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1화 (960/1,009)

***

─슈르륵.

정령들이 날아오르며, 찌그러진 찻 주전자에다 물을 붓고 끓였다.

“차를 만든 건 오랜만이군요. 당신이 선물해준 물건이니, 당신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축축하게 눌러붙은 찻잎을 말리고서 차를 우린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네. 처음부터 돼 있었습니다.”

“정신력이 강하시군요. 9년 전에도 그랬죠.”

고개를 끄덕인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정령들이 그녀 앞에도 차를 뒀다. 하지만 미각을 잃었다는 말은 사실인지, 그녀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9년 전, 제가 즉위했던 날 당신을 부른 날을. 그날 있던 학회장 납치 사건을.”

“예.”

“계기는 그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몇 년 후에나 알게 된 운명의 흐름과 법칙에 따르면, 그 작은 변수와 개인의 의지가 미래를 크게 바꾼다고 들었으니까요.”

“미래를 바꾼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가, 그날의 사건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학회장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셰라드의 죽음이 그렇게나 큰일이었다고?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내용이었다. 엘리자베트 역시 선뜻 부정했다.

“그 이후의 일이 큰일이었죠. 그녀의 죽음 이후, 히타이트의 유물이 속속들이 발견되고 고고학자들 몇몇은 다른 차원에 관심을 가졌죠.”

“……제가 막았을 거라고 보는데요.”

“예. 놀라운 수완으로 정말로 잘 해 주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당신마저 없었으면 파국은 몇 년 이상 빨랐으리라고 생각하니까요.”

“에르제. 그건……”

말을 머뭇거리는 라리루라. 엘리자베트의 얼음 같은, 얼음결정이 결정화된 안구가 빙글 움직였다.

“저희는 그에게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적어도 나도 말하게 해 줘.”

“저는 나라를 잃은 뒤로, 단 한 차례도 당신을 상대로 허락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여기 남아준 것도 오직 당신의 의지인걸요.”

9년 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는 좀 신경 쓰였지만, 엘리자베트는 질문으로 내 설명의 맥을 끊지 않았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해야겠지.

“마저 말합시다. 어떤 수완을 발휘했는지는 긴 얘기가 될 테니 생략하고, 사실 3년만에 당신들은 차원 이동의 연구가 위험하다는 걸 밝히고 차원막 자체를 보강할 방법까지 마련했죠.”

“혹시 그 후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당신은 실패하지 않는 예언자였으니. 당신이 예지하거나 예상한 미래가 참혹하다면, 그 미래를 바꿔서라도 성공해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죠.”

지금의 엘리자베트는 우리 가족의 비밀도 전부 알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묵묵히 듣기로 했다.

“여러분들은 잘 해냈고,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풀렸습니다.”

“……선배는 나타나지 않는 시구르드에 대해서 계속 알아보고 경계하셨지만, 큰 수확은 없었어요. 선배의 말로는 예언자끼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구요.”

자리에 앉지도 않은 라리루라가 말했다.

안다. 코앞에서 마주치고 벌인 싸움조차 저렇게 운명을 비트는 싸움의 연속이었는데, 도망친다면 무슨 수로 잡겠는가.

‘시구르드가 날 잡아 죽이려고 들지 않았던 게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만은 아니었겠지.’

그 새끼는 나를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찾을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아마도 미래의 나도 스스로 나서진 않았을 것이고.

소용없는 꼬리 물기라는 걸 알았을 것이니까.

“네페르티티 언니도 점점 부드러워지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문득 저희는 생각했어요. 보이지도 않는 위협 때문에 행복을 꺼리는 건 미련한 짓이 아닐까 하고.”

“행복이라니?”

“아이 말이에요.”

슬쩍 미소지은 라리루라였지만, 즐겁거나 좋은 감정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울프헤딘 백작가의 후계 문제도 있었고, 저희 단장님이랑 다나 언니네 어머니도 관심이 컸어요. 코르넬리우스 가주님께서 쓰러지셨을 때도, 죽기 전에 티르시 언니의 손주가 보고 싶다고……”

옛날 일을 말하던 라리루라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그게, 그.”

“어느날 댁에 동생을 보냈더니, 코르넬리우스 폰 아르마알스의 사망 이후로 여러분은 자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고 전하더군요.”

단어를 고르는 라리루라의 바통을 엘리자베트가 대신 받았다.

“……미래의 저는 아이를 봤습니까?”

나는 무심코 질문했다.

