 벌레 미만의 쓰레기가 돼서 사막에 버금가는 토양을 꽉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이끼 알갱이가 구르면 이끼들은 뒤섞이며 굴러다녔다.

몸이 수억 조각으로 말라붙어서 뿔뿔이 흩어져 굴러가는 감각이 어떨지, 인간의 뇌로는 전혀 감 잡히지 않는 참변이었다.

“……후.”

나는 몸에 묻은 이끼를 한 톨도 남김없이 전부 떼어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이끼밭의 정체가 뭔지 알고 나니, 가짜라곤 해도 밟고 다닐 기분이 들질 않았다.

─슈우우우웅!

안개구름을 발로 딛고 더 높게 날아올랐다. 휙 돌아보자 이끼가 보이지 않는 지형이 있었다. 몇 분 정도를 천천히 날아가서 착지했다.

“끼기기긱!”

고릴라에게 조형을 가르치다가 만 듯한 형태의 도마뱀이 비효율적인 걸음으로 놀라서 도망쳤다. 나는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대지를 보면서 혀를 찼다.

가뭄에 갈라진 것처럼 회색 대륙에는 끔찍하게 크레바스가 널려 있었고, 그나마 지성적인 생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다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이 우리가 살던 【중간 가지】라는 뜻일까.

“씹놈이 별 시답잖은 짓거리를 다 해대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에 앞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언젠가 찾아올 미래라면 끔찍하긴 한데, 그 병신은 메신저의 중요성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지.

“다른 놈도 아니고, 싸이코 학살마가 보여주는 미래상을 곧이곧대로 믿는 저능아가 어디 있겠냐.”

하지만 기분은 굉장히 더러웠다.

얼마나 더러웠는가 하면, 나를 뒤에서부터 노린 참격을 피해내는 중에도 어떻게 시구르드 새끼를 조져놓을지부터 생각했을 정도로.

─쉬익.

바람 빠지는 듯 맥없는 소리였지만 그 위력까지 맥없지는 않았다.

─쩍. 회색 지면이 순두부처럼 갈라졌다.

단면이 너무 얇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티도 나지 않았는데, 내 다리가 저 위치에 있었다면 우리 아내님들은 나를 위한 휠체어를 골라줘야 했을 것이었다.

“상황파악도 안 된 놈한테 대화할 마음도 없이 선빵부터 갈겨?”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새끼지.

나는 적을 찾아서 사방에 눈을 돌렸다. 보이지 않는다. 장애물도 없는 평야였기에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참격이 날아온 각도를 파악하고 나는 대가리를 쳐들었다.

“하늘인가.”

위에서 아래로 꽂혔는데 설마 지하에서 날리진 않았겠지.

예지능력이 막힌 건 애석하지만, 권능이 봉인됐다고 내 힘이 사라진 건 아니다. 곤두세운 감각은 주변 십여 미터 안에서는 프랑보다 뛰어나다.

메마른 바람이 불고, 쉬익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숨어들었다.

‘왼쪽.’

몸을 비틀었다.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참격이 내 머리카락을 몇 가닥 앗아갔다.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권능이다.

신이던가, 마스터 클래스던가── 옛 지배자다.

‘육체의 감각만으로 피해야 하나.’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시구르드 새끼가 몇 번씩 나한테 공격을 맞춰댔던 건 예지 빨이었지, 내가 가진 감각이 맛이 가서가 아니니까.

‘하지만 예감이 안 좋아. 맞으면 방어를 굳혀도 베인다.’

썰린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까. 힘을 극한까지 효율적으로 짜낸 살상기술이었다. 괴물 좀 죽여본 솜씨다.

상관없다. 안 맞으면 그만이고, 에너지가 응축된 공격이기에 받아치면 상쇄할 수도 있다. 날 죽일 힘은 나랑 싸운 놈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새끼들 중에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 놈은 아무도 없었다.

─파츳, 파츳, 파츠츠츠츳!!

땅을 딛고 흐르는 듯한 보법으로 참격을 싸그리 피해냈다.

