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999화 (998/1,009)

피비린내가 입속 가득히 아릿하다.

투콰콰쾅─!!!!

하지만 나는 입 안에서 퍼져가는 피의 맛 같은 것에 사고를 할애하지 못했다. ‘심해의 군주’가 퍼붓는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섬뜩한 촉수가 귓불을 스쳤다. 마나를 뭉친 제 3, 제 4의 팔이 4개. 간단하지만 강력하다. 인간 특유의 오러를 고등하게 갈고 닦은 것에 가깝다.

나는 귓불이 뜯겨나간 걸 느끼며 말을 토해냈다.

“죽일 생각은 없다며, 씨발련아!!”

“다치면 고쳐줄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할 만큼 다치면 내 무릎에서 쉬어도 돼, 노르!”

“비린내 나는 문어 주제에 무릎은 지랄아! 매운탕에나 넣어둬!”

틈을 봐서 브류나크를 휘둘렀다. 절기가 ‘심해의 군주’에게 닿는다. 순간적으로 마나 촉수를 방어에 돌렸지만 내 근력은 놈의 방어를 가볍게 파괴했다.

힘은 내가 우위였다. ‘심해의 군주’는 머리통이 부숴지며 눈알 한짝이 안와 밖으로 빠져나왔다.

콰앙─!!!!

창으로 후려치자 우주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부숴진 피와 살이 소우주에 별과 은하를 토했다. 마치 부숴진 머리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듯 했다.

창을 잡은 ‘심해의 군주’는 헤벌쭉 웃었다.

“아하, 에헤, 노르…… 아파아……♡”

─슈르르륵!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나아버리는 상처. 나는 핏물을 삼켰다.

공격하던 창을 놓고 되돌린 왼팔에 여자 허리에 버금갈 정도로 굵은 촉수가 꽂혀 있었다.

개수는 3개였다. 방어보다 공격을 중시한 동귀어진의 한 수다.

“읍…!”

막았는데도 타격이 내장까지 스며든 느낌이다. 나는 브류나크를 털 듯이 절기를 펼쳤다. ‘심해의 군주’는 스프링에 튕긴 것처럼 거리를 벌렸다.

스르르르….

마치 우주의 허무가 스며드는 것처럼 내 부상이 저절로 나았다.

‘심해의 군주’는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걸까. 믿기 힘들었지만 정말로 상처가 사라졌다.

‘……힘의 총합은 비등비등하다.’

어느 한쪽이 압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각이다.

그러니 ‘심해의 군주’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덤비면 나라도 부상을 전혀 입지 않을 순 없었다. 아무리 내가 강해도 ‘심해의 군주’는 흔한 졸병이 아니잖은가.

“노르! 죽으면 안 돼! 약속이야!”

─콰득!

우주로 뛰어서 물러난 ‘심해의 군주’는 내게서 1초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자기 육편에서 태어난 별들을 공처럼 잡아다가 빛보다 빠르게 던졌다.

“……씨발!”

도무지 현실적이지 못한, 차원이 다른 공격!

‘창세의 권능!’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본 나는 ᚦ(Thurs)의 룬과 토르의 신좌가 가진 창세의 권능을 끌어냈다. 두 힘은 상성이 좋은 건지 룬의 효능이 폭증했다.

목성보다 커다란 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존나 신발에 밟히는 개미가 된 기분이다. 의식도 못한 채로 기합을 내지르며 정권을 내질렀다.

─타아아앙!!!

9개의 별을 맨주먹으로 전부 쳐부쉈다.

창세의 권능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저항하는 방법을 모르면 마스터 클래스라도 벌레처럼 눌려 죽겠지만, 이렇게 방법만 알면 파훼하기는 쉽다.

그래서 내 오한과 불길함은 더 커져만 갔다.

‘왜 마법을 쓰지 않지?’

권능이랄 게 보이지 않는 건 이해한다.

‘심해의 군주’는 예언자. 예지의 권능은 나처럼 봉인된 상태일 것이다.

운명의 흐름이 원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할 만큼 이 공간에 저년의 의지력이 충만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년의 미래예지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마법은 쓸 수 있을 텐데.’

오딘을 죽이고, 라그라로크를 일으킨 년이다.

인류를 지키던 신들을 몰살하고자 오딘 흉내를 냈던 괴물이 마법을 써대면 파훼하긴 더 어렵다.

‘……아니, 그렇지 않아.’

파훼하기 어렵다고? 아니다. 그 반대다.

