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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쫀득쫀득.......”
“......”
순간 발로 차버릴 뻔 했다.
진정하자.
정말 아쉬운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주물럭주물럭 거리는 안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꼭 만지고 말겠다는 눈빛으로, 내 턱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 아가씨.
행동은 거슬리는데, 신기하게도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 하는 것을 들어봐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천연이다. 그것도 위험한.
어제 만났던 애니도 천연이었지만, 푼수에 가까웠지. 이렇게 색기를 풀풀 풍기며, 다른 남자를 만져대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니와 같은 타입은 현실에서 많이 만나봤지만, 안나와 같은 여자애는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햄스터라고 말한 거나, 어휘 선택을 보니. 딱히 다른 학생들처럼 날 피하거나 역겨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별생각 없는 것 같지만, 나쁘게 보냐, 좋게 보냐, 둘 중 하나 중 고르자면. 오히려 호의적으로 보는 편인 것 같다.
정말인 건가? 한번 진짜 생각은 어떤지 확인해볼까나.
“그렇게 만지고 싶어?”
“우웅~.”
고개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어 댔다. 이 아가씨, 귀여운 척이 너무 과도한데? 문제는 그게 나한테 통하고 있다는 거지만.
“알겠어. 만지게 해줄 테니, 네 손목에 있는 팔찌. 그거 잠시 내가 차봐도 돼?”
“웅? 이거?”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의 팔찌를 바라봤다. 그녀는 쉽게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면 그렇-.’
“그럼, 쫀득쫀득 계속 만져도 돼?”
“...... 내가 그거 돌려줄 때까지는.”
“조아~. 손 좀 놔줘여~.”
믿을 수가 없구만.
난 일단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안나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목에 있던 아티팩트를 내게 건네줬다.
팟-.
「 체력회복용 아티팩트 - 랭크 B
- 체력 회복을 30% 향상시킵니다.」
난 그것을 건네받고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까 망설임은 이걸 건네줬을때, 얼마나 만질 수 있는 건지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던 건가.
“근데, 뭐하려고오~?”
내가 멍하니 팔찌를 바라보고 있자 물어왔다. 난 대답 없이 팔찌를 팔에 끼워보았다.
한번 실험해볼 게 있었거든.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또 씹는다. 또! 에잇!”
내가 관심을 안 주자 분개해 하며, 턱살을 마구잡이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난 그녀를 내버려 두고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아티팩트 효과가 적용되어 체력 회복 수치가 30% 높아졌다.
그렇다면.
「체력 회복 5배 부스트를 사용 하겠습니까? (300 포인트 사용, 3시간 적용)」
( Y / N )
Y를 눌렀다.
「남은 포인트는 2520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맙소사......”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부스트를 적용하자, 아티팩트를 착용한 수치에 5배가 적용 된 것이다.
“쭈욱~. 쭈우욱~. 쫀득~쫀득~.”
30%는 1.3배.
그런데, 부스트를 적용했을 때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는 수치에다 5배를 하는 거라. 5.3배가 아닌 6.5배로 적용되었다.
30%의 아티팩트가 150% 효과를 발휘하는 아티팩트로 바뀌었다. 결국, 내가 이렇게 내 수치를 건드릴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게 되면, 5배의 효율을 낼 수 있다는 거다.
‘이런 게 있다면......’
살을 빼는 거든, 마력을 노가다 하는거든,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포인트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뽀뽀뽀잉-. 뽀잉~.”
상점에 없다고, 왜 이런 능력을 보조하는 아이템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까.
‘내가 스스로 아티팩트를 제작해보면 어떨까?’
그러고 보니 그때의 아티팩트들 돌과 나무 목걸이였지. 그렇다면, 아티팩트를 직접 만드는데 돈이 별로 들지 않을 거다.
게다가.
이제까지 마법을 사용하는데 보조를 해준 게임창 능력이, 아이템 제작에도 힘을 발휘할 거라 생각이 되었다.
