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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건드리는 녀석은
“휴가요?”
갑자기 왜?
유급 휴가를 주며, 미안다고 말하는게 신기했다.
[괜찮은데? 그 기간 동안 마법 연습도 하고 적응도 하면 되겠네.]
“원래라면, 폭행사건의 피의자가 근신처분이든 퇴학이든 처분을 받고, 피해자랑 같은 수업에서 만나지 않는 게 원칙이에요. 하지만, 엘레인 학생을 처분하지 못 하는 이상...... 아서 조교가 수업에 안 들어가야 할 거 같네요.”
“아......”
말을 이어가던 비올렛 교장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우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엘레인 학생이 수업에 나오고, 아서 조교가 안 나온다면. 아마 악성적인 유언비어가 돌 거에요. 그렇다면 아서 조교의 이미지가 더 안 좋아 질것이고요.”
유언비어라. 학생들 사이에서 지금 이 사건은 뜨거운 감자와 같을 거다.
엘레인이 요란법석을 떨며 밀고 들어온 탓에, 학생들이 모를 수가 없는 사건이 되었으니까.
사건이 있는 직후, 수업에 내가 얼굴을 안 비추고 엘레인만 나온다면, 사건의 진위를 모르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잘못했구나 생각하겠지.
하지만, 뭐 이미 내 이미지는 바닥을 기는데, 여기서 더 나빠져 봤자 뭐가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상관없습니다만, 학교 안에 있는 건 괜찮은 거죠?”
“그건 괜찮습니다. 대신 학생들 많은 곳에서 엘레인을 만난다면 태도를 주의해주세요.”
괜찮다는 내 말에 비올렛 교장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엘레인 학생과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다른 곳에서 말하며 다녀도 곤란하니 주의해주시고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떠벌리고 다닐 상대도 없거든요.
****
“그렇다면 이번 방학 때 우리 영지로 오시는 게 어때요?”
“또 가고 싶지만, 이번 방학에는 연구할 게 많아서 힘들어.”
“연구하는 데 방해 안되도록, 저희 마탑에서 도움을-.”
“아서, 자네도 나왔군.”
교장실에 나와 복도를 조금 걸었더니, 아직 대화하고 있는 레온과 엘레인이 보였다.
열을 내며 말을 이어가던 엘레인은 나 때문에 말이 끊어지자 불만인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네도 이리 와서 손을 내밀어보게.”
“이렇게?”
“잠시만 기다려봐.”
레온이 지팡이를 잡고 내 손끝에 같다. 대자 창이 하나 떴다.
「 계약의 마법이 느껴집니다. 마력 개입을 수락하겠습니까?
( Y / N ) 」
이건 뭐지.
[호오. 이건 흥미롭군.]
“어라? 마법이 안 통하는데?”
레온이 당황하는 걸 보고, 난 재빨리 마력개입을 수락했다.
「 계약의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 계약 내용 : 엘레인 아이네스는 아서 페르시에게 폭행과 관련된 일련의 일에 대해 사과한다.
- 아서 페르시는 엘레인 아이네스의 사과를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할 수 있으며, 사과를 받을 시 계약이 끝난다. 그럴 경우 레온 데메디치 에게 보고된다.
(상태 이상 : 위치 추적)
- 계약기한 : 6일 23시 48분 남음 」
“아 마법이 잘 되어있구나. 잠시 착각했나보다.”
“살 쪄서 마법이 잘 안 걸리는 거 아니에요?”
“엘레인,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런 말실수한 것 좀 봐. 아서 조교님 죄송해요. 악의는 없었어요.”
아주 악의가 충만하게 느껴지는데.
“하여튼 둘 다 잘 화해해봐. 안 그럴 사람들이 오해 때문에 싸우면 안 좋지.”
오해라니. 아까 내 이야기 못 들었나? 비올렛 교장은 그렇다 쳐도, 레온은 사람 보는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난 비올렛 교장님하고 이야기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 여기서 대화하는 건 상관없지만 싸우지는 마.”
“앗! 교수님. 방학 때는-.”
“방학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가본다.”
아서는 엘레인의 말을 넘기며 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장실 문을 바라보는 엘레인의 표정이 상심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뒷모습만 보였다.
나도 이제 가볼까.
“잠시만.”
“응?”
엘레인이 말을 걸었다. 벌써 사과하려는 건가.
“어제 내가 했던 제안, 어떻게 하기로 했어?”
“뭐? 제안?”
“뭐야, 벌써 잊었어? 내 밑에서 일하라는 제안 말이야.”
