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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건드리는 녀석은
화창한 날씨.
난 감상에 젖어 있었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창 너머엔 헤엄치고 싶을 만큼 파란 하늘이 보였다. 몽글몽글한 구름은 어찌나 선명한지 손을 뻗으면 금세 잡힐듯했다.
저 구름의 촉감은 어떨까? 젖가슴 마냥 부드럽지 않을까? 는 개뿔, 감상에 젖은 게 아니라 그냥 음란한 거네.
“어이가 없구먼. 지금 멍이 때려지냐? 때려져?”
멍 때린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거다.
난 소리 지른 중년 남성을 쳐다보았다. 잔뜩 성이 난 그는 비쩍 마른 데다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심술궂게 보였다. 양옆으로 말아 올라가게 기른 얄팍한 수염도 안 좋은 인상에 한몫했다.
“안톤 교감. 그 정도만 하세요.”
“쳇.”
“레온 교수, 확인해봤나요?”
“네, 비올렛 교장님. 결과는 아까와 똑같습니다. 마력 반응은 없습니다.”
“그럴 리 없어요! 교수님, 그건 분명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고요.”
그렇다. 난 어제 일에 대한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교장실. 학교의 탑 꼭대기쯤에 위치하지 않을까 추정되는 이 방에서 말이다.
상석에 앉아 중년의 안톤 교감을 저지하는 비올렛 교장은 놀랍게도 앳돼 보이는 여자였다.
이 너구리 상의 귀여운 여자는 직함에 어울리는 다소 연배가 있어 보이는 옷. 그리고 어딘가의 전통 복식처럼 느껴지는 앞머리 볼륨을 과도하게 넣고,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을 빼고 본다면, 엘레인과 동년배라고 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서 조교가 제게 앙심을 품고, 뭔가 한 게 분명하다고요.”
“저, 엘레인양? 저는 아무것도-.”
“듣기 싫어요!”
엘레인은 아까부터 내가 변명을 하려 할 때마다 격하게 소리 지르며, 말도 못 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그딴! 으으으......! 제발 교수님, 한 번만 더 확인해주세요!”
“아니, 진짜-.”
“입 열지 말라니까요!”
엘레인이 분개하며, 내 말을 잘랐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곤란하다는 듯 교장을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교장은 굵은 단무지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살짝 감았다.
“엘레인양. 아무래도 단순한 꿈이 아니었을까요?”
“꿈......? 꿈이라고요? 교장 선생님. 제가 꿈과 현실 하나 분간 못 할 사람처럼 보이나요? 교장 선생님도 절 아시잖아요.”
“분간 못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죠. 적어도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보기 전까지는요.”
앳된 얼굴과 달리, 여유롭고 부드럽게 이어가는 말에 연배가 느껴졌다.
사람 좋은 미소를 계속 담고 있지만, 그 미소에 묘한 위엄이 서려져 있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닐 거다.
“감정이 상했다고 아무에게나 언성을 높이는 건 성숙한 게 아니죠. 엘레인 학생은 원래 이런 학생이었던 건가요?”
“아뇨, 그게.......”
이런 학생이었던 건가요? 라니. 누가 봐도 그런 사람이 아닌 건가?
며칠간 엘레인의 최악의 모습을 다 겪었다 자부하는 나로선, 이런 고평가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고 보니 레온도 엘레인 하는 행동 하나하나마다 좋게 받아들였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떻게 저런 싸이코 같은 여자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일 수가 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무례했습니다......”
“허허 교장님. 이해해 주시죠. 아까 말한 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차분하게 있을 수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엘레인이 곤혹스러워하자, 안톤 교감이 끼어들었다.
“게다가, 전 이제까지 성실하고 우수하게 학교생활을 하며 모범을 보였던 엘레인 학생이 단순히 착각만으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단순히 마력 검사뿐만 아니라 금기된 흑마법에 손대지 않았을지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저기, 저 아서 조교의 저 음흉한 상판대기 좀 보세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저 아저씨는 또 엄한 사람한테 시비네.]
아니,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한 시비야.
점쟁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물론, 그가 통찰력이 좋아서 날 의심하는 건 아닐 거다.
