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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촉루’는 그를 막아서는 적에게 손바닥을 뻗었다.
─콰드득!!
얼어붙은 차원에서 그의 권능이 펼쳐졌다. 벌써 30번째의 공격에 티르시는 몸을 날렸다. 마법으로 빨라진 그녀의 다리는 바람을 타는 듯 했다.
실핏줄이 가득한 ‘창백한 촉루’의 해골 머리에서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 섬뜩한 안광은 분노했음을 의미했다.
“천것이 누구를 상대로 바람을 부리는가.”
그는 성간우주의 제왕이면서 ‘심해의 군주’만큼 강대한 옛 지배자, ‘황색 왕’의 심복이었다.
옛 지배자라고 해도 힘의 차이는 있다. 그리고 힘의 차이는 상하관계를 낳는다. ‘창백한 촉루’가 ‘황색 왕’의 심복인 건 그래서이기도 했다.
‘창백한 촉루’는 눈에 거슬리는 마법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그의 권능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공간의 열 에너지를 빨아들여서 극한의 추위를 일으키거나, 적수의 생명력과 영혼까지 강탈하는 힘이다. 공간을 뛰어넘은 권능이 티르시를 덮쳤다.
─파삭!
마나를 빼앗긴 바람 마법이 소멸하며 티르시의 몸이 느려졌지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2번째 마법을 발동하면서 몸을 날렸다. 놀랄 정도로 빠른 주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그녀의 저항은 ‘창백한 촉루’의 심기를 거슬렀다.
“하찮다. 미온하다. 실로 굼뜬 바람이로다.”
그와 싸우면서 마법을 다룬다는 것부터가 ‘창백한 촉루’에게는 형언하기 힘들 만큼 불쾌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가 바라보기만 해도 얼어 죽으며 칠공분혈하고 만다.
그래야 하는데, 7분이 넘도록 티르시를 죽이지 못하고 있다. 그가 권능을 한껏 발휘해도 그랬다.
인간치고는 격이 높은 듯했기에 빠르게 승부를 내기 힘든 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벌써 코즈믹 에너지를 싸그리 빼앗기고 말았는데, 티르시는 아직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물며 기절하기 직전까지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전혀 생명력을 빼앗기지 않는다? ‘창백한 촉루’는 뛰어난 감지력을 발휘해서 격리 차원을 망라했다.
“모습을 감춘 3대 유희신의 수작인가.”
7분 전, 싸움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창백한 촉루’는 차원을 격리하려는 인간 출신의 유희신에게도 권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인간의 몸을 지키고 있는 차원벽을 뚫을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에 티르시의 공격을 받고 2대 1의 양상으로 이 격리 차원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3대 유희신은 차원의 틈새에 숨어 있군.”
그에게서 몸을 피하고 동료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창백한 촉루’의 판단은 그랬다. 대꾸하지 않은 티르시가 우신의 눈동자로 만든 완드를 겨누면서 질문을 돌려줬다.
“3대? 라리루라가 왜 세 번째죠?”
“첫 번째 유희신은 우리 왕에게 이름과 존재를 빼앗겼다. 고로 그분께서 버린 이름을 습유(拾遺)한 천것은 세 번째이며, 나 또한 경의를 갖출 필요가 없을지어다.”
“아하. ‘황색 왕’의 끄나풀이셨군요.”
티르시는 의외로 옛 지배자와 대화가 성립하자 조금 놀랐다.
‘황색 왕’의 얘기만 들어봐도 놀랄 일은 아니긴 했지만, 일부러라도 이런 시시한 일에 의식을 할애해야 마나 탈진에 의한 기절을 면할 수 있었다.
‘몸에 마나 한 톨 안 남았어요. 안 좋은 역할에 걸려버렸네요.’
계획대로 풀리고 있기는 했는데, 그녀의 역할이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탁! 완드를 양손으로 잡는 티르시.
‘창백한 촉루’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자동추적 효과를 가진 완드가 부서졌다간 광범위 대마법이 아니면 적을 맞추지도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이야말로 언니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겠죠.’
라리루라가 아주 좁게 분단시킨 차원은 ‘창백한 촉루’에게 최고 속도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주군인 ‘황색 왕’의 가호를 받은 적수의 강점!
그걸 처음부터 봉쇄하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노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스 레이드 공략본을 숙지하고 왔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그래도 에너지의 종류를 불문하고 무조건 흡수한다니. 미래의 베로니카가 알려준 지식으로 저랑 상성이 좋다는 걸 알고 시작하길 망정이지……’
정보를 알지 못했다면 노르드도 고전을 면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다행히 베로니카가 남겨준 미래의 지식은 거의 완전하다.
티르시는 모르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베로니카 본인이 상대하게 될 ‘무쌍의 만겁’을 빼면 옛 지배자들의 정보에 불확실하거나 모자란 내용은 없을 정도였다.
그 ‘무쌍의 만겁’의 능력조차 베로니카가 미래의 자신을 일시적으로 과거에 불러내는 필승 전략을 성립시키고자 일부러 수첩에 남기지 않았던 내용!