몇 번인가 반복하자 공격을 가한 놈에게도 적지 않은 동요가 보였다.

‘내가 생각보다 잘 피해서…… 아니군. 망설임?’

의구심에 집중하고자 감았던 눈을 떴지만, 다소 곤란하게도 적의 공격은 잠시 그쳤다가 이전보다 격렬해졌다. 참격이 네온사인처럼 늘어지며 주변 수천 미터를 감쌌다.

잘못 감지한 게 아니다. 수천 미터가 맞다.

“미친.”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수천 미터를 전부 아우르는 참격이 울타리처럼 퍼졌다가 수축했다. 이만한 광범위를 감싸며 공격하는 건 신적 존재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권능을 활용한 건가? 지나치게 살벌한데.’

사아아아아아아악─!!

수천 미터의 거리를 거의 총알처럼 줄이고, 또 줄이는 날카로운 에너지 체!

투사체는 여전히 가느다랗지만, 공격의 숫자가 너무 방대했기에 바람을 찢는 소리가 거의 산사태처럼 들렸다.

“……안 놓치시겠다 이거지.”

가뿐하게 수만 가닥은 될 듯한 공격이 좁혀지고 있다. 땅 밑에서도 오고 있는 게, 눈에 띈 강적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쳐죽이려는 듯한 기술이다.

메달 속의 공간 마법 유물에도 손을 대 봤다.

─키이잉!!

놀랍게도 예지가 순간적으로 발동했다. 공간을 도약해서 피하려는 순간, 저 에너지의 벽에 냉큼 부딪혀서 강북호 믹스 쥬스가 돼 버리는 미래가.

‘컨트롤 못 할 정도로 급한 분석이 밀려있어도 내 죽음만큼은 최우선으로 처리하는군. 그렇다면 됐어.’

예언자의 철칙은 아직 유지되고 있다. 나는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다시 하늘 위로 달려들었다. 내 감각이 절벽 끝에 매달린 듯 경종을 울렸다.

‘진짜 미래로 온 건 아니다. 미래를 보고 있을 뿐.’

죽는다면 현실로 돌아갈까? 모른다. 못 돌아갈 경우를 생각하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죽음만은 최우선으로 예지한다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도 세상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사납게 웃고 하늘을 박찼다.

“죽여봐라. 할 수 있으면.”

쐐액─!!!! 예리한 죽음의 예감이 뒷목을 스쳤다.

믹서기에 뛰어든 순간, 내 권능이 모든 처리를 미루고 한순간 통제에 들어왔다. 죽을 위기에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듯 권능의 감각이 돌아왔다.

【게르튀르 푸타르크(Geirtýr ᚠᚢᚦᚨᚱᚴ)】·ᚢ(Ūruz)

룬의 힘을 담은 초식에, 〈정화의 벼락불〉까지 부여했다.

─서걱!!!!

모든 개념에 개입하고 불태우는 신의 번개는 내 죽음을 구현화한 듯한 살육 공간을 전부 베었다. 통제를 되찾은 눈이 은폐된 차원을 간파했다.

─싹둑! 벼락불을 감은 브류나크가 차원의 벽을 베어냈다.

급격한 접근에도 후퇴가 아니라 반격하길 택한 듯, 나를 공격해온 적이 다시 공격을 펼쳤다. 푸른 밤하늘에 실이 뻗어나갔다.

핑크색의, 차원을 절단하는 실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권능으로 만든 실을 밟고 올라탄 성숙한 여성이었다. 실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은 기억에 있던 것보다 몇 배는 길고 풍성했다.

“……라리루라!”

“시끄러워. 입 다물어.”

무심한 목소리는 사선을 몇 번이나 넘어왔다는 것처럼, 나와의 목숨을 건 승패가 걸린 지금에도 일절 동요나 공포가 없었다.

계속해서 나를 공격했던 날카로운 실의 참격이 거미줄처럼 불어났다.

“선배의 목소리로 말하지 마, 가짜.”

─촤자자자자작!!!

오딘의 눈이 통제를 벗어나며, 로키의 권능이 내 전신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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