이 세상 자체가 이뤄져선 안 될, 내가 저지해야 할 미래라는 걸 명심했는데도 말이다.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우선 당신과 평범한 인간 사이에서는 아이를 볼 수 있었지만, 당신과 신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했죠.”

지구의 신인류와 【중간 가지】의 인류.

무척 다르지만 그들은 일단 신들에게 만들어진 종족이었다.

전혀 다른 생물학적 계보가 아니었기에 아이를 보는 것 자체는 가능했던 듯 했다. 하긴 나 외의 지구인도 이곳에 왔다면 아이를 보기도 했겠지.

적어도 오크와 인간보다는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보다는 멀었을 거고.

“베로니카와는…… 아이를 보지 못했습니까?”

신족인 그녀와 신의 손을 최대한 피해서 창조된 신인류는, 출신이나 신체가 너무 달랐으니까?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하다는 건 짐작했기에, 베로니카 부인은 그렇다는 결론에는 납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베로니카가 자식을 보길 포기했다는 겁니까?”

“스스로 낳지는 못해도, 저희가 낳은 아이라면 자기 피붙이처럼 보살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고개를 푹 수그린 라리루라가 말했다.

“분명 그 말은 진심이셨을 거에요. 하지만…… 역시 선배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으리란 게…… 언니로서는 마음에 걸렸던 걸지도 몰라요.”

걸지도 모른다.

추측. 짐작하는 말투.

다시 말하자면, 본인에게 듣지 못한 대답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베로니카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언니 잘못이 아니었어요!”

물어본 내가 놀랄 정도로 크게 외친 라리루라는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숙이고 울먹거렸다.

“단지, 제 생각이지만…… 언니는 선배가 가족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아셨잖아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슬픈데, 낳고 길러왔던 아이와 헤어진 선배네 부모님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셨을 거에요.”

“……………….”

감이 잡혔다.

나를 부모님들과 만나게 해 주고 싶었겠지.

‘내 아이를 낳아줄 수 없는 대신, 부모님과 재회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이 아니라, 잃어버린 가족을 선물할 생각으로 말이다.

“그래서, 언니는 선배에게 상의했어요. 차원막을 고치는 게 가능하다면, 지구와 세계수를 연결해도 괜찮지 않을까? 더 두껍게 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한층 더 나아갈 순 없을까?”

차원막을 새롭게 고친다.

지구로 향해서 부모님들과 만나고, 찢어진 차원막을 수리한다는 발상이었다. 오만하거나 그릇된 발상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니까.

지금 얘기를 듣고, 저 회색 대지와 이끼밭을 본 후가 아니었다면.

아셰라드의 사망 건 이후로 차원막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면 더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어째서?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런 위험한 시도를 했을 것 같진 않은데.”

“……선배가 보낸 편지를 받을 때마다, 선배의 어머니가 울면서 선배를 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 편지의 내용은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후우.”

나는 라리루라의 대답을 듣고 눈을 감았다.

자식의 도리 등을 놓고 보더라도, 내게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남아 있던 ‘심해의 군주’ 년이 우리 부모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잖은가.

나우넷의 진흙으로 과거를 본 뒤, 우리가 차원 마법 연구를 서둘렀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 알겠어. 하지만 차원을 연결했다가, 수복한다고 치면 ‘심해의 군주’도 굳이 좌시할 것 없었을 텐데? 약해진 상태라면 해치우면 되잖아.”

“실험만 성공한다면…… 그럴 생각이었어요.”

내가 묻자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리루라.

아마도 가족끼리 상의해서 내린 결론이었을까.

엘리자베트도 알고 있고, 동의한 내용이었는지 그녀는 수긍했다.

“신들께서도 기뻐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심해의 군주’를 좌시했던 건 그자를 해치워도 차원막을 다시 고칠 방법이 없어서였잖습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언제고 브리타니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데, 당연히 저도 동의했죠. 연구 자금의 일부는 제가 댔습니다.”

차원막을 수리한다.

사실 이것 자체로는 무척 좋은 발상이었다.

마지막 남은 옛 지배자를 해치워도 만사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딘과 ‘심해의 군주’가 서로를 발견했던 우연, 그도 아니면 운명의 사건이 저 옛날 라그나로크의 시발점이지 않았나.

신들이 거의 죽고 차원을 수호하는 차원막마저 없어졌을 때, 우주 어딘가에서 별의 자손들이나 또 다른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차원막이 사라진다는 건 이 세계수 전체로부터 면역체계가 없어지는 거랑 똑같아.’

