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뒤,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창끝이 내 머리를 노리고 뻗어왔다.
─파츳!!!!
고개를 뒤틀고 피한다. 예지가 아니었다면 절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권능.’
베로니카가 남긴 수첩에서 읽었던 내용이었다. 노란 황금 창날이 빠르게 물러났다. 놀라운 창술 실력으로 【게르튀르】의 초식을 펼쳐대며 ‘황색 왕’이 홍소를 터트렸다.
“‘심해의 군주’를 죽이는 운명을 손에 넣고, 이 따분한 미래도 예방할 수 있다니, 존나 최고잖아! 노르드가 나는 된다! 너, 내 몸뚱이가 돼라!”
“씨팔럼이 싸우는데 존나 정신 사납게 떠드네!”
“거울 치료 당하니까 개꼽죠? 빡치죠? 그래봤자 못 이기죠? 하하하! 이거 재밌네! 너랑 목숨 걸고 분위기 잡으면서 싸우려던 새끼들은 뒤지게 배알 꼴렸겠다, 야!”
공격을 피하면서 나는 이 새끼가 뭘 노리는건지 눈치챘다.
‘로키 때처럼 내 이름을, 존재 자체를 빼앗아갈 생각이군.’
이 새끼는 나로 변신해서 운명에 수작을 부려보려는 생각이었다.
‘저놈은 이미 신대에 로키의 이름을 빼앗았다가 라그나로크 당시 죽어야 했을 로키의 운명까지도 뒤집어쓴 전적이 있다.’
그걸 이번엔 나로 되풀이할 생각인 것이었다.
그때는 자기 불멸성을 믿고 불행한 운명을 대신 받은 거라면, 이번에는 ‘심해의 군주를 족쳐버리는 울프헤딘’이라는 운명을 탐내면서 말이다.
내 몸에 자기 의식을 업로드한 ‘황색 왕’은 내가 가진 운명을 따라서 ‘심해의 군주’를 해치우고서, 노르드 폰 울프헤딘이 돼갖고 현실을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그걸 눈치챈 나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분노에 눈앞이 돌아갈 듯 빡쳤다.
“이 애미 뒤진 날먹충 폐하께서 아주 내 인생을 통째로 NTR하러 들어?”
왜 로키가 이놈을 그렇게 역겨워했는지 알겠다.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먹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인간관계와 삶까지 전부 빼앗아버린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향해 보내는 감정까지도 전부!
“이 금발 태닝 촉수 새끼가. 문어 숙회가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나는 차가운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내가 그 새끼에게 창을 내지르는 것보다 먼저, 낄낄대면서 웃던 ‘황색 왕’의 표정이 일변했다.
촤아아아아아악─!!!!
사방팔방을 거미줄처럼 포위하는 실타래가 놈이 있던 공간을 난자했다. 옛 지배자고 지랄이고 한 대 맞으면 가랑이에 달린 촉수도 뎅겅 썰려나갈, 차원을 가르는 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저 녀석과 싸워줄 이유가 없어요, 선배.”
그 실타래를 능숙하게 조종하면서, 나보다 훨씬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는 라리루라가 말했다.
“목적지는 바로 앞에 있어요. 저 못생긴 구더기 괴물의 진짜 몸은 현실에서 잠이나 자고 있겠죠. 입을 놀리는 건 지금이 아니면 한 번 대차게 지고 죽은 자기가 세상에 간섭할 기회가 없어서에요.”
“크으, 역시 우리 라리루라. 머리 좋은 것 보게.”
“입 다물어. 선배는 저나 언니들을 뺏기지 않게 어서 빨리 이 미래를 탈출해서, 현실에서 잠이나 자고 있을 저 녀석을 해치워 버리면 돼요.”
라리루라는 내게 윙크하면서 심념을 쏘아냈다.
─제가 말했었죠? 저 이계는 안과 밖의 시간이 달라요. 안에서의 1분은 바깥에서의 1시간이에요.
들었다. 꼴랑 소원을 이뤄준다는, 그것도 사기에 불과한 이계인데도 탈출하는 데 1달이나 걸린 건 그것 때문이었다.
별의 자손 중 한 놈은 시간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었다던데, 그놈들한테 자기 힘을 나눠준 ‘심해의 군주’가 그 정도의 수작도 못 부릴까.
그래서 우리는 옛 지배자들 모르게 이계에 바로 들어가는 방법을 포기했다.
