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95화 (994/1,009)

【■■■■■■■■■■!!!!】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모든 생명을 모독하던 옛 지배자가 심해의 처소에 내장을 흩뿌렸다.

칼날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추악한 모독자’. 소멸엔 이르지 않았지만 저만한 상처를 입으면 부활에도 최소 수천 년은 걸릴 것이다.

“………………?!”

차원벽을 부숴가면서 발견한 동포가 패배했다. 예상 밖의 사태에 ‘창백한 촉루’가 눈을 부릅떴다.

“쳇! 한 마리 잡자마자 곧바로 다음 놈이야?!”

“아뇨, 아버지. 울프헤딘의 아내들이 보입니다.”

크게 놀란 ‘창백한 촉루’. 그를 발견한 앙구스와 디어뮈드. 혀를 차는 앙구스를 대신해 디어뮈드가 찢어진 차원을 살피다가 티르시와 눈이 마주쳤다.

“저들도 전투 중입니다. 소모가 큰 모양입니다.”

“뭐? 진짜야? 쉴 때가 아니네! 가자!”

날개 달린 신과 반신 부자(父子)는 각자의 검과 창을 한 자루씩 들고 ‘창백한 촉루’에게 돌격했다. 연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모습이었다.

【Kuaaaaaaak!!!】

고함을 토해내면서 ‘창백한 촉루’는 순식간에 두 신을 후려쳤다. 조바심으로 펼친 공격이었지만 그 속도는 변함없이 빠르고, 권능까지 담겨 있었다.

─콰아아앙!!!

“크윽?!”

신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공격이다. 앙구스는 간신히 검으로 막고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팍이 손톱에 깊숙이 베이자 생명력이 눈에 보이게 흡수되었다.

‘창백한 촉루’는 낮게 뇌까렸다.

“나약하구나, 죽다 만 패배자여.”

그의 일격으로 저렇게 다친다면 그렇게 강력한 신은 아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사악하지만 어리석지 않다. 이제 싸움이 시작되고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창백한 촉루’ 급의 옛 지배자가 벌써 토벌되고 말다니?

‘추악한 모독자’가 죽은 건 약점을 공략당해서인 게 분명했다. ‘창백한 촉루’의 혼란스러운 이성은 차게 식었다.

그가 아는 ‘추악한 모독자’의 권능은 왜곡이자, 반전이다.

젊음을 늙음으로, 성자를 악귀로, 생자를 시체로 바꾸는 역전(逆轉)의 권능! 그러므로 날개를 가진 세계수의 신은 ‘추악한 모독자’의 권능을 막는 데 특화된 존재였을 것이다.

단, 그렇게 생각해도 10분은 너무 짧다.

불가사의한 현상에는 수수께끼를 해결할 열쇠가 따른다. 그는 일격에 제압한 앙구스와 그 아들을, 죽음을 맞이한 동포의 상처를 관찰했다.

그들의 사투를 짐작하게 하는 심한 부상이었다.

아무리 신적 존재의 속도로 싸웠다 해도 고작 10분 만에 얻었다기엔 상처가 많고, 깊다.

【Kyaoooooooooo!!!】

‘창백한 촉루’는 찢어발긴 차원의 난류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손톱을 휘둘렀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춤췄다.

“꺄♡! 10분 만에 들켰네요! 저만 안전한 곳에 숨어 있자니 좌불안석이었는데 다행이에요!”

익살맞은 말투에 걸맞지 않게 냉정한 표정으로 라리루라는 공격을 피했다.

손톱을 휘두르던 ‘창백한 촉루’는 답을 내리면서 소름 끼치게 외쳤다.

“격리한 차원마다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했나!”

“정답♡!”

꼭두각시를 늘려서 포격을 가하면서 라리루라는 솔직히 대답했다.

“제가 있던 차원이랑 앙구스 님이 계신 차원은 약 20배 정도의 시차가 있었답니다! 앙구스 님이 싸우신 시간은 200분, 3시간 반이었다는 뜻이죠!”

공간과 시간은 밀접하므로, 차원의 다른 이름은 ‘시공간’이다.

라리루라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10배 감속하고 앙구스가 있는 공간을 3배 가속했다. 시간을 거의 멈추기까지 했던 별의 자손들보다는 훨씬 간단한 시간조작이었다.

“당신이 저희에게 한눈파는 동안, ‘적을 빠르게 해치울 수 있는 분들’에게 서둘러 달라고 부탁해 봤답니다!”

티르시와 ‘창백한 촉루’의 권능은 백중지세였다.

오래 싸워봤자 싸움이 질질 끌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앙구스와 디어뮈드는 아니다. 그들은 ‘추악한 모독자’의 생명력 역전이나 부패의 권능을 젊음을 유지하는 권능으로 반격할 수 있었다.

라리루라가 그들이 벌인 5시간의 사투를 가속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가세하겠습니다.”

승산이 높은 일행의 싸움이 일찍 끝나면, 이긴 동료들이 불리한 동료를 도와주러 올 수 있으니까.

앙구스를 후방에 눕힌 디어뮈드가 창을 던졌다. ‘창백한 촉루’는 창에 담긴 힘을 느끼고 공격 중에 피치 못하게 몸을 비틀었다.

촤아아아악─!!!! 빗나간 ‘창백한 촉루’의 공격이 차원벽을 찢었다.

손톱자국 안쪽에서 푸른 상아색과 물색 극광이 비쳤다.

안개에 뒤덮인 금속 에너지 원뿔! ‘창백한 촉루’와 함께 부활한 옛 지배자, ‘크리스탈의 신’이었다.