내게는 오히려 마법이 더 대처하기 쉽다. 내가 가진 권능은 마법과 권능의 분석도 겸하니까.

다시 말해서, 이게 나한테 가장 유효한 전략이다.

진정한 신들은 창세의 권능을 가졌고, 그걸 더 발전시키고 한 점에 특화한 게 각자의 권능이다.

창세의 권능끼리는 상쇄가 가능하지만, 특화한 오리지널의 권능은 창세의 권능으로도 무효화 할 수 없다.

맨손으로는 칼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혹시 그게 가능한 새끼가 있으면 맨손보다는 칼을 드는 게 더 쎄고.

그러니까 모든 신들은 각자의 권능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 권능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신들은 이렇게 싸웠다.

별을 터트리고, 은하를 소멸시키며 타고난 신격 자체를 부딪쳤다.

이게 바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조차 가능한 태초신들의 싸움!

“아하하! 아하하하! 멋져, 노르!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는 나를 죽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더욱이 창세의 권능으로 별을 던져대는 ‘심해의 군주’.

그 공격에는 잔재주, 잔머리가 없다.

순수한 감정을 부딪치듯, 자신의 전부를 나한테 쏟아붓고 있다.

“망할! 왜 갑자기 장르가 드래곤볼로 넘어가!”

농담처럼 뱉었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별을 쳐부수면서 어설프게 움직이기보다 생각에 골몰했다.

‘에퀴녹스 때랑은 규모부터 달라! 토르의 신좌, 창세의 권능, 【힘의 허리띠】, 룬 마법! 어느 것 하나라도 모자랐으면 벌써 뒤지고도 남았어!’

창세의 권능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현실 조작!

보다 고등하고, 현실에 뿌리 박은 내 권능들은 저딴 개수작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각몽을 현실에 재현해도 면상에 찬물을 끼얹어서 정신 차리게 해 주면 되니까.

단지,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고등수학 풀이 승부가 갑자기 10의 제곱 단위 사칙연산 승부로 바뀌면 이럴까. 처음 겪는 신화 단위의 원초적인 권능 승부에 나는 이제까지처럼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렇게 창세의 권능을 전투에 활용한 경험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인간으로 타천한 ‘심해의 군주’는 의지력 하나로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 그 힘의 배경도 역시 창세의 권능이다.

‘심해의 군주’가 만든 이 소우주에서, 저년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모든 물질과 법칙의 존망을 총괄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이다.

─콰아앙!!!!

생각이 너무 길어졌던 게 실수였다. 몇십 번째 별을 쳐부순 나는 그 직후에 쳐들어온 별보다 큰 고래를 반으로 쪼갰을 때, 그 내장에서 뛰쳐나온 ‘심해의 군주’에게 걷어차였다.

딛고 있던 행성의 지각을 뚫고, 외핵과 내핵에 처박혔다가 멈추지 않고 행성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와서는 몇 광년을 우주 공간을 더 날아갔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아픔은 그저 동급의 적에게 맞은 정도였지만, 규모가 이렇게나 차이가 나서는 정신이 비현실적인 싸움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크윽!”

그렇게 날아간 끝에 별 하나를 추가로 파괴하며 간신히 부서진 별의 중력권 안에서 멈췄다.

꾸그그그그그그극…!! 파괴된 행성의 중력장이 내 몸을 짓눌렀다.

혹시 현실이었다면 신이라도 핏물이 돼서 죽을 중력이었지만, 이건 전부 창세의 권능으로 창조한 꿈결 같은 피조물이다. 신격과 저항수단을 갖추고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

─벌떡!

내 육신은 권능과 룬의 상호작용으로 중력장을 무시하고 일어났다.

우주 건너에서 촉수를 꿈틀대며 나신의 소녀가 날아왔다. 넘실거리는 마나는 내게 실질적인 유효타를 먹이기 위한 공격 수단이었다.

“노르, 아픈 데는 없어? 화가 나면 나를 욕해도 괜찮아.”

“해 봤자 좋아하기만 할 거 안다.”

“에헤헤. 나도 노르도 좋다면 그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대로 해.”

‘심해의 군주’는 배시시 웃었다.

지금 상황과 쥐뿔도 어울리지 않지만, 저 인간 같은 얼굴과 인간 같은 감정에는 딱 맞아떨어져서 소름이 돋았다.

몸 상태를 점검했다. 순간적인 통증은 있었지만 상처는 나은 상태였다.

그 점이 못내 불안했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미 자기가 내뱉은 말만으로도 모순이야.’

