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이 확정됐을 무렵, 내가 아직 지구에 있을 때.
10년 전에 살던 동네를 우연히 지나갈 기회가 있었다. 개발이 진행되고 풍경이 바뀌어서, 익숙할 터인 풍경이 다른 곳처럼 느껴졌던 게 기억난다.
아이키븐 섬에 도착한 내가 느낀 첫인상은 그야말로 그때를 방불케 했다.
백골이 가득하던 섬은 휴양지에 걸맞게 가꿔질 수 있는 포텐셜을 군사기지에 빼앗겼다. 과거 저 히타이트의 해군 보급기지로 사용됐던 것처럼.
그리고 그 엄중한 기지는 안팎의 폭동에 부서진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이 섬의 중심, 차원연결장치가 있는 곳에 몇 년 전의 실험 실패가 만들어낸 방대한 에너지가── 그리고 그 에너지로 탄생한 이계가 있을 것이다.
파괴된 성벽의 분위기는 음산하고, 마치 족쇄에 묶인 채로 바다 깊은 곳에 내던져진 듯한 갑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섬 전체가 ‘황색 왕’의 영지.
푸른 밤하늘에 감도는 한기로도 메워지지 않는, 바람이 그친 무풍지대였다.
“……가요.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눈물을 닦은 라리루라가 말했다. 워프 직후에도 주저앉아 있던 그녀였지만, 눈물을 닦고서 냉정할 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오기까지는 1분도 미처 걸리지 않았다.
“‘휘왕’ 역시 엄연한 옛 지배자. 공간을 넘어서 여기 도착하기까지 몇 분 걸리지 않겠죠. 그 잠깐 사이에 저희는 섬의 중심에 도달해야 해요.”
“……괜찮겠어?”
“전혀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저만이 살아서 끝나지 않는 아침을 보내는 동안, 한 시도, 한순간도 괜찮았던 적이 없는걸요.”
적응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견디는 것은 익숙해졌다.
그렇게 말한 라리루라가 장갑을 당겼다.
“체력을 아끼려면 더는 워프는 못 해요. 그치만 때로는 요령을 피우지 않는 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잖아요?”
“좋아, 뛰자. 1초가 아까워.”
우리는 성벽의 부서진 틈으로 뛰어들었다.
무척 깔끔하던 밖과 달리 성벽 안은 처참했다. 한때 이 섬이, 사람의 욕망을 충동하는 이상향이 불러왔던 몇 개의 참변이 눈꺼풀에 떠오르는 듯이 상상 갔다.
지키는 자가 없는 천국의 문 앞은 지옥의 가장 깊은 곳보다 비참하다.
“훌륭하죠? 이 섬의 정경이 바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재밌고, 흥미로로웠던 쇼의 결말이랍니다!”
체력을 과하게 낭비하지 않게 주파하자, 여봐란 듯 열려 있는 차원의 문 앞에서 노란 로브를 입은 남자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치익─! 급정지를 가한 신발 밑창이 바닥에 긴 브레이크 자국을 남겼다.
나는 임전 태세를 갖추고 말했다.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떠드는군.”
“으음? 일반적인 감수성을 가진 인간은 이 꼴을 보고 떠올릴 법한 생각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노란 로브는 2미터는 될 남자의 키보다 더 길고 바닥에 질질 끌리고 남을 만큼의 기장이 있었다.
그런 옷을 입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남자에게선 어딘가 아주 조금, 인간의 흉내를 내는 듯한 장난기가 전해졌다.
완벽하게 인간 흉내를 내고 있지만, 다르다.
개를 완벽하게 따라 하며 짖어대도 인간은 결국 개가 아닌 것처럼.
인간의 두뇌를 닭의 몸에 집어넣어서 그 인간이 벌레를 잡아먹고 맛있다고 느끼는 몸이 돼도, 근저에 있는 감수성은 인간에서 벗어나진 않는 것처럼.
그 위화감을 누군가는 카리스마라고 볼 것이며, 또 누군가는 혐오스럽게 느낄 것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고.