안에서 3분만 흘러도 밖에 있던 옛 지배자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고 협력해서 죽이러 올 테니까.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휘왕’을 잡아주고, 우리가 힘을 온존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기에──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가능성이 생겨났다.
─저를 두고 가세요. 심부름 정도는 혼자서 갈 나이시잖아요?
라리루라가 이계의 앞을 지키는 동안, 내가 내 모든 힘을 써서 권능으로 이 미래의 시뮬레이션을 끝내버리는 가능성이다.
아껴둔 권능과 마나를 최대한 발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오? 그거 좋네. 멋진 아이디어야. 표창감이네.”
‘황색 왕’은 실실 웃으며 차원의 문 앞에서 여유롭게 비켜섰다.
“라리루라가 깔쌈하게 빠삭한 통구이가 된다고 해도, 어차피 저년은 진짜도 아니잖아? 단지…… 우리 후배님께서 시간을 끄는 데 실패하면, 알지?”
이건 라리루라가 최소 몇 시간 이상을 버텨줘야 성립되는 작전이다.
내가 힘을 소진한 채로 ‘황색 왕’과── 어쩌면 ‘휘왕’까지 포함한 2대 1로 붙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바에는 둘이서 ‘황색 왕’을 먼저 죽이는 게 나을 것이다.
승산은 높지만 실패했을 때는 괴멸이다.
“근데 쓰벌, 이래서는 아직 느그들한테 선택할 여지가 있네? 그럼 재미가 없지. ‘나’라면 여기서 적에게 대굴빡을 굴릴 여유를 주지 말아야지.”
본인 말대로 인간에 대한 높은 이해력으로 우리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것처럼, ‘황색 왕’은 웃는 얼굴로 창을 등 뒤에 휘둘렀다.
예지하고 막으려 했으나, 이미 미래의 모습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갑자기 분 바람이 내가 투척한 창을 갈아버리고, ‘황색 왕’은 목적을 이뤘다.
카치잉─!!!!
‘심해의 군주’가 만든 이계에 금이 내달렸다.
놈이 창을 휘둘러서 이계를 부숴놓은 것이었다.
“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거 아니냐? 그럼 들어가고 싶게 해줘야지. 혼돈의 이계가 무너지기까지 안팎 상관없이…… 9분 정도 남았겠네. 캬, 내 심장이 다 쫄깃하네.”
이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황색 왕’이라도 동격의 존재가 만든 공간 자체를 한 번에 부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간의 특성과 무관하게 똑같이 9분의 시간제한이 생겨났다.
9분 안에 ‘황색 왕’을 죽일 확률은 너무 낮다.
그렇기에 남겨진 승산은, 나 혼자만이라도 안에 들어가는 것.
“흐흐, 뭐 어때? 어차피 내가 라리루라를 후딱 잡아먹고 쫓아오게 두기 싫다면 밖에서 9시간이나 흐르게 둘 수는 없었잖아? 결국 결론은 똑같네.”
실실 웃는 ‘황색 왕’의 생각은 뻔했다.
대가리가 아무리 좋더라도 답이 이렇게 명확한 이상, 서로 수작을 부리고 할 것도 없다. 이 데드 레이스에서 이겨낼 자신이 놈에게는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하나 더 가능성이 남아있다.
‘수첩에 적힌 베로니카의 예언들.’
이걸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이 혼돈의 이계까지 왔다.
베로니카가 자기가 남겨둔 예언은 내가 현실로 돌아갔을 때 잊혀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에.
이 예언을 가져가길 포기하면 라리루라가 죽지 않아도 ‘황색 왕’을 해치울 수 있다. 여기서 놈을 죽이면 옛 지배자의 불멸성을 파훼할 수 있다면서 오딘의 눈도 그 선택을 종용했다.
놈이 죽으면 ‘심해의 군주’가 몇 년 후에 대동할 수 있는 전력도 삭감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다면 내게 목숨을 내준 엘리자베트와 생존자들의 뜻을 저버리게 된다. 가짜니까 배려할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기 있는 라리루라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
시간은 흐르고, 선택의 때는 다가온다.
오직 더 나은 승산과 미래를 위해서, 나 스스로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마저 내버릴 것인가.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본래의 내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내 뜻으로 넘어서?
‘이게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거냐? 시구르드.’
내가 내 마음보다 이성을 중시해야 하는 순간.
지금까지는 내 지혜와 힘으로 선택 자체를 피하면서 극복해 왔던 미래가, 옛 지배자들 같은 초월자들을 상대로는 찾아올 거라고?