“아니, 사과하는 건 줄 알았더니 그 이야기야?”
내가 한 말에 엘레인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사과? 내가 왜 해? 오히려 내가 받아야지. 네가 내게 뭔가 한 거 맞잖아? 하여튼, 그건 중요하지 않고. 일할 거지?”
“어떻게 하면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네 밑으로 들어갈 거라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
“공작가 혈통 마법의 진명을!”
엘레인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다 순간, 아차 싶던지 주위 눈치를 봤다. 아무도 없다는걸 확인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아는 사람인데도 내가 살려 주었잖아.”
그녀가 속삭이기 위해 다가오자 좋은 냄새가 코에 부딪혔다.
냄새에 취해 판단이 흐려질 거 같은 난, 그녀에게 멀어지려 고개를 뒤로 뺐다.
이거 설마 고마우라고 하는 말인가?
이 아가씨는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길래, 내 목숨 살려준 은인 행세를 하는 걸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네 밑에서 일을 하기 원했으면, 어제 그 난리나 치지 말든지. 일을 제의 해놓고 왜 채찍질을 했던 거야.”
“하. 그보다 어디서 반말이야?”
“너도 말이 짧은 건 매한가지 일텐데?”
내가 계속 반박하자,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날 노려보았다.
두려움이란 자기가 세상에 긋는 원이라고 했던가. 어제 꿈에서 엘레인의 애처로운 꼬락서니를 봐서 그런가. 원 밖에 있던 그녀가, 이제는 내 원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어제와 같은 위압감이 안 느껴졌다.
“일주일 안에 결정해.”
“아니, 지금 결정할게.”
“응?”
잠시 생각하는 척, 시간을 보내다 입을 열었다.
“안 해.”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도 않았잖아!”
“안 할 거니 들을 필요도 없지.”
내 말에 엘레인의 얼굴이 사납게 돌변했다.
“너 계속 뭐가 된 것마냥 까부는데, 그렇게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
감정만 안 남았을 뿐이지 말을 나누고 있으면, 짜증 나는 여자라는 건 매한가지구나.
“그래서 어찌할 건데?”
“일단, 그 알량한 조교자리부터 잃게 해주겠어.”
“네가? 푸하하. 대체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야? 아이네스 공작가의 셋째딸이라고! 그거 하나 못 할 거 같아?”
“못 할 거 같은데?”
“뭐?”
“어떻게 잘리게 하려고? 가문에 연락해서? 내가 그렇게 눈치 없어 보여? 아버지에게 연락 온 것 하나만으로 벌벌 떠는데, 그게 가당키나 해?”
“큭.”
엘레인이 정곡을 찔린듯 뒷걸음쳤다.
“게다가, 죽이겠다고? 그리 요란하게 일을 벌여 학교 학생들에게 은원관계를 알려놓고서? 만약 내가 사라지면 가장 의심 받는 건 네가 될건데? 살인 혐의를 받으면서도 무서워하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그...... 그건.”
엘레인의 난처한 얼굴을 보니 비릿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아~. 아이네스 가문에다가 혈통마법 진명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한번 해볼까~.”
“뭐? 죽으려 환장했어?”
“어라? 괜찮은 거 아니었어? 아아..... 진명을 알고 있는데도, 어느 공작 가문의 셋째 딸이 그냥 보내줘서 괜찮은지 알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아, 그게 아니라면 너희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았을때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 그딴 짓을 했다간 너도 무사하지 못 할 거라고!”
엘레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왜 이전에는 살려줬는지. 왜 가문의 비밀이 너한테서 새어 나갔는지부터 생각하지 않을까?”
“나한테서 새어나갔다니!”
“아니 뭐,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지.”
내 말에 엘레인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또 그게 사실이기도 하잖아?”
장난스러운 억양으로 골려봤는데, 대답이 없었다. 엘레인은 조용히 내 얼굴을 한참 노려보았다.
“하, 기가 막혀서.”
그러더니 날 툭 치고는 성큼성큼 지나가 계단 옆에 있는 워프 마법진 위에 있는 [룬]에 손을 대고 사라졌다.
역시 끝까지 기세가 죽지 않는 여자다.
짝짝짝
갑자기 박수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봤더니, 아서가 날 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남사스러운 자식. 하, 개운하다. 엘레인에게 한바탕 쏟아냈더니, 찌뿌드드한 온몸이 풀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시때때로 엘레인을 갈궈줘야겠다.
