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5화 (964/1,009)

─……이 개새끼는 또 무슨 쉰소리야?

나는 웜 새끼가 지껄인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나랑 같이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부활한다고?

‘지랄하고 있네. 가능할 턱이 있나.’

이건 미래여행이 아니었다. 내 권능이 보여주는 미래의 단편이지.

시간 여행을 하듯 여기서 뭔가를 가지고 돌아갈 수는 없다.

옮길 수 있는 건 오직 기억과 정보뿐!

영혼은 물질이 아니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영적 개념이다.

애초에 내가 저 새끼들을 왜 도와줘야 하는가는 물론, 저 새끼의 영혼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부터 성립되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쉬이 믿기 힘듬을 안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지.

살아남은 ‘세이렌’들을 소강상태로 배치한 데스 웜 새끼가 지껄여댔다.

─우리들, 너희가 위대한 옛 존재라고 통칭하는 신격의 존재는 ‘백일몽의 영속성’을 띤다. 우리가 불멸의 존재인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알아듣게 지껄여, 새끼야.

생존자들은 갑자기 침묵하는─것처럼 보이지만 내게 심념을 보내대는─ ‘휘왕’을 주시하면서 뒤로 전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들이 준비할 시간만 벌릴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 얼마든지 저 개소리에 변죽을 울려줘야겠지.

─이해해라, 예언자. 이것이 네놈의 꿈이라면 깰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네놈이 나를 꿈의 일부분이자 환상인 나를, 이 육신을 미물 짓밟듯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인 이유인가?

‘휘왕’은 구더기 같은 촉수다발을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 모든 악몽이 치밀한 법칙이 성립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굳건한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차원에서는 누구도 법칙을 무시할 수 없다. 설령 네가 이 꿈의 지배자라고 해도.

알고 있다.

셰이드의 꿈에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의식에 타격을 주는 건── 현실에서 잠드는 아내들을 어떻게 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명계의 피라미드에 있던 어린 파라오 세헤테피브라는 마치 신처럼 과거의 단편을 재현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결국 무덤에 혼자 잠든 어린 파라오가 꾸는, 깨는 일 없는 영면 속의 꿈일 뿐.

무덤에서 꿈을 꾸는 파라오는 신과도 같았지만, 에퀴녹스는 이기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에서 신 역할을 맡아도 그 장난을 상대하는 어른이 소꿉놀이의 룰을 무시해버리면 소용없는 것처럼 말이다.

─창세의 권능을 비롯한 모든 권능은 이 꿈을, 아버지가 꾸고 오딘이 빼앗아서 세계의 법칙으로 성립시킨 꿈의 ‘규칙’을 무시하는 힘이다.

잠자던 우둔한 거인을 죽이고, 영면에 빠트려서 세계수를 창조한 창세신들.

이미르는 꿈꾸는 채로 영면에 빠졌고, 그가 꾼 꿈의 법칙은 창세신들이 이어받았다.

중력의 작용, 시공간의 존재, 운명이라는 개념을.

현실적으로 비유하면, 어떤 세계관의 창작자를 죽이고 그 세계관을 빼앗아서 정착시킨 것이었다. 인성이 파탄난 작가 이미르가 잠에서 깼다간 몰살 엔딩이니 창세신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자각몽을 꾸는 사람이 꿈속을 지배하듯 법칙을 주무르는 게 바로 권능.

그래서 창세의 권능은 셰이드의 꿈과 닮았다.

그래서 신좌의 계승자들이 꿈속에서 소환한 프레이야의 성에서는 나도 룬 마법으로 창세의 권능을 흉내낼 수 있다.

둘 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꿈을 개변하는 힘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지금, 이 ‘드림랜드’의 주인은 너다. 이곳은 네가 관측한 운명. 이 꿈의 지배자, 세계의 창조주가 바로 너다. 나는 너라고 하는 이미르가 꾸는 꿈속의 오딘인 것이다.

나는 창을 매만졌다.

중력이나 ‘죽음’처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법칙은 말하자면 신들이 합의하고 유지하는 법률이다.

