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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셰라드의 납치범들을 구속하고, 그녀를 구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 다나는 노르드의 설명을 듣고 그런 장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고작 고고학 박사에 불과한 그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사건이 어디 1~2개던가?
하지만 9년 뒤의 멸망한 세계에 관한 예언이란 침착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됐다. 가족에게 눈을 돌리자 그녀들도 심정은 비슷한 눈치였다.
“자, 이게 그 수첩이야.”
“……내게도 보여다오.”
수첩을 받고 몇 장 넘겨본 베로니카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내 필적이 맞군. 그대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못된 장난을 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도 하니, 의심할 나위는 없겠노라고 보겠다.”
“멘탈을 추스를 시간은 줬으니까, 왈가왈부하기 전에 내 결론부터 말할게.”
노르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정색하며 말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심해의 군주’에게 시간을 주는 건 실수야. 사람들을 구슬려서 운명을 자기 좆대로 바꿔놓는 게 가능하니까.”
다행히 차원을 연결하는 기술은 있다.
태평양의 심해에서 잠자는 악신의 목에 창끝을 꽂을 방법이.
“살아남은 신들은 마음만 먹으면 다른 차원까지 갈 수 있댔잖아? 문제는 갔다 오는 과정에서 찢어진 차원막을 고칠 방법이 없다는 거였지.”
하지만 이제는 차원의 막을 수리할 방법이 있다.
노르드의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낯빛을 굳혔다.
“주인님. 그 마법은……”
“맞아, 차원막 복구 실험은 실패했지. 그렇지만 그 마법의 술식과 실험 기록은 수첩에 적혀 있고, 데이터가 있으니 같은 실패를 반복할 일은 없어.”
“뭣보다 저 ‘심해의 군주’마저 없다면 실패해도 괜찮고.”
팔짱을 푼 다나가 베로니카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사건이 문제가 된 건 심해의 군주가 수작을 부려서였다며. ‘심해의 군주’부터 잡고 나서 다시 실험하면 기존의 데이터도 있고, 미래예지도 멀쩡하게 기능할 거 아냐.”
“다나의 말이 맞아요. 저희가 가지 않아도 머지않아 저들이 찾아온다면, 기회가 됐을 때 공격을 꺼려서는 안 돼요. 수복 실험의 가부는 그 뒤죠.”
살아남은 신들이 차원막의 파괴를 꺼리더라도, 언제든 적이 원하는 순간 침공해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고민할 여지가 없다.
슬금…. 라리루라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신들께서 승산이 낮다는 얘기를 받아들이실까요?”
“승산이 낮은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어.”
주저하며 묻는 라리루라였지만 네페르티티는 딱 잘라 말했다.
“운명에 구속된 신과 운명을 예지하고 초월한 신. 확연한 수준 차이. 그러니 받아들여야 해. 그 싸움을 이유로 지상에 개입하길 꺼렸다면 더욱.”
“신들이 몇 명 남아있는지는 몰라도, 옛 지배자 14체를 불리한 상황에서 상대해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진상 규명은 나우넷의 진흙도 있고 증명하긴 쉬울 테고요.”
“그렇죠, 그래서 미래의 베로니카, 그리고 저는 제안합니다.”
냉수로 속을 달래는 티르시의 의견에 노르드도 동조했다.
순간적으로 일가의 시선이 베로니카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수첩에 쏠렸다.
“저희들이 ‘심해의 군주’를 해치웁시다.”
적이 또다른 계략을 구상하기 전에 친다.
‘심해의 군주’가 병력을 잃고 있는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
미래의 베로니카가 남긴 말이 사실이라면, 노르드의 꿈에 들어왔다가 죽은 옛 지배자들은 현실에서도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었으니까.
“……‘진토’, 즉 미래의 프랑 언니가 해치운 옛 지배자는 3마리.”
라리루라는 짧은 단발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녀의 눈은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본 적조차 없는 미래의 풍경을 생각하는 듯 했다.
“‘황색 왕’, ‘휘왕’, 그리고 선배 앞에 나타나기 전에 죽은 개체까지. ‘심해의 군주’가 엄선한 특히 강력한 옛 지배자가 3마리나 소멸한 상황이에요.”
“미래에 강림하는 옛 지배자는 14마리라셨죠?”
“옙. 그 우주 괴물들의 수명을 생각하면 몇 년 정도의 오차로 숫자가 변할 가능성은 적으니까, 3마리가 뒤진 지금은 11마리겠네요.”
베로니카는 노르드의 말을 경청하며 고심했다.
“……살아남은 신들이 네 분, 아니 세 분 정도만 계셔도 우리를 포함해서 11대 11. 숫자로는 적과 비등해지겠구나.”
“그다지 비등하지는 않아.”
어지간하면 변하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찌푸리며 네페르티티는 그녀의 발언에 잠시 정정을 가했다.
“나는 아직 브류나크가 없으면 권능을 못 다뤄. 그리고……”
빙글─. 그녀의 머리가 프랑에게 돌아갔다.
“프랑도 아직, 오딘의 계승자가 아니야.”