그래서 신들은 로키를 고치고, 세계수를 니플헤임에서부터 안정화시켜서 차원막을 수복해보려고 했다. 그래야만 케케묵은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러 갈 테니까.

‘심해의 군주’가 부활하고 전력을 확충하기 전에.

‘……그래.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나는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다.

신들도 갈망하던 결전을 벌이는 게 가능하다.

이렇게나 이유와 승산이 갖춰졌다. 나라도 계속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그보단 내가 먼저 실천에 앞장섰겠지.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는가.

그건 창밖의 풍경이 말해주었다.

“……그렇게 무작정 시도했다가, 실패한 건가.”

“무작정이 아니었어요!”

라리루라는 말을 망설이던 이유가 그것이었다는 듯 소리쳤다.

“선배는 신들의 협력을 모으고, 철저하게 온갖 문제를 방지하고 해결할 방법을 마련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오딘에게 한 번 패배한 ‘심해의 군주’는, 오랜 시간 예언자를 상대하는 방법을 고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엘리자베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신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사랑했던 베로니카 에클립시스 역시 신이었다는 걸, 저희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죠.”

베로니카가 권능으로 얻은 지식을 활용한 실험.

그러나 나는, 미래를 보는 여신이 더한 지식을 바란 끝에 벌어진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믿고 파멸하는 운명을 불러들인 역사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만한 실패를 제가 전혀 예지 못했다고요?”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은 그 누구 한 사람 죽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요?”

“그녀가── ‘심해의 군주’가 도왔습니다.”

나는 두통에 내려가던 머리를 쳐들었다.

“실험이 운명의 장난처럼 실패해서, 아이키븐 섬 전체가 차원 단절의 혼돈으로 변했음에도, ‘심해의 군주’는 힘을 짜내 베로니카 부인을 지켰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놀라서는 아니었다. 내 머리가 순식간에 온갖 생각을 되풀이하며 일이 그렇게 된 이유를 알아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가속한 머릿속에, 엘리자베트의 말이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공간의 파괴에 휘말린 프란체스카 부인을 지키고자 베로니카 부인이 차원이동장치의 폭심지까지 달려갔고, 당신이 닿기보다 먼저──”

“그 문어대가리 년이 베로니카를 구했겠죠. 왜? 그래야만 하니까.”

나는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는 형형한 눈동자에 엘리자베트는 숨을 삼켰다. 조금 미안했다. 안 그래도 쭉 발동 중인 오딘의 눈 때문에 살벌할 텐데.

“계획은 실패해야 하지만, 그건 내게 절대 해가 되어선 안 되니까. 내가 그녀들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파멸이라고 여기는 걸 잘 아니까.

그렇게 해서 아무도 죽지 않아서, 그 실패가 내 앞날에 스쳐 지나가는 불행 정도가 돼야 ‘자기만’ 그 미래를 보고,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까.”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이를 갈았다.

“그 실험은 제겐 실패였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실패가 아니었겠죠. 연결된 곳이 전혀 다른 차원이었을 겁니다. 맞습니까?”

“……신화에서 사악한 신은 금은보화로 사람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렇게 파멸까지 몰아넣는다고 하죠. ‘심해의 군주’가 만든 이계가 그랬습니다.”

긴장이 풀린 듯 숨을 내쉰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금은보화와 강력한 병기, 연인까지. 그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공간이었죠.”

“……창세의 권능과 그놈이 회수한 옛 지배자의 시체에서 힘을 짜내면 못할 건 없었겠죠. 창조된 사람은 진짜가 아니었겠지만.”

“네. 이족이었죠. 사회에 알려진 아이키븐 섬에 사람들이 몰려온 건 순식간이었고, 인간으로 변한 옛 지배자의 권속들이 사회에 숨어들었습니다.”

“저희는 왜 막지 못했죠?”

“그 모든 게 여러분이 아이키븐 섬의 이계에서 빠져나오는 1달 사이 벌어진 일이었으니까요. 참으로 고맙게도, 이계에는 베로니카 부인이 ‘아무 문제도 없이’ 아이를 낳을 방법이 갖춰져 있었다더군요.”

베로니카가 아이를 낳을 방법. ‘심해의 군주’가 준비해둔 거겠지.

예언자를 죽이는 건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다.

카산드라가 있던 트로이를 불태운 게 영웅들의 군대가 아니라, 성으로 들여놓은 목마 때문이었던 것처럼.

‘심해의 군주’는 나랑 베로니카── 예언자들이 바라던 행운을 아무런 거짓도 없이, 정말 선량한 신인 것처럼 정성스럽게 선물해놓고.