법치사회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바로 감옥에 휙 텔레포트 당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사람은 법을 준수한다. 실존하지 않아도 법에는 강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법칙도 마찬가지지.’

치밀한 설정일수록, 강고한 법일수록 어기기가 힘들다.

그리고 미래예지는 가장 완벽하고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지는 시뮬레이팅!

여기서 내가 꿈속에서처럼 물리법칙을 씹어먹는 초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건, 말하자면 지가 만든 템플릿을 준수해야 하는 게임 운영자로 비유할 수 있겠지.

그래서 창세의 권능으로 브리타니아를 섬에다가 끌어다가 박아버리는 힘까지 가진 ‘휘왕’도 법칙에── 운명에 귀속된다.

거인 이미르가 떠받치던 ‘꿈’은 그의 시체와 옛 창세신들의 의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작가가 조율하며 성립시키는 방대한 세계관처럼.

쌈마이하게 비유하면 이미르 시네마틱 유니버스 같은 것이다.

─권능인즉 세계에 개입하는 붓.

의지가 없는 물질조차 매료해 지배하는 ‘휘왕’은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창세의 권능’은 가장 세계의 법칙에, 운명에 귀속된 자의 족쇄이자 자격이지. 운명의 흐름에서 초월자로 태어난 신은, 그렇기에 더욱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을지니.

게임 운영자와 연극의 창작자는 전능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만든 게임 룰이나, 연극의 설정을 가장 솔선수범하여 준수해야만 한다.

신들이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건 초월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 대가다.

햄릿 왕은 죽어야 한다. 배역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로키가 옛 지배자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우드가르트 로키’나 크라운 크라운이 돼서 살아남았듯이.

유니콘과 바이콘이 ‘라그나로크에서 몰살당하는 신들’에서 ‘저주받은 종족’으로 배역을 교체해서, 그 운명의 흐름을 비껴갔듯이 말이다.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여 태어난 신들, 그 대가 없는 듯한 권능 수저에 뒤따르는 당연한 족쇄였다.

대신 운명에 정한 배역을 준수하는 동안, 신과 옛 지배자는 자신에게 허락된 범주까지 전능하다.

그 태초신들의 전유물, 세계수위키 설정 놀음에 감히 반달리즘을 갈길 수 있는 개인 유저들이 곧 신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 마스터 클래스였고.

그래서 나는 이 법칙에 대고 ‘강북호는 미래를 볼 수가 있다’고 설정을 수정할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오델리아 같은 경우는 ‘내가 베지 못할 것은 없다’ 정도겠지.

─고로, 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불멸성의 정체와 진배없노라.

‘휘왕’이 말했다.

피부의 색은 수시로 바뀌며 이끼처럼 초록빛을 띠거나, 썩은 낙엽처럼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감수성으로는 역겹게 보인다는 것뿐이다.

─너희 인간은 악몽에서 죽으면 죽는가? 아니, 현실에서 깨어날 뿐이다. 꿈은 연속적인 것. 우리 역시 그러하다. 죽는다 해도 이윽고 ‘죽음’이라는 악몽에서 깨어나지.

백일몽. 호접지몽.

저 코즈믹 몬스터들에게 현실과 꿈은 서로 표리일체라는 것이었다.

─설사 이 미래가 현실이 되어도, 너희가 죽인 옛 지배자들은 언젠가 되살아나 이 땅에 재림하리.

오딘, 로키 같은 세계수의 신들은 가지지 못한 불멸성.

‘휘왕’은 그것을 자랑스럽지도 않게 늘어놓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인간이 개미에게 자신이 10년, 20년을 살고도 늙어죽지 않는다고 자랑한다면 그 무슨 꼴불견이겠는가.

미래를 읽고 자길 찢어 죽이려 드는 개미였기에 말을 걸고는 있지만, 나를 상대하는 ‘휘왕’에게선 숨길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간과 괴물 간의 괴리가 느껴졌다.

인간과 개미는 서로를 관찰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봤고, ‘휘왕’은 이해하려고 하는 생각조차── 아니,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는 발상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슥.

시야 구석에서 엘리자베트가 자연스럽게 낮춰둔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 3개.

