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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난 대답하지 않고, 목소리가 들린 곳 반대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야! 거기 서라니까?”
쳐다도 봐선 안 된다.
그녀의 목소리가 거세졌지만,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내 말 안 들려?”
또각또각 또각또각-.
난 대답 없이 더욱 빠르게 걸었다.
그러자 달리는듯한 다급한 굽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더니, 이내 내 앞쪽에 한 인형이 휙 뛰어들었다.
엘레인.
그녀가 식식거리며, 내 앞을 막은 거다.
“너, 왜 나 무시해.”
왜라니.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유가 잔뜩 생각날 텐데 말이지.
엘레인의 얼굴을 바라보자 문득, 교장이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다른 학생들 앞에서 엘레인을 만나면 주의해달라’.
난 주위를 빠르게 훑어봤다. 개인용 마법연습실은 단체로 오지 않아 복도에는 사람이 적었다. 게다가, 그녀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병풍도 안 보였다.
그렇다면 괜찮겠군.
난 엘레인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말도 없이. 야! 저리 가.”
난 엘레인을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치더니, 이내 그녀의 뒷머리가 벽에 닿았다. 그녀와 코 닿을 만큼 다가가선, 오른손으로 그녀의 얼굴 옆에 있는 벽을 '쾅!' 소리 나게 밀쳤다.
“힉!”
엘레인은 깜짝 놀라 소리를 내뱉었다. 갑작스런 벽치기에 상황이 파악 안 되는지, 눈을 말똥말똥 뜨며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는 옆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긴.
난 대답 없이 엘레인에게 씩 미소를 짓고는, 다시 뒤돌아서 갈 길을 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사람이 말하는 거 안 들려? 야!”
귀청이 다 떨어지겠네.
“멈춰봐!”
아무리 사람 없는 복도라 하지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 보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여나 난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보기나 할까 싶어 걸음 속도를 더 높이려 했다.
그랬는데, 내 손이 획 붙잡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가느다란 두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있다. 엘레인이 붙잡은 거다.
남자가 손대는 거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엘레인의 얼굴을 보니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혐오감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뒤섞여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뒤돌아서 엘레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내 손을 내던지더니, 고개를 획 돌리며 투덜 되었다.
“하, 내가 왜 이런 취급을...... 야! 너, 잠시 기다려.”
그러더니 아까 내가 나온 문 옆에서 주섬주섬 뭔가 들고 왔다. 대체 뭐지. 다가온 그녀가 들고 있는걸 내게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뭔데?”
“네가 저번에 먹지 못했던 히포그리프 치즈랑 블랙펄주야.”
엘레인이 케이크를 담은 듯한 상자와, 무척 큰 사이즈의 와인병을 나에게 건넸다.
[오오, 블랙펄주. 저것도 엄청 비싼거야.]
“네 월급으로는 이런 거 택도 없을걸? 받아 어서.”
엘레인이 그 말을 하며 의기양양했다.
“그래서 뭐.”
“뭐긴 뭐야. 받으라고.”
“내가 왜.”
“그냥 주는 대로 받으면 되잖아!”
내가 순순히 받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자 성을 내기 시작했다.
“너, 혹시 이걸 사과라고 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비싼 물건 선물 받는다고 해도, 태도가 그따위인데 사과를 받겠어?”
“사과? 내가 왜 해? 저번에도 말했잖아.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네가 날 강간했다고 생각하거든? 안 그래도 이를 갈릴 만큼 치가 떨리는데, 이렇게 선물을 주는 것 만으로 감사하도록 하지?”
엘레인이 말을 격하게 쏟아 내놓고는 자신이 든 치즈와 술병을 흔들었다.
“그러니 어서 받아.”
“싫어.”
“왜!”
“사과하려고 주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인지 알고 그걸 받아. 게다가 독이라도 들어있는지 어떻게 알아?”
“하, 독? 아, 진짜.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하는 수준 하고는. 기가 막혀선.”
그렇게 말하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날 노려봤다. 정말 화가 났는지 눈빛 너머에 살기마저도 엿보였다.
오늘도 어제처럼 혼자 질려서 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엘레인이 블랙펄주 포장을 거칠게 뜯더니, 마개를 손날로 쳤다.
