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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의 시작
그러니까.
전형적인 상황이었다.
[괴롭힘 당하나본데?]
그래, 척 봐도 알겠다.
한 여학생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다른 여학생 다섯이 그 학생을 둘러싼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엎어져 있는 학생은 내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이었다.
“애니잖아.”
아까 급한 용무가 이거였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까 표정이 너무 활기찼는데.
[애니랑 엘레인이라.]
“엘레인?”
잠시 생각하던 아서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 들은 적 있어.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겠다. 문제는 네가 끼어들어도 도움이 될까 인 건데.]
“왜?”
[저기 여자애들 무리 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금발 머리 여자애 보여?]
보인다. 완전 잘 보여.
애니를 둘러싸고 있는 여학생들 모두 키가 큰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키가 컸다. 게다가 가슴 위까지 길게 자란 금발 생머리가 조명에 반사되어 윤기가 좔좔 흐르는 탓에 도드라지게 튀었다. 얼핏 보이는 그녀의 로브에 달린 브로치도 그녀의 머리처럼 금빛으로 빛났다.
[아이네스 공작가의 셋째 딸. 엘레인이야. 성격이 더럽지만, 계급도 높아. 그렇다는 건? 나 같은 놈이 막으러 나섰다간 산채로 먹힌다는 거지.]
“무슨 소리야. 계급 차이가 있지만, 쟤넨 학생이고 난 조교잖아.”
[아까 학생들이 널 어떻게 대했는지 알잖아? 이 학교에서의 내 위치는 바닥 그 자체야. 애초에 그 소문이 아니라도, 내가 중급조차 수료 못 했으면서 레온의 추천을 받아 조교가 된 걸 쟤네도 다 안다고.]
“아.... 그래?”
그 말을 들으니, 아까 말을 걸어준 애니가 성녀처럼 느껴지는데?
[게다가 이런 아가씨들이 병풍마냥 데리고 다니는 애들도 감히 올려다보기 힘들만큼 계급이 높거든.]
저것들이? 귀족의 기품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지.
거리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불량한 품새가 겉에서 팍팍 풍겼다. 아마 입고 있는 교복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엎어져 있는 애니의 헐렁한 블라우스 핏과 무릎까지 이어지는 길다란 진청색 주름스커트와는 달리.
엘레인과 병풍들은 터질 것마냥 타이트한 블라우스와 허벅지 중간에 걸치는 짧은 주름 스커를 입어 볼륨있는 몸매를 강조했다.
신발조차 일반적인 단화가 아니고 뒷굽이 많이 올라가 있는 단화라. 서 있는 자세가 섹슈열 하면, 섹슈얼했지. 학생의 풋풋함 따위 코딱지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위 핫하고 나쁜 년 느낌이 풀풀 난다.
내가 마법 학교에 무슨 환상이나 고리타분한 착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복식이었다. 역시, 아까도 느꼈지만, 생각보다 교풍이 자유로운 학교다.
감탄스럽군.
“아, 빨리 안 일어나?”
엘레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단화 앞코로 애니를 툭툭 찬다.
새삼 놀랐다. 짜증 섞여 있는데도 듣기 좋은 목소리라서. 적당히 높은 데다. 깊고 청량감 넘치는 목소리가 내 고막을 간지럽힌다.
이럴 수가 있나.
“안 일어나는 거 보니까 거기서 잠들겠다?”
“이불이라도 깔아줄까여?”
엘레인이 먼저 말을 꺼내자. 그녀를 따라 양옆에 있는 여자애들이 말을 툭툭 던졌다.
“콜록. 콜록. 자....자. 잠시만.”
울먹거리듯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 애니가 손으로 허공을 막았다.
“잠시만 뭐?”
“자.자.자.자자.자.잠.시만! 푸핫.”
“한마디 듣고 다음 말 들으려면, 아주 그냥 하루가 다 가겠어여?”
한편의 꽁트를 보는 기분이다. 유쾌하지 않고. 짜증만 나는.
“오해한 거야.”
“잠시만.”
엘레인이 손을 들자. 악담 하나씩 장전하여 발사하려던 양옆 병풍들이 멈칫한다.
“내가 다 봤는데 뭐가 오해인데? 시답잖은 헛소리로 상황만 벗어나려 하기만 해봐.”
“단순히 레온 교수님께 연습용 과제 받으려고 했을 뿐이야.”
“아이씨. 누가 과제 받은 거 모른데? 거기서 온몸을 비비 꼬며 꼬리 쳤던 거 말하는 거 아냐. 그게 단순히 과제만 받는 건가요? 그런 거에요 우리 애니 학생?”
“평민 챙녀들이 다 그렇지.”
한 병풍의 조롱에 다들 깔깔대며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엘레인도 한쪽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썩을 년들.
“아서, 이거 생각보다 분위기가 격한데? 어떻게 구해줄 방법이 없어?”
[엘레인이면 하나 있긴 한데-.]
“꺄아악-!”