그녀의 말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가치는 없지만, 그래도 이미 이상한 부분 투성이가 아닌가.

나한테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몇천 년이라도 죽임당하는 걸 즐긴다?

진짜 그런 걸 바라고 있다면 나한테 반격을 할 이유가 없다.

맹추격을 가하는 건 나한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일 것이다.

‘운명이 비틀렸으니 예지도 불가능해. 이제부터 날 반쯤 죽여놓은 상태로 영원히 데리고 있으려고 해도 그녀로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일 텐데.’

내가 순순히 당해주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그런 목표를 세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2명이서 계속 죽고 죽이겠다는 목표부터가 안일하기 짝이 없지 않나.

‘몇천 년은 지랄이고, 며칠 이상 싸우는 것부터 불가능해. 그때쯤이면 다른 옛 지배자들을 족치고 우리 가족들이 이 차원에 간섭하러 올 테니까.’

심해의 군주가 만든 세계도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 곳은 아니다.

우리 일행과 옛 지배자들.

어느 쪽이 이기건, 나와 그녀의 싸움은 길어야 며칠이다. 짧게 보면 몇 시간도 못 갈 것이었다.

저만큼 미친년이, 평생을 기다리던 만남을 그런 찰나의 싸움을 만족한다고?

자기가 뱉은 말마따나, 이렇게 죽음과 고통만을 주고받는 야만한 애정 교류로는 수천 년쯤 즐겨야 간신히 애피타이저로 느낄 년인데?

그렇게 고민하다가, 깨달음처럼 눈치챘다.

“……아, 이런 씨발.”

나는 내 머리가 전투 중인 만큼 평소보다 훨씬 팽팽 돌던 걸 무심코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년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꺼낸 건지 깨닫고 말았으니까.

“노르, 표정 무섭다. 그치만 그런 표정도 좋아…♡”

오싹오싹한 것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스스로 쓰다듬는 ‘심해의 군주’.

“나한테 화났구나? 최고야. 일부러라도 나한테 귀찮은 쓰레기 치우듯 건성으로 대하고 있었지만, 역시 노르는 화를 내는 모습이 제일 멋진걸.”

“굳이 내가 촌스럽게 질문해야 대답할 거냐? 날 잘 안다면서?”

“아냐! 대답할게!”

내게 증오나 미움을 받는 것보다, 나에 대해서 모른다는 소리가 더 싫은 것처럼 ‘심해의 군주’는 즉답했다.

“눈치챘지? 응, 맞아. 내가 격리한 이 소우주는 바깥 세상이랑은 시간의 흐름이 살짝 달라.”

‘심해의 군주’는 수줍게 뺨을 긁으며 말했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실수를 농담 섞어 장난처럼 넘기려는 것처럼.

“그치만 예지로 봤는걸? 노르가 일부러 옛 지배자들을 격리하고,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해서 토벌 타이밍을 조절하는걸.”

“날 따라 했다는 소리는 할 생각일랑 마라. 이 수작질은 미래의 너한테서 파쿠리한 거니까.”

미래에서 봤던 혼돈의 이계 얘기였다.

우리 가족을 격리하고, ‘심해의 군주’가 맘대로 인류 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유도하는 걸 막지 못하게 했던 인공적인 이계.

나는 거기서 배운 걸 이용해서, 그 망할 수작을 부렸던 년에게 한 방 갚아준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어떤 운명일까.

‘심해의 군주’는 내가 흉내를 낸 미래의 자신의 아이디어를 예지하고, 다시금 따라 한 모양이었다.

“에헤헤, 정말?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그래설까?”

“개소리 집어치워.”

“그럴게. 아! 노르, 지금 바깥이랑 어느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는지 묻고 싶은 거구나? 맞지?”

‘심해의 군주’는 퀴즈를 맞히는 것처럼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듯 하던 그녀가 말했다.

“숫자로 표현하면── 10만 배 정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숨이 멎는 감각을 느꼈다.

“……몇 배라고?”

실력 있는 전사라면 적 앞에서 잠시라도 의식이 공백 상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겠지만, 나는 뒤통수가 아릿해지는 감각을 5초 안에 수습한 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었다.

“10만 배야. 바깥에서의 1초가 우리 둘에게는 700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면 돼. 에헤헤. 2년이 조금 안 되는 정도네! 가능한 길게 늘려 봤는데, 맘에 들어?”

10만 배.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시차였다. 나는 의식의 끈을 다잡았다.

