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66화 (965/1,009)

***

“……갔군요.”

팔다리를 대신하던 정령의 몸을 잃고, 엘리자베트는 녹아내리기 직전인 채로 바닥을 굴렀다. 더 이상 정신을 지켜줄 얼음 정령의 가호도 없었다.

─어리석다. 실로 우매함의 극치로다.

‘휘왕’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왔다. 노르드가 이 자리를 떠났는데도 조금의 조바심도 느끼지 않는 그 태도는 실로 제왕에 어울리는 품격이었다.

너무도 분하고, 증오스럽지만…… ‘휘왕’은 엘리자베트보다 제왕다웠다.

─적이라면 몰라도 아군마저 설득하지 못하고, 보살펴야 할 자들마저 전부 죽음으로 몰아넣어서 얻은 것이라곤 몇 분의 시간이 전부. 한심하도다, 인간의 여왕이여.

대답할 수 없었다. 옛 지배자의 존재감은 더는 움직일 힘도 남지 않은 엘리자베트의 정신에게는 지나치게 압도적인 과부하였다.

─네가 모든 것을 잃고 거둔 건 추호도 승리가 아니다. 소멸한 옛 지배자들은 모두 부활하여, 이 싸움마저 무한한 시간 속에서 가벼이 망각하리라.

악신이 속삭인다. 진실을, 몇만 년 뒤에 도래할 재림을.

머리가 끓는 주전자에 식칼을 꽂는 것 같았다. 언젠가 부활하여 다시금 유유하게 멸망한 그녀의 고향을 뒤로 떠나버릴 악신들의 존재가 뇌리에서 헤엄쳤다.

인류는 이긴 적이 없었다. 그녀는 더 고통스레 죽고자 짓뭉개진 몸을 떨며 날아보려고 버둥대는 파리였다. 지난 몇 년의 절망은 그러했다.

“……아, 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말했다.

음절 하나하나만으로 인간의 몸을 무한한 고통, 끝나지 않는 고독에 몰아넣는 초월자에게 단호한 저항의 뜻을 드러냈다.

“희망은, 이어졌어…… 사람의 죽음, 은, 미래, 로, 이어지니까……”

─하찮도다. 그 남자가 ‘황색 왕’에게 승리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가정일지니. 꿈속의 존재면서 아직 성사되지도 않은 미래를 소원하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군.

‘휘왕’은 촉수를 뻗었다.

이 인간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머릿속에서 며칠 사이의 기억을 읽어내기 위함이었다. 아니면 손과 발을 달아주고 울프헤딘 앞에 던져놔도 좋으리라.

아무리 그 남자가 ‘심해의 군주’마저 해치워버릴 패왕의 씨앗이라도, ‘황색 왕’에게 쉽사리 승리할 리는 없다. ‘휘왕’에게는 여유를 부려도 좋을 만한 시간이 있었다.

‘이 암컷 자신도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고, 배를 부풀려서 그들 앞에 던져놓으면 어떨까.’

어린 개체의 죽음에 민감한 건 인간들도 같다. 이제 대화는 파탄 나고 말았으니, 이성을 상실한 울프헤딘을 죽이고 그 이름을 빼앗으면 되었다.

그걸 위한 수단으로 작은 세공을 부리는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아니, 이끼로 바꾼 이들도 전부 되살리면?

그가 미루어 보기에, 울프헤딘은 ‘휘왕’ 자신이 그렇듯 성숙한 개체의 죽음에는 완전히 무심하지 않은 듯 싶었다.

‘원숙한 존재마저 보호하려고 들아니, 한심하군. 동족끼리 감싸고 들면 쇠퇴밖에 없거늘.’

비웃음도 아닌 단순한 감상이었다. ‘휘왕’은 그 발상을 실현하고자 전신의 숨구멍으로부터 사망한 봉사종족들과 인간들을 되살리다가── 보았다.

─……무엇이냐?

그가 둥지로 삼은 황야로 이어지는 경계에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인간은…… 아니다.’

지금 죽어가는 암컷보다 키가 2배는 크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느낌이 달랐다. 걷는 모양은 길게 뻗은 다리를 질질 끄는 듯 했고 거적데기를 둘둘 만 몸은 어지간한 봉사종족보다 억셌다.

그러나 딱히 강대한 힘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별의 토착생물인가.’

생물인지도 불분명한 ‘그것’을 목격한 ‘휘왕’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권능을 사용했다. 무엇이든 상관있으랴? 그의 권능은 지극히 다채롭고 만능, 그 자체였다.