“통통통통~ 통통통~. 꺄르륵.”
“......”
안나가 내 턱살을 손으로 털자, 살들이 포동거리며 마구 떨렸다. 그녀는 그걸 보며 즐거운지 꺄르르 웃어대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도 즐겁게 지낼 타입이었다.
그보다 성가시네.
난 팔찌를 풀고 그녀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내 턱살을 만져대며, 내가 내민 손을 무시했다.
“어서 받어.”
“잠시만여. 에잇! 쭈우욱!”
“아아아! 야야! 아퍼!”
안나가 내 턱을 힘껏 잡아당겼다.
난 그녀의 손을 힘으로 떼어내, 강제로 팔찌를 채워주었다. 그러자 안나가 손을 털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으, 쫀득쫀득...... 근데, 이걸로 뭐한거얌?”
“알거 없잖아. 하여튼, 난 이제 간다.”
“이거 가지고 싶은 거 아님?”
“왜. 주기라도 하려고?”
“그건 아니공~. 쫀득쫀득 만지게 해주면 빌려-.”
“뭐야 니네.”
갑자기, 말을 끊고 들려온 목소리.
낯익다. 하지만, 별로 좋은 기억이 나는 목소리가 아니다. 듣자마자 인상이 저절로 팍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쁜 배꼽이 먼저 보였다. 타티아나만큼은 아니지만, 운동을 많이 한 듯 내천자를 그리는 복근 있는 배였다.
시선을 올려보니 육상선수 유니폼으로 보이는,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침쟁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도 육체파였던 건가. 붉은 단발에 사나운 인상. 널찍한 어깨까지. 하지만, 타티아나와 달리 피부도 하얗고 가슴도 컸다.
그러고 보니 엘레인의 병풍들 중에 가슴 작은 여자는 검은 단발밖에 없었구나.
“벌써 뛰고 와써여?”
아 이 아가씨. 혼자 있던 게 아니었구나. 샤브리나란 이 침쟁이랑 같이 나온 거였나. 이거 진짜 성가시게 되었는데.
안나는 원래 감정이 별로 없었다 쳐도, 이 붉은 단발이 시비를 걸어오면 피할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얼굴만 봐도 아주 부숴버리고 싶으니까.
그랬는데.
샤브리나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안나를 바라보며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왔지. 그런데 이게 뭐야?”
“흐응? 보는 그대로인데에?”
“대체, 뭘 하고 있던 건지. 보고 있어도 모르겠는데? 엘레인한테 못 들었어? 한동안 돼지 만나도 피해 다니라고 했잖아.”
“싸우지 말라는거였져. 난 안 싸웠는데에?”
“넌 진짜......”
샤브리나가 당해내지 못 하겠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오, 이거 설마 싸우는 거야? 내가 싸우는 게 아니니, 이렇게 흥미진진하구나.
“왜 아무한테나 꼬리를 치며 다니는 거야. 게다가......”
샤브리나가 눈을 크게 떠선, 날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왜 이딴 돼지한테 치는 거냐고! 네가 뭐가 아쉬워서!”
“나 아무한테나 꼬리 안치는데여? 특히 애인이 있을 때는?”
“그 애인이 있던 적이 이제까지 없었잖아! 그렇게 창녀처럼 헤프게 돌아다녀서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할 거면, 차라리 한 명 만들라고!”
이런. 이건 심한데.
창녀라니.
하지만, 안나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계속 샤브리나를 바라보았다.
가문? 그러고 보니 둘 다 붉은 머리인게, 같은 가문 소속이었던건가.
“흐응~ 그래에?”
검지를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며 생각하는 척 하더니. 안나가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를 푹 안 안았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대체.]
“지금 만들었네에?”
뭐?
“읏...... 너, 너......!”
단숨에 샤브리나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이 안 나올 지경으로 씩씩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없다.
가슴에 있어야 할게.
