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악─!!
찢어진 파편이 푸른 밤하늘을 점철했다.
피처럼 빨간 조각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피처럼 빨갛다는 건, 다시 말하자면 피는 아니라는 뜻이다.
“읏!”
유효타를 맞췄는데도 놀란 건 오히려 라리루라 쪽이었다.
쿠와아아아악─!! 나는 차원의 실타래에 난도질당하려는 찰나, 몸에 〈정화의 번갯불〉을 둘렀다. 권능도 불사르는 격류가 실타래를 태웠던 것이다.
수르트의 권능도 받아친 【엘든 링】의 원리다.
“흡!!!”
빨갛게 변한 번개를 두른 나는 공중을 박찼다. 라리루라의 등장에 경악해서 여기가 하늘 위라는 걸 잊은 건 아니다. 내 발이 허공을 디뎠다.
“석사탈주, 허공답보!!”
베스타의 권능, 〈정화의 번갯불〉을 카피해서 만든 마법은 공간 그 자체에 간섭했다. 작용하는 다릿심의 반작용으로 나는 높이 도약했다.
지금보다 더 높이, 날 때보다 더 빠르게, 나보다 위에 있는 라리루라에게로!
“너 임마, 라리루라! 누가 가짜라고?!”
“큭!”
저항하는 라리루라를 막고, 도망치는 것보다 더 빨리 그녀의 목에 팔을 감았다. 공격당한 줄로만 알았는지 라리루라는 한순간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핸섬한 와꾸를 들이밀었다.
“잘 봐! 니가 홀랑 반한 서방님이다! 네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고 파릇파릇할걸!”
“……그 얼굴로 떠들지 마!”
“니가 말을 놓으니까 좀 신선하네!”
동요하는 듯 했지만, 그런데도 라리루라는 나를 뿌리치려고 들었다.
‘보통 이 정도까지 의심하나?’
그럴 리 없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상관없다. 사랑하는 아내님들이라면 칼빵 몇 대 쯤 맞아줘도 된다. 그 정도 각오도 없는데 하렘충 꼴마초를 해먹을 수 있겠는가!
─파파파팍!!
공중에서 2초만에 열 합을 겨루고, 그대로 힘을 잃고 떨어지는 우리.
“이얍!”
지면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라리루라를 지키듯 몸을 밑에 밀어 넣었다.
쿵─!! 우리는 사이 좋게 바닥에 충돌했다.
“윽, 놓으라고 했잖아!”
날 뿌리친 라리루라는 덤블링을 하며 후퇴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였지만 지친 것 같진 않았다. 얼마나 강해진 건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다.
회색 대지에서 대치한 나는 무릎을 털며 웃었다.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니까 옛날 생각 나네. 너, 나랑 사람만 한 이족보행 벌레가 판치는 이계에서 바다에 떨어졌었잖아.”
“……네가 어떻게 그걸?”
우리만 아는 에피소드를 읊는 건 효과적이었다. 라리루라는 눈동자를 눈에 띄게 떨며 동요했다.
“정말로……? 아니, 하지만…… 읏.”
하지만 의심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흔들린다는 건 나를 의심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힘을 써서 결백을 증명해봤자 역효과일 거고.
‘이럴 때 써 볼 만한 수단이……’
가짜가 어떠니 하며 날 의심할 정도다. 참트루 강북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는 없을까?
기자회견하듯이 바지를 까? 아니, 쥬지 크기는 내 매력을 일부 대변할 뿐이다. 엘리트 대갈통을 어필해? 안 통하겠지.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나만 가지고 있는 것. 나만 보여줄 수 있는 것.
‘……그렇지!’
떠올랐다. 나는 내면세계를 들여다봤다.
적을 앞두고 보이기엔 너무나 큰 빈틈이었지만, 그렇기에 라리루라는 더 공격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올 거라고 믿고 있었지.
내면의 인격을 끌어내며 나는 외쳤다
“교수 슬레이어!”
─퍼드득! 하얀 까마귀는 울지도 않고 내 팔에 내려와 앉았다.
내가 쌓은 구신의 마나, 그 결정체! 야수회귀와 룬 마법 등으로 얻은 힘은 내면세계에서 타오르던 하얀 태양이 새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나를 빼닮은 개새끼가 있더라도, 교수 슬레이어까지 불러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안아 봐, 라리루라. 동물 좋아하지?”
“……정말이에요?”
내가 아는 그녀보다 몇 살쯤 더 먹은 듯한 라리루라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다.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떨리는 것이었다.
“정말로, 선배세요?”
“정말이지, 그럼 가짜겠어? 나야말로 겨우 애기 테를 벗었던 프리실라가 이렇게 예쁘게 자랐다는 게 믿겨지질 않──”
너스레를 떨던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멈췄다.
─와락!
나를 공격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온 라리루라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부서지도록 끌어안은 라리루라는 잠시 지나자, 내가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팔에 힘을 풀었다.
“흑, 흐윽……! 흐윽……!”
그리고는 참지 못한 듯 울음을 터트렸다.
“……후우. 영문을 모르겠네.”
회색으로 사멸한 대지가 떠나가라 우는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흐윽, 흑…… 이제 괜찮아요. 좀 진정했어요.”
1시간 넘도록 횡설수설하며 울었던 라리루라는 간신히 어떻게 얘기가 가능할 정도로 침착해졌다. 나는 우선 내 이마를 두들겼다.
“내 사정부터 말하는 게 도리겠지만, 이쪽도 꽤 복잡해서.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차분하게 대화를 해 봐야 할 텐데, 어디 쉴 만한 곳은 없어?”