순간, 애니의 비명이 아서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마치 누군가 한 발을 잡고 들어 올리는 것 마냥, 애니가 허공에 매달려 거꾸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덕에 입고 있는 로브와 스커트가 아래로 젖혀졌다. 난데없는 살색의 향연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색 줄무늬!]
이 변태새끼가.
“내려줘!”
눈을 떠보니 애니가 허공에서 팬티를 다 드러낸 채 바둥거리고 있다. 로브에 얼굴과 팔이 다 가려져 바닥에 떨어진 마법 지팡이를 집으려고 연실 허우적대었지만. 손가락 끝에 닿을 듯 말듯 안달 나게 안 닿았다.
엘레인과 병풍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그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나한테도 레온 교수한테 한 것 마냥 아양 좀 떨어봐. 그럼 생각 좀 해볼게.”
“그만하고 내려달라니까!”
순간, 그 짜증 섞인 한마디에 엘레인이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싸늘한 표정으로 바둥거리는 꼴을 바라만 보더니 이내 화풀이하듯 지팡이를 휘둘렀다.
애니가 허공에 치솟았다.
[오, 이런......]
“꺄악!”
“내려달라면, 소원대로 내려줘야겠네.”
지팡이를 튕기듯 올리자. 허공에 떠있는 애니가 보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빙빙 돌기 시작했다.
엘레인이 지팡이를 천천히 내렸다.
애니가 빠른 속도로 바닥에 쏘아져 갔다.
쾅-! 쿵- 쿵.
사람의 몸이 바닥에 부딪쳐 튕기는 소리가 그로테스크 하게 방을 울렸다.
애니가 바닥에 연달아 튕기며 저 멀리 벽까지 미끄러지며 닿았다.
바닥에 미끄러질 때 애니의 로브가 분리되어 그녀의 옆에 널브러졌다.
난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본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끄아아악!”
애니가 방을 메우는 깨질듯한 고음의 비명을 내질렀다.
안 죽었구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야야, 저거 너무 심한데? 어서 나서야 겠어.”
[잠만, 혹시 여기서 끝날지 모르니 조금만 기다려봐.]
“무지막지하게 내쳐졌는데 중상을 입은 거 아냐? 어서 가서 아까 말한 치유마법이든 뭐든 걸어야 하지 않겠어?”
[학생 로브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으니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해 줬을 거야.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만약, 여기서 엘레인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때 나서.]
“아아악-끄윽, 꺽-.”
애니가 소리 지르다 갑자기 숨을 못 쉬겠는지. 얼굴이 창백해져서 명치를 막 손으로 쳐냈다. 뭔가 잘못 되었는지 꺽- 꺽- 거리며 숨을 못 쉬겠다는 듯 괴로워하더니, 이내 바닥에 토를 게워냈다.
“쿨럭. 우웁-. 우웨에에엑-”
“아, 미친. 가지가지 한다.”
“으~ 젠장. 눈 버렸어.”
다 게워낸 애니가 신음을 내뱉으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기어갔다. 그리고 벗겨진 로브를 집으려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히익-.”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또다시 발을 바둥거리며 허공에 떠오른다. 들어 올려진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엘레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지팡이를 휘두르려 했을 때였다.
“동작 그만!”
[타이밍 좋고.]
스스로 놀랄 만큼 목청껏 외쳤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다들 몸을 들썩이고는 날 쳐다봤다.
방에 정적이 맴돈다.
[동작 그만이 뭐냐. 동작 그만이. 하여튼, 그만 가라고 말하고, 반항하면 오늘 본 거 레온교수한테 보고할 거라고 해.]
레온 교수가 갑자기 왜 나오지? 그러고 보니 얘네들 싸움의 원인이 레온 교수였던 것 같은데. 하여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세 좋게 걸어가며 외쳤다.
“너희 이 자식들!-.”
[존칭! 존칭!]
“......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
[휴...]
기세 좋게 나온 말은 아서의 필사적인 호소에 막혔다. 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워 졌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무섭게 학생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정적도 잠시.
“푸하하핫!”
“하하핫! 큭! 크큭!”
박장대소가 터졌다.
“푸하핫! 쥐굼 이궤 뭐하눈고죵~!”
“동좍~ 구만~!”
곱슬 거리는 검은 단발 여자애와 남자마냥 스포티한 붉은 단발 여자애가 내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반항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조롱해올 줄이야.
아까 넘어졌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조용히 하세요!”
“조룡. 꾸울. 하세. 꿀꿀.”
아 이년들......
명치에 꿀밤 한 대씩 상냥하게 갈겨 주고 싶구나.
“계속 하실 생각이면, 오늘 일을 레온 교수에게 말하겠어요.”
“눼? 일룸보 하겠-.”
“다들 그만.”
내 말에 엘레인이 손을 들어 병풍들을 진정시켰다. 아서의 말대로 레온 이름 꺼내는 게 효과가 있구나.
엘레인은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날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표정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조교님, 어쩌다보니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었네요.”
“이제까지 다 지켜봤는데, 뭐가 사고라는 겁니까?”
“지 눈이 삐어서 잘못 본거겠지?”
