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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는 점심을 먹을 때 쯤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해진 일과만 다 하면 된다는 생각에,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일어나자마자 한 것은 머리를 다듬는 것이었다. 어제 필요한 미용 도구는 다 사놓았기에 시간만 할애하면 되었다. 난 열심히 거울을 보며 다듬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서는 그냥 교내 미용실을 이용하라 했지만, 미용실 직원들이 아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거절했다. 난 누군가에게 돈을 지급하여 서비스를 받으면서, 원치 않는 경멸까지 맛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무작정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라면 직접 해보고 싶었다.
저번에 아서의 장발을 자르며 느낀 거지만. 아서의 머리를 다듬는 건 비교적 쉬웠다. 모발이 얇고, 숱도 적당한 데다. 살짝 곱슬 진 머리라 길이만 맞춰놓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길이만 정리하는 게 아니라, 스타일도 내보고 싶었다. 윗머리와 앞머리는 남겨두고 옆머리를 짧게 치는 언더컷을 시도해보는 중인 거다. 옆머리는 생각만큼 잘 나왔지만, 잘 안 보이는 뒷머리를 대충대충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길이를 다듬고 난 뒤, 포마드로 머리를 올려 넘겨 마무리했다.
“어때 보여?”
[부유한 연쇄 살인마처럼 보여.]
“......”
할말이 없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니까.
실제로는 부유하기보다 가난한 편이지만, 자다 일어나 얼굴에 묻어있는 기름이 여드름이나 잡티 없는 과한 살집과 어우러져 부티 있게 느껴졌다.
[차라리 꾸미지 않았던 게, 시간을 아끼는 거 아니었을까.]
“...... 내게 보람을 줘.”
[너무 멋있다~. 이딴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아서가 조롱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솔직히 거울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무릎에 힘이 확 풀릴 뻔 했으니까. 볼은 빵빵한 데 머리 쪽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언벨런스했다. 고스트버스터즈의 유령처럼 생겼다. 아니 그보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심술굳은 뚱뚱보라 해야하나.
그래도 안 한 것 보다는 깔끔하고 개성 있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좋아,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오늘은 어디로 갈 건데?]
“당연히, 직원식당인 거지.”
[오늘도 직원식당이냐. 밥 먹는데 안 껄끄러워?]
“오늘도가 아니라, ‘오늘은’ 인 거야. 그리고 내가 어제 밥 먹는데 껄끄러워 보였어?”
[그렇......진 않았구나. 그보다 오늘은 이라니? 무슨 소리야.]
“글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아주 많이.
****
오늘도 교원식당은 붐비었다. 한참 밥 먹는 시간이기도 해서 조교들 테이블에 빈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붐비는 데도 신기하게 마리 조교의 양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요령이 좋은 사람은 어디든 있는 법이었다. 그녀가 그런 자리만 앉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녀 가까이에 오질 않으려 하는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가까이하기 힘든 타입이라 그런가?
난 마리 조교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탁-!
“안녕하세요, 마리 조교님. 오늘도 먼저 식사하고 계셨군요.”
난 마리 조교에게 손가락을 튕기며 인사하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마리 조교가 음식을 입에 집어넣다 말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짜증 난다는 얼굴로 음식을 빠르게 씹고서는 냅킨으로 분풀이하듯 입가를 닦아냈다.
“왜 이러시는 거죠?”
“뭐가요?”
능청맞은 내 목소리에 마리 조교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이틀 전부터 왜 계속 아는 척을 하는 거예요. 우리 이런 사이 아닐 텐데요?”
“친하게 지내자 이거죠.”
“온몸 다해 싫다고 하는 게 안 보이나요?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눈치를 이제까지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진물이 나서요. 그래서 이제 안 보려고요.”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은 사람에게만.
마리 조교와 싸우려는 건 아니므로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계속 말장난 같은 대화가 이어지자, 마리 조교는 화가 난 듯 어금늬를 꽉 깨물며 노려봤다.
“이제부터 아는 척 하지 말아주세요. 토가 나올 지경이니까 밥 먹을 때는 다른 곳에 가서 앉아주시고요.”
“그걸 아니까 계속 인사하는 겁니다. 같이 일할 사이인데, 토악질을 안 하려면 역한 것에 익숙해 져야 하잖아요.”
“하. 정말......”
마리조교가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젖히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눈에 힘을 주며 날 노려보았다.
이 아낙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역시 눈빛이 아주 사납다. 하지만, 저번과 같이 그 눈빛에 주눅 드는 일 따윈 없었다.