뽕-.
탁-.
압력으로 날아간 마개가, 빠르게 내 얼굴 바로 옆 벽을 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고 있는데, 엘레인이 고개를 젖혀 블랙펄주를 병나발을 불고 꿀꺽꿀꺽 마셔대기 시작했다.
[미친년.......]
두눈에 핏줄을 새운 엘레인이 날 부라리며, 술을 흡입했다.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붉은 블랙펄주가, 허연 턱을 타고 가녀린 목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그 덕에 그녀의 흰 블라우스 카라가 붉게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레인은 옷이 더럽혀 지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날 쳐다보는 눈을 한 번도 깜짝이지 않은 채 계속 마셨다.
내가 이제까지 본 그녀의 표정 중 가장 무서운 표정이었다.
이 구역에 미친년은 정녕 너란 말인가.
이 격렬한 똘끼라니.
[와...... 블랙펄주. 엄청 독한 술인데, 저걸......]
커다란 와인병 안에서 출렁이는 붉은 액체가 어느새 반이 되었다. 엘레인이 거칠게 병을 입에서 때고 외쳤다.
“하! 됐어? 이러면 됐냐고!”
엘레인이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훔치며 말했다. 차라리 폭력을 하려 했으면, 막은 뒤에 그걸 구실 피했을 텐데. 이렇게 응수하다니.
엘레인이 왜 이러는지는 안다.
저번에 채찍질하며 말하던 ‘일’ 때문이겠지.
그 일이 뭐길래 강간범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달라붙는 걸까.
궁금해졌다.
어떤 일인지, 또 내가 무엇을 해주기 원하는지, 한번 들어보기나 해볼까.
“하...... 그래, 사과는 됐고.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거 받아.”
엘레인이 다시 치즈케이크랑 병이 열린채 반쯤 비어져 있는 블랙펄주를 건넸다.
“이건 됐다니-.”
“받으라구!”
엘레인이 혀가 꼬이는지 발음이 이상했다. 이제 보니 얼굴에도 술기운이 오르는지, 코가 딸기마냥 빨갛고, 백옥같던 얼굴도 서서히 상기되기 시작했다. 눈마저 게슴츠레하게 뜨기 시작하는게...... 벌써 취한 거 아냐?
“받으라니까-아. 히끅.”
엘레인이 재촉했다. 알코올로 인해 뇌 기능이 저하되자, 참을성이 2배로 없어진 것 같다. 게다가 딸꾹질까지.
괜히 안 받았다가 폭주할 것 같아서 건네받았다. 블랙펄주를 받자마자 깜짝 놀랐다. 열려 있는 작은 구멍 사이로 독한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뭐야, 이런 걸 반이나 비웠어?
“흐흐 받았겠. 히끅. 다!”
아, 이거. 진짜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데.
엘레인이 날 손가락질하고, 비열하게 실실 웃어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도 풀리고 있는지,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헤쳐 져 있는 머리가 게슴츠레한 눈빛과 어우러져 아주 요염해 넘쳐 보였다.
“어? 안돼. 히끅. 술기운. 취...... 하기....... 전 [치료마법] 해야...... 흐흐.”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도리질하던 그녀가, 로브 품에 손을 집어넣어 지팡이를 꺼내 들더니. 갑자기, 굳은 듯 멈췄다.
“뭐 하려 했더라? 헤헤헤.”
그 말과 함께 허공에 지팡이를 좌우로 흔들며, 미친년처럼 웃어대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다음에 이야기하자.”
“아, 맞다! 너! 히끅. 이제, 나랑 일 같이하는 거야. 으흐흐흐”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야.”
심지어, 엘레인이 온 이유를 일 때문이라고 추측했을 뿐이지. 오늘 엘레인 입에서 일하자고, 말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술에 취해서 아주 있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말하는구먼.
“아직 한다고 한 적 없어.”
“하자. 하자고~ 히끅.”
“하여간, 이야기는 들어줄 테니까. 다음번에 제정신일 때 이야기하자. 난 간다.”
기분 좋게 취한 것에는 [치료마법]이 안 통하지만, 저렇게 주사를 부리는 건 [치료마법]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급한 게 없는 나로서는 굳이 써 줄 이유가 없다.