죽은 자들을 거짓으로나마 되살린다.

그들 전원을 이끌고 ‘황색 왕’의 영토에 공간을 뛰어넘어서 도달한다.

그걸 동시에,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성사시킬 응용력과 출력이 있다. 겸사겸사 저 그림자에게도 영원한 삶을 선사해줄 수 있을 터였고.

이끼 알갱이로서의 영원한 삶을 말이다.

■■■■■■■■■■■■─!!

인간에게는 들을 수 없는 음역대의 텔레파시가 퍼져나왔다.

우주는 그의 발밑에 복종한다. 별들의 바다에서 발생하고 떠도는 코즈믹 에너지─인류가 마나라고 부르는 에너지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휘왕’은 본디 그렇게 강력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바깥 우주의 신처럼 창세의 권능으로 시간마저 지배하는 경지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둥지를 튼 별, 태어난 차원에서 군림했을 뿐.

─복종하라.

그러나 더는 아니다.

그는 수억 년 전, 창세기에 그 하찮아 보이기만 하던 코즈믹 에너지로 아버지의 곁을 기어 다니던 요툰에게 영원한 소멸을 선사하는 여신을 보았다.

‘황색 왕’이 매료되고 ‘심해의 군주’가 찬탈했던 가장 세련된 창세의 권능.

코즈믹 에너지를 활용하여, 창세의 권능으로도 상쇄하지 못할 불꽃과 벼락으로 바꾸는 기적. 그 기적의 이름이 바로 마법이다.

그리고 ‘휘왕’의 권능은── 코즈믹 에너지에도 작용한다.

우우우우우우…!

마나가 움직인다. 스스로의 의지로, ‘휘왕’에게 복종하고자 자신의 구조를 마법으로, 오딘이 정립시킨 코즈믹 에너지의 파괴적 용도로 승화시켰다.

이 별의 바다를 흐르는 모든 에너지는 ‘휘왕’의 발밑에 조아리나니.

‘황색 왕’조차 지혜를 거듭하여 통솔하는 코즈믹 에너지를, 한마디 부르기만 하면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권능.

이것이 지배자의 권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휘왕’은 조금의 고됨도 없이 인간 마법사 수십 만 명이 동시에 펼치는 듯한 대마법을 전개하며, 마음속으로 강대해진 자신의 위엄에 만족했다.

그렇기에 1초 뒤.

─콰득!

자신의 육신이 70%나 파괴됐을 때도, ‘휘왕’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기우뚱….

머리와 촉수 일부를 육신과 연결하는 살덩이가 기울고, ‘휘왕’은 왕좌에서 걷어차인 왕처럼 흙에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

한 발 뒤늦은 비명이 황야를 붕괴시켰다.

‘휘왕’이 지닌 고유의 권능과 창세의 권능. 법칙 자체를 유린하고 세상을 꿈으로 바꾸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힘이 뿜어지면서 지면을 수천 미터 가량 침전시켰다

콰르르르르, 콰과과과과광──!!!!!

달이 땅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지형이 바뀌고, 가라앉은 만큼의 토사가 ‘휘왕’의 권능에 폭주하며 수십 개의 산맥을 치솟게 했다.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지각변동조차 우스운 대재해의 한중간을 작은 거인이 달렸다.

인간보다 까마득히 크고, 하지만 세계수의 어떤 차원보다 광활한 고향 별을 헤엄치던 ‘휘왕’에게는 같잖을 만큼 작은── 그러나 그 별의 누구보다도 강대한 거인이.

─■■■■■■■■■■■■■■■■■■■■■!!!!!

혹시 ‘휘왕’이 인간이었다면, 그 사념은 비명에 가깝게 들렸을까.

‘휘왕’과 같은 음역을 들을 수 있는 봉사종족은 직전의 포효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오직 한 마리, 아니 1명만이 기적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휘왕’이 일부러 권능의 영향에서 빼놓았던 엘리자베트만이 말이다.

“……‘진토’.”

엘리자베트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그 신화의 싸움을 목도했다.

머리만 남은 ‘휘왕’이 별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저 정체 모를 무언가를 삼켜서 없애라.

직접적인 명령은 통하지 않는다. 저것은 어떻게 봐도 ‘휘왕’ 자신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의 존재다. 격이 엇비슷한 상대에게 권능을 사용하려면 적을 지배하기 전에 그가 죽는다.

힘은 충분하다. 울프헤딘을 죽이기 위해서 대륙 절반을 잡아먹고 기른 힘이 남아 있다. 한순간에 전부 쓸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저장이 그의 위장에 남아 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륵─!!!!

