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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불평등한 종속계약
로브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머리를 양옆으로 땋아 내린 금발 여자애가 싸늘하고 무덤덤한 시선으로 날 내리깔아보고 있었다.
감이 온다. 안 좋다. 이건 아주 안 좋아.
“다 벗겼어여. 으... 손이 썩을 거 같아여.”
“수고했어, 안나. 그럼 셋은 잠시 나가봐.”
“지켜보면 안 돼?”
샤브리나의 말에 엘레인이 눈썹을 비죽거리며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샤브리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들어 허공을 막으며 말했다.
“아, 알았어. 나가면 되잖아. 야,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샤브리나가 아트리샤와 안나를 챙겨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시끌벅적 했던 방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방에는 엘레인과 나, 그리고 이제까지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는 여자애 셋만이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까 크게 실수했다는 게 인지되어, 방에 흐르는 적막을 깨기가 무서웠던 탓이었다.
엘레인이 무슨 생각을 하나 바라보려는 순간, 방 안에 있는 불이 꺼졌다.
타악-.
엎어져 있는 내 옆으로 약한 불이 하나 켜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빛이 나는 구가 생겨 내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취조실의 분위기가 났다. 어두워서 엘레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문에서 이런 심리전도 교육받는 건가.
“어제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아주 기분이 나쁜 일이요.”
엘레인의 한껏 내리깐 목소리와 함께 알림창이 눈앞에 확 떴다.
「 마법을 감지합니다. 」
또다시 내 몸이 중력을 거스르며 허공에 떴다.
“으아아. 잠시만, 이러지 말아봐.”
내 말에 대답도 없이 날 계속 허공에 띄웠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바닥에 내쳐지거나 하지 않았다. 머리를 바닥을 향한 체 허공에 띄워져 있을 뿐이었다.
피가 머리에 몰려, 관자놀이 핏줄에 압력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몽이겠거니 했어요. 하지만, 너무 생생한 이미지에 떨치려 했음에도 종일 기분이 나쁘더군요. 그래서 액땜하기 위해 조교님을 가볍게 혼내주려 했지만, 조교님께서 아시다시피 실패했죠.”
그 불마법이 가볍게 였다고?
“그런데, 조교님이 아까 진명을 말한 덕분에 한가지 확신이 생겼어요. 그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확신이요.”
그 말에 내내 무덤덤하게 내려다보던 금발여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했다. 찰나였지만, 워낙 표정이 없었기에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아니 그건 오해-. 으아악!”
후욱-.
아찔한 느낌.
순식간에 바닥이 눈앞까지 도달했다.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비명부터 지르고 보았다. 하지만,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질끈 감은 한쪽 눈을 천천히 실눈 떠 쳐다보니, 부딪힐락 말락 한 아슬아슬한 허공에 겨우 떠 있었다.
“입 열지 마,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으니까.”
난 어느새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연실 끄덕여 댔다. 사방팔방으로 땀이 튀었다.
잘 못 생각했다. 상대방을 의심했으면서 왜 대비를 안 했던 걸까. 적어도 지팡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이런 상황이 돼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어떻게 혈통 마법의 진명을 알아낸 거야? 그리고 대체 무슨 의도로 내게 말을 꺼낸 거지? 뭘 노렸던 거야? 뭘 노린 거냐고!”
안 좋다. 자기 좋을 데로 크게 오해 중인데, 내게는 오해를 풀 만한 실마리가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까.
“아, 아니-.”
“네게 이곳까지 데려와서 최대한 좋은 조건의 일도 제시해줬는데, 날 엿 먹이려 들어? 너 대체 뭐야. 우리 가문의 혈통 마법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물건을 띄운다는 거?”
휘익-. 짝!
“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더니, 갑자기 뺨이 녹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눈앞에 별똥이 튄다. 얼마나 알싸한 고통이었는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존댓말.”
옆에 있는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 들었는지 손에는 승마용 회초리 채찍이 들려있었다.
[그냥 넘어가 주지 않으려나 보네. 이거 큰일이군. 난 더는 못 보겠다. 살아남으면 보자. 행운을 빌어]
침통이 감도는 표정으로 말을 끝마친 아서가 내 문양에 빨려가듯 사라졌다.