“뭐라고요?”
“응? 뭐?”
저 빨간 단발 여자애는 꼭 기억해놔야겠다. 머리는 남자애마냥 짧게 쳐서는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말없이 눈만 가늘게 뜨던 엘레인이 이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애니가 바닥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꺄악-!”
쿵-.
“나가자.”
바닥에 나뒹구는 애니를 뒤로한 채, 엘레인이 애들을 이끌고 나가려 했다.
레온 교수 라는 패가 잘 드는걸 아는 이상, 이대로 그냥 보내 줄 수 없었다.
“엘레인 학생. 그냥 나갈 수는 없죠.”
“그러면요?”
“애니 학생에게 사과하시죠.”
“푸핫? 뭘 하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미를 찌푸리며 응수하더니, 같잖은 게 나댄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애니를 놔둔 채 내 뒤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서, 됐어.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잘 한 거야. 보고하면 어느 정도 점수 받겠는데?]
“엘레인이 처벌받을까?”
[급의 차이가 있는데 그럴 리가.]
“그럴 거 같았다.”
어느덧 엘레인이 코앞까지 왔다.
그녀는 정말 컸다.
아서도 큰 키였는데, 엘레인은 올려다봐야 했다. 구두 굽을 감안 해보면, 아서와 비슷한 키가 아닐까 싶었다.
올려다본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수놓아져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곧고 뾰족한 턱선, 게다가 볼살도 적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고양이 눈이라, 안 그래도 강렬한데, 그 위에 아이라인마져 그렸다.
전반적인 인상이 종이 끝 마냥 날카롭고, 도도했다. 한 없이 높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뒤처리를 부탁해요. 조교님.”
“수고 해여.”
“쟤는 맘대로 해도 좋아. 지금이면 반항도 못 할걸? 깔깔.”
이런 쌍년들이.
“사과하라니까?”
탁-.
도발에 화를 참지 못 하고,
엘레인의 팔을 붙잡았다.
[아...... 이런, 저질러 버렸군.]
팟-.
「시스템에 [엘레인 아이네스]가 등록되었습니다.」
눈앞에 창이 떴다.
시스템? 이게 뭐지.
벙쩌있는것도 잠시. 팔을 잡고 있는 몸이 뭔가에 맞은 것마냥 튕겨 나갔다.
후웅-.
“어어?”
쿵-!
“이런 돼지새끼가. 지금 어딜 만진 거야!”
엉덩방아를 찍고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엘레인의 사나운 고성이 고막을 울렸다.
[엘레인은 남자가 몸에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걸로 유명했거든.]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쳐다보니. 붉으락푸르락 하다못해 관자놀이에 핏줄마저 솟은 엘레인이 눈을 치켜뜨곤 지팡이를 내게 들이밀고 있었다.
안 좋다. 아주 안 좋아.
“저. 저기 잠시만 말로- 으아악!”
말을 잇지 못하고 시야가 바닥과 멀어졌다. 아까 애니가 당했던 마법인 거 같았다. 마치 안 보이는 거인이 한쪽 발을 힘 있게 잡고 들어 올리는 기분이다.
차이가 있다면, 애니처럼 허공에서 머물지 않고, 높이 들어 올려지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내리 찍혀졌다는 거다.
“으아아아악!”
쾅-!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강렬한 통증이 몰아쳤다.
[괜찮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아무리 막나가는 애라도 조교인 널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아서는 이미 자기 손을 떠나갔다는 듯, 날 바라보지 않고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큽. 쿨럭-. 잠시만!”
엘레인은 내 말을 무시한 채 또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다시 몸이 튕기듯 떠올라, 반대편 바닥으로 빠르게 내리쳐졌다.
쿵-!
“크억-.”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건 아이네스 가문의 혈통 마법이야. 마력의 효율이 좋은 거로 유명하기 하다고. 이야, 난 평생 학교에 붙어있으면서 아이네스가문의 혈통 마법을 직접 볼 기회도 없었는데. 넌 학교 온 첫날부터 직접 몸으로 맞기까지 하냐.]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자기 일이 아니라고 부럽다는 듯이 말하다니.
“교수님 생각해서 사람취급 좀 해줬더니, 위에 올라가려 들어? 아, 이 건방진 새끼가 네놈 때문에 교복을 버려야 하잖아!”
“잠만, 기다, 기다려보라고. 으아-!”
휘이잉-. 쿵!
충격에 귀가 먹먹해 졌다.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니 따뜻하고 촉촉한 뭔가가 느껴졌다.
피다.
[...가 ..너... 이런....]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데, 마치 아득한 저편에서 말을 하는 것마냥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난 다시금 몸이 떠올랐다.
쿵-! 쿵-! 쿵-!
계속하여 내리쳐지며, 충격이 머리에 쇄도하자. 난 신음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생각했지만, 몸은 무력하게 다시금 공중으로 튀어 오를 뿐이다.
허공에 뜬 몸은 다시 바닥을 향해 빠르게 내리쳐졌다.
안돼.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