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2화 (961/1,009)

***

“생존자들에게 선배의 귀환을 알릴 거야?”

조금 더 상세한 설명 끝에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라리루라가 물었다.

질문을 받은 엘리자베트는 뿌리를 내린 나무가 이러하랴 싶을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니. 그러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물어본 건 나였다. 돌아보는 엘리자베트는 얼음 조각상 같은 눈을 소리 없이 굴렸다.

“조금 전과는 목표의 전제가 바뀌었으니까요.”

“전제라뇨?”

“모든 것들의 전제입니다. 당신의 사정을 듣고, 절 포함한 몇십 명 없는 생존자들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차가운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원래 저는 당신이 진짜건 아니건, 옛 지배자가 아니고 저희에게 협력할 뜻이 있다면 이 아지트와 대륙을 안정시키자는 요청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아니죠.”

“생존자들의 안전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까?”

“네. 당신의 귀환입니다.”

내 귀환. 내가 눈을 반개하자 그녀는 바위처럼 변한 손을 움직였다.

“이 세상이 당신이 보고 있는 미래라면, 저희를 포함한 ‘지난 9년’은 모두 한순간의 꿈입니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은 평행세계가 아니니까.

내 눈동자에서부터 전해지는 권능의 기척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들이 겪었던 시간과 고통이 전부 거짓이라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잔인한 현실이었다.

싸움 끝에 모든 걸 잃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겪은 사건들은 다 제가 관측한 미래입니다. 제가 깨어나면 싹 사라지니까 걱정 마세요’ 라고 말을 한다고 기뻐할까?

그 사실을 언급한다면 저들도 가짜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자신이 연극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깨달은 ‘무능한 여왕’ 캐릭터일 뿐. 그러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얻어 가야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엘리자베트는 그런 내 생각을 일소에 붙이는 듯 손가락을 꼽았다.

“하나는 이 꿈을 탈출할 방법이고.”

“둘은 이 세상이 실현되지 않게 할 방법이죠.”

─까딱.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3시간만 기다리십시오. 방법을 구상하죠. 오는 길이 피곤하셨을 테니, 부족한 침상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계셔 주세요.”

─훅! 불타오르는 종이처럼 사라지는 엘리자베트.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소매를 라리루라가 당겼다.

“가요. 제 방으로 안내할게요.”

“……그래.”

지나가는 길에 모습을 숨기고 이 아지트가 어떤 곳인지 볼 수 있었다. 성채였던 듯 보이는 건물을 개조한 것이었다. 생존자들도 몇몇 보였다.

느낌은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의 생존자 아지트 같았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생존을 도모한 거야?”

“네. 하지만 인류가 여기서부터 재흥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조금 의문스러웠다. 신세계의 아담과 이브라기에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기는 했는데, 마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듯한 말투 아닌가.

내 표정을 읽은 라리루라가 설명했다.

“부활한 옛 지배자들 중 하나가 저주에 가까운 질병을 뿌려뒀거든요. 종류를 불문하고 어떤 생물이든 어린 개체들은 살아남지 못해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리야?”

라리루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인류를 재흥시킬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병이었다.

살아만 있다면 희망은 있다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희망을 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없는데, 남겨진 희망이 무슨 소용일까.

“텃밭에서 채소 같은 걸 길러보려고도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됐어요. 덕분에 이 아지트는 지독한 고령화 사회랍니다?”

억지로 기운을 낸 듯한 발언이었지만 라리루라 치고는 상당히 시니컬하게 들리는 농담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면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가, 어설프게 폈다.

“에르제…… 엘리자베트 여왕님을 너무 안 좋게 보지는 말아주세요.”

“내가? 그렇게 본 적 없어.”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초인은 없다. 인류 전체의 실패를 그녀 한 명한테 떠넘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잖은가.

근본적인 원인은 ‘심해의 군주’잖나. 피해자들이 서로 물고 뜯으며 누구 잘못인가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특히 이 백일몽 같은 미래에서는 더.’

내가 잘못을 따져봤자 시구르드, 그 씨팔럼이나 좋아하겠지.

“그렇담 다행이구요. 그게, 사실 저희가 혼돈의 이계를 빠져나올 동안 여왕님에겐 문제를 저지할 여력이 없으셨거든요.”

“알아. 신들도 못 막는 게 인간의 의지니까.”

의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미련한 짓이었지만.

나도 남 일이었다면 좆간이 좆간했다고 했겠지.

인류가 멸망한다면 외계인의 침공이나 운석충돌 같은 게 아니라 자업자득 때문일 거라더니, 정말 그런 꼴이었다.

“아뇨, 그것도 있지만…… 여왕님이 언젠가 올 재앙을 막으려고 결심했던 건, 배 속의 아이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서였어요.”

“……아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건 지금의 엘리자베트다.

어린 생명이 못 태어나게 하는 질병.

옛 지배자들이 이 땅에 강림할 때 아이를 배고 있었다는 그녀.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가 생명으로 취급되는 건 언제부터일까.

적어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어머니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에 품은 자식을 생명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지휘하시려고 특히 무리를 많이 하셨어요. 남은 수명이 크게 줄 만큼요.”

“……그래서 정령왕들을 흡수한 거야?”

“싸울 힘이 조금이라도 필요했으니까요.”

자기 손으로 길다트를 죽였다던가.