저렇게 사라질 수도 있구나. 그보다 날 혼자 놔두지 마.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누가 그딴 거 물었는지 알아? 너, 대체 뭘 알고 있어?”
“더 없어......요.”
“진명을 알고 있는데, 더 없다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것밖에 모릅니다! 정말이라고요.”
“그것밖에? 진명을 아는데 그것 밖에!? 캐서린!”
캐서린이라 불린 여자는 승마용 회초리를 던지고 품 안에 있는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자 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든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전 그것밖에 모른다고요.”
휘이-착!
“으아아아!”
캐서린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공기 가르는 소리가 강렬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왼쪽 고막이 멍멍하게 울릴 뿐 기다리던 아픔은 오지 않았다. 채찍이 내 얼굴 바로 옆 바닥을 때린 것이다.
“혹시, 어제 고위 귀족 숙소에 침투했어?”
“아니요.”
휘이-찰싹!
“으아아아악! 으으윽! 끄아아악!”
불타는 듯한 같은 고통이 뱃살에 새겨들었다. 단 한 번의 채찍질이었지만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허공에서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올려다보니 거꾸로 눕혀져 있느라 축 쳐져 있는 뱃살에 붉은 선이 하나 그려져 있다.
얼마나 아픈지 고통의 비명을 지르느라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다.
“혹시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어? 아니면, 어제 날 만졌을 때 뭘 한 거지?”
“으으으아. 씨..씨바”
휘이익-찰싹!
“으악! 악! 시발!! 시바아알!”
“대답.”
채찍질한 캐서린이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으아악- 없어. 아니, 없어요. 으아아아. 잠만, 이러지 않아도 다 대답할 거야. 때리지 말아줘. 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거라고.”
하지만, 내 말에도 캐서린은 다시 채찍을 치켜들었다.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는데, 캐서린의 손을 엘레인이 한 손으로 막았다. 그녀가 그만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 이게 마지막 기회야. 만약 내가 납득 못할 대답을 한다면, 널 죽일 테니 알아둬.”
그녀의 사망선고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다른 건 되었고, 진명은 어떻게 안 건데? 그것만 말해봐.”
“그..그게.”
생각해라. 생각해! 안 그러면 또 맞는다. 머리에 회색 뇌세포가 격렬하게 마찰하며 생각을 짜내고 있었다.
내 눈에 캐서린 손에 들려진 채찍이 서서히 치켜지는 게 보였다. 안돼!
“제 고유능력입니다!”
“뭐?”
내 말에 눈에 띌 정도로 엘레인과 캐서린의 얼굴에 당혹이 물들었다.
순간, 감이 왔다. 이건 통한다.
“그래, 그래요. 제 고유능력! 고유능력으로 혈통마법의 진명을 알아낸 거에요.”
“네가 고유능력자라고?”
“예!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알아냈겠어요.”
“어떤 고유 능력? 설마 마법의 진명을 알아내는 게 네 고유 능력이야?”
“네, 네! 바로 그거에요. 그거!”
“맙소사......” 엘레인이 경악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말하는 거야? 귀족 사회의 근간을 쥐고 흔들 힘이 있다고 말하는 거라고.”
진명 운운한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살벌한 꼬락서니를 만들었던 걸 생각해보면,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그 정도로 대단한 거였던 건가.
엘레인은 말을 한 뒤 고개를 숙여 뭔가 생각하는 듯했고, 캐서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고유능력자라...... 그래서 그 혐오스러운 외견에 별 볼 일 없던 능력에도 이 마법 학교에서 조교로 일할 수 있던 건가? 아니지, 아까 내 마법을 막아냈잖아. 그런데, 왜 중급도 이수 못한 거지?”
혼잣말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혹시, 네가 고유능력자인 건 누가 알지?”
“여기 두 명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캐서린 뒤에 있던 엘레인이 내게로 걸어왔다. 빛에 비쳐진 그녀의 눈이 이채로 가득 찼다.
“두 명? 아니지, 그녀는 나와 한 몸 같은 존재니.”
그 말에 엘레인 뒤에 있던 캐서린의 눈빛이 잠시 돌변했다.
적의.