대략 1시간쯤 전부터 말이 없었던 프랑은 입만 벙긋댔다. 본인 얘기가 나왔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벙쪄 있는 상태다.
“……어으에? 오딘님의 신좌를 계승해? 내가 옛 지배자? 흐에? 으에?”
미래의 이야기를 듣고 라리루라, 베로니카만큼 충격을 받은 것일까.
미래에 그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표정이 냉랭하던 그녀도, 9년 뒤의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를 듣고 나자 정신이 가출한 모양이었다.
“……으흠. 보다시피, 전력을 확충하는 게 가장 급선무겠어요.”
헛기침을 한 티르시가 가볍게 펜을 쥐었다.
“네페르티티. 권능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감은 잡았어. 나우넷의 진흙을 다 쓰면, 아마 1~2달 정도.”
“긴 듯하면서 짧군요.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죠. 네페르티티의 숙련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고, 먼저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건 다른 쪽일 테죠.”
“이것들 말이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노르드는 찬란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2개의 빛 덩이를 불러냈다.
그 광채는 7대신의 신좌와 닮았으나, 누가 봐도 알아챌 수준의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빛이 품은 강함의 격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격’의 차이였다.
오딘의 신좌와, 토르의 신좌.
시구르드를 쓰러트리고 얻은 신대의 유산이었다.
“뭐, 고민할 것도 없네. 우선 이건 프랑 거.”
노르드는 아침 식사의 베이컨이라도 분배하듯이 넋이 나간 프랑의 손에 형체를 얻은 신좌를 넙죽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에서 신좌는 열쇠로 모습을 바꿨다.
“……꺄으야아아아악?!”
정신을 프랑은 손에 들린 열쇠를 보고는 기함을 하며 뒤로 넘어졌다. 그러는 중에도 자칫 주신의 신좌가 마룻바닥에 구를까 무서운 것처럼 감싸 안기까지 했다.
“안 돼! 응, 절대 안 돼! 난 못 해! 이건 노르가 가져! 오딘 님의 후계자라면 노르밖에 없잖아!”
─벌떡! 오뚝이 인형처럼 일어난 프랑이 열쇠를 두 손으로 받쳐들며 허둥지둥 말했다. 하지만 노르드는 고려할 게 못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받아봤자 능력이 너무 겹쳐. 예지의 권능이라는 게 덧셈 뺄셈 하듯이 강해질 리도 없고.”
먼 미래를 보는 천공신의 권좌와 자신에게 닥친 미래를 바꾸는 노르드의 권능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힘이었다.
하물며 오딘하고 울프헤딘은 별개의 존재다.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오딘과, 오딘이 죽은 후에 나타난다는 울프헤딘이 같은 신격일 수는 없었다. 서로 한없이 닮을 수는 있겠지만.
신좌를 받지 못할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운 좋게 받았다고 쳐도 권능끼리 상충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내가 신경써야 할 건 신좌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쪽이지.”
노르드는 처지 곤란한 계륵을 보는 것처럼 거실 소파에 앉은 그의 뒤편에서 둥둥 떠다니는 고풍스러운 창을 힐끔거렸다.
궁니르.
생전에 오딘이 다루던 신의 무기.
이 창은 오딘의 신좌와는 별개의 존재였다. 저 토르의 묠니르나, 프레이야의 궁전이자 마당처럼 신좌에 부속된 병장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문어 대가리 년한테 신좌 채로 존재를 뺏길 걸 알았을 텐데, 거따가 자기 무기를 뭣하러 붙여놓겠어.’
신좌는 신들의 권능의 집약체이자 후계자들에게 남기는 유산이다.
하지만 다른 신들과 오딘은 처지가 달랐잖은가.
그가 예상하기에, 신좌를 얻은 시구르드는 미래예지로 궁니르가 숨겨진 곳을 찾아내서 손에 넣은 듯 했다.
오딘의 거죽을 뒤집어쓴 ‘심해의 군주’가 패하던 순간 지상에 떨어트렸을, 오딘의 무기를 말이다.
“니가 그걸? 창을 두 자루씩 들고 쓰게?”
다나가 고개를 모로 꼬자, 노르드가 찬 팔찌가 가당찮다는 듯 떨었다.
─웅웅웅웅웅웅웅!!!!
진동으로 모자랐는지 노르드의 귓가에는 까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찌푸린 그는 브류나크와 소통을 시켜주는 풍요신의 장갑을 벗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 볼게. 이 녀석이 아주 내 주변에서 안 떨어지려고 해서. 꼴이 이러니 받지도 못할 듯한 신좌에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겠어.”
“네에~! 그럼 오딘 님의 신좌는 프랑 언니 걸로 낙찰~♡!”
“내 의견은 무시하기야?!”
울먹이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 항의하던 프랑의 반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나가 손가락을 세우며 짐짓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1. 그걸 안 받고 남편놈이 골로 갈 확률을 두, 세 배로 높인다. 2. 냉큼 받고 ‘심해의 군주’년의 모가지를 딸 확률을 높인다. 어느 쪽이 좋아?”
“……다나 나빴어. 그렇게 말하면 절대 싫다곤 못 하잖아.”
