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1004화 (1,003/1,009)

***

바람처럼 가벼운 발재간으로 두 여인은 거리를 좁혔다.

부딪히는 그녀들의 몸 상태는 동등하다.

지워지지 않는 부상을 입었지만, 무한한 체력과 마나를 남긴 ‘심해의 군주.’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도 체력이며 마나가 대폭 깎여나간 프랑.

하지만 ‘심해의 군주’에겐 이 소우주의 통제권이 남았다.

프랑에게는 내가 붙어 있다.

그래서, 승부는 이곳에 이르러 호각이었다.

콰과과과과과곽─!!!!

수십 자루의 무기가 부려졌다. 프랑이 창조하는 무기들이 ‘심해의 군주’가 힘겹게 길러낸 촉수 한 가닥에 조각났다. 힘껏 뻗은 창을 ‘심해의 군주’는 고개를 당기며 피했다.

─챙! 프랑의 무기가 또 붉은 촉수에 부러졌다.

이미 더는 증오와 분노가 아니다. ‘심해의 군주’에게서 넘실대는 감정의 파도와 촉수를 불태우는 기운은 피처럼 순수한 붉은 사랑의 발로였다.

작은 우주는 우리를 기점으로 둘로 나뉘었다.

나와 프랑이 세상을 푸르른 녹청으로 해방하고 ‘심해의 군주’가 검붉게 지배했다. 우리의 감정과 의지가 우주를 찢다가 가르며 헤집었다.

자기 손으로 묠니르를 쥔 프랑이 공간을 쪼개면 궁니르의 힘을 발휘하는 나는 강적을 몰아붙였다. 난잡하게 공격을 받아친 ‘심해의 군주’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안다. 우리를 상대로 한 발짝이라도 물러나면 그건 평범한 후퇴가 아니다.

의지와 감정을 겨루는 싸움에서 후퇴는 패배를 의미했다.

다리를 베어버려도 ‘심해의 군주’는 두 번 다시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심장이 멎을 때까지.

이 우주에 찾아올 결말이 싸움의 종말이다.

‘심해의 군주’는 어두운 광탄에 팔 힘을 실어서 투척했다. 골렘 팔을 후광처럼 뻗은 프랑이 높이 뻗은 부속 팔을 휘둘러서 광탄을 흘려넘겼다.

프랑은 〈백토인형〉으로 금속 나이프를 만들고 투척했다. 촉수를 끌어당긴 ‘심해의 군주’는 짧게 줄인 촉수를 뭉쳐서 나이프를 막아냈다.

─쾅!

프랑이 진각을 디디자 창을 든 골렘의 팔이 우후죽순으로 자라나며 오러를 뿜으며 절기를 펼쳤다. ‘심해의 군주’는 마법을 펼치며 골렘 팔의 마나를 흡수하고 소멸시켰다.

‘심해의 군주’가 손을 쳐들자 어둠과 음의 마나 덩어리가 형체를 얻은 손길이 프랑의 목을 조르려 했다. 프랑은 머리 위로 묠니르를 던져서 손길을 소멸시켰다.

프랑이 선 공간을 가라앉힌 ‘심해의 군주’가 그 즉시 촉수를 내질러서 프랑의 어깨를 뚫었다.

‘심해의 군주’에게 팔을 내준 프랑은 부러진 듯 쳐진 어깨에 꽂힌 촉수를 붙잡았다. 내가 펼쳐낸 절기가 ‘심해의 군주’의 손바닥과 가슴을 뚫었다.

작은 손이 내 내장을 휘저었다. ‘심해의 군주’가 남은 손으로 텅 빈 배에 일장을 날린 것이었다.

찰나의 대치.

세 명의 예언자는 직후에 벌어질 일을 보았다.

각자 한 차례씩 수를 겨루고, 그것으로 끝난다.

예지의 권능이 침묵해도 우리는 의지와 집념을 믿고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밀어붙였다.

‘심해의 군주’의 촉수가 뒤틀리고, 그녀는 거의 최대치 상태로 유지되던 마나를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폭발시켰다. 그녀의 혼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검붉은 피딱지 같은 마나였다.

막을 수 없는 일격이 온다.

인간의 의지로 펼치는 옛 지배자의 힘. 아무리 신에게 범접한 우리라고 해도 막아내고 멀쩡하게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옳았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나인가 프랑인가.

한쪽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그 행방을 읽을 수 없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여인이 내뿜는 마지막 한 수가 누구를 노리는가. 그런 건 우리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일격이 발해졌다.

──왼쪽.

촉수에 어깨를 뚫려서 움직임을 묶인 프랑에게 ‘심해의 군주’의 수도가 짓쳐들어갔다. 그 위력은 필설로 형언하기도 어려웠지만 프랑의 몸을 양단하기엔 차고도 남았다.