“……저희가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늦었었어요.”

그 뒤에서는, 인간들에게 파멸을 내렸다.

욕망을 채워줄 힘을 주고, 악마처럼 그 대가를 받아갔다.

“인류는 혼돈의 총아. 신을 지배하는 운명마저 지배하는 종족. 하지만, 태고의 옛 지배자는 그런 인간을 장난감처럼 유인하고 조종할 만큼 사악한 지혜가 있었죠.”

“……꼭 동화나 괴담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전부 다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지금도 매일 밤 생각합니다. 더는 잠들 수도 없는 몸입니다만.”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았다.

코즈믹 호러급 문어 대가리 새끼한테 사람들을 가볍게 조종하는 지혜가 있고, 그걸 활용해서 나 외의 인류를 가지고 놀았다.

그 말에는 숨이 턱 막히지만, 여기까지라면── 감히 말하건대, 솔직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미래는 바뀐다. 여긴 평행세계가 아니다. 고도의 시뮬레이션이지.

망할 문어대가리 신화의 초월적인 악신에게 그 지혜를 발휘할 여지를 주면 어떻게 될지.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내가 과거를 바꾸면, 이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 미래를 두려워하는 건 방금 말한대로 괴담을 듣고 벌벌 떠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니까.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는 절망적인 미래?

그딴 건 괴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작지 않은 충격 속에서도 마음을 다졌다.

미래가 바뀌면, 엘리자베트와 라리루라도 이런 데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필요도 없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심해의 군주’는 되살아났습니까?”

나는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질문했다.

“수렵신 사티스는 말했습니다. ‘심해의 군주’는 옛 지배자들을 되살리려는 게 아니라, 부활시켜서 자신의 충실한 노예로 지배하려는 거라고.”

그년 입장에서 보면 위협이 되는 요소는 싸그리 배제된 최고의 순간이다.

죽음을 극복하여 재림하기에 적절한 때다.

부활은 수백 년 이후라고 했지만, 그 또한 예언 아닌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면 운명은 틀어진다.’

바이콘과 유니콘 족의 선지자, 마기도라가 울프헤딘의 등장을 예언했으나 실제로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헤니르가 경계했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 세상의 풍경을 보면 자기 동족들을 전부 되살리지는 못했어도, 충분한 숫자를 채워서 지배하고 자신 또한 되살아났을 것이다.

“묻겠습니다. 이 시대의 저는 어디 있습니까?”

라리루라가 말한 ‘가짜’가 진짜인 양 날뛰려면, 진짜가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되잖은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당신에게는 5년이 지난 그날, 하늘이 무너지며 옛 악신들이 강림했습니다. 신들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엘리자베트는 피로한 것처럼 말했다.

전쟁을 대비하던 신들은 가장 취약했을 순간에 기습을 허용했겠지,

그들이라면 충분히 옛 지배자들 몇몇을 쓰러트렸겠지만, 절대로 승리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기는 운명이 존재한다면 ‘심해의 군주’도 싸우러 하지 않을 것이고.

예지의 권능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같은 예언자가 아니라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예언자 없이는── 예언자를 죽일 수 없다.

“신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기습이었죠. 전 인류는 그에 맞섰습니다. 저를 포함한 왕들은 수억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후퇴하고, 결집하여, 도래하는 재앙에 맞섰습니다.”

“이겼습니까?”

“이겼죠. 돌아온 당신은 ‘심해의 군주’를 해치웠습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욕망에 못 이겨서 재앙을 부르고 만 인류에게 승리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대답한 엘리자베트가 라리루라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권능을 발동했다. 우리들은 어느 허름한 마당에 이동했다. 비바람에 상한 듯 녹슨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잡동사니들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건 아니었다.

묘비 앞에, 유품처럼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승리했으나, 인류는 패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말했고, 나는 눈치챘다.

나를 만난 뒤부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자신이 매달릴 사형대를 자기 손으로 조립하고자 하는 암군 같았다는 걸.

“그러므로, 이것은…… 인류가 여러분께 지우고 만 멍에입니다.”

묘비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묘비는 무척 어설펐다. 아마 라리루라나 또다른 누군가가 땔감조차 부족한 와중에 억지를 부려서 만든 듯한 묘비를, 나는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와 아내들의 묘비를.

“……죄송해요, 선배.”

내 뒤에서 라리루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누구 하나 지켜내지 못했어요……”

이곳은 9년 뒤. ‘올바른 운명’ 속의 미래.

이 세상에, 나와 그녀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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