창조주를 잃은 별은 명령에 따랐다.

절대지배자로서 갖춘 창세의 권능은 제외한다. 같은 권능으로 맞받아치면 진다. 신적 존재들에게 싸움이란 오롯이 자신만의 권능으로 이뤄지는 것.

─■■■■■■!!!!!

‘휘왕’은 산도 으깨버릴 위력의 토사를 별로부터 분출했다.

그리고, ‘진토’가 움직였다.

같은 질량의 운석 충돌에도 비견될 흙 폭포를, 옛 지배자의 육신도 뚫을 속도로 튀는 돌조각을, 자아를 가진 종복처럼 달려드는 바위를 피한다.

피하고 밟고 뛰어넘으며, 유유하게 도약한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음의 실감이 3할 남은 몸을 지진 듯 달구자, ‘휘왕’은 그저 무아지경으로 ‘진토’를 공격했다.

죽는다. 한순간의 영면, 그 모순된 잠깐의 잠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면이다. 그저 한없이 불멸인 듯한 옛 지배자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지금, 여기서 살해당했다간…… 궁전에서 잠든 진짜 나까지 죽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기에, 꿈에서 죽는 것도 현실의 죽음이 된다.

원래라면 문제는 아니다. 옛 지배자를 죽일 힘, 죽일 권한을 가진 자는 거의 없었으니까.

─탓!

이때, ‘휘왕’에게 닿는 힘과 그를 멸살할 자격을 갖춘 수라(修羅)가 ‘휘왕’을 깔보듯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전까지는.

푸른 달을 등진 ‘진토’는 문드러진 팔을 달에게 뻗고, 월면을 잡아뜯는 것처럼 검을 뽑아냈다.

마치 달이 통째로 무기가 된 듯한 질량. 월광을 반사하는 거대한 무기는 엘리자베트가 눈을 한 번 깜빡이기가 무섭게 현실로 튀어나왔다.

같은 기적을 목도한 ‘휘왕’은 눈치챘다.

저것이었다. 조금 전에 그의 몸을 절반이 넘게 부수고 소멸해버린 공격의 정체는 저것이었다.

권능도 뭣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검이다.

한없이 무거운, 환상처럼 이 세상에 아주 잠시 동안만 존재하기를 허락받은 비현실적인 대검.

인간이 인식하는 최소한의 찰나보다 짧게, 다음 찰나가 지나갈 무렵에는 사라질 무기.

인간이라면 휘두르기는커녕 들지도, 눈으로 살피지도 못할 찰나지간의 기적.

그렇기에 그 검의 질량은, ‘휘왕’이 동원한 모든 마법을 웃돌았으며.

【■■■■.】

─서걱!

‘진토’의 손속은 검의 소멸보다 빨랐다.

일검(一劍). 검이 허락한 찰나보다 더 신속하게 휘두른 질량의 폭력은 ‘휘왕’의 남은 몸을 과육을 터트리듯 흔적도 없이 완전히 분쇄했다.

“……아하하. 속 시원하네.”

‘휘왕’이 만든 무저갱으로 떨어지며, 그 절경을 멀리서 구경한 엘리자베트는 웃었다. 아직 여왕이 되기 전의 그녀처럼.

“노르드…… 과거의 나…… 힘내 주기다……?”

눈을 감는 엘리자베트의 숨은, 그녀를 바닥으로 이끄는 중력의 손길보다 조금 더 빨리 끊어졌다.

…척! ‘진토’는 산맥에 내려섰다.

모든 신적 존재들 중에서도 한손에 꼽을 정도로 강대하던 옛 지배자. 그를 2번의 공격으로 영원히 소멸시킨 존재는 황야에 솟아난 산맥의 봉우리에 서서 지면을 굽어살폈다.

더는 영향을 행사할 사람도 없이 약해진 차원, 창세의 권능으로 형성된 산맥은 【중간 가지】가 건재한 시절보다 효과가 뛰어났다.

산의 높이는 가히 수천 미터를 넘었으며, 처음 그 정상에 선 ‘진토’에게 남쪽 끝단의 바다를 내다보기에 적합한 높이를 제공했다.

명계 니플헤임보다 권능에 더 취약해진 차원의 산맥에 서서, ‘진토’는 수만 km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팔다리라고 부르기에는 조잡한 육신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르륵.】

─콰광!!!!!

무저갱을 등진 ‘진토’는 산맥을 널뛰듯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향해야 할 장소는 처음부터 바뀌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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