30분일 리는 없으니, 준비 완료까지 앞으로 3분.

─쉰소리가 장황하군. 질문에나 대답해라.

눈을 굴리지도 않고 그걸 확인한 내가 말했다.

─‘심해의 군주’를 죽이겠다는 소리는 넘어가마. 니들의 관계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라도 날 능멸한 씹놈을 살려둘 이유가 없으니.

─놈은 내 종족의 어린 개체를 몰살했다.

쯔으으으으응…!

‘휘왕’의 사념파가 울려퍼졌다. 인간과 너무나도 다른 사고방식이었지만, 만언신의 권능이 사람을 미쳐 죽이게 만드는 초음파를 해석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나라는 지배자의 아래에서 영원무궁하게 번영하여 마땅한 ᚲᚺᚦᛟᚾᛁᚨᚾ의 자손들을 몰살했다. 너희 인간의 손에 백성들의 알을 넘겼다. 죽어 마땅한 이유는 그것으로 족하다.

사념파는 인간들이 〈장송곡〉이라고 명명했던 권능을 발휘했다.

부글부글…. 사념파에 접촉한 바위가 용광로에 던진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사람이 매력적인 노랫소리에 멈칫하듯, 분자의 구조 자체가 ‘휘왕’의 사념파에 지배당하자 형태를 구성하기를 포기하고 무너진 것이었다.

무심코 흘린 살기로,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건만 저 꼴이다. 마치 바위 죽이 돼 버린 듯 무너지는 돌들을 살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는 힘. 옛 지배자다운 권능이었다.

내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거 멋지군. 비인륜적인 어린이 몰살 바이러스가 외계인한테도 적용되는지는 몰랐는데. 잘난 권능으로 애새끼 웜들이나 구해주지 그랬냐?

내가 비아냥거린 순간, ‘휘왕’의 분노가 그쳤다.

뚝 하고 끊긴 것처럼 사념파를 멈춘 휘왕에게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시선이라고 할 만한 어떤 압력을 노골적으로 느꼈다.

앞으로 40초.

─뭐, 새끼야. 불만 있냐? 아, 그래. 니가 문어 새끼 노예에서 탈출하고 벽에 똥칠하던 걸 멈췄을 때는 이미 다 애새끼는 다 뒤졌겠구나? 그게 뭐?

‘휘왕’ 씨는 멍청한데스. 자는 죽으면 또 낳으면 되는데스.

내가 이죽거리자 ‘휘왕’의 촉수가 먹잇감을 덮치려는 짐승처럼 곧추섰다. 씹놈이 하나부터 열까지 징그럽기 짝이 없고 지랄이네.

─……‘황색 왕’과 ‘심해의 군주’는 오랜 악연이 있지. 군림하는 별도 다른 우리가 위대한 옛 존재라고 분류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겠나?

─모르고 관심도 없다, 코즈믹한 전설의 포켓몬 새끼야.

앞으로 10초.

9초, 8초, 7초, 6초, 5초…… 생존자들이 무기를 들었다.

─‘백일몽의 영속성’을 깨트리고, 불멸하는 지배자를 멸할 수 있는가.

위이이이잉─!!!! 사념파가 눈에 보일 만큼 검은 악의를 뿜어냈다.

─그게 우리들 ‘옛 지배자’와 필멸자를 분간하는 기준이다, 인간이여.

─대사 한 번 전형적이군, 땅개 오징어 새끼여.

그 찰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짓뭉개고, 세상의 법칙마저 초월하는 절대강자들의 권능이 이뤄진 적 없는 이 미래에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장치, 기동.”

엘리자베트가 준비한 시동어를 읊조리자, 나와 라리루라는 차원의 균열에 휘말렸다.

“……어?!”

놀란 건 라리루라만이 아니었다. 권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나도 경악을 금할 수 없었으니까. 설마 이 와중에 그녀가 배신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프리실라!! 아이키븐 섬으로 워프하세요!!”