【■■■■■■■■■■■──!!!!】

‘창백한 촉루’가 발견했을 때 이미 궁지에 몰려 있던 ‘크리스탈의 신’은 사념파를 뿜어냈다. 그가 별처럼 빛나며 코즈믹 에너지를 방출하려는 순간이었다.

“눈부셔. 그리고 정신 사나워.”

─빠캉!!!!

대지가 흔들리는 듯한 파공성. ‘창백한 촉루’는 눈을 의심했다.

무정한 선고를 내린 네페르티티의 채찍이 뻗자 둥근 행성을 닮은 ‘크리스탈의 신’은 바닥에 던진 수박처럼 박살났다.

후광처럼 물색 꽃을 피운 네페르티티가 ‘크리스탈의 신’을 사살한 것이었다.

‘창백한 촉루’도 에너지를 흡수하지 않으면 파괴 불가능한 수십 겹의 방어막! 그 방패로 지켜지는 옛 지배자의 금속 육체가 마치 종잇장처럼 부서지다니?

단지 네페르티티는 체력이 빠져나간 양을 보며 납득할 뿐, 따로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방어막은 사용자의 의지로 해제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해제될 가능성이 0%만 아니면, 사막에 피는 한 떨기의 꽃은 그 가능성이 만개할 확률을 100%로 만든다.

네페르티티의 권능은 그녀와 무예를 겨룰 힘이 없는 적에게는 죽음의 선고였다. 버텨내고 싶으면 달인의 공격을 피할 체술을 가진 달인이어야 했다.

또는 육체의 강도가 네페르티티도 흠집 하나 못 낼 만큼 단단해도 버틸 수 있지만── ‘크리스탈의 신’은 묠니르를 넘는 강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한 결착이 ‘창백한 촉루’가 모르는 장소에서 시시각각 벌어졌다.

【■■■■■■!!!!】

‘창백한 촉루’는 동포의 죽음을 눈치채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함쳤다.

단, 그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나 동포의 무참한 패배 때문은 아니었다.

“네가…… 유희신이 어떻게 그분의 권능을!!”

시간을 가속하는 권능은 유희신이 쓰지 못하던 것이었으니까.

예지마저 뛰어넘고, 시간을 가속해서 섬광의 그 너머로 나아가는 바람! 별의 바다에 부는 샛노란 광풍(光風)은 그의 주군의 권능이었으니까.

“우리의 주군을, ‘황색 왕’을 어떻게 했나!!”

“아핫♡ 부활 못 한 시점에서 눈치채셨어야죠. 성질 고약한 ‘심해의 군주’가 말 안 해 주셨나요?”

라리루라는 미래의 기억에서 내려받은 깨달음을 마음껏 발휘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미래의 그녀가 사용했다는 차원의 실은 다룰 수 없다. 그 기술은 라리루라가 9년에 달하는 연습과, 가족의 몰살을 보며 뼈를 깎아 도달한 경지였다.

고작 1달 정도의 연습으로는 실전에서 쓸 만큼 흉내내지 못했다.

“로키 님의 이름을 뺏은 보답이에요♡ 동업자를 상대로 곡예를 보여줬으면 베낄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뒀어야죠.”

그녀에게는 훨씬 하찮은, ‘황색 왕’의 권능과는 다르게 말이다.

‘황색 왕’이 로키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면, 그 반대라고 왜 불가능할까.

“【성간우주의 바람】.”

라리루라는 주변 시간을 가속하며 ‘황색 왕’처럼 자신의 체감시간을 늘렸다. 그리고 혀를 빼물었다.

“기분 나쁜 이름이네요. 어쩌다 우주의 바람을 맞아본 적이 있는데, 엄청 춥기만 하던데요?”

【■■■■■■ ■■■■──!!!!】

‘창백한 촉루’는 라리루라에게 최고 속도로 몸을 내던졌다.

저 인간이 유희신의 권능으로 그의 주군의 힘을 흉내낸 게 사실이라면 그에게 승산이 없었다. 라리루라는 정지화면처럼 느린 돌진에 대고 침착하게 손을 꼬았다.

실뜨기처럼 손가락을 꼬고, 그녀에겐 거의 10분 정도로 느껴지는 시간 동안 느긋하게 집중했다.

─사라락.

완성된 차원의 실을 그물처럼 회오리쳤다.

실전에서 실을 짜낼 시간이 부족하다면 시간을 늘리면 해결이지 않은가. ‘창백한 촉루’는 공격을 멈추고 자신을 대상으로 권능을 발휘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힘으로 전환한다.

서걱─!!!

세운 손톱에 막대한 힘이 깃들자, 그의 손톱은 차원의 실을 전부 베어냈다. 대신 10개의 손톱이 전부 뜯어졌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명치가 텅 비었군요.”

그렇게 양팔을 휘두른 그의 정면으로 티르시가 뛰어들었다.

─쩌억!!!!

공간을 지우는 안개가 ‘창백한 촉루’의 가슴팍을 소멸시켰다.

“【수감자여(Bandingi)】.”

옛 지배자에게 치명상을 입힌 티르시는 곧바로 육신에 감춰져 있던 영혼을 포착했다. 베로니카가 제작한 봉인 마법이 그의 혼을 얼음 궤에 가뒀다.

─파앗!!!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혼을 잃은 옛 지배자의 육신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씻은 듯 사라졌다.

승리의 여운을 느낄 틈도 없었다. 마나 탈진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티르시는 녹초가 된 몸에 활기를 불어넣듯이 수제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으헤…… 아가씨, 생긴 거랑 달리 터프하네……”

모든 힘을 잃고 봉인된 얼음 심장을 보며 웃는 앙구스. 티르시는 어깨를 움츠리고 대답했다.

“찬 공기는 익숙하거든요. 험하게 자라서.”

그녀들은 조금 춥다고 시들어버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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