[훌랄라~. 저렇게 표정이 풍부한 마리 조교는 처음 보는데??]
내가 계속 실실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내자. 마리 조교가 분이 안 삭힌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먹던 걸 정리하며 일어났다.
“다음부터 말 걸지 마세요. 그땐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하아, 그렇게 말하면 뭘 하실지 궁금하잖아요. 기대할게요.”
협박을 윙크로 응수했다.
그러자 마리 조교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미쳤나 봐’ 라고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어서 가 뒹굴뒹굴하며 웃어 재꼈다. 나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 지었다.
내가 변하고 있구나.
이전 삶에서는 내가 싫다는 사람에게 인사 같은 것 안 했는데. 이번 삶에서는 딱히 피하고 싶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멸을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며 살 생각이 없는 거다.
지금의 난 하반신에서부터 자존감이 끓어올랐다. 발걸음은 힘 있고. 어깨에는 힘이 실리며. 고개를 숙이지 않고 타인을 보도록 들고 있다.
살아있다. 어느 때보다 그렇게 느껴졌다.
이 변화가 단순히 모페로스의 마력이 영향을 끼친 탓은 아니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저항 못 하고 움츠리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타인이 일방적으로 보내는 경멸을, 나 혼자 가슴속에 삭이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는 것.
이것을 어제 타티아나의 꿈에 들어가고 나서 깨달았다.
사람이 움츠려 드는 것은 삶에 저항했을 때의 결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보다 좋지 않다고 생각할 때이지 않은가. 나에게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당장 불의에 저항할 힘도 있었다. 그렇기에 당당해진 거다.
그렇다고 안하무인 하여,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타인에게 시비를 걸며 돌아다니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보다 타인의 관계와 감정, 그리고 내 분수를 정확하게 파악이 될 만큼 기민하여, 더욱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자, 앞에서 나와 마리 조교의 눈치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핏 보니 날 보는 눈빛이 호의가 섞여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잘되었군.
오늘도 테이블을 혼자 독점해서 먹다니. 높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갑자기 입맛이 돋았다.
손을 싹싹 비비며 테이블 위를 쳐다봤을 때였다.
“에이, 괜찮아. 괜찮아.”
“저기는 앉지 말자. 응? 다른 자리도 있을 거야.”
“쟤 보기 싫어서 그런 거지? 오늘 내가 쫓아 내줄게.”
“아, 진짜! 아루!”
[쟤네 또 왔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내 뒤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왔구나. 난 기다렸다는 듯이 비릿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턱-.
누군가 내가 바로 옆자리 식탁 위에 거칠게 가방을 내려놨다.
“어이, 아서 오늘 또 본다?”
알이 말을 건 것이다. 순간, 기대보다 너무나 빨리 성사된 만남에 음흉한 웃음을 참지 못할 뻔 했다. 난 그에게 돌아보곤 말했다.
“그러게~. 이게 누구야?”
“뭐야, 그 말투는? 게기다. 풋. 머리 꼬락서니는 왜 이래? 푸하핫.”
“너무 멋있나?”
“푸하핫. 야야. 얘가 하는 말 들었어? 지금 상태가 이상한가 봐?”
뒤돌아선 알이 조금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까치 머리와 더벅머리에게 손가락을 머리 옆에 대고 뱅뱅 돌리며 말했다.
“오늘 아주 코미디언 납셨다?”
“내가 항상 유쾌하긴 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뒤쪽에 있는 타티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해서 가만히 못 서 있었다. 뭔가 불편한지 까치 머리와 더벅머리보다 더 뒤쪽에 서서 나와 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난 타티아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자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흠칫거리곤,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수치스럽다는 듯 입술도 오므리기도 했다.
난 타티아나와 나 사이에 느껴지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에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새끼 봐라? 너, 누구 보고 지금 웃고 있는 거냐?”
알이 이전과 달리 얼굴이 굳어서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그런 그에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타티아나는 내 머리가 마음에 드는 눈치라.”
“하아. 미친...... 너 오늘 진짜 뭐 잘 못 먹었어?”
“아~. 뭐 잘 못 먹었지. 그래! 이 우유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난 우유가 든 잔을 들고 뒤돌아 모두에게 보여줬다. 손에 든 우유 잔을 까닥까닥 흔들자, 그걸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눈빛에 심란함이 가득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거 먹지-. 아이고, 내 실수야.
