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3화 (962/1,009)

***

“이제부터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몇 시간 후, 나를 찾아온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그밖에도 생존자들은 여럿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우리 3명뿐이었다.

“대전제를 다시 확인하고 가죠. 이 세상은 모두 예지의 단편이며 백일몽. 그러므로, 당신의 권능은 당신이 알아야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터.”

그녀는 내가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달라진 지도를 가리켰다.

문명이 남아 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간소하고 대략적인 지도였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보고, 이 각본의 클라이맥스이자 핵심까지 접근합시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중심입니다.”

─쿡. 흙과 바위가 뭉친 손가락이 바다의 어느 한 곳을 짚었다.

“아이키븐 섬, 혼돈의 이계.”

차원이동과 차원막 수복 실험이 일어났던 섬.

‘심해의 군주’가 이 세상에 남긴 손톱자국이다.

“단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다는 섬기던 신들을 잃고 지능이 없는 존재로 전락한 이족들의 영역이 되었고, 바다를 건널 배가 없다는 겁니다.”

“제 권능으로도 단번에 도착할 수가 없고요.”

라리루라의 부연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전에서 살아남은 옛 지배자가 터를 틀었다고 했으니까.”

“네. 적어도 섬에 도착하려면 현실의 거리 역시 줄여야 해요. 최소한 여기, 대륙 최남단의 해안에 접근한 이후가 아니면 힘들 거에요.”

“그리고, 남부에는 살아남은 옛 지배자가 있지.”

과거, ‘심해의 군주’는 13마리의 옛 지배자들을 데리고 【중간 가지】에 강림했다고 한다.

사티스를 비롯한 신들은 ‘심해의 군주’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운명이 확정됐을 때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다섯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운명을 극복하는 힘은 신들에게는 없지만, 그들의 사투는 인간 연합군의 승산을 높여주었다.

결전에 나서는 아군은 【중간 가지】의 총 전력.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당시 몇 명 없던 마스터 클래스.

속세를 피해서 지내던 일부 강자들.

바이츠니아 대륙 산맥의 운해(雲海)에 살았다는 용들이나 서방대륙의 드래곤, 요정왕, 신대가 끝난 후에 거의 자연을 떠받치는 기둥에 가까웠던 정령왕들.

그리고 그들에 맞서는 건, ‘심해의 군주’를 포함한 14개체의 옛 지배자.

“그들은 ‘심해의 군주’의 성에서 잠들어 있던 옛 지배자들 중에서도 특히 강대한 존재였습니다.”

과거에, 태초의 요툰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미래인들이 전쟁 중에 알아내기를, 옛 지배자의 자손이나 봉사종족들은 바깥 우주의 신(Outer God)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던 존재들이다.

세계수 바깥 우주에서 군림하던 악신들. 우둔한 거인 이미르에게서 태어난, 오딘 같은 태초신들의 숙적 말이다.

로키 말로는 세계수를 만들기 이전의 전쟁에서 전멸했다고 했던가.

‘심해의 군주’가 부활시켜서 지배한 건 그 바깥 우주의 신에게 필적하거나, 그게 아니어도 동격의 옛 지배자 안에서도 군계일학의 초월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오딘이나 수르트가 14마리씩이나 강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겼다.

‘심해의 군주’를 죽이고, 정해진 파멸의 운명을 뛰어넘어서 11마리의 옛 지배자들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그런 게 가능한지 믿기 힘들 정도의 전과였다.

적을 분산하고, 옛 지배자를 몇 마리나 죽이며 싸워나간 결사대의 창끝은 악신에게 닿았다.

그러나 라리루라를 뺀 나와 아내들은 결전에서 사망했다.

마지막에 ‘심해의 군주’와 공멸한 것이었다.

더 나은 미래를 찾기에는 터닝 포인트를 지나쳐버린 시대였다. 이 시대의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결과가 그것이었겠지.

“하지만 ‘심해의 군주’가 완전히 사멸했음에도, 그녀의 손으로 되살아난 옛 지배자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상과 달리 오히려 자아를 되찾았죠.”

3마리.

그게 인류가 멸망을 대가로 일궈낸 승리로부터 몸을 피한 옛 지배자 측의 패잔병이었다.

“그저 패잔병이라기엔, 이미 주력을 잃은 잔존 인류에게 그들은 너무나도 강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의식을 되찾은 후에는 각자 【중간 가지】에서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서방대륙의 남동부에 동그라미를 쳤다.

서방 대륙 남부. 로마니아와 게르마니아의 중간 지점에 한 마리.

아이키븐 섬, 혼돈의 이계에 한 마리.

그리고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려는 것처럼 동서 대륙 곳곳에 죽음을 뿌려대던 개체가 또 한 마리.

이렇게 3마리다.

그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남은 적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물리치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었다. 내버려둬도 알아서 좋게좋게 사라져줄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보면 엘리자베트의 발언도 이해가 갔다.