그래서 이 멸망한 세상을 보여준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리안을 켰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나도 알아채는 게 늦었다. 그저 무심코 멀리 내다보는 힘을 눈에 펼쳐내고, 이계를 관찰하려는 직감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
“──아.”
나는 눈치챘다.
애초에 나는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고되고 좆 같은 온갖 트러블, 평지풍파 따위에 시달리는 중에도, 내 곁에는 그 고난에 함께 해 줄 사람이 있었다.
그러게 우리는 돕고 도우며 사랑하기로 했다.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혹은, 다한 후에도.
“……다녀올게, 라리루라.”
“네, 선배.”
사랑하는 그녀의 대답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라리루라는 내게 남은 망설임까지 털어내 주려는 듯, 그때 그 시절처럼 밝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9년 전의 과거에서♡”
순간, 내 다리는 지면에 크레이터를 만들어내며 가속했다.
오직 앞만을 보고 달리는 속도에는 ‘황색 왕’도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놈은 상관없다는 듯 친절한 미소를 짓고 마법을 펼쳤다.
“로키가 말해주지 않았나 봐? 나는 내기와 경주도 좋아하거든.”
목표는 라리루라다. 예리한 바람이 라리루라가 몸을 지키기 위해서 펼친 차원벽을 빠져나갔다.
【성간우주의 바람】. 시간을 가속시켜서 빛을 뛰어넘는 속도를 지닌 바람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든 바람을 자신이나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부여하는 권능이었다.
한때 로키에게서 이름을 빼앗고, 아스가르드의 무지개다리를 지키는 신과 동귀어진했다는 ‘황색 왕’의 권능.
‘우드가르트 로키’와의 내기에서 ‘생각보다 빠른 골렘’을 만들고, 로키 흉내를 내면서 아홉 세계를 오고 가는 걸 가능하게 만들어준 힘.
저 바람은 때로는 ‘심해의 군주’의 예지보다 더 빠르게 미래에 닿고, 차원도 비틀어서 뛰어넘는다.
권능으로 시간, 공간을 왜곡시키는 바람에 실은 마법이 라리루라에게 거침없이 뻗어갔다.
‘황색 왕’의 권능은 로키의 권능을 상대로 훨씬 유리하다.
바람을 지배하는 ‘황색 왕’의 성간우주에는 유희신도 발을 디딜 수 없다.
나나 ‘심해의 군주’ 같은 예언자에게 맞서는 게 가능한, 모든 우주를 통틀어도 몇 없는 권능 중의 하나.
그래서 베로니카는 이때를 대비했다.
미래를 대비하는 게 선지자의 역할이기에.
─콰아앙!!!!
‘황색 왕’이 뿜어낸 바람의 칼날을, 그보다 훨씬 무식한 망치가 파괴했다.
내가 천리안으로 봤던 ‘그녀’의 소행이었다.
이계에 뛰어들기 직전, 나는 넋 나간 표정으로 멈춰서는 라리루라와── 눈을 반개하며 강적에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황색 왕’을 볼 수 있었다.
“……오딘?”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중얼거리고서, ‘황색 왕’은 그럴 리가 없다고 냉정을 되찾은 듯 했다.
“……실언을 했군. 세계수의 신들은 물론, 우리 같은 불멸성을 가진 존재조차 진정한 소멸에서는 살아날 수 없다. 그렇게 운명을 비틀 자격을 오직 가진 건 인간뿐일 터.”
인간 흉내도 잊은 옛 지배자는 겉가죽의 표정을 바꿀 생각도 하지 못한 듯, 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으로 뇌까렸다.
“누구냐. 이름을 밝히거라, 인간의 아이여.”
‘황색 왕’의 하문에도 난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지를 격전의 와중에 잃고 목은 쉬었으며 눈 하나 역시 잃었다. 무너진 몸은 죽음에서 기어 올라온 망자의 몰골이다.
그 신체에서 발휘하는 마나도 본인임을 알아볼 수가 없을 만큼 달라졌다.
그래도 그 어떤 금속보다 무겁고 단단한 흰색의 금속으로 다친 몸을 대신하고,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황색 왕’을 바라보는 그 외눈에서.
그 얼굴에서 나는 내가 아는 그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오딘의 신좌를 계승한 하프 드워프는 골렘으로 대체한 팔로 자기 목을 매만지고서,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
18개의 룬 문자가 그녀의 등 뒤에서 나이프를 대신하듯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