찌찌가리개가 없어!
얇은 천옷 넘어, 안나의 풍만한 가슴이 내 몸에 찰떡처럼 달라붙었다.
느껴질 리 없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야릇함인가?
안돼.
자극이 너무 크다.
“야야. 잠시만. 저리.”
내가 안나를 밀어내자, 다시 달라붙었다.
“에잇! 나쁜 돼지! 가만이 이써여!”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잠시 맞춰 줘봐여. 사례해줄 테니.”
귓가가 간질간질하다.
흥분이 귓볼을 타고 올라왔다. 하마터면 신음을 뱉을 뻔 했다. 설상가상, 좋은 냄새마저 코로 들어왔다.
내가 쓰는 향수랑 비슷한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쓴 향수가 자기 가문의 조향사가 만든 거라고 했지. 비슷한 향수를 쓰고 있는 건가.
“이 돼지새꺄! 안나랑 떨어지지 못해?”
“왜 돼지한테 말해여~. 제가 좋아서 붙는 건데.”
“아! 너 진짜!”
샤브리나는 화를 못 참겟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안나가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어쩐다.’
이렇게 셋이서 분위기 안 좋게 있으니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이 갸웃거리며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구경거리가 났나 다가오고 있는 사람도 있다.
곤란하다.
솔직히 저 침쟁이가 가만히 못 있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안나에게 맞춰주며 계속 골려주고 싶은데.
문제는 이러고 있으면, 내 아랫도리가 일어서서 학생들한테 다 보일꺼 같다.
안 되겠군.
“샤브리나님.”
“허?”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어서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봤다.
“누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지?”
흥분한 탓일까? 사람들이 듣는데도 그녀는 반말로 응수했다. 얘는 계급이 어떻게 되길래 이러는 거지. 백작의 딸이라도 되는 건가.
“안나님께서 누구랑 사귀든, 그건 안나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기대어서 날 바라보던 안나가 눈을 반짝였다.
샤브리나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옆머리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아 진짜. 오늘 어이없는 일 참 많이 당하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그러는 건데?”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두 분께서 사이가 나빠지는걸 걱정하는 것 뿐이지요.”
“그쪽이 걱정할 게 아니거든? 애초에 그쪽 탓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해결보자 이겁니다.”
그 말에 샤브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그렇게 계속 말을 주고받으며 대치하고 있자, 어느새 학생들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모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싸움 난 거야?”
“아서 조교는 알겠는데, 여자는 누구야?”
“걔잖아. 엘레인하고 같이 다니는.”
“돼지 조교한테 누가 안겨있는데?”
샤브리나는 군중들을 한번 훑더니, 날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해결. 해결이라...... 솔직히 그쪽 얼굴을 한번 신명 나게 때려보고 싶었거든? 어때? 나랑 한번 마법 안 쓰고 싸워보는 게?”
“...... 맨손으로 말입니까?”
아, 땡긴다.
자신만만하게 제안한 만큼, 샤브리나는 쌔보였지만.
육체 능력 5배 부스트를 쓰면, 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그 뒤다.
학교에서 교원과 학생의 주먹다짐을 어떤 형태로든 허용할 리 없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이겼을 때, 이 샤브리나라는 여자가 가만히 있겠다는 보장도 없었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싸운다 해도 이미 다른 학생들이 우리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와중에 무작정 싸울 수는 없었다.
“왜? 쫄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브리나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날 도발했다.
“어떤 형태로든, 전 학생과 싸울 수 없습니다.”
“푸하핫-. 그냥 꼬리 내리는 거라고 솔직히 말하지?”
“그보다. 이런 건 어떨까요? 옷을 보아하니 달리기를 잘하시는 것 같은데, 저와 한번 겨뤄보겠습니까?”
“뭐?”
내 말에 같잖다는 듯 그녀가 눈을 찡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푸하하하핫.”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마냥 폭소하기 시작했다.