안톤 교감.
불쾌한 사람이다. 두 시간 남 짓 겪어보지 않았는데도 다시는 이 사람과 같이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서에 대한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건 그렇다 쳐도, 내가 당일에 몇 번이고 폭력 당한 정황에 대해 전부 말했는데도 엘레인을 두둔하다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담당 교수인 레온까지 불러 책망을 한 뒤, 마력을 직접 탐지해보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교감은 딱히 엘레인을 옹호하고 싶으려는 게 아니라, 나를 엿먹이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왜냐인 건데,
“혹시, 엘레인 학생 말고 다른 피해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런 예비 강간마 같은 사람을 학생 숙소 앞에 둔다는 것도 전 반대였어요. 격리해야 됩니다. 아니, 이참에 학교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뭐? 강간마 같이 생긴 얼굴?! 그건 너겠지 족제비같이 생긴새꺄!]
누가 봐도 건수 하나 잡았다고, 쌓인 감정을 다 풀어내는 것 같았다.
아까 엘레인에게 화풀이에 관한 인상 깊은 조언을 해준 교장을 쳐다봤는데, 교감의 말에는 눈매만 찡그린 채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다.
누가 봐도 엘레인보다 안톤 교감의 언행이 더 심한 거 아닌가?
“안톤 교감.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워줄 수 있을까요?”
“예?”
“부탁드려요.”
잠시 나와 교장을 번갈아 바라보던 교감은 불만스러운 듯, 내 옆을 지나며 “쳇” 소리를 내곤 밖으로 나갔다.
“엘레인 학생. 학생이 의심한 대로 아서 조교와 학생에게 마력 감지를 시도했지만, 잔존해있는 이상 마력은 없었어요.”
“교장님, 제발 한번 더-.”
“그리고. 애초에 엘레인 학생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죠. 지금 왜 학생이 징계팀이 아니라 교장실에 있는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 못 했나요? 한 번 더 [감지]를 해서 결과가 똑같다면. 엘레인 학생은 책임을 다 하실 건가요?”
“네?”
“교내 폭력 행위와 기물파손에 대해, 교칙에 따른 처벌을 달게 받으실 거냐는 말이에요.”
“그...... 그건.”
“아서 조교를 상습폭행하고, 심지어 학생 기숙사 앞에서 폭발마법을 썼으니, 정학 정도가 아니라 퇴학까지도 당연히 고려해볼 만한 사항이지요.”
퇴학을 운운하니 싸이코년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 반면, 나는 교장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고려가 아니라 당연히 퇴학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전에 아서가 나한테는 학생 기숙사에 침입하는 것 만으로 재판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왜 재판은 언급조차 없는 걸까.
엘레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 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교장이 말을 이었다.
“엘레인양. 이른 아침에 아이네스 가문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말에 엘레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엘레인 학생, 더는 가문에 누를 끼치지 말아요. 학생이 사과하고 아서 조교가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감안해서 처벌을 감면하겠습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야야, 표정]
무의식중에 표정이 다 드러났나. 알게 뭐야. 그보다 교장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과를 받아줘? 감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저 교장님. 연락한 것은 혹시......”
그런데도 엘레인의 목소리가 상당히 떨렸다.
“예. 아버님이셨어요. 여전히 요령 좋으신 분이라 학교에 있는 저보다 먼저 소식을 전해 들으셨더군요.”
그 말에 엘레인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숨 쉬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난 당연히 그녀가 가문의 힘을 빌려 일을 무마시키려 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아니, 그건 고사하고 가문에게 알려진 걸 두려워 하는 기색이다.
엘레인은 교장에게 뭔가 말을 할 듯 말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다,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버님에게는 제가 말을 잘 해두었기에 뒤에서라도 이 일을 언급하며 책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 고맙습니다.”
엘레인의 얼굴이 풀려갔다. 비올렛 교장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덩달아 분위기도 훈훈해진다.