정말 찰나였지만, 그녀에게서 엘레인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아직 네 말을 다 믿는 건 아냐. 하지만, 네가 귀족사회에 능통하지 않다는 게 너무 티가 나다 보니, 날 엿먹이려고 혈통 마법 명을 말했다는 것보다 고유능력자라는 게 더 말이 되네.”
그러고선 고개를 들어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활짝 웃었다.
“말이 된다고.”
음흉한 년.
“이야, 고유능력자라니. 이제야 우리 아서 조교님의 가치가 제대로 보이네요.”
존대를 반말보다 능글맞게 한 그녀는,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톱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능력을 절 위해 쓰는 게 어때요? 그러면 죽이지 않을게요.”
“그쪽을 위해서 쓰라고요?”
“네, 바로 저. 엘레인 아이네스를 위해서요. 안 그래도 그 능력을 쓸만한 일이 있거든요.”
“무슨 일이죠?”
“푸하핫.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 어차피, 조교님은 날 위해 평생 일하게 될 텐데.”
“예?”
갑작스러운 엘레인의 비소와 이어지는 말에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다시금 그녀의 표정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목소리를 내리 깔며 내게 말했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넌 평생 날 따라다니면서 날 위해 일하게 될 거야. 넌 이제 이 학교에서 일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니, 이 학교뿐만 아니라 그 어디든!”
“그게 무슨...... 날 노예로라도 만들겠단 말이야?”
“푸하하핫.”
너무 어이없어서 존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캐서린이 채찍을 휘두르려 했지만, 엘레인이 크게 한번 웃어 재낀 덕에 휘두르려던 손을 멈췄다.
엘레인이 내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읔!”
“바로 그거야, 노예! 이미 넌 내 것이거든.”
이런 개 같은 년이
입 밖으로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나.
“이 미친년이 계속 받아주니까 한도 끝도 없네”
“하핫....응?”
“노예는 무슨! 야 이 씨부랄년아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임계점에 넘어서자마자 내 이성이 끈이 뚝 끊어졌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바락바락 욕을 날렸다.
엘레인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캐서린이 채찍을 날리려 하자 그녀가 손으로 막아냈다.
그리곤 화풀이하듯 내 머리를 잡은 손을 거칠게 밀며 풀었다.
“정말 다행으로 아세요. 조교님. 제가 능력 있는 사람에게 후하다는 건 빈말이 아니거든요.”
어금니를 꽉 문 채, 새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대답은 지금 안 하셔도 되요. 하지만! 저희 가문의 혈통마법 진명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조교님이 고유능력자인 걸 타인에게 말할 경우.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겁니다.”
엘레엔이 캐서린이 주는 손수건을 건네받고 손을 닦았다.
“일단, 전 이만 가볼게요. 혼자 생각해볼 게 좀 있어서요.”
툭.
“으앗.”
바닥에 떨어졌다.
땅에 닿기 직전 살짝 띄워줘서 아프지는 않았다. 머리에 쏠린 피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이제 끝난 건가?
일어서려 하는데 손발이 아직 묶여있었다. 내가 낑낑대자, 엘레인이 웃었다.
“아..... 정말 이대로 그냥 보내 드리고 싶었지만, 오늘 아서 조교님께서 너무, 너무 매너가 없어서요. 캐서린에게 교육을 받아야 할 거 같네요. 조금 맞는다고 너무 감정 상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뭐?”
엘레인이 그 말과 함께 방을 나가자, 캐서린이 몸을 풀듯 채찍질을 했다.
휘리릭-착!
내 얼굴 바로 앞 바닥에 채찍질한 자국이 남았다.
“아아아악. 잠만. 악! 잠깐만이라니- 악!”
휙- 착!
휙- 착!
휘릭-착!
몸을 찢을듯한 고통이 쇄도했다.
무자비한 채찍질이 계속 몸에 파고들며 살점이 튀고 피가 낭자했다.
난 갓 잡힌 생선마냥 바닥 위를 파닥파닥 뒹굴며 소리쳤다.
“시발년!! 개 같은 년-악! 아아악-!”
찰싹!
얼마나 후들겨 맞았을까.
목덜미에 날라오는 채찍에 불이 튄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더니, 난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