****
계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탑의 높이가 높은 만큼 각 층에 [이동마법]을 새겨놓은 워프마법진의 룬을 이용하여 각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걸 이용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워프 마법진이 연결되어 그려있지 않으면 사용이 불가하기에. [이동마법]은 건물 안을 이동하는 용도로만 쓰인다고 한다.
1층으로 내려온 아서와 나는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기 위해 학교 매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교장 말이야.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어려 보여서 묻는 거지? 외견만 그런 거야.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대충 따져봐도 300살은 넘을걸?]
“300살이 넘는다고? 혹시 엘프야?”
[뭐? 아냐. 엘프라니 푸하핫. 수인이야. 머리의 볼륨 봤지? 그거 귀를 가리려고 그러는 거라고.]
아, 무슨 머리모양이 그런가 했더니 그런 용도였나.
“이쁘던데 착각할 수도 있지.”
[뚱뚱하잖아. 엘프는 무척 날씬하다고.]
“그건 뚱뚱이 아니라 육덕진거지. 그보다 네가 사람 몸 가지고 지적을 하다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야. 그보다 엘프를 직접 본적이 있나 보네?”
[있지. 우리 학교에 가끔 오거든.]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엘프를 볼 수 있다고?
“진짜? 왜? 언제?”
[비올렛 교장이 엘프 국가의 마법 학교와 교류를 틀어놔서 오는 거지. 어디 보자. 내년 봄쯤에 오겠네.]
“오오!”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안 할 수가 있나. 아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학교에서 타 종족을 보지 못했네.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못 본 건가?”
[아냐, 못 보는 게 맞는거야. 학교에 입학한 타 종족 학생이 없거든. 인간이 아닌 학교 직원이 간혹 있지만, 그나마도 장수 종이 아닌 종족들이야. 엘프 같은 경우 비올렛 교장이 교류를 틀어서 볼 수 있었던 거지, 평생 한 번도 못 본 사람도 많아. 크로넬 제국, 아니 아르 대륙 통틀어서도 작위가 있는 수인은 비올렛 교장 한 명뿐일 정도니까.]
“흠...... 그래? 인간을 경계하나?”
[누가 경계하냐를 따지면 인간 쪽이겠지. 장수종들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보다 훨씬 상회하거든.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본능적으로 평화를 선호하기도 하고.]
그렇구만. 그렇다면 인간이 하게모니아를 이루는 게 신기할정도인데.
”비올렛 교장은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독특하지. 왜 그녀가 인간의 나라에 남아 있으려 하는지 잘 알려진 바가 없거든. 비올렛 교장은 크로넬 제국의 일곱 선제후 중 한명이야]
“높은 직위야?”
[높지. 황제를 뽑을 권한이 있는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라는 뜻이니까.]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어마어마한 직위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왜 교장 같은걸 맡고 있는 거야?”
[교장 같은 거라니. 이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현 권력자들의 자녀들이자 차후 권력을 잡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마법 학교라고. 원래 대부분 국가에서 내놓으라 하는 권력자들이 맡는 직책이지. 심지어 어떤 국가에서는 왕이 맡기도 한다니까?]
“그래도 비올렛 교장이란 사람. 그렇게 권세 높게 보이지 않았는데.”
[뭐,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긴 하지만, 변경백보다 소박하고 겸손하다는 게 세간의 평가니까.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평가가 그렇다는 거야. 흠...... 네가 알아야 할게. 아! 그녀가 엄청난 애국자라는 거야.]
“애국자라니......”
[나도 왜 수인이 인간의 나라에 소속감을 가지는지 교육받으며 의문이었지만, 다들 그분은 예외로 치니까 그러려니 했지.]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널 좋게 보는 거지.”
[뭐, 나도 처음에 무슨 꿍꿍이가 있나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닌데, 여차여차해도 이 학교에서 날 끝까지 좋게 챙겨준 건 교장과 레온뿐이었으니. 둘은 믿어도 돼.]
“그게 더 미심쩍어. 챙겨줄 이유가 없잖아. 이유가.”
아무리 봐도 레온과 교장의 호의에 맥락이 없다.
솔직히 이걸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나. 속내가 어떤지 몰라도 아서의 전생을 생각해보면 죽을 때까지 챙겨주는 사람이었으니. 쓸데없는 고민을 접어야 하나. 아니면 나름대로 의심을 해봐야 하는 건가.
[모르지? 정말 날 좋게 봤을지. 어쩌면 이런 몸매가 취향이라던가?]
아서는 자신의 후덕한 뱃살을 양손으로 잡고 파닥파닥 흔들었다.
최악의 추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