프랑은 안심했다. 몸을 지키지 않고 내 가슴에 금속 갑옷을 씌운 자신의 선택을 기뻐하며.

그녀의 몸을 가르고 위력이 죽은 공격은 나까지 죽이지는 못한다. 나는 혼과 기억이 전부 오염돼버리겠지만 기억을 잃어도 살아서 돌아갈 수는 있을 것이었다.

프랑이 죽고 ‘심해의 군주’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었다.

한 여인은 연적을 죽였고, 한 여인은 연인을 지켰다.

그러면 나는?

“네 목숨, 나한테 주겠다고 했었지.”

나는 주저 없이 프랑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러니까 나도, 내 목숨을 주마.”

콰드드드득─!!!!

갑옷, 갈비뼈, 폐, 심장, 다시 갈비뼈, 갑옷.

처형 순서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철과 뼈와 살이 꼼꼼하게 으깨졌다.

촤악─. 내 가슴을 부수고 빠져나온 손은 피와 뼈로 범벅이었다. 나는 가슴을 파괴당하고 척추만으로 간신히 상반신이 달랑달랑 붙은 꼴이 되었다.

예언자가 아니라도 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처였다.

여기가 현실과 꿈의 경계, ‘심해의 군주’가 만든 소우주라도 마찬가지다.

“──────.”

그녀들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저 공격은 몸을 방패로 내민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뛰어들어봤자 프랑과 내가 둘 다 사이좋게 죽어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런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다음 순간에 나만이 살아남을 거라고 예상했다.

단, 1명. 나만 빼고.

나를 지켜준 프랑 덕에 내 상체는 아직 하체에 붙어 있다.

깔끔하게 몸만 부숴준 ‘심해의 군주’ 덕분에 팔 부분은 멀쩡하다.

주먹을 내지를 호흡 한 번은 몸을 던지기 전에 삼켜뒀다.

모두가 마지막 이게 끝이라고 믿었을 때.

나는 그 후에 올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보지도, 고려하지도 않았던 미래를 내 손에 거머쥐었다.

마초란 부모님들께서 낳아주신 몸뚱이와 말아쥔 주먹 하나만 있으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생물이었으니까.

나는 예언자들보다 한 발을 더 미래로 내디뎠다.

…퍼석!!!

주먹은 설익은 사과를 부수듯, ‘심해의 군주’의 심장을 관통했다.

범람하는 어둠에 잠기면서, 나는 잠들듯 죽음에 빠졌다.

***

석사와 박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뜬금없게도, 떠올리거나 후회해야 할 일을 그렇게나 많이 남겨둔 주제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것이었다.

아내님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다.

학문을 갈고닦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라고 하는 마초의 기원이자 시작이 아니던가. 세계수의 한 세상에 떨어진 뒤에도, 그 전에도 말이다.

스스로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석사는 꽤 대단한 위치였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수준에서 가장 많은 학식을 쌓은 게 석사다. 석사 단 거 박사까지 달지~ 하는 쌉소리로 훈수를 두는 꼰대들도 있지만, 석사만 따 둬도 먹고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석사가 전문 연구자라기에는 살짝 끗발이 후달리는 포지션이라는 것도 맞다.

연구만 하며 먹고살다 새로운 경지의 지식들을 발굴해가는 직책을 석사 학위자가 감당 가능할까? 이 말에는 석사들도 쌍욕을 할지언정 부정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아마 나를 시작으로 한 석사들은 씩씩대며 팩트폭력에 눈물을 훔칠 게 분명하다.

솔직히 석사는 아직 학생이다. 그들이 아는 걸 모르는 학자가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연구가보단 배워가는 처지에서 점수(漸修)하는 처지인 게 현실이다.

그러면 저 잘나신 박사, 교수들은 뭘 기준으로 학자와 학생을 가를까?

음. 고민해 봤지만 역시 좆도 모르겠다.

석사따리 강북호가 뭘 알겠는가. 지구의 학력을 따져도 고졸인데.

수의대 중퇴생 고졸 VS 논문 뺏긴 석사.

가슴이 옹졸해진다. 내가 지구와 이세계를 구할 영웅이 맞나? 진짜 이래도 돼? 하긴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한다는 명곡도 있던 것 같기는 하다.

영웅의 조건이 공부라면 슬플 것이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야 하는 장면에서 나처럼 못 배운 놈이 뭘 하겠느냐며 쭈그러드는 미래라. 딱히 건전하게 굴러가는 사회 같지는 않잖은가.

아무튼 한 가지, 알게 된 것도 있다.