“아이, 뭐 하는 거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내가 실수한 척 우유를 바닥에 쏟았다. 바지에 살짝 튄 알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유가 바닥에 사방으로 번져가며, 타일을 흰색으로 수놓았다. 난 타티아나를 향해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아까운데...... 핥아 먹어야 하려나?”
“......!”
“푸하핫. 뭐라는 거야 진짜. 생긴 것마냥 발상하고는. 그래 핥아 먹-. 어? 어디 가는 거야? 타티아나!”
그 말에 타티아나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눈망울마저 촉촉하게 젖어 들더니, 이내 뒤돌아선 식당을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이런, 귀엽잖아?
알은 날 조롱하다 말고, 타티아나를 따라 달려갔다. 내 옆자리에서 그가 놔두고 간 서류 가방이 보였다.
“어이, 알.”
내가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알이 멈춰선 날 바라봤다. 난 가방을 들고 일어나 알에게 건넸다. 알은 눈을 찡그리며, 나와 내 손에 든 가방을 번갈아 보더니, 내 손을 치고 가방을 거칠게 뺏었다.
팟-.
「시스템에 [알 안그리오테]가 등록되었습니다.」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렇게만 말하고는, 타티아나를 쫓아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난 싸늘한 눈빛으로 그가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풋.”
코웃음이 나왔다.
네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넌 내가 무엇에 손대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할 텐데?
얄팍한 녀석이다. 저런 애한테 타티아나는 과분하지. 문득, 앞에 떠져 있는 시스템 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뭘 손대고 있는지 알게 해줄까? 불현듯 든 생각에 절로 음흉한 웃음이 나왔다. 하마터면 폭소할 뻔 했다.
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테이블에 앉아, 양념이 안 된 브로콜리를 덜어 입에 집어넣었다.
채소가 달다. 아주 달아.
****
「 2배 부스트가 끝났습니다. ( 8번 중첩, 숙련도 256 배) 」
「 마력 회복 5배 부스트가 끝났습니다. 」
「남은 포인트는 3760 포인트입니다.」
[으아, 드디어 끝났구만.]
“어째 나보다 네가 더 기운을 쓴 것마냥 보이냐?”
[문양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아~주 심심하거든.]
아서는 어제, 내가 타티아나의 꿈에서 ‘아~루’라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는지. 뭔 말만 하면 말을 길게 늘였다.
“그러고 보니 문양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렇다기보다. 아무런 느낌이 안 들어. 마치 껌껌한 방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는 잠드는 것 같다고 해야겠다.]
“그런데 용케 끝날 때를 알고 나오네.”
[그렇다는거지. 정말 자는 건 아니니까.]
“...... 그렇군.”
알쏭달쏭한 이야기지만, 어떤 말인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이야기를 끝냈다.
아까 ‘나보다 네가 힘들어 보이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마력 노가다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마력이 빠져나가면 피곤해 지지만, 부스트 때문에 금세 회복되기에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힘든 것보다는 지루한 게 문제였다. 3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마법 명만 마음속으로 외치다 나오면 되는 거였으니.
그 결과.
「[마력] D+ 랭크 (65%)」
D에서 시작했던 랭크가 이틀 만에 이렇게 올랐다.
한번 승급한 데다가 65%까지 오른 거다. 256배율이라 해도 너무 빨리 오르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후에 상태 창을 더 뒤져 보다 발견한, 랭크별 필요 숙련도를 보고 이해했다.
C-까지 올라가는 건 큰 숙련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C등급에 들어서부터 승급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마력 양이 아주 많이 늘어났다.
그러니 마법사들 사이에서
‘초급마법사가 중급마법사의 마력만큼 성장할 수 있지만, 중급 마법사 이상부터는 태어날 때부터 마력 양이 정해진다.’
라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왔던 것 같았다.
그 속설은 상식으로 굳어져. ‘마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다 써가며 연습하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연습을 하더라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감각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난 다르다. 마력의 숙련도가 오르는 걸 직관적이게 확인할 수 있다. 마법을 쓰는 데 필요한 감각을 느끼느라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매 마법마다 한계치만큼 모든 마력을 다 쏟으며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장할 수 있고.
또 빠른 거다.
[이제 나가자.]
“그래야지.”
<결계를 해제합니다.>
[룬]에 손을 대자, 방을 두르는 막이 사라져갔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붉은색 빗장도 문에서 사라지자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어제 말했던 그리핀 클럽이나 갈까?]
“그럴까-.”
“야. 너, 거기서.”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날 불렀다.
깊고 청량감 있는 이쁜 목소리.
낯익다.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왠지 성가신 기분이 확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