마음을 정한 프랑이 결심하자 베로니카가 눈을 반개했다.
“프랑이 납득해준 건 좋았다만, 미래의 프랑도 오딘 님의 신좌를 그리 쉽게 계승하지는 못했다. 주인님의 얘기를 들어보면 준비가 더 필요했지.”
“응. 죽었다 살아나기.”
“정확하게는 더욱 높은 경지까지 도약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 삼아 희생하고, 되살아나는 거죠.”
“……마법은 어려워. 다른 거야?”
“전혀 다른 거에요. 추락이랑 비행 정도로.”
미래의 프랑은 그 조건을 충족했다.
어떤 식의 작용인지는 모른다. 수첩에도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었다면 노르드는 프랑이 아이키븐 섬으로 찾아오기 전에 그녀의 방문을 예상했겠지.
프랑은 열쇠를 손수건으로 감싸면서 물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한 번 죽으면 돼?”
“프랑, 끔찍한 소리 할래? 그러다가 남편 가슴 미어터진다?”
“괜찮아. 노르가 저세상에 갔을 때도 내 가슴은 멀쩡했는걸? 그러니까 노르도 분명 괜찮을 거야.”
“갸아아악! 구와아악!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지는레후!”
악의 없는 말투가 더 폭력적이었다. 화를 내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주인마님의 언변에 죄 많은 남편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꽁트 찍는 바보들은 냅두고, 싸우게 된다면 더 추가할 만한 전력은 없어?”
“다른 마스터 클래스에게 협력을 받는다…… 는 건 역시 어렵겠죠?”
“협력받기는 힘들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전부 터놓고 밝히는 미래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화하지 않다. 하물며 서로 간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양측 차원의 첫 조우가 전쟁이어서는……”
“미래에 재림한 옛 지배자들의 공략법은 수첩에 적혀 있어요. 숫자만 비등하다면 승산은 높죠. 전 저희끼리 해결하는 게 최선이라고 봐요.”
논의는 길어지고, 결론은 사티스를 시작으로 한 신들에게 상의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해졌다.
단, 이 자리에서 끝마쳐둬야 할 일도 있다.
베로니카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광채에 눈짓을 했다.
“토르 님의 신좌는 어쩔 생각이더냐?”
“다른 적합자를 찾는 건 낭비 아닐까요? 저희가 선배네 고향에서 ‘심해의 군주’랑 싸울 때 사람들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우리 가족 중에서 찾자고? 좀 무리가 있는데.”
다나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적성을 따지기 전에 특징만 나열해 볼까. 토르라고 하면 보통 다혈질에 단순무식한 싸움의 달인이지?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나?”
“내가 아는 토르, 남자다운 신.”
“남자답다고 해도 특성은 여럿 아니더냐. 힘이 무척 강하고, 그분을 숭배하던 전사들이 야만성을 추구할 정도로 용맹하고, 벼락불을 다루고……”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때로는 다른 신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사려와 지혜를 보여준다는 신화도 있죠?”
“……그렇지? 별의 자손이던 셀루스티아 남작의 기억에서는 로키로 변신했던 ‘황색 왕’을 어렴풋이 깨달은 슬레이프니르에게 상담도 해 줬댔고.”
“그리고…… 그 ‘황색 왕’에게 아내를 모욕받자 불같이 화를 낼 만큼 애처가이기도 했고요?”
그녀들을 입을 모아 입을 다물고 토르의 특징과 가장 비슷한 인물을 보았다.
혼자 뭔가를 생각하던 노르드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궁니르처럼 토르의 신좌에서 묠니르만 쏙 빼다 프랑한테 주는 건 어때?”
“……………….”
“부서지기는 했지만 며칠 지나면 회복할 테고, 프랑도 쬐까만 궁니르보다는 부피가 큰 묠니르가 골렘의 팔로 들고 쓰기 좋지 않을까? 원래 프랑은 망치가 주무기였잖아.”
무기만 빼서 브류나크처럼 실체화시키면 신좌의 적성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시구르드도 그런 편법을 써서 묠니르를 썼었고,노르드는 【미래 퇴적】을 펼치는 중에 그 마법을 분석했다.
물체를 분리하는 풍요신의 장갑을 쓰면 완전히 신좌에서 분리하는 것도 재현 가능할 듯 했다.
그렇게 희희낙락 웃던 노르드가 문득 눈을 깜빡였다.
“……근데 다들 표정이 왜 그럼?”
“아주 천생연분 납셨다 싶어서 그런다, 새끼야.”
“뎃?”
“……무기도 돌려쓰고, 신좌도 나눠 쓰고.”
“후후…… 알고 있었어요…… 네, 알고 있었고 말고요……”
“아니 그, 나야 딱히 상관은 없다만…… 불평을 말할 처지도 아니고……”
“어쩐지 패배감이 맥시멈이에요! 저도 로키 님 후계자인데 두 분 사이에 살짜쿵 끼어도 되나요?! 오딘 토르 로키 트리오는 라그나로크 시즌 2까지 불가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닷!”
그날의 회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얼마 후에 있을 장절한 싸움을 앞둔, 신에게도 필적할 이들이라기엔 무척이나 소박한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