어쩌면 그새 ‘휘왕’에게 조종당한 걸까 의심하는 내게, 엘리자베트는 한 치의 흐림도 없는 눈으로 몇 시간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여왕님, 이게 무슨──”

“말했습니다! 10번도 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신의 목적은 저들을 해치우는 게 아닙니다! 이 상황은 저희에게는 오히려 호기에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열어! 이거 풀란 말야! ‘휘왕’이 죽인 사람들 몫까지 이겨보일 거랬잖아! 길다트 씨의 복수를 할 거랬잖아!”

─쾅쾅쾅쾅!! 라리루라가 벽을 두들겼지만 쉽게 부숴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이건 로키가 크라운 크라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고대, 히타이트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차원 마법의 기술이었으니까.

시구르드와 헤니르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닌 로키가 자기 몸을 감추는 데에도 사용한 기술력.

인류가 남긴 지식의 결정은 신에게도 통한다.

이 순간, ‘휘왕’의 권능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게 그 증거였다.

“차원왜곡 발생장치에요. ‘휘왕’ 토벌에 쓰고자 아껴둔 비장의 수입니다만, 이러는 편이 더 효과적이겠죠. 이제 워프하는 동안은 ‘휘왕’도 감히 당신들을 해칠 수 없을 테니.”

엘리자베트가 미소지었다. 라리루라는 말을 잃고 망연자실해졌다.

“에르제, 너 처음부터……”

“……후. 여전히 순진하시네요, 프리실라. 다른 사람들이 놀랄 테니 말하지 말라고요? 설마 오늘 이날까지 자살하지도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정도의 오기도 없을까요.”

─툭. 라리루라는 투명한 벽을 짚고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나라면, 그리고 라리루라라면 이 벽을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체력과 권능이 소모된다. 엘리자베트가 목숨을 바쳐서 만들어준 방패를 우리의 승산까지 줄여가며 부수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겠는가.

“답지 않게 속아 넘어가 줘서 다행이었다, 백작.”

털모자를 눌러쓴 엘프가 다가오며 웃었다.

“아무리 너라도 마음이 복잡하긴 했나 보군. 이 정도의 수작도 간파하지 못하다니. 예언자에게 한 방 먹인다는 건 기분이 상쾌한걸.”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고,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공유했던 거냐?”

“그래. 사실 7년쯤 전에 너에게 실컷 부려 먹혔거든. 추수 의뢰 때의 복수인가 싶었지. 그러니까 너랑 라리루라를 빼놓고 우리끼리 회의를 했지.”

여차할 때는 우리의 체력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시한다.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라도 이런 상황이 왔을 때를 염두해서.

옛 지배자를 향한 복수보다, 과거로 보내는 이 희망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 그리운 브리타니아의 채소, 잘 먹었다. 마지막 만찬에 말로나마 감사를 표하마. 그렇지만 넌 변함없이 연기를 지지리도 못하더군.”

두두두두두…!!!!

생존자들의 방패를 ‘세이렌’들의 사념파가 연신 두들겼다. 호툴루실은 이미 이끼 알갱이로 전락해버린 도르카를 바라봤다.

“거짓말은 결국 들키기 마련이라지만, 저 놈은 정체를 감출 거면 하다못해 덩치부터 줄여보라고 불평을 했더랬지. 너처럼 착해빠진 놈에게 세상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이다.”

내가 사르가디스에 살던 시절의 인연은 그때와 하등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수룩한 자가 꿈꾸는 세계이기에 비로소, 우리는 그 꿈을 믿을 수 있다. 네 선함이 계도하는 미래를 믿고 달려갈 수 있다.”

위잉─!

두 손 합쳐서 5개가 되지 않는 손가락이 마법을 펼쳤다.

“모래바람 거칠고, 황야의 지평선에 끝 없으니.”

목숨을 불태우는 마법이 그의 타다 남은 티끌과 같은 생명을 공격으로 바꾸었다. ‘세이렌’ 하나가 그 마법을 미처 지배하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오늘 이곳, 실로 타타르니아의 엘프가 죽기에 어울리노라!!”

생존자들은 방패를 내던지고, 사념파를 막기엔 역부족한 룬 스톤만을 쥐고 ‘휘왕’에게 돌격했다.