“그러니 갈피만 확실하게 잡고 대략적인 말투로 떠들면, 마치 상대는 자기 마음을 다 읽는 것처럼 느끼죠. 전 관록이 있다 보니 적중률은 높답니다.”
노란 로브의 남자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교태마저 느끼는 동작이었지만, 불쾌함은 더해질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새끼의 얼굴은 물론, 몸까지 나를 그대로 빼다 박았기 때문이었다. 나로 변신했다는 걸 몰랐다면 혹시 미래의 내가 아닐까 싶었겠지.
“어울리죠? 제 이복형제…… 지금은 남매인가? 그 아이의 속을 긁기 좋을 것 같아서 변해봤어요. 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심해의 군주’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그래, 다 안다. 사람 흉내 뒤지게 못 내는 새끼라고 생각하던 중이었고.”
“와우, 충격입니다. 역시 덩치 큰 남자의 몸으론 좀 더 근엄하고 우직한 행동을 해야 합니까? 제가 알기론 당신은 방정맞은 편으로 분류될 텐데.”
“본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농담은 입에 담는 순간 주변이 싸해지지. 너는 평생 개그맨은 못 하겠군, ‘황색 왕’.”
‘황색 왕’은 깔깔거리며 매력적인 분위기의 쾌남처럼 웃었다.
“이름으로 불러주실래요? 자자, ᚺᚨᛋᛏᚢᚱ, ᚺᚨᛋᛏᚢᚱ. 발음하기도 쉽죠?”
“응, 니애미.”
“우리 엄마는 죽었는데!”
나는 눈만 반개했고, ‘황색 왕’은 뺨을 긁적였다.
“으음, 분위기 한 번 싸해진 것 봐. 이래서 사람 흉내를 낼 때는 이 성격 저 성격 다 해 봐야 하는 거군요. 적응 안 되네.”
“생각보다 야단스럽군.”
로키의 이름을 쓰고 돌아다녔다고 하고, 예상했어야 하는 부분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옛 지배자는 무릎을 치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의외였습니까? 하긴, 제가 인간이나 봉사종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전해지는지는 조금 압니다.”
“분위기 쇄신이란 게 좀 어렵지. 한 번 굳어진 인상을 바꾸려고 들면 주변 것들이 으엑 거리면서 질겁하든가 벌벌 떨거든.”
대화에는 응한다. 선공은 아직 가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내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오딘의 눈이 점차 회복되고 있어.’
내가 회복까지 걸리라고 계산한 시간은 일주일.
하지만 그 흔한 휴양도 먼지 날리는 폐허보다는 요양하기 좋은 휴양지에서 보내는 편이 회복력이 더 좋아지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내 권능도 여기서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저 이계다. 엘리자베트 말대로 저곳이 이 미래, 이 세상의 중심이야.’
이계를 눈으로 봤던 즈음부터, 1분 1초가 흐를 때마다 권능의 힘이 눈에 보일 만큼 돌아온다.
내 계산으로 3~4일 이상 남았던 회복이 2시간 안팎으로 끝날 듯 하다. 밖에 있는데도 이 정도다. 안으로 들어가면 몇 분도 걸리지 않겠지.
‘밖에서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단기예지는 가능하다.’
최대 9초짜리 예지.
짧긴 하지만, 전투에서는 이루 말할 필요 없는 이점이다. 성급한 공격은 내 목을 조르는 악수다.
시간을 끌어서 ‘휘왕’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어도 내 예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편이 낫다.
“하아,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황색 왕’은 기분이 상한 것처럼 한탄했다.
“당신은 10년 전의 당신과 완벽하게 같습니까? 1년 전의 당신과는? 아니겠죠. 가진 생각, 사람을 대하는 자세, 그런 게 바뀌었을 겁니다. 인간조차 그럴진대 어째서 우리들은 백 년 만 년 한결같은 존재이리라고 믿죠?”
“누가 뭐랬냐? 병신이 쌓인 게 많은가 보군.”