덕분에 티르시는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싸울 수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목만 붙어 있는 선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흘러가면 티르시와 라리루라의 승산은 적다.
‘창백한 촉루’는 파란 실핏줄이 도드라진 해골을 딱딱 울렸다.
“너희의 싸움, 하등의 의미도 없을진저. 예언과 유리를 살려도 죽지 않는 게 고작이니, 실로 격이 모자란 힘이로다.”
“비웃으실 거라면 제게 상처라도 입혀보신 뒤에 하시죠.”
마나가 바닥나고 다리가 떨려도 티르시는 계속 싸울 수 있다.
격리된 차원에는 굳이 배출하지 않은 바닷물이 가득했었고, 이곳에 이동된 티르시는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 바닷물을 전부 얼려버렸다.
티르시의 〈탄빙옥궤〉는 얼음을 마나처럼 쓰는 권능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권능만 남아 있으면 티르시가 마법을 못 쓰게 될 일은 없다.
저 ‘창백한 촉루’도 권능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권능으로 얼음을 없애는 것도 ‘창백한 촉루’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냉기라는 건 열 에너지가 사라진 마이너스 상태.
얼음은 열 에너지를 잃은 액체이므로,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해서 따로 사라지거나 붕괴하지 않는 것이었다.
‘창백한 촉루’가 에너지를 빼앗아도 얼음은 사라지지 않고 더 차가워지기만 할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흘러들어온 바닷물은 현실의 물질. 창세의 권능 등으로 지워질 걱정도 없다.
혹시나 불꽃 마법 같은 것으로 녹이려고 해봤자 마법을 받아치지 못할 티르시가 아니다. 그녀와 ‘창백한 촉루’의 권능은 꼬리를 물고 무는 무상성인 셈이었다.
“백중세라고 생각하고 있군.”
‘창백한 촉루’가 조소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인간들의 얄팍한 지혜란 이렇게나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을.
─휙!! ‘창백한 촉루’는 최대 속도로 차원벽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손톱이 공간을 휘젓자 라리루라가 격리한 차원이 깊게 베였다.
“도망치게 둘 것 같나요?”
티르시는 주문도 없이 공간을 잘게 써는 마법을 4번 연속으로 발동했다.
얼음을 마나로 쓰는 권능이다. ‘창백한 촉루’가 흡수하려고 해도 얼음에는 에너지랄 게 없으므로 마법을 소멸시키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창백한 촉루’는 인간의 웃음을 오싹하게 흉내 내며 몸을 피했다. 티르시의 마법을 느리다고 깔볼 만한 스피드였다.
티르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로니카가 알려준 지식에 있는 현상이었다. ‘황색 왕’에게 받았다는 가호였다.
원래부터 ‘황색 왕’은 권속이자 봉사종족에 불과한 존재들에게조차 빛보다 빠른 비행속도를 주던 외신급의 옛 지배자!
차원을 다루는 라리루라의 견제 때문에 가호의 성능을 10%도 끌어낼 수 없었지만, 원래부터 바람보다 빠르던 ‘창백한 촉루’는 발동 전에 비해 3배 이상 빨라졌다.
“애당초 이 격리 차원은 나를 가두기엔 역부족!”
콰과과광!! 촤좌좌좌좌좌좍─!!
시간을 가속하는 가호를 발동한 ‘창백한 촉루’는 엄청난 속도로 금이 가기 시작한 차원벽을 부쉈다.
“차원의 격벽을 부수면 다른 옛 지배자들 역시 같은 공간에 섞여든다! 덜떨어진 계획이 붕괴하면 난전 중에 우리를 당해낼 수 있겠느냐!”
함정이라는 걸 알고도 거기에 어울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10분 정도의 싸움으로 티르시의 노림수를 알아챈 ‘창백한 촉루’는 그녀의 계획을 부수기로 했다.
목적이 뭐든 그가 얌전히 갇혀 있길 바라는 듯 했기에 그 소원을 묵살해줄 생각이었다.
빛보다 빠르게 날아서 모든 에너지를 순식간에 앗아가는 죽음의 눈보라! ‘창백한 촉루’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티르시를 가지고 놀듯이 차원벽을 파괴했다.
─콰직!
그의 손톱이 차원벽을 찢어발기자 옛 지배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상대를 알아본 ‘창백한 촉루’가 웃었다. ‘추악한 모독자’였다. 그가 상대하기에는 귀찮던 인간 마법사를 죽이거나, 혹은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자다.
‘추악한 모독자’에게도 예언자가 상성이 유리한 신이나 인간을 붙여뒀겠지만, 상대를 교체하면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운명을 비틀 방법은 가지고 있으니까.
아아아아아아아─!!
그가 허리춤에 매단 인간들의 머리통이 죽지도 못하고 귀곡성을 내질렀다.
“이리로 오라. 나와 함께하라.”
─파칵!!
동포에게 말을 건 ‘창백한 촉루’가 격리 차원을 파괴했다.
그리고 ‘추악한 모독자’의 실루엣이 또렷해졌을 때.
“하압!!”
촤아아악─!!!
날개 달린 신과 반인반신의 전사가 그의 동포의 혼을 창칼로 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