“투쟁하라!! 맞서라!! 악신에게 반기를 들어라!! 죽어간 이들에게 나는 목숨 바쳐 싸웠노라고 자부하고자 하는 자는, 내 뒤를 따라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온풍에 달려드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스승이 남긴 세검을 손이 없어진 손목에 묶고 싸우는 고결한 기사단장이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신에게 기도하며 무기를 휘두르는 야누스 교단의 성기사가 있었다.

성벽보다 높은 흑마법사의 골렘을 상대로 도시 하나를 지킨 전과를 자랑으로 삼던 브리타니아의 모험가들이 있었다.

세상을 배우고 아내를 얻고자 군락에서 나왔던 얼스터의 전사가 있었다. 그와 함께 작은 단체를 키워나가던 뛰어난 모험가 마법사가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도 다음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비난하며, 짐승처럼 손톱을 휘두르며 하울링 하는 작은 체구의 베르세르크 인이 있었다.

─아둔하구나, 정해진 죽음마저 서두르는가.

그들 모두가, 옛 지배자의 앞에 촛불을 방불케 하며 녹아내릴 때까지 싸웠다.

우리에게 1초라도 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건가요?”

최후로, 통솔하는 정령들과 함께 불에 맞서려는 부나방처럼 투쟁하는 젊은 여왕이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여기서 바로 섬에 직행하려면 워프를 2~3번쯤 해야겠지만, ‘휘왕’과 싸우는 소모보다는 적겠죠. 섬에 터를 튼 ‘황색 왕’과 교전하더라도 이러는 편이 더 유리할 거에요.”

“나, 나는, 나는…… 그치만, 이런 건……”

울먹거리며 말을 더듬으면서도 라리루라는 엘리자베트의 올곧은 눈에 떠밀리듯 권능을 사용했다.

목숨의 가치는 시간으로 치환된다. 그렇기에 이 망설이는 시간조차 목숨을 바치는 이들의 목숨을 더 무가치하게 만드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지 말아요, 프리실라. 마이너스에서 0으로 달려나가기 위해서 남겨뒀던 저희의 목숨, 이제는 떠오르지도 않는 과거의 초석으로 바칠 수 있다면 기쁘기 그지없어요.”

실드를 뚫고 울리는 음파는 사념파의 매개체다. 엘리자베트의 몸에서 불이 꺼지고, 얼음이 녹으며 손발이 가루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울프헤딘 백작. 아니, 노르드.”

방울지는 눈물을 떨어트리는 라리루라가 섬까지 연달아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펼쳐내기까지의 잠깐 동안 엘리자베트가 나를 바라봤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믿겨지질 않습니다. 두 분을 빼면 ‘휘왕’ 앞에서 손도 발도 쓸 수 없는 저희가, 저들에게는 굳이 뿌리 뽑을 가치도 없는 미물인 저희가, 정말 그때로 돌아가도 될까요?”

파스스…. 정령왕의 시체를 기워 붙인 부위들이 재봉이 풀린 봉제인형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꿈을 꿔도 될까요? 꿈에서 깨도 될까요? 제가 겪은 모든 일이 잠깐의 환상이었고, 비록 제 모든 기억이 진짜 저와는 무관한 가짜여서, 당신이 이 백일몽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사라진다고 해도……”

녹아내린 얼음은 눈물처럼 무표정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의 장막을 걷은 세상 어딘가에, 언제나처럼 길다트에게 투정을 부리는 제가 있을까요? 아바마마께서 저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 보이겠다고 맹세하는 제가, 아직 행복해질 수 있는 제가 있을까요?”

“……예, 반드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여러분의 고통도, 여러분의 실패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한순간의 꿈으로 만들겠습니다.”

나와, 이 시대의 베로니카가 남겨준 것들로.

나는 미래의 베로니카가 남긴 수첩을 옷 위에서 만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자베트가 쓰러지듯 무너지고, 라리루라의 권능이 눈앞을 뒤덮었다.

─파팟!!

두 개의 빛이 연달아서 반짝이고, 우리는 남은 인류의 완전한 전멸을 목격하며 공간을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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