“히끅, 흑…… 기지가, 그게, 숨을 만한 기지가 있긴 해요.”
“기지? ……아니, 됐나. 가서 듣자.”
“네…….”
로키의 권능, 【보천의 편자】를 쓴 라리루라가 나와 함께 공간을 뛰어넘었다. 나는 그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발동에 신음했다.
‘강해졌네. 몇 년이나 지난 미래지?’
라리루라의 모습만 봐도 1~2년은 아니다.
딱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늙지는 않았다. 딱 보면 얼굴 생김새 등은 내가 기억하는, 10대다운 생명력과 20대의 성숙함을 두루 갖춘 그녀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바뀌었다.
표정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저도 조금씩 길러볼게요!’ 하고 기르기 시작한 머리가 저토록 풍성해진 것도 인상의 변화에 비하면 소소할 정도였다.
─파앗!
도착한 곳은 차원벽으로 감춰진 성채였다. 나를 돌아본 라리루라는 빨개진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일단, 사람들을 데려올게요. 제 방이니까 뭐든 마음대로 쓰시고 편하게 계세요. 괜히 밖에 나가셨다가는, 그게……”
“의심받을 거다? 알아. 그 정도 눈치는 있지.”
“네. 금방 데려올게요.”
누구를 데려온다는 건지는 몰라도, 라리루라는 그렇게 방을 나갔다. 나는 이상하게 바뀐 하늘을 빼고는 전혀 볼 맛이 나지 않는 창밖을 바라봤다.
‘보통 미래가 아니라는 건 자연환경만 살펴봐도 알겠어.’
시구르드 새끼가 나한테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미래를 보여준 거라면, 당연히 그 목적에 최고로 적합한 미래상을 선별했을 것이다.
평행세계를 보듯 여러 ‘만약의 세상’을 관측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비효과처럼 변수가 생길 때마다 미래는 모습을 바꿀 것이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변한 미래 중 하나다.’
엄청난 숫자의 미래를 보고, 자기 입맛대로 바꿔왔을 놈이 나를 흔들기 위해서 엄선한 미래일까. 고찰하던 나는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부터 뭘 보게 되든 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벌컥!
방문은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했을 때 열렸다.
“과연. 정말로 있네요.”
무례할 정도로 거칠게 방에 난입한 사람은 나를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닌 듯 했다. 오히려 집 안에 드래곤을 들여놨다는 얘기에 달려온 느낌이지.
팔과 다리가 불이며 얼음, 땅이며 식물 등으로 뒤덮인 여자였다.
인간의 육신에 자연을 거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내 기억 속의 어떤 인물과 조금 닮았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여왕님?”
“무슨 과거에서 온 사람 같다더니, 정말이군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도 저는 여왕이었나 보죠?”
정치에 닳고 닳은 성군처럼 차가운 말투. 방에 들어온 엘리자베트는 의자에 앉기도 부적한 몸을 아무렇지 않게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몸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옛 지배자들에게 잡아먹힌 정령왕들의 시체를 육체에 거뒀습니다. 미각과 시력과 장기를 일부분 잃었지만, 대신 그들의 힘을 좀 흡수했죠. 아픔엔 적응했고요.”
무심하게 카탈로그를 읽는 듯한 대답에 그녀가 들어온 문을 바라봤다.
라리루라는 안에 들어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 시선이동을 눈치챈 듯 엘리자베트는 말했다.
“길다트는 죽었습니다. 제 손에.”
“……의심은 안 하십니까?”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프리실라마저 속였다면 제가 의심해 봤자죠. 그리고 정말 가짜라도, 저흴 도와줄 수만 있다면 하등 상관 없습니다.”
“에르제, 진짜야……! 진짜 선배란 말야!”
울 것 같은 라리루라가 호소했다. 엘리자베트는 긍정했다.
“저도 물론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정을 알아야 저도 설명하기 편할 테니.”
“……믿을 만한 얘기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운을 떼고 오랫동안 설명했다.
오딘의 〈인신〉 시구르드와 만났다.
그놈은 내게 미래를 보여준다고 떠들었다.
그렇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내 권능이 폭주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 이끼밭에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서 회색 대지를 건너다 라리루라와 만났다.
딱 거기까지 얘기하는 데 10분이 걸렸다. 어떤 질문도 의혹 제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그 이끼밭은 브리타니아 인들입니다.”
“……………….”
“옛 지배자 ‘땅 밑 세이렌들의 휘왕’이 섬 채로 끌어당겨서 대륙에 붙였고,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개체가 전 국민의 모습을 변이시켜서 산과 바다에 흩뿌렸죠.”
“……일단 사람이 변한 모습이란 건 눈치채서, 한 톨도 남김없이 떼서 내려놓고 오긴 했습니다.”
많은 정령들이 뒤섞인 존재처럼 변모한 그녀는 열었던 입을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닫았다.
아마 그 정도로는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려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겠지. 정말로 저것들이 전부 인간의 살점이 변한 거라면, 이미 수만 갈래로 찢어져서 바람과 바다에 흩뿌려진 그들에게 추가적인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믿기 힘들지만, 믿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감사? 저에게? 저 이끼밭에는 티르시 양의 친구였던 헨네시스 백작도 있습니다. 당신 앞에서 떠들고 있는 저는 감사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입을 닫았다. 라리루라가 고개를 떨궜다.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툭툭. 엘리자베트가 시간이 아깝다는 듯 탁자 위를 두들겼다.
“이 세상은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로부터 9년이 지난 미래.”
엘리자베트는 오직 필요한 일만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장치처럼 1초의 낭비도 없이 입을 움직였다.
“인류는 절멸했습니다. 저희를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