─더듬.

가슴을 만져보자 상처는 그대로 있었다. 열심히 기른 내 마초 찌찌가 게살 발라내듯 들어내진 공간에는 큼직한 수박도 2개쯤 들어갈 듯 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죽겠네.”

가망이 없다(End Game).

이게 오락실 게임이었다면 코인을 더 넣으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메시지가 번쩍이고 있겠지만, 이 좆망겜 인생 RPG는 누구나가 원트 챌린지를 하며 사는 게임이었다.

뽑기라는 가공할 자본주의의 화신이 등장하면서 파멸로 달려가는 21세기의 황금만능주의조차 내 삶을 연명시키긴 어려울 듯 하다는 게 본심이었다.

“한결같이 무모하네. 죽음은 무책임한 짓이건만.”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머리맡에 나타난 유령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오딘.”

“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니. 남자란 것들은 왜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삼나 몰라. 그렇게 자기만 속 편하게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의 기분은 어쩌고?”

“……로키한테 들었는데.”

나는 드러누운 채로 말했다.

“만약 오딘의 망령을 또 만나면, 널 원망하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혼자 죽어버린 걸 지옥에서도 저주하면서 그리워할 거라고 전해달랬어.”

“바보구나. 그건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하는 말이었을 거야. 로키, 그 애는 속이 뒤틀렸으니까. 제 맘에 솔직해지는 법을 모르며 살았거든.”

아하, 그랬군. 나더러 아내님들을 두고 뒤지지는 말라는 뜻이었구나.

“기대하게 했다면 미안한데.”

마녀 모자를 눌러쓴 오딘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널 살려주러 온 게 아냐. 그럴 힘도 없고.”

“그래.”

“넌 죽었어. 지금은 영혼의 소멸을 앞둔 주마등 상태지. 유언은 남겼니?”

“저택 집무실 서랍을 뒤져보면 찾을 수 있겠지. 자식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재산 분할 변호사를 고용할 여유까지는 없었거든.”

“못된 남자네. 하긴, 사돈 남 말인가.”

─다그닥. 오딘은 슬레이프니르 위에 올라탔다.

“가자. 배웅해줄게. 내 본체는 이미 지나간 길일 테니까.”

“말이 없는데.”

내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을 때였다. 삐에엑─!! 쇳소리를 내며 브류나크가 내 옆에 나타났다. 꽤 컸다. 나를 태우고 날 수 있을 만큼.

난 그 녀석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너는 남아. 프랑이라면 네가 나랑 별개의 존재가 될 수 있게, 나한테서 분리해줄 거야.”

“삐에에엑! 삐엑! 삐에에엑!”

─도리도리.

나랑 같이 가 주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녀석의 부리에 이마를 포갰다. 미스릴일 텐데 꽤 따듯했다.

“가서 엄마들한테 전해줘. 재혼하면 울 테지만, 내가 울 만큼 너희도 울었다고 느껴질 때쯤 되면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이 말 안 전해주면 너희 엄마들이 꽃다운 나이에 미혼모로 살다 갈라.”

그래도 브류나크는 나한테 안겨 붙으며 말했다.

“……싫어.”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브류나크는 항의했다.

“같이 데려가. 나도, 나도 같이……”

“어허. 무서운 언니가 이놈한다.”

저승길 노잣돈으로도 못 쓸 소량의 마나를 써서 브류나크의 눈을 덮었다.

“브류나크는 여기 살아. 아빠는 갈 거야.”

내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잠에 빠진 뒤였을 것이다.

스르르륵…. 브류나크를 재워둔 나는 오딘에게 다가갔다. 오딘은 한숨을 쉬며 입김을 불었다. 그 자리에 굼뜬 말, 하말이 한 마리 자라났다.

오딘은 슬레이프니르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라니. 슬레이프니르의 자손 종족이야. 알지?”

“타 본 적 있어. 혼자 타는 건 처음이지만.”

그때는 말을 탈 줄 몰라서 프랑이 대신 고삐를 잡아줬던가.

생각해보면 드워프인 프랑만 말을 탈 줄 알고, 남편인 내가 꼴사납게 부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세상 시발 한심한 꼬라지였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런 때에도 웃기만 하던 프랑의 마음씨가 떠올랐다.

다나가, 베로니카가, 라리루라가, 티르시가, 네페르티티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하말의 안장에 올라타는 데에 발을 6번이나 헛디뎠다. 아득바득 올라가자 오딘이 짝! 하는 소리를 내며 하말의 덩어리를 쳐 줬다.

은하수가 흐르는 검은 설원에 신마가 2필, 머릴 나란히 하고 달린다.

영멸로 향하는 저승길에는 검은 눈보라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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