“처음에는 저한테 그놈들을 해치우는 걸 도와달라고 하실 생각이었던 거였죠? 라리루라 혼자서는 힘들어도, 2대 1이면 승산이 높다고 보셨을 테니.”

“네. 생존한 인류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던, 결전 때 미처 해치우지 못한 3마리의 옛 지배자를 쓰러트리는 게 생존의 필수조건이었으니까요.”

엘리자베트는 내 말을 긍정하고, 살짝 정정했다.

“정확하게는, 엊그제 부로 2마리가 됐습니다만.”

스윽…. 그녀가 가리킨 건 대륙 남쪽이었다.

“얼마 전, 대륙을 서성이던 옛 지배자가 갑자기 소멸했습니다.”

라리루라를 빼면 견줄 상대가 없던 괴물이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소멸했다.

또다시 별의 바다를 건넌 악신이 나타난 걸까. 혹은 옛 지배자들끼리의 전쟁이었을까. 확인하러 나선 생존자들이 발견한 건 전투의 흔적이 다였다.

“……‘진토(塵土)’. 저희는 잿더미만 남은 전투 흔적으로부터 그 정체불명의 신적 존재를 그렇게 호칭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생존자들 사이에 추측만 무성한 가운데, 내가 나타났다.

“처음엔 선배의 기척을 느끼고 ‘진토’가 나타난 거라고 생각해서 제가 나섰어요. 그리고 선배라는 걸 멀리서 알아보고선…… 가짜라고 생각했고요.”

“미안해할 거 없어. 다친 것도 아니잖아.”

“……네.”

눈을 아래로 내리깐 라리루라가 지도에 찍어둔 점을 바라봤다.

“……아이키븐 섬에 터를 튼 옛 지배자는 남의 모습을 흉내낼 수 있었어요. 흉내 수준이 아니라, 결전 직후에 선배의 모습으로 저희 앞에 나타났었고요.”

“그래, 들었어.”

스스로 말하자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이 시대의 나는 인류에게 있어서 희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에,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음에도 생존자들은 그 가짜 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사칭하는 동안에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하니까.

“저희에게 식량을 얻을 방법을 알려주고, 몇 달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었지만…… 꼬리가 밟혀서 저랑 싸우다 도망쳤죠.”

라리루라가 나를 회 치려고 썼던 기술은 그놈을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으려고 만든 기술이었던 듯 했다. 날 덮어놓고 믿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갔고.

“……혹시나 해서 묻는데, 로키는 아니었지?”

“정체는 확인했어요. 결전 당시에 봤던 옛 지배자가 맞아요.”

하긴, 로키였으면 굳이 내 흉내를 내진 않았겠지.

“……다시금 목적을 정리합시다.”

정리를 마친 엘리자베트가 운을 뗐다.

“저희의 목표는 크게 나눠서 3단계. 첫째로 옛 지배자 ‘땅 밑 세이렌들의 휘왕’이 머무는 대륙의 최남단을 향해 진격, 그의 영지를 뛰어넘는 것.”

“둘째는 그곳에서 아이키븐 섬으로 워프하는 것.”

말을 받은 라리루라는 내게 미소지었다.

옛 지배자의 영역을 가로지른다는 말을 당연한 일과처럼 얘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셋째는, 선배가 혼돈의 이계에 도달하는 거에요.”

“……그 뒤는 나한테 맡겨.”

베로니카의 예언은 이미 알렸다. 혼돈의 이계에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뭘 해야 할지는 정해졌다.

“아핫. 목표가 깔끔하게 정리됐네요!”

─짝! 라리루라가 손뼉을 쳤다.

“어차피 옛 지배자의 토벌은 필요한 일이었고, 할 일이 확실하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네요, 프리실라.”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에는 늦은 시대.

하지만 지금보다 나았던 과거에 이 절망을 전할 수만 있다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은 시간을 뛰어넘어 희망으로 바뀐다.

나라고 하는 타임머신에 싣는, 과거로의 희망.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정독한 수첩을 움켜쥐었다.

“‘땅 밑 세이렌들의 휘왕’이란 놈의 영토까지는 저희 셋이서 가는 겁니까?”

“남은 이들도 함께 갈 겁니다. 그들이 그러기를 바랐으니. 생존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옛 지배자를 토벌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령처럼 변한 몸에 닿지 않게 지도를 잘 접은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그러니 대륙 최남단에 도달하기까지, 당신께선 정체를 감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전의 가짜 때처럼 혼란과 기대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구원할 방법은 이미 이 시대에는 없다. 있다고 해도 그건 포기와 체념 속에서의 적응일 뿐, 그들이 원하는 행복한 미래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웃음 짓는 나날을 돌려주고 싶다면, 나는 현실로 돌아가서 이 비참한 이야기를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럼 행동을 개시합시다.”

엘리자베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만 눈을 깔았다가, 다시 원래대로── 내가 모르는 원래의 그녀로 돌아갔다.

“당신께서 남겨준 모든 희망과 기적을, 당신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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