시간의 흐름에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주무르는 법을 깨우쳤던 라리루라에게도 이 점을 가장 경계하라고 전했다. 시공간에 어떤 위화감이라도 발견하면 고쳐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라리루라가 최대한 빠르게 싸움을 마치고 여기 온다고 가정해도, 그때까지 몇 분이나 걸릴까.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분에서 20분.

10만 배의 시차로 16666시간. 최소 694일에서 최대 1400일.

거의 4년.

아내들과 알고 지냈던 시간보다 긴 시간을, 저 미친년과 싸워야만 광명이 보인다는 뜻이었다.

“……돌겠네.”

뭣보다 라리루라나 로키가 온다고 해도 이 격리 소우주를 파훼하고,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 줄 수 있을까?

궁니르조차 의지의 힘으로 무효화시킨 ‘심해의 군주’다.

인간의 의지를 등에 업은 창세의 권능.

유희신의 권능이라도 간단히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나는 가능성 있는 후보를 물색했다.

자력으로 빠져나가면 그게 제일이겠지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 내내 여기 처박혀 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은 좀 한심하더라도 아내들에게 의지하는 게 옳았다.

신들은 내가 그들의 모든 능력을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므로 논외로 치자.

그렇다면 나를 이곳에서 건져줄 가망이 있는 건 누굴까.

다나는 힘들 것이다. 라리루라는 상술한 이유로 어렵다. 라리루라가 힘들다면 베로니카와 티르시 역시 불가능할 것이었고, 네페르티티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5명 모두 안 되면 더는 가망이 없어. 역시 나 스스로 빠져나가는 수…… 밖에……?’

그때였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구역질이 치솟는 느낌. 내 몸을 흘러 다녀야 할 피가 혈관에서 멈춘 듯하다.

“……………….”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나, 라리루라, 베로니카, 티르시, 네페르티티.

“……5명?”

내 아내가── 5명이었던가?

아니, 맞다. 5명이다. 기억을 아무리 돌이켜봐도 5명이다.

다같이 밥을 먹을 때도, 여행을 다닐 때도, 시답잖은 얘기로 웃고 떠들 때도, 몸을 섞을 때까지도 분명 5명이었다.

“……………….”

그런데, 어째서일까.

절대 잊어선 안 될 무언가를 잊은 것만 같았다. 기억의 필름이 군데군데 까맣게 칠해진 것처럼.

그녀들과 보낸 추억이 군데군데 좀먹어 있다.

완벽하게 채워진 기억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후우, 실수해버렸네.”

‘심해의 군주’가 한숨을 쉬었다.

“이럴 것 같아서 계속 공격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려는 거였는데…… 노르가 말을 걸어주는 게 기뻐서, 나도 모르게 계속 얘기에 정신이 팔려버렸어.”

“……너.”

“그만. 더는 묻는 말에 대답 안 해 줄 거야.”

이유 모를 분노에 잠식된 내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심해의 군주’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노르의 입에서 다른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건 싫단 말야.”

질문을 정면에서 묵살한 ‘심해의 군주’는 촉수를 꿈틀댔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그것도 상관없다. 그녀가 잃어버려선 안 되는 걸 내게서 앗아갔다면, 그런 짓을 벌였을 만한 순간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나한테 상처를 입히고, 그 부상을 치료할 때.’

조금 전에도 ‘심해의 군주’는 내 상처에 그녀의 힘을 억지로 스며들게 해서 고쳐놓지 않았던가.

마치 그림을 긁어내고 새로 그려넣는 것처럼.

좋아하는 물건에 튄 얼룩을 지우고, 자기 색으로 물들이려는 것처럼.

…철퍽, 철퍽.

어둠과 음의 마나가 검게 변한 촉수에서 흘러넘쳤다. 넘쳐흐른 마나는 여러 색조로 물드는가 했던 소우주를 다시 허무한 죽음의 우주로 돌려놓았다.

저렇듯, 검은 먹물은 모든 색을 뒤덮는다.

가장 어둡고, 칙칙하며, 깊고 혼탁한 색이기에.

“노르. 너는 나의 노르야. 나만의 그이야. 내가 너의 유일무이한 운명의 상대야. 다른 누구 하나 끼어들지 못해. 오직 나만이 널 채워줄 수 있어.”

사랑스러운 그녀는 연정을 품고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우리 둘만 남으면, 너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심해의 군주’는 내 기억을 지운 것이었다.

무엇을 잊었는지 깨닫지도 못할 만큼, 철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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