명계에서 내게 자기 목숨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내만이라도 도와달라고 했던 녀석이다. 자기가 원해서 엘리자베트에게 칼을 내밀진 않았겠지.

‘심해의 군주’가 데리고 온 옛 지배자나 이족들 중에서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는 옛 지배자가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걸어갔다.

“여기요. 아핫, 문이 너덜너덜해서 부끄럽네요.”

다시 도착한 라리루라의 방을 새삼 살폈다.

소박했다. 현재에도 그렇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라리루라가 굳이 물건을 들이지 않았던 거라면 이 방은 꼭 필요한 물건만 가져다 뒀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라리루라가 소중하게 보관하던 물건들─크라운 크라운의 책이나 서커스 단원들의 선물, 우리랑 여행하면서 샀던 기념품 등─도 없었다.

슥….

그때 문득, 라리루라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

그녀는 말없이 등에 얼굴을 묻고, 내 체온 등을 느끼려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 후에 떨어진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죄송해요. 선배의 향기가 어떤 느낌이었나 깜빡했거든요. 고작 몇 년 지났을 뿐인데, 최근엔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신발코로 바닥을 톡톡 치면 라리루라가 말했다.

“흙의 냄새, 수풀의 냄새, 공연장에서 흥분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의 땀 냄새, 동물들의 냄새…… 이 시대에서는 이제 맡을 기회가 없는 것들이에요.”

“……그래.”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백일몽의 한 장면일 뿐이라고 해도, 몇 년 동안 이 시간대를 살아온 기억을 가진 아내에게 경솔한 마음으로 건넬 만한 위로의 말이 어디 있겠는가.

“……아핫, 선배 표정 엄청 이상해.”

다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기분 좋은 것처럼 웃었다.

“실은요, 지금 선배를 안고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어요. 같이 즐겁게 옛날 얘기도 하고…… 쬐끔 야한 짓도 하고 싶고…… 꿈이 펼쳐지네요. 정말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턱 아래에 손을 대고 손가락을 꼽던 라리루라가 목을 움츠렸다.

“그치만, 역시 하지 않을래요.”

열리려던 입술에 검지가 닿았다.

“제가 선배를 다시 사랑해버리면, 선배가 저를 기억할 테니까.

이뤄져선 안 되는 미래의 기억이, 선배 마음에 남아버릴 테니까.”

오직 그 미소만이 내가 아는 그녀였다.

“과거의 저한테서 선배를 뺏고 싶진 않답니다! 저, 한 번 아낀 물건은 오래오래 간직하는 편이라.”

라리루라는 빙글 돌아선 내 입술을 막은 검지를 자기 입술에 가져가고서, 데이트를 나온 소녀처럼 한쪽 눈으로 윙크했다.

“차린 건 없지만 푹 쉬세요. 금방 올게요?”

라리루라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걸이를 존경하던 신의 권능을 빌려서 뗐다.

워프해서 사라지는 라리루라를 떠나보내고, 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이마에 손을 얹고 사색에 잠기길 잠시.

“………………?”

복잡해진 머리로도 순간적으로 눈길을 빼앗기고 마는 물건이 있었다.

랜턴이다. 라리루라가 아끼는 낡은 랜턴. 몇 번 본 적 있는, 그녀의 소중한 물건. 이 방에서 얼마 없는 낯익은 물건이라서 눈에 띈 걸까.

“……………….”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 랜턴을 들었다. 기름을 넣은지도 오래인 듯 말라붙은 가죽 랜턴. 뒷면엔 구멍까지 뚫려 있어서 지금은 폐품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랜턴을 샅샅이 살폈다.

이 위화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쯧.”

눈을 찌푸리고, 찌푸린 끝에 끝까지 발동하려고 들지 않는 권능에 혀를 차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내 심장을 야수회귀의 마나로 붙잡았다.

꽈아아악…!!

적의 심장을 터트리듯 붙잡는다. 뛰지 않게 된 심장은 산소를 전달하지 못하고,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오는 감각이 손발 끝으로 퍼져간다.

“……정신, 차려라, 강북호.”

이를 악물고 띄엄띄엄 뇌까린 순간이었다.

키잉─!! 죽음이 가까워지자 다급하게 발동하는 오딘의 눈.

그렇게 힘껏 눈을 부라렸을 때, 나는 랜턴에서 마법 하나를 발견했다. 차원을 오고 가는 권능을 가진 라리루라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한 술식을.

“……후.”

헛웃음이 나왔다. 랜턴에 손을 집어넣고, 내부에 숨겨진 특수한 공간의 왜곡에서 수첩을 꺼냈다.

라리루라의 랜턴에, 늘 랜턴을 곁에 둔 그녀도 눈치를 못 챌 정도의 마법으로 물건을 숨겨둔다. 유희신의 권능마저 초월하는 고도의 마법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의 나라면 가능할까? 아니, 불가능하다.

미래의 티르시라면 가능할까? 아니, 불가능하다.

뛰어난 대마법사가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수십 년을 연마해도, 창세신인 로키의 권능을 웃도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게 가능한 상대는── 그런 ‘기술’을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대는 내가 아는 한 오직 1명뿐이다.

나는 내가 쓰던 수첩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글이 빼곡한 수첩의 서두, 낯익은 필적이 한 줄.

─나의 그대에게.

─미래의 절망은 과거의 희망이니라.

베로니카가 남긴 예언이 그곳에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