청소년 드라마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주연 중에 나는 없는지, 내 감정이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감정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엘레인에 대한 분노가 많이 풀렸다. 어제 그렇게 증오했던 걸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그녀의 처절한 꼬락서니를 봐서 그런가? 아니면, 엘레인과 섹스를 해서 그런 걸까. 아니다.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예전에 죽기 전을 돌이켜보면, 난 타인에 대한 감정을 오래 남기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내 감정 상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다고 할까. 주인에게 지랄하는 애완동물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정말 제 정신이 아니군.
“정말 고맙다면, 엘레인 학생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졌으면 좋겠군요.”
“사과......”
엘레인은 그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는지, 뭔가 결심한 듯 날 쳐다보았다.
정말 사과하려나.
내가 엘레인을 마주 보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내 고개를 도리질하며 안 되겠다는 듯 말했다.
“교장님. 제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많이 놀란 상태라 진심이 안 담긴 말뿐인 사과를 할 거 같습니다. 염치없지만, 나중에 결심이 섰을 때 조교님을 직접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해도 괜찮을까요.”
“뭐.......?”
니가 날 또 왜 찾아와. 하지만, 그런 내 심정은 알지도 못하는지, 레온과 교장이 눈빛을 교환하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대신 기간은 1주일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장 선생님.”
“레온 교수. 먼저 엘레인 학생을 데리고 나가 [계약] 마법을 부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레인양 이쪽으로 오겠어요?”
“네.”
그렇게 말하고 엘레인이 뒤도는데, 윤기가 흐르는 분홍빛 입술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어제의 농밀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정말 미친 거지.
엘레인이 레온 교수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방안은 나와 비올렛 교장. 단둘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일은 알아서 혼자 다 끝내놓고, 왜 날 안 보내는 건가.
비올렛 교장은 말없이.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만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납득하지 못 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군요.”
“흠...... 아닙니다.”
“이해해요. 방금 제가 엘레인을 교칙대로 처벌하지 않은 건 불합리한 처우가 맞으니까요. 아서 조교로선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죠.”
“흠...... 그게.”
“아서 조교...... 생각보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당신의 능력이 기준에 미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는 소인배들이 아니에요. 그보다도 교내 정치라는 쓰잘데기 없는 오락을 즐기는 족속들이 문제죠.”
교내 정치?
“만약, 엘레인의 징계위원회가 열리면, 상습폭력과 학교 안 금지마법의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고. 조교가 학생에게 폭력을 몇 번이고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짚고 넘어가며, 조교의 자질이 쟁점이 될 거에요. 저로서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을뿐더러 저와 레온도 공격당하겠죠.”
“아.”
단순한 계급의 격차로 인한 처우가 아니었던 건가. 생각해보니 레온의 추천만으로 조교가 되지 않고, 교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그런가. 비올렛 교장이 그렇게 허가했기 때문에 아서라는 폭탄을 짊어진 건가.
아니,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상했다. 날 계속 짊어질 필요 없이 중간에 자를 수도 있지 않은가. 날 지켜준 줄 수 없다고 언급했던 걸 보아하니 그녀도 레온처럼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게 분명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 말이다.
비올렛 교장은 탁자 서랍을 열어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내 앞에 올려놓았다.
“15골드. 50실버. 아이네스 가문 측에서 아서 조교에게 주는 겁니다.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이걸 받아주면 좋겠네요.”
[오! 생각보다 많이 준비했는데?]
합의금 인 건가.
화폐 개념을 모르겠다 보니, 눈앞에 놓인 돈이 얼마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하지만, 아서가 많이 준비했다고 놀라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둑해 보이긴 했다.
“받으실 건가요?”
내가 말없이 주머니만 쳐다보자, 대답을 재촉했다. 아이네스 가문의 돈이라. 부정 탈까 봐 별로 안 받고 싶지만.
“네, 받겠습니다.”
안 받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남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기대하지 못 하는 이상. 돈이 많아서 나쁠 게 없을 테니까.
“좋아요. 이 돈을 들고 다니긴 곤란할 테니, 이야기가 끝나는 데로 은행 계좌에 넣어드릴게요.”
비올렛 교장이 지팡이로 돈주머니를 톡 건드리자, 이내 돈주머니가 허공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하아. 한 가지가 더 남아있어요.”
“뭐죠?”
“아서 조교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달간 유급 휴가를 갖는 게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