“저는 단지 궁금한 겁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무슨 기분일까? 그리도 오만하던 녀석이 자기 죽음보다도 사랑하는 이와 죽고 죽이는 찰나를 더 갈구할 만큼 흥미로울까? 자기를 그렇게나 혐오한 남자인데도?”
‘황색 왕’은 죽은 남매를 향해서는 경멸의 색도 내비치지 않고 웃었다.
“이러니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까요. 녀석에게는 목숨 외에는 무엇도 내어주지 않았던 남자. 그가 생전 사랑했던 인간은 어떤 인물이었을지.”
눈을 돌린 ‘황색 왕’은 침묵하는 라리루라를 슥 흘겼다.
“그렇기에 당신으로 변해서, 인간들의 심리적인 약점을 파고들고, 안에서부터 느긋히 관찰하고자 했습니다만……”
순간, 나를 빼닮은 얼굴은 인간에서 돌변했다.
“지루했습니다. 몹시도.”
생김새가 일그러진 것은 아니다. 돌변한 건 표정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얼굴 표정은 비언어적인 대화 수단이다.
아무리 둔한 인간도 타인의 노골적인 표정에는 민감하고, 적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혹시 인간과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생물체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다면 어떨까.
“지루해. 아주 지루합니다. 불쾌하죠. 그 녀석의 이기심 하나로 이렇게 볼 맛 나던 세계가 모조리 고장나버렸습니다.”
그 답이 우리 앞에 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심해의 군주’가 흩뿌려뒀던 치료법도 같이 개발하려고 했는데,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제가 먼저 그 작은 사회에 질려버렸어요. 멸망한 세계는 그토록 지루합니다.”
‘황색 왕’은 인간의 거죽을 쓰고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을. 무지개다리 위에서 빛의 파수꾼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깜빡 졸다 깼을 뿐인데 남매가 모든 놀거리를 망가트려놨단 걸 알았을 때의 좌절감을.”
“안타깝게 됐군. 미인은 잠이 많은 법이지. 나나 로키로 변신하지 말고 니 원래 낯짝으로 돌아다녔다면 뒤지는 날까지 불면 불휴였을 텐데.”
“늦어? 어째서요? 저는 이렇게 꿈속에서 눈을 뜨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 면상에 붙은 내 얼굴을 빵 반죽처럼 주물렀다.
“제가 ‘황색 왕’을 연기하는 건 쉽습니다. 인간, 봉사종족을 흉내 내는 건 조금만 신경 쓰면 되죠.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두 번을 연달아 실패했다니 믿어지십니까? 체면이 다 구겨지는 기분입니다.”
로키로 변했을 때 들켰고, 나로 변했을 때 역시 들켰다.
“실패하고 좌절도 했지만, 뭐든지 삼세판입니다. 멋진 말 아닙니까. 자기 손에 다음 기회가 있다고 믿는 오연함. 그 희망이 인간의 멋진 점입니다.”
인간의 거죽을 주물러서 자기 얼굴에 맞추듯이 ‘황색 왕’의 표정은 다시 인간다운 태도로 변했다.
“꿈속에서의 실패는 부끄럽지 않지. 눈을 뜨고 나도 잊어버리면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거든.”
당사자인 내가 봐도 분위기, 동작 하나하나까지 나를 빼닮은 ‘노르드 폰 울프헤딘’으로 말이다.
“즐거운 시간은 되도록 오래 갔으면 하거든. 아, 너무 그렇게 걱정은 말고. 나 역시도 울프헤딘이 ‘심해의 군주’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걸랑.”
히죽 웃은 ‘황색 왕’이 나처럼 말했다.
“그런데…… ‘울프헤딘’이 꼭 너여야 할 필요는 없지? 인간박이 노란 원숭이 새끼야.”
“나는 그딴 천박한 말투 안 쓴다, 병신아.”
그리고, 드디어 내 눈동자에 권능이 돌아온다.
1초 뒤,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창끝이 내 머리를 노리고 뻗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