난 비싼 척 질질 끌 생각이었다. 오늘 이렇게 그녀가 내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도, 나중에 내가 쓸 수 있는 좋은 패가 될 수 있겠지.
일을 수락할지 안 수락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지만. 그 전에 미리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무슨 제안까지 수락해야 하나 저울질해볼 시간도 필요했다.
또 계약마법이 걸렸을 때부터, 일주일 정도는 애태우게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랬는데.
“뭐! 안 한다고? 히끅.“
말을 잘 못 알아듣고는 표독스럽게 날 노려봤다.
“아니 안 한다는 게 아니-.”
“이 치사한 색뀌! 받아 쳐먹을 것만-. 히끅. 쳐먹고 내빼는 돼지- 색뀌!”
엘레인이 마구 욕질을 하며, 내 가슴팍을 툭툭 쳤다. 손아귀에 힘이 없는지라 아픈 건 아니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 꼴을 멍하니 바라만 보다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흣-.”
그러자 갑자기, 엘레인의 다리가 풀렸는지. 무너지듯 내 품으로 안겨 왔다. 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안았다.
엘레인에 윤기가 넘치는 금발 머리를 타고, 좋은 향기가 내 얼굴에 부딪혔다.
부드러운 여체를 감싸고 있는 천 옷의 낯선 감촉이 묘하게 날 포근하게 만들었다.
여자를 안다니.
형용할 수 없는 흥분감이 뇌를 감칠맛 나게 때려왔다. 성욕과 확연히 다른 감정이 가슴에서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순간, 사방이 꽃밭이 되는 것마냥 착각이 들 찰나.
“으아아악! 히끅. 흐엉. 아악!”
들려온 그녀의 신음.
“아이, 씨. 깜짝이야. 뭐야, 왜 그래.”
“다리. 다리!”
엘레인이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힘이 풀려 넘어질 때 힐을 시은 다리가 삐끗 한 것이다.
아니.
겨우 그걸로?
엄살이 아주 그냥......
이거, 완전 애가 되었네.
그 도도한 쌍년인 엘레인이 이런 주사를 가지고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복도 한복판에서 다리를 부여잡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 좋다. 아무리 지금 사람이 없다지만, 어디서 사람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법. 만에 하나 지금의 나와 엘레인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교장실에 끌려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흐어어엉. 흐읏?”
난 엘레인을 들어 올리고, 방금 나왔던 방으로 데려갔다. 아주 가볍다. 그녀의 검은색 니삭스에 접힌 무릎 아래 살이 부드럽게 만져졌다.
후다닥 달려 들어가 문을 발로 닫고, 엘레인를 뉘었다.
엘레인이 신은 힐을 벗겨보았다. 검정 니삭스를 신은 그녀의 발이 나왔다. 신발을 보니 굽이 꽤 높다. 이런 거 신다가 삐면 많이 아프긴 하겠구나.
그보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는데.
한번 발목을 건드려봤다.
“히잉. 악! 건들지 마!”
“......”
내 평생 살면서 키 180이 넘는 거구의 여자가 아기 마냥 구는걸 볼 줄이야.
난 엘레인의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치료마법]을 걸었다.
“아퍼.. 아프... 응?”
아픔이 사라지자, 엘레인이 고개를 들어 다리 쪽을 쳐다봤다. 난 손을 대고 있다가, 그녀가 바라보자 흠칫 놀라 뒤로 뺐다.
“뭐한 거야.”
몸에 손대서 화 낼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봤다.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아서 의문이 든것 같다. 남자가 몸에 손대면 싫어한다는 것도 이만큼 취했을 때는 상관없는 말이었나.
“어디 아팠는지 확인해 본 거지.”
“손을 대니까, 갑자기 안 아팠는데? 그거 마법 장갑이야?”
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엘레인의 길게 뻗은 발목을 잡고선 말했다.
“아니? 이거 그냥 장갑이야. 내가 마사지해줘서 나은 거야.”
“오~. 히히. 좀. 히끅. 할 줄 아나 보지? 그럼 어디 한번 좀 더 해봐.”
그녀가 눈을 감으